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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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책이긴 한데, 번역이 다시 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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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이던 2000년대 중반에는, 진로를 준비하며 방황할 때, 현각 스님 등의 불교 에세이가 마음을 바로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반면, 어릴 적부터 교회 다니라는 말에 큰 반감을 가진 데다, 타 종교에 적대적인 기독교는 혐오하다시피 해서, 지금의 일베 같은 활동은 아니지만 안티 크라이스트 카페 등에서 그들을 깨는 논리들을 읽곤 했다.














최근 몇 년간, 마음의 화가 많이 쌓여,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솔루션을 찾던 중, 모 인터넷 서점에서 발견한, 지난해부터 화제가 된 베스트셀러 (장원영의) 『초역 부처의 말』을 발견했다. 급한 마음에 다소 빠르게 읽었는데도 방황하던 그 시절에 그토록 갈구했던 마음의 안식이 돌아오는 듯 했다. 역시, 붓다는 천재. 어떻게 그 옛날 이런 진리를 발견한 것인지.


내친 김에, 인류의 지혜가 담긴 경들을 조금씩 읽기로 했다. 2020년까지 한두번 정도 읽었고 또 한번 통독해야지 했던 성서원의 『쉬운말 성경』도 다시 집어들어 매일 줄 쳐가며 읽는 중. 신약부터 완독했는데, 예수의 말도 깨달음을 주는 부분이 많다. 다만, 그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와 그 후의 제자/사도들의 말을 비교해 보면 다소 차이가 있는데, 사도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옛날의 그 불쾌감을 조금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들의 행적이 당시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기록이어 읽을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교회와 신앙을 강요하는 교인들은 여전히 싫지만, 이제 나는 예수의 '빅팬'이 된 듯하다. 


『쉬운말성경』을 읽어가면서, 원문 직역본에 대한 갈증도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워낙 연구자가 많다보니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번역본은 많겠지만, 신앙심이 아닌 순수하게 학문적 목적을 가진 성서학자의 직역본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일리아스』를 천병희 역본으로 읽고, 좀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본을 찾는 것과 같은 욕망인 것. 아무래도 신앙인들의 역본에는 원본과 다른, 종교인들을 위한 심한 왜곡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한데다, '...께서 말씀하셨다'라는 극존중 어투, 예수의 행적에 대한 후대 사도나 교인들의 MSG (그가 실존 인물이라면)가 배제된, 일종의 역사서로서의 성경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원본 자체가 신앙을 위해 쓰여진 것이니 내가 바라는 역본은 나올 수도 없거니와, 존재한다면 불경이니, 이단이니 공격받기 쉬울 듯 싶다.


그러던 중, 허성갑 목사의 히브리어·헬라어 직역본을 발견했다. 신실한 목회자의 번역이니 내가 찾는 그런 역본은 아니지만, '예슈아'라고 표기하는 등 원문에 가까움을 자부하고 있어 관심이 갔다. 알라딘 댓글이나 일부 블로그에서 오류를 지적하기는 하나, 그래도 이만한 완역본이 우리나라에 없지 않나 싶어 구입해서 '마타이'부터 읽고 있다. 


일단 소감은, 내가 히브리어를 모르니 오역은 잘 모르지만, 정체불명의 한역 표기가 아닌 히브리어 발음으로 표기된 점이 우선 좋았고, '지옥 불'과 같은 비유를 '힌놈 골짜기'라는 실제 지명으로 되살린 게 마음에 들었다(『쉬운말 성경』은 각주에서 히브리어 또는 헬라어 원문을 잘 설명하고 있기는 하다). 한학자 김원중의 역서들처럼 원본에는 없으나 역자의 보충이 필요한 부분은 따로 작은 글씨로 표기된 점도 높이 살 만하다. 『쉬운말성경』을 기준으로 단점도 지적할 만한데, 종이가 너무 얇고, 보통 성경에 있는 옆면의 반원형의 인덱스가 없어 즉시 찾기가 힘들다. 띄어쓰기라든가 문법이 어색하다. 


무엇보다, 예슈아가 제자와 대중에게 반말을 하는 점이 거슬린다. 예슈아 마쉬아흐라는 청년이 당대의 가치관에 맞서 최하층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그들을 설득했을까를 상상해 본다면, 절대로 이렇게 무례하게는 안 했을 것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장점이 단점을 덮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 역본과 데이비드 스턴의 『유대인 신약성경』을 기준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처럼) 나만의 '예슈아 마쉬아흐의 삶과 행적'을 정리해 보고 싶기도 하다.


개신교 측에서 다음세대 신자들을 위해 새로 출간한 『새한글 성경』에도 눈길이 간다. 유월절을 '넘넌절'이라고 한글화하여 표기하는 등 한역어들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보이는데다, 앞으로 누군가와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성경의 표현들을 인용하려면 이것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톨릭성경도 언젠가는 올라야 할 산인데, 여러 미술작품에서 유디트와 같은 외경을 주제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3천 페이지나 되는 것들을 넷씩이나 언제 다 읽으려나...

























불교 쪽으로 넘어가면, 금강경이나 법화경 같은 중국화된 경전들이 너무 어려워, 붓다의 가르침을 사랑함에도 불경은 전혀 읽어볼 생각이 없었다(불포자). 그러던 중, '초기 불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녀원에서 나와서 출가한 일아 스님이라는 분이 쓴 빠알리어 원전 번역본들이 검색되었다. 먼저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알려진 『숫따니빠따』부터 읽었는데, 『초역 부처의 말』과 같은 '당의정'은 아니지만 역시 감동이 크다. 특히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실린 '다니야의 경'은 여러 번 음독하고 있다. 지금은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을 통해 붓다의 행적을 알아가고 있고, 다음으로 『담마빠다』도 읽으려 한다. 지난해 출간된 이중표 교수의 초기 불경 편역본인 『불경』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걸 지나면 불교의 뿌리인 힌두교 경전들도 읽고 싶은데 마땅한 역본이 없어뵈네...
























아마도 가장 먼저 산 책인 논어는, 가장 손이 안 가기도 하다. 반드시 한자 원문으로 음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벽이고, 공자의 언행이 후대 학자들에 의해 여러 주석이 붙어 지금 유교가 거의 탈레반 취급 받고 있는 것도 한 몫한다. 그래도 역시 교양인으로서는 봐야 한다고 생각에, 사 놓고 20년 가까이 방치한 을유문화사 역본을 집어 들었다. 한자 부담을 덜기 위해 어려운 한자가 많은 구절은 그냥 한글과 각주만 읽고, 와닿는 글들은 한자를 여러번 써본다. 붓다나 예슈아의 말보다는 다소 엄격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나는 사자성어에 길들여진 세대. 앞의 둘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지만 이번 한 번은 끝까지 가보련다. 1회독 후에는 지난해 출간된, 논어에 대해 상세히 다룬 『논어와 역사』나 사마천의 '사기 세가'의 해당 부분도 생각하고 있다(그런데 김영수의 중니제자열전은 언제쯤?).














마지막으로, 세 사람에게서 위로받은 말들 소개.


"나는 성냄에서 벗어나고, 완고함은 사라졌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있네. 내 움막은 지붕도 없고 (번뇌의) 불은 꺼져 버렸다. 그러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려무나." 

"내 마음은 나에게 충실하고 (번뇌에서) 벗어났다. 오랫동안 잘 수련되고 잘 다스려졌다. 더욱이 (어떤) 악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려무나." - 「다니야의 경」(일아 역)


"내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은 그날 염려하여라. 한 날의 악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타이」6:34 (허성갑 역)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백이와 숙제는 과거의 원한을 기억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도 그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적었다.) 「공야장에게」- 23장 (박종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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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블루레이] 베르디 : 오페라 '리골레토' (한글자막)
베르디 (Giuseppe Verdi) 외 아티스트 / OPUS ARTE(오퍼스 아르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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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은 적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톤의 무대가 고급스럽다. 소프라노와 테너의 역량이 훌륭하다. 파파노의 지휘와 알바레스의 노래는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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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 사회 대한민국 - 이주민, 차별, 인종주의
손인서 지음 / 돌베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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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민정책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골랐다.

그런데, 기대와 달랐다. 이민정책이 아니고 지금의 이민정책과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지적하는 비판서였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수긍할 만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절대로 다민족국가가 될 수 없는 가장 강려크한 증거가, '대구시의 이슬람 사원 건립 반대'라고 늘 생각해 왔는데, 아마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동일할 것이다. '이슬람=테러리스트'라는 개신교 중심의 시선과, 이에 따른 집값 하락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이 책은 우리 특유의 '다문화'라는 단어의 허구적이라 하면서, 각 카테고리면 이주민들에 대한 정책이 인종주의적이라고 폭로한다. 결혼 이주민, 가사도우미, 계절노동자, 난민, 재외동포, 화교, 탈북자 등등. 우리가 보는 그들은 하나같이 타자이고, 값싸게 쓰다가 버려도 될 사람들이며, 잠재적 범죄자이자 차세대 이등국민이다. 덧붙여 전문인력 유입정책은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런 고급인력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지 우리나라로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비판적 시민사회, 페미니즘, 평등주의를 견지하는 점은 무척 아쉽다. 시민사회도 특정 정파와 결부된 이익집단에 불과하며 나라를 두쪽내는 동력이라는 점은 몇 개 정부를 거치는 동안 검증되었다. 최근 최저임금과 경직적인 노동시장이 우리 경제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민자에게도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가격을 낮출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박탈하는 것이다. '이민정책으로 동남아 여성이 유입되는 것이 출산율을 증가시킨다는 기대는 인종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출산율 저하는 선진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이며, 이는 여성들의 선택이라는 게 알려졌는데 왜 이런 가정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특정 대통령을 거론하면서 혐오감을 자아내는 것도 문제이다. 역대 우리나라 정부의 이민정책이 모두 실패했다는 스탠스를 취하는 듯하면서도, 유독 대통령 하나를 실명 거론하며 인종주의적이라고 한다(그 대통령이 인종주의적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냈긴 하다). 오해를 사면서 논지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인종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순서가 잘못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를 포함해서. 이 책에 높은 별점을 매기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차별의 원인을 문화나 이념에서 찾는 설명은 개인의 무지나 오해가 차별을 낳는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대고 있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차별의 해결책은 개인의 무지, 오해, 편견을 교정하는 일, 즉 교육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지 못했다. 미국은 반세기 넘게 인종차별에 대한 교육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미국의 인종차별이 개선되기는커녕 끈질기게 존속하고 있음을 꼬집고 있다. - P37

‘다문화 현상‘이나 ‘사회통합‘ 과정의 일부로서 차별을 다룰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반 교양 교육이 아닌 다문화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주요 주제로 다루지 않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 P49

정부가 이렇게 유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정작 이들은 졸업 후 대부분 한국을 떠난다. 유학생 유치를 통한 ‘우수 인력‘ 이민자 유입정책은 유명무실하다. 국내 유학생의 졸업 후 경로를 추적한 통계는 없다. 다만 교육부에 따르면 2022년 유학생 졸업자 2만 7,321명 가운데 국내에서 취업한 이는 8.2퍼센트에 불과했다. - P52

취약계층 남성은 가족의 돌봄이 필요할 때 정부의 복지에 기댈 수 없고, 외국의 이주민을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존재한다. 정부는 이주민으로 ‘값싸게‘ 복지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 P67

저출생 위기의 해결책으로 이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주민이 많이 들어와서 인구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르게 자녀를 많이 낳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생각은 주로 동남아시아 등 저소득 국가에서 이주하는 이주민이 출신국의 출생률을 따라갈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이 가정은 동남아시아 여성이 전근대적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상이다. 게다가 국내 결혼이주여성에 관한 연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사회에 동화하면서 내국인의 출생률의 수렴한다고 보고한다. - P8182

비판적인 시민사회는 이주가사노동자 도입은 출생률 제고와 무관하며, 무엇보다 최저임금 차등 적용 주장은 인종차별적이라며 반발했다. - P116

우리의 이익과 부합하면 같은 민족으로, 그렇지 않으면 외국인으로 배척해 왔다. 그래서 민족과 문화는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에 가깝다. 우리가 오랫동안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에 이주민에 배타적이라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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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페르시아 - 700년의 대결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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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분야의 역사, 

다른 렌즈로 조명한 역사서들은 언제나 반갑다. 


지난해 윤성학의 '지리와 전쟁'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거의 20년쯤 전 '중앙아시아(또는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지정학적 명제가 기억났던 것인데, 그리고 그 주인공 중 하나가 페르시아 민족이다.


페르시아는 서양권에서 이란을 칭하는 표현이란다. 우리는 '페르시아 제국'하면 고대 그리스 군의 용맹에 무참히 발린 괴물 빌런이고, 이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군주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한 패배자들로 기억한다. 그런데 '로마와 페르시아'라니?


즉, 그리스 세계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로마의 속주로 전락할 때, 페르시아는 (왕조는 바뀌었을지언정) 동방에서는 여전히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왕중왕'으로 불렀다.


그 왕중왕이 서방의 황제와 전쟁도 하고 경쟁도 하면서 서로를 진화시켰다는 게 저자의 주장. 문제는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서는 거의 남은 것이 없어, 그동안 로마 쪽 기록들에만 의존해 왔기 때문에 그들을 다룬 책들은 숫자도 적을 뿐더러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이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중앙아시아에서 약간 변방(?)의 제국의 덜 알려진 700년 간의 이야기들을, 그것도 대제국 로마와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조명하고 있으니.


로마와 페르시아의 첫 조우인 술라의 동방 원정부터 시작해, 크라수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그리고 그 이후 서로 죽이고 죽은 황제들을 거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어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파르티아는 크라수스가 원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사산왕조도 지나가며 들었던 명칭이기 때문에 어디 변두리 왕조이겠거니 했으나, 그 시절 로마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한편으로, 로마사에 대한 우리의 통념들을 흔들어 놓는다. 위기의 로마 공화정에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셋이 부상한 것을 두고 삼두정치라는 '편리한' 명칭을 쓰고 있는데, 삼자 간 객관적인 계약은 카이사르가 딸을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낸 것 정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쓴 적이 없고, 그가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은 그의 주장일 뿐이다. 등등


게다가 이 책은 온갖 저자의 추측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건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놓지 않고, '그랬을 가능성'으로 채우고 있다. 당연하지, 남아 있는 사료가 절대 부족하니.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만한 분량을 뽑았다는 건, 비단 700년의 긴 세월을 다루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방대한 자료를 검토했으니 그런 추정을 할 수 있었을 것. 그렇기 때문에 더 신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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