김정아 박사의 '도스또옙스끼 4대 장편 합본'을 기다리면서, 어쩌다보니 작가의 중후기작을 중심으로 읽어가고 있다.
시작은 김정아의 『미성년』천줄읽기. 그의 번역 스타일을 알고 싶었다. 역자의 해설이 좋았다. 대부분 노문학과 불문학 작품들은 뒤에 수록된 역자나 전문가의 해설이 매우 어렵다. 이 역자는 일반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그 내용이 그가 출연한 유튜브에 반복되어 나온다.
두번째는 『도박사』천줄읽기. 도 선생의 가장 위험했던 시기, 그의 경험과 전문성(?)이 최고조로 발휘된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의 출간 자체가 그의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
김혜경 역의 『악령』이다. 집에 중도포기한 상권을 다시 집어들었는데, 웬걸, 뭐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왜 고이 모셔두고 있었을까 싶었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두 번을 읽었다.
동시에 진행했던 『죄와 벌』거의 10년 전 홍대화 역을 읽고 라스꼴리니꼬프의 카리스마틱한 '범인'과 '비범인' 이론에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로 좋은 평가를 받은 김희숙의 번역본을 선택했다. 확실히 잘 읽히고, 이전과 같은 전율은 없지만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뽀르피리의 심리 추리와 자수 설득("삶을 혐오하면 안됩니다."), 에필로그('변증법 대신에 삶이 찾아왔다')가 특히 와 닿았다. '솔로몬(←솔론)', '현' 같은 일어본 중역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흠. 좋아하는 작품이라 역시 두 번 읽음.
4대 장편의 두번째, 김희숙이 번역한 『백치』이다. 2021년 첫 출간되었을 때 구입해 읽었는데 당시에는 매우 지루했다고 느꼈다. 라스꼴리니꼬프에 비해 백치 공작이 한없이 착해서였을까, 죽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였을까.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의 1부를 읽고 나서는 『죄와 벌』을 처음 읽었을 때 이상의 전율을 느꼈다.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쉴새없이 몰아치는 게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도 선생과 김정아 박사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를 알겠다.

이건 그냥 도 선생의 생애를 약식으로 조망하는 차원에서... 여러 역자 해설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얻은 지식들을 조립해주는 책, 제대로 된 평전은 없는 듯하다.
번역가 김연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변태와 탈각의 순간을 보여준다'로 평했다.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서정성이 짙은 작가였다가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대작가로서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나의 '4대 장편 준비'의 출발점을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잡았다. 돌아이 같은 '지하 인간'의 모순으로 가득찬 내적 고백은 라스꼴리니꼬프, 알렉세이, 아르까지 마까로비치 돌로루끼 등으로 이어진다. 다소 어렵지만 긴 문장을 그 호흡 그대로 나누지 않고 번역한 역자의 솜씨는 칭찬할 만하다.

무슨 고집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도 선생의 주인공들처럼 돈을 아끼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전부터 그 유명한 '빨간책'을 소장하고 싶었던 욕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악몽같은 이야기」,「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악어」와 중편 『노름꾼』의 네 작품이 수록된 2002년 판 책을 중고로 구해 읽었다. 「악몽같은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보석같은 작품. 다만, 도 선생의 반복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과 슬라브주의 띄우기에 점점 질려가고 있다.

역시 중고로 저렴하게 구매한 빨간 『미성년』은 그냥 새 책. 세계문학전집별로 경쟁이 치열한 4대 장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미성년』은 선택지가 이것 하나 뿐이다. 다소 철없는 19세 청년 아르까지의 회고록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평가가 낮은 편이다. 김정아 박사에 따르면 작가가 결핍의 시기에 걸작을 쏟아내던 반면, 이 때는 전작들의 성공과 아내 안나 도스또예프스까야의 야무진 경제활동으로 어느정도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아직 읽는 중이지만 완독하고 나면 '도스또옙스끼 5대 장편'이 될 것이다. (ㅋㅋㅋ)

도 선생의 마지막 중단편들(빨간책으로 배송 중...).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성격이라...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지하인간' 같지 아니한가.
이 모든 고독한 작업들은 이 한 편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도 선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전작들을 모두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김정아는 호언장담한다. 도 선생 전공자들, 장편 3~4편을 번역한 사람들이나 그만큼 필사한 사람들은 그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범인'이기도 하고, 필사를 할 만한 글씨가 안되어 이렇게 먼고 험한 길을 돌아왔다.
2014년 김연경 본으로 처음 접하고, 2022년 김희숙 본으로 두번째 읽었으나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약 한달 반에 걸친 도 선생 중후기작 여정, 3년 전 읽은 나폴레옹 평전들을 비롯해 그간 쌓인 유럽사-중앙아시아사 지식들, 곁에 두고 틈틈히 탐독하는 4복음서, 그리고 지금 함께 읽고 있는 크리스 밀러의 『우리가 주인이 될 것이다』까지 동원했으니, 더 잘 다가가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