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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엠
앙리 뮈르제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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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어려웠던 때가 다들 있다. 20대부터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어려움을 뚫고 부와 명성을 거머쥔 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이 책 '보헤미안의 생활정경', 일명 '라 보엠'은 자유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유라는 건 각 분야 네 예술가(보헤미안)의 삶이 돈에 얽매이지 않고 지극히 자유분방하다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건 각자의 연인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게, 배경이 19세기 중반의 파리였음에도 그 사랑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연인이 만나고 함께 살고, 그러다 싸우거나 구속됨에 지쳐 헤어져 다른 연인을 만나지만 서로를 잊지 못해 돌아오곤 한다. 동시대인 프랑스 제2제정 시기를 다룬 에밀졸라의 '목로주점'이 여자가 전남편과 현남편 둘과의 기묘한 동거를 묘사하고 있다. 지금의 프랑스인들도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호한다고 하는데, 이미 이 이전부터 프랑스는 연인들의 동거가 일반화 되었던 것 같다.

 

나아가, 두 여자 주인공의 당당함이란! 그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른 캐릭터이다. 먼저, 미미는 캐시미어 등 비싼 물건을 사줄 수 있는 재력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 푸른 눈에 반한 폴 자작의 마차에 몇 번이고 오른다. 반면, 뮈제타는 그 매력에 남자가 줄을 서기 때문에 입맛대로 고른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건 언제나 마르셀이라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한다.

 

'80프랑짜리 코르셋 안에 심장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아요...'

 

'후렴구는 마르셀이에요...'

 

이러한 당당함으로, 둘은 보헤미안 남친들과 귀족 젊은이들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영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게 20세기 초이고, 프랑스는 20세기 중반이다. 그런데 투표권과 관계 없이, 이미 100여 년 전부터 프랑스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 사랑 등을 주장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물론 목로주점의 제르베르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어찌됐든, 진솔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크게 성공을 거두어, 작가인 뮈르제는 안정된 여건 속에서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돌프는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뒤마나 발자크 처럼 돈에 쫓겨 살다 끝난 것 같은데, 그로서는 무척 다행이다.

 

19세기는 프랑스 문학계에 엄청난 작가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발자크, 빅토르, 알렉상드르 뒤마, 뒤이어 에밀 졸라 등등... 다들 사회문제를 고발하거나 남자들의 모험담을 다루는 등 묵직한 글들을 썼다. 그 틈새로 이렇게 작고 아기자기한, 현대 시트콤의 원형이 될만한 이야기를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은 이 연작소설의 에피소드 몇 개를 재구성한 것인데, 미미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캐릭터들의 특성을 그대로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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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셀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9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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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얘기지만, 국가로부터 암건강 관리 안내메시지를 받은 나이에 처음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나는 베르디의 '오텔로'를 먼저 보고 원전을 알고 싶어 읽었다.

 

다른 원작을 둔 오페라들이 그러듯, '오텔로'도 캐릭터들의 동기가 좀 약하다. 원작인 희곡 오셀로는 '질투'의 드라마다. 무어인이 백인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여 손수건 하나로 파멸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비단 오셀로 뿐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역시 질투에 의해 움직인다. 로더리고는 오셀로를 질투해서 살인을 저지르려 한다. 심지어 이아고의 동기도 질투다. 오페라에서는 단순히 무어인 상관이 싫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오텔로를 질투한다.

 

"사람들은 그 놈이 내 이불 속에서 내가 할 일을 대신 했다고들 생각하지.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의심만 들어도 확실한 것처럼 보복을 해야해."

 

이제, 캐릭터들의 행동의 동기가 분명해졌다. 오셀로는 질투 때문에 아끼는 부하인 캐시오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 한다. 이아고는 질투 때문에 로더리고를 움직여 캐시오를 죽이려 한다. '아키텍쳐'인 이아고는 이를 이용해 오셀로를 움직이고, 로더리고를 움직이고 캐시오를 움직인다. 보면 볼수록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역자는 후기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이 작품을 해설하는 데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이 극의 비극성은 오셀로의 질투심에 더해 가부장제 하의 그릇된 여성관이 결합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조를 상실한 여성에 대한 남성 간 연대감 보이고 있다고 강조한다. 문득 동남아-인도에서 가장의 의도에 반하여 결혼하거나,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에 대한 집안 남자들의 폭력이 떠오른다. '명예살인'. 여성의 정조(honor)는 곧 그것을 소유한 남성의 명예(honor)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4벡여 년 전의 셰익스피어와 지금의 인도-파키스탄의 여성관이 별 차이가 없다니. 그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이라는 말인가.

 

"무식한 인도 사람처럼 제 손으로 제 종족 전체보다도 값진 진주를 버린 자라고."

 

번역은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주석과 맞물려 재미있게 읽었다. 영한 대역본이나 좀 더 시적인 번역본을 읽고 싶다.

[이아고] 예전처럼 2순위가 1순위의 뒤를 따르는 경력순으로 승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천장과 총애에 따라 이루어지니

[이아고] 누구나 다 대장이 될 수 없는 법이고, 또 대장이라고 누구나 진실로 충성스러운 부하를 둘 수도 없는 법입니다. 나리께서도 무릎을 구부리고 충성을 다하는 많은 작자들이 노새처럼 먹을 것만 주면 그저 비굴한 의무를 다하면서 세월을 허비하다 늙어 해고당하는 꼴을 많이 보셨겠죠. 그렇게 충직한 놈들은 회초리질을 해야 합니다.

[이아고] 저는 그를 섬기면서 실은 저 자신을 섬기는 겁니다. 제가 사랑과 충성심으로 그를 따르는 듯 보이지만, 실은 특별한 목적으로 그런 척하는 것은 하늘이 알 터입니다.

아, 혈육이 이토록 배신을 하다니! 세상 아비들이여, 이제부터는 딸년들의 행동만 보고 그 마음을 믿지 말지어다. - P14

[오셀로] 저는 전쟁과 전투에 관한 것이 아닌 이 위대한 세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변명하는 일에서도 대의명분을 그럴싸하게 꾸며 말할 줄 모릅니다. - P24

[오셀로]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들 때문에 저를 사랑하고 저는 그녀가 그것들을 동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사용한 마술입니다. - P27

내 보물, 네 소행을 보니 또 다른 자식이 없는 게 다행이구나. 네 사랑의 도주를 보고 나는 독재의 필요성을 배워 자식들에게 족쇄를 채우게 했을 테니까. - P29

[공작] 그동안 희망을 두어 왔던 해결책이 어쩔 도리가 없이 되어 최악의 상태를 보게 되면, 슬픔도 끝내야 하는 법이오. 다 끝나 지나가 버린 불운을 슬퍼함은 불행을 더 질질 끌고 가는 짓이오. - P29

말은 말일 뿐, 말이 귀를 통해서 상처받은 가슴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 P30

[이아고] 우리에게는 날뛰는 감정과 음욕의 자극과 끓어오르는 정욕을 식혀 줄 이성이 있지요. 나라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제가 보기엔 음욕의 곁가지이거나 어린 가지에 불과합니다. - P34

이 끔찍한 일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려면 지옥과 밤의 도움을 받아야 해. - P36

너무 기뻐 가슴이 벅차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심장이 만들어 내는 최대의 불협화음이 되게 하소서! - P47

훌륭한 내 사랑, 내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파멸이 내 영혼을 붙잡아 가기를! - P76

[이아고] 사람은 모름지기 겉과 속이 같아야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정직한 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 P78

좋은 평판은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보석입니다. - P79

가난해도 만족하면 부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해질까 늘 염려하는 자는 아무리 부자여도 겨울처럼 가난합니다. - P80

[이아고] 위험스러운 억측은 원래 독약과 같아서 처음에는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을 잘 모르지만 혈액에 조금만 작용하면 유황 광산처럼 타오르지. - P87

도둑맞은 자가 도둑맞은 것을 모를 때, 모르는 채로 놔두면 그자는 아무것도 도둑맞지 않은 거지. - P88

[에밀라아] 남자의 본심은 한두 해만에 나타나지 않아요. 그들은 모두 위장이고 우리 여자들은 모두 음식에 불과해요. 그들은 게걸스레 우리를 먹고, 배가 부르면 뱉어 버리죠. - P98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소용없어요. 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질투심이 많아서 질투하는 것이죠. 질투심은 스스로 잉태되어 태어나는 괴물이에요. - P100

죄를 지으면 혀를 놀리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 P138

[이아고] 오늘 밤은 내가 아주 일어스든가 아주 파멸하든가 하는 밤이다. - P140

그자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다 목숨을 지녔다 해도 내 복수심은 채워지지 않아 - P144

[오셀로] 아, 견딜 수가 없구나! 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거대한 일식과 월식이 생겨서 암흑이 엄습하고 놀란 지구도 이변에 입을 벌리는 듯하다. - P144

이는 달의 궤도 이탈 때문이다. 달이 평소보다 지구에 더 가까이 다가와서 인간들이 돈 거야. - P145

내키시면 명예로운 살인이라고 말씀해 주시오. 이 모든 짓을 증오심이 아니라 명예심으로 했으니.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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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즐긴다
빅토르 위고 지음, 이선화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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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까지 본 오페라가 40편 이상인데, 그 작품의 원작인 문학작품들을 읽어본 게 하나도 없었다. 한때 위고, 졸라, 디킨스 등에 빠져 지냈는데도.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읽었던 작품들은 오페라 작곡가들이 별로 안 땡겨했던 것 같다(푸치니에게 '레 미제라블'의 오페라화 제안이 갔었으나 거절했다고). 내가 즐겨 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오페라의 원작들은 대부분 희곡인 것 같고, 그래서 실러, 괴테, 셰익스피어 등의 희곡 작품들이 오페라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절치부심해서 간만에 서양고전문학을 읽어보기로 했고, (비싸지만) 이 작품을 택했다.

 

의외로, 위고의 이 작품과 베르디의 '리골레토'는 거의 내용이 같다. 오페라는 희곡의 마지막 한 장(scene)만을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나는 오페라의 엔딩이 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이 '왕'에서 '광대'로, 등장인물의 이름과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귀족계급을 까기 위한 목적의식까지 똑같다.

 

희곡은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봤던 것처럼 위고 특유의 장광설로 빼곡하다. 오페라는 가락이라도 붙어 있지, 이걸 어떻게 다 외워서 말할지 의아할 정도. 당연히, 리브레토의 상당 부분이 희곡의 대사를 차용했지만 대부분 축약되어 있고, 그래서 오페라에서는 동기라든가 이해가 잘 안되던 부분들을 이 작품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놀라웠던 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프랑수아 1세가 남긴 시에 곡을 붙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남았을 그 싯구가 베르디의 음악을 타고 지금까지 모든 이들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위고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이라는 구절을 여기서 발견한 것도 반가웠다.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프랑수아 1세의 작업용 멘트라는 걸 알고는 환상이 다소 깨지긴 했지만, 역시 위고의 말을 다루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지막으로, 해설이 매우 풍부하다. 박종호의 '리골레토' 해설과 겹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참고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리골레토'를 더 즐기고 싶다면 이 희곡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곳곳에 문맥이 다소 이상해 오역 스멜을 풍기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별 하나 삭제.

백작, 이번 연애사는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구료. 출생도 불확실하고 부르주아 여자이긴 하지만 미모가 여간 아니거든.

연애사에서 허술한 전략의 보완책은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죠. 위장술 말입니다.

저는 꼬투리 잡는 일에 열중할 테니 폐하께서는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 참 상서롭지 못한 징조올시다! 왕이 향락에 빠진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지요.

왕께서 누리는 즐거움은 늘 누군가에게서 가로챈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누이건 딸이건 부인이건 유혹으로부터 잘 지켜내십시오. 도락에 빠진 권력자는 해를 끼칠 생각밖에는 안 하는 법이니까요. 그 안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 백성들 몫 아니겠습니까. 입으론 웃고 있어도 안으로는 온갖 뾰족한 이빨을 숨기고 있지요.

눈을 멀게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당신은 왕이고 저는 아비입니다. 나이로 보면 왕권을 가져 마땅한 나이지요. 우리는 둘 다 머리에 왕관을 두르고 있지요. 그 누구도 금으로 된 백합 왕관을 쓰고 있는 폐하나 백발을 하고 있는 제게 방자한 시선을 던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둘 다 처지가 비슷하군. 한 명은 가시 돋친 혓바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뾰족한 날을 품고 있고. 내가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이라면, 저자는 죽이는 사람이고.

인생은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고, 사랑은 그 꽃에서 난 벌꿀이지. 사랑은 하늘에 있는 독수리와 맺어진 비둘기와 같은 것이라오. 사랑은 밀어붙이는 힘에 전율하는 은총과 같은 것이오. 사랑은 가만히 내 손 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그대 손과 같은 것이지.

악마는 자기 식대로 일을 풀어나가지요!

여자는 죽 끓듯 변덕을 부리지.
여자를 믿는 건 미친 짓이라네.
여자는 수시로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과 같으니.

저 자 이름 마리오? 내 이름도 알고 싶지 않소? 저 자 이름은 죄이고 내 이름은 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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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의 반지 세트 - 전4권 풍월당 오페라 총서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지음, 안인희 옮김, 오해수 해설 / 풍월당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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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와 해설자를 봤을 때 반신반의했다. 오해수라는 사람은 공무원에서 전업한 작가, '노래극의 연금술사'라는 다소 없어보이는 제목의 푸치니 안내서를 출간한 경력이 있고, 안인희는 '북유럽 신화'는 조금 읽다 말았고, 윌 듀런트의 '중세이야기' 중 르네상스 부분을 번역했으나 정말 최악이었던 경험이 있다(초벌 수준으로 번역된 책의 출간을 강행한 건 번역자, 편집자, 출판사 중 어디가 문제였을까). 이 책을 구입하게 된 동기는 오페라를 막 시작하는 나로서,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풍월당에 대한 후원의 의미가 90% 이다. 10%는 DVD에서 영어자막이 좀 어렵게 나왔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함이고.

 

결론부터 말하면 잘 사서 읽었다. 바그너가 대본을 쓴 순서를 따라 '신들의 황혼'부터 '라인의 황금'에 이르기까지 역순으로 1일 1권씩 읽어내려갔는데, 사건의 세세한 사항, 인물들의 미세한 감정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완벽하게 나온 자막만으로도 커버가 어렵다. 또 하나는 안인희의 풍부한 해설과 주석인데, 정통으로 독일 인문학을 연구해서 북유럽신화나 바그너 관련 저서를 쓴 사람답게 이 부분이 상당히 충실하다. 이 점은 '불멸의 오페라'에서조차 다루지 못한 부분들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주석이 좀 더 상세하면 어땠을까, 지도나 사진 등이 첨부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북유럽신화 관련 책들을 뒤적이는 걸로 수고를 더해야 하겠지만, 책이 많이 팔려 증보개정판에서는 이런 점들이 개선되었으면 한다.

 

번역 자체는 70점을 주겠는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어 이런 것들은 외국사이트의 영역 대본과 비교하였다. 이 대본을 읽는 동안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희랍-로마 저작들을 떠올렸는데, 편집자들의 노력이 자못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한편으로, '라인의 황금'에 실린 오해수의 해설은 바그너에 대한 놀랍도록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바그너 보다는 '니벨룽의 반지' 자체에 초점을 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조지 버나드 쇼의 해설서 '니벨룽의 반지'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고 소개했으므로, 역시 그 책을 찾아서 읽는 걸로 갈음해야겠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가지가 있는데, 1) 지그프리트의 등이 배리어프리한 게 안인희의 해설 및 번역은 '브륀힐데가 보호해주지 않아서'라고 하고, 오해수 해설은 '용의 피가 등에는 튀지 않아서'라고 한다. 다른 책이라면 모를까, 같은 책에서 이러면 곤란하니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2)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신들의 멸망이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지그프리트가 계약으로 묶인 보탄이 하지 못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계에 보내진 '가장 자유로운 영웅'이라는 점은 알겠다. 그런데 지그프리트가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브륀힐데가 대신 했는데? 박종호, 이용숙, 안인희, 오해수의 글들을 다 읽어봐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나는 공연물 두 개를 보고 이 책을 사서 읽었다. 다음에 볼 공연은 이 책을 서너번 더 읽은 후 보려 한다. 지금은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와 오해수의 '인간 바그너'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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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몬 베유 - 여성, 유럽, 기억을 위한 삶
시몬 베유 지음, 이민경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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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지 프리드먼이 유럽연합의 위기를 진단한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을 읽으면서, 유럽의회 의장을 역임한 시몬 베유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우연이지만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유럽연합의 기원을 한 개인의 경험에서 짧게나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국가들)의 통합이란 매우 어렵다. 우리가 교련 수업이나 안보 교육을 받을 때와 같이 '세계는 상시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과 소련의 부상,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출범한 유럽공동체였고, 시몬 베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시몬 베유는 그 취임연설에서 '평화, 자유, 번영'을 외치면서 초기 유럽 공동체가 나가갈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거의 내 나이와 같다. 평화가 너무 길어서였을까? 유럽연합은 다시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2차대전 이후) 혐오의 시대가 다시 다가오면서, 그리고 코로나19의 부상으로 유럽은 다시 갈라서고 있다. 2017년 그녀의 사망에 전후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그녀가 꿈꾸던 유럽 모델이 소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일까? 유럽연합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혐오가 증가함에 따라 홀로코스트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

 

또한,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나에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더불어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임신중단(Termination of pregnancy)' 이 표현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낙태'가 태아에 초점을 둔 성차별적 표현이로, 그녀는 임신중단이라고 명명하고 있다(아니면 역자가 페미니스트로서 그렇게 번역한 것일수도...). 어쨌든 가톨릭 국가에서, 의료인에 의한 임신중단을 합법화-양성화한 것은, 피임과 더불어 여성의 몸을 남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임신중단법을 제창하는 그녀를 향해 '태아를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라고 문명국가 의회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난을 무릅쓰고 말이다.

우리 가족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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