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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금의 샘』과 『반지의 제왕』을 추석을 기회로 끝냈는데, 벽돌을 둘이나 동시에 읽었던 터라 쉬어가자는 마음에, 서점에서 한 시간 가량 읽다가 구매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안 건 책을 1/3 쯤 지나고나서였지만.
거의 10년 전 나오키상 수상작들을 한창 몰아 읽을 때,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트콤 같은 설정이 무척 인상적인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 작가가 '식물학'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돌아왔다니. 처음에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고 플랜테리어나 조경 좀 공부해볼까 하고 집어들었더랜다. 그런데 웬걸, 식당 남자 종업원 얘기로 시작하더니 그가 식물학과 대학원에 배달을 갔다가 막내 여학생으로부터 '애기장대'라는 잡초를 연구하는 얘기를 듣는다. 그 얘기가 끝까지 간다. '식물학자'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책이 쉽지 않은 건 유전학과 실험에 대한 작가의 정밀한 묘사 때문이다. 과알못인 나로서는 그토록 그런 세밀함을 따라가기 쉽지 않아 진땀을 뺴고 두어번씩 읽어야 했다. 이 점 하나만으로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데 식물학이라니?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한 일본은 기초과학 매우 튼튼해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 자부심과 열정을 갖고 연구를 기울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는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최고의 영예인 노벨상이라도 있지, 식물학은 그런 것도 없는 사각의 사각이다. 지도교수인 마쓰다가 기혼인지 미혼인지 아무도 모른다. 옷은 거의 갈아입지 않고 연구실에는 책과 논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몇 명밖에 되지 않는 연구원, 대학원생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는다. 돈이 안 되고, 전망도 없기 때문에 새학기가 되어도 신입은 들어오지 않는다. 거기에, 예쁜 꽃도 아니고 '애기장대'라는, 아무도 모르는 잡초의 '잎'을 연구하는 일은, 발견했을 때 짜릿함과 논문 외에는 별다른 보상도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식물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연구대상인 식물은 사랑없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 연구자들은 그것을 한없이 사랑한다는 역설.
정말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는데, 작가의 표현력과 묘사는 이제는 한때 유행했던 TV장르인 시트콤을 보는 것 같다. 두 번이나 고백했으나 차였으면 어색할 법도 한데, 계속 처음의 관계를 유지하는 그들을 보면서 흐뭇하기까지 하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담아낸 명작이다.
* 강양구 추천
** 서점에서 구입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중략)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 P96
모투모라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는 세계를 대하는 후지마루의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이 존중받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중략) 서로가 열정을 기울이는 세계는 달라도 언제까지나 함께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언제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모토무라는 하고 있었다. - P123
모토무라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다가 독특한 형태의 세포를 발견하고 ‘어‘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느꼈던 그 느낌. 아마 마쓰다가 산울타리 너머로 동백나무를 발견하고 ‘어‘했던 순간에 느꼈을 그 느낌. 그것은 지금 모토무라가 후지마루와의 사이에서 공감을 확인하고 느끼는 그 느낌과 다르지 않다. 찌릿한 기쁨의 충격이 내달리는 느낌이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연구를 그만둘 수 없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사는 것을 그만 둘 수 없다. - P194
모토무라는 취미든 일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거듭한다. 그러자 신기하게 생각되는 건 역시 식물이다. 뇌도 신경도 없는 식물은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 같은 게 없어도 빛과 물만 있으면 그것을 식량으로 하여 얼마든지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다. 먹을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과는 ‘산다‘는 것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 같다. - P229
큰 발견을 하면 칭찬받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화려함하고는 거리가 먼 실험의 나날을 오랜 기간 계속할 수 없다. 그저 식물을 좋아해서, 식물을 좀 더 알고 싶기 때문에 연구한다. 사랑,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 P279
"아니"하고 모토무라는 고개를 흔든다. 아니, 전혀 다르지 않아. 요리나 실험이나 같아. 예정대로 실험을 진행해서 예정대로의 성공을 얻을 수 있을까. 기일까지 박사논문을 제출할 수 있을까. 그런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내가 틀렸어. 실험에 짜인 줄거리는 없어. 연구에 기일 같은 건 없어. - P349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 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한다. 반대로 인간은 뇌와 언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뇌도 기쁨도 모두 뇌가 내놓은 것이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은 물론 인간이기에 맛볼 수 있는 묘미겠지만, 관점을 바꿔놓고 보면 인간은 뇌의 포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화분의 식물보다도 더 좁은 범위에서밖에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 P352
"직감을 너무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마쓰다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에 손을 들었다. "내가 말하는 직감은 신으로부터 들은 갑작스러운 계시 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우직하게 관찰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직감을 말하는 겁니다. 모토무라 씨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P362
실험이란, 식물이란,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이제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사는 것을 그만둘 수 없듯이, 학부생 때 ‘왜?‘"알고 싶어‘하며 묻고 바랐던 것은 낭비도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알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신기하고 매력적인 존재, 식물을 알고 싶다. 앞으로도 계쏙 살아가기 위해서 연구자로서 살아갈 거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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