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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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뤼팽은 어릴 적『기암성』과 『수정마개』 , 그리고 (이 결정판을 통해 안 것이지만) 홈스가 처음 등장한 단편 하나를 읽은 게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계 최초의 뤼팽 집대성인 만큼, 결정판 1권은 거의 역자가 센터에 섰는데, 본인이 쓴 서문을 비롯하여 각종 해설이 초반을 빼곡히 차지한다. 당연히 그에게는 자격이 있으리라.


첫 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르센 뤼팽의 출발일 뿐 아니라, 작가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기법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는 역자의 설명도 있고(과연 그렇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품에서는 자신을 뤼팽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서술자로 소개하기도 한다. 모리스 르블랑 자신이 뤼팽의 행적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프리퀄 격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도 소개된다. 셜록 홈스에 대한 경의가 곳곳에 배어 있으며 그의 첫 등장도 여기서부터이다. 무엇보다 대도가 체포되고 탈출하는 방식으로 전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단숨에 대중의 시선을 잡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두번째 권,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은 홈스와의 대결을 담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대도와 명탐정 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누구도 우위에 두지 않는 결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뤼팽의 난봉질도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만, 왓슨이 얼빵하게 행동하는데다, 심지어 그를 忠犬에 비유하는 점이 아쉽고(르블랑이 자신을 뤼팽의 왓슨 역할로 자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홈스가 왓슨을 무시하거나 여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등 행동이 원래의 캐릭터를 충실히 살린 것인지 의심스럽다. 홈스가 아니라 에를로크 숄메스라는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셋째 권, 「아르센 뤼팽, 4막극」은 본 결정판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희곡이라고 한다. 희곡은 거의 읽지는 않는데 이 형식의 추리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이후로는 처음이라, 대도의 행각을 관객 앞에서 시각적으로 어떻게 그려낼지는 분명 흥미를 자아내는 점이다. 그 외에도 이 희곡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처음 소개되는 루팽의 주변 인물들이 몇 명 있기 때문이다. 


책의 출간연도가 1900년대 초반인 점을 고려하여, 그 시대의 기술, 문화, 유럽의 역학관계 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일례로, 초반부터 뤼팽이 '수퍼카'를 끌고 다니고, '택시'도 등장하는 반면, 말과 마차도 함께 거리를 다닌다. '가스등'이 있는가 하면 '전등'도 보급되어 있다. '전화'와 '전보'가 공존한다. 잠수함 관련 국뽕 에피소드도 소개된 점은 1차대전의 전조를 느끼게 한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은, 의외로 번역이라 하겠다. 세계 최고의 뤼팽 덕후의 성과물인 만큼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고 오역도 거의 없을 거라 생각된다. 향후 몇십년간 우리나라에서 이 권위를 능가하는 번역본이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포털을 검색해 봐도 번역에 대한 불만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 개인에 한한 문제이길 바라지만) 아쉽게도 나는 역자의 번역이 쉬이 읽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페라의 유령』과 조르주 심농의 작품 하나가 그랬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이라는 제목이 그의 번역에 대한 나의 불편한 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가 한데, 「뤼팽 대 홈스」(이게 원제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또는 「뤼팽과 홈스의 대결」이 맞지 않나? 이런 번역들이 암암리에 있다면 몰입에 방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를로크 숄메스'를 '홈스'로 표기한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역자는 '영미권에서도 '뤼팽 대 홈스'라고 번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했으나, 내가 알라딘에서 'Lupin'을 검색한 결과 '홈스'로 한 표기는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식 역어들을 그대로 계승한 점이 안타깝다. 'Gentleman-thier'라면 '괴도신사'가 아니라 '신사도둑'이라고 해야하지 않겠나. 그의 본질이 '도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둘의 뉘앙스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식 역어나 기존의 오역 제목들이 역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계최초 결정판'임을 자부했다면 좀 더 신경써줬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 문학 번역계가 함꼐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어쨌거나, 어린시절 추억을 곱씹을 수 있어 보는 내내 즐거웠다. 읽어볼 마음이 생기도록 이렇게 멋진 전집을 출간한 역자와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한다. 일단은 좋아했던 「수정마개」까지는 보고 열 권을 모두 읽을지 결정할 생각이다.


*리디셀렉트로 읽음

무엇보다 아르센 뤼팽을, 그 태양처럼 빛나는 열정과 자신감뿐 아니라 고독과 실존의 그림자까지도 사랑하여, 그가 펼쳐 보인 파란만장한 모험들 하나하나에 흔쾌히 동참해온 친구들, 그리고 동참할 준비가 된 모든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전집을 펴낸 것 같아, 한없이 기쁘다.

이 얼마나 기괴한 여행이란 말인가! 그래도 시작은 꽤 좋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보다 더 신나는 기분으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도대체 왜 한정된 모습만을 가져야 하는 거지? 늘 똑같은 성격을 굳이 왜 고집해야 하느냔 말일세. 어차피 내가 저지른 행위들만으로도 충분히 나라는 사람이 떠오를 텐데 말이야." (중략) "‘이자가 아르센 뤼팽이오!‘하고 분명히 얘기할 수 없으면 더 좋지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건 아르센 뤼팽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확실히 명심하는 것이니까."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 저들은 내 윗도리 안감까지 뜯어보고 신발 밑창까지 훑어내는가 하면 이 보잘것없는 벽면도 여차하면 두드려대면서도, 누구 하나 이 아르센 뤼팽이 훨씬 손쉬운 은닉처를 고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더라고요! 바로 그런 맹점 때문에 내가 편해요."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 마치 내 맘대로 섞은 카드 패처럼, 나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이미 하나 조성되어 있었다오. 다름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언제 나의 탈출이 현실로 드러날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당신을 포함해서 숱한 사람이 빠져버린 그 엄청난 미몽(迷夢)에다 결국 나는 나의 자유를 판돈으로 내건 거나 다름없었소. (후략)"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보드뤼든 다른 누구든 되어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오. 개성을 마치 셔츠를 갈아입듯 바꾸고, 외모와 목소리, 눈빛, 필체 따위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 말이오! 하지만 문득 그 모든 모습 가운데서 진짜 자기 자신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요. 그땐 몹시 서글퍼진다오. 지금도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후략)"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도둑질이란 얼마나 쉬운가 말이야! 왜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손쉽고도 안정된 직업을 마다하는지 모르겠어. 약간의 기술과 머리만 있으면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도 없을 텐데 말이야. 이처럼 편하고 이처럼 견실한 직업이 또 어디 있겠어? (후략)" 「흑진주」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이 알아낸 것은 무시하세요. 현재를 떠나 부디 과거를 돌아보세요. 저는 간밤에 당신이 본 사람이 아니라, 그 옛날 당신의 시선이 머물렀던 존재입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옛날에 당신이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그렇게도 변했나요?" 「셜록 홈스, 한발 늦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자를 신뢰하는 겁니까?"
홈스가 감탄한 듯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조건 신뢰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지요? 그가 원하는 일은 모든 게 성취되고, 당신은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겠죠?"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뤼팽 대 홈스: 금발의 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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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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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0년 만. 처음 읽었을 때 인생이 너무 허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 읽어도 여전히 허무하게 한다. 오조가 작가 자신이라고 봤을 때, 유복한 집안 형편과 빈민들에 연민 사이에서 번민하면서 사회에 자리잡지 못하고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쉽지는 않다. 생물학적 성과 실제 느끼는 성이 일치하지 않은 성 때문에 방황하는 성소수자들이 이 작품에 공감하지 않을까.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사회의 벽에 부딪혀 끝내 좌절한 변희수 하사가 떠올랐다.


「직소」
처음 읽었을 때에는 참 독특한, 반전 있는 성경소설이구나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예수에 대한 가롯 유다의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한없이 사랑해도, 그 사랑을 알아주지 않아 발생한 그 다음의 행동에 대한 변명.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 장을 본 적이 있다. - P9

인간이라는 존재는 왜 하루 삼시 세끼 밥을 먹는 것일까. 정말 모두들 엄숙한 얼굴로 먹고 있군.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어서, 가족이 삼시 세끼 시간을 정해 놓고 어두컴컴한 방에 모여 밥상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밥알을 씹는 것은 집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기도하는 행위가 아닐까. - P15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존재를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 P17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P26

어떻게 하면 저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행동이 속여도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는 둥 똑똑하고 교활한 처세술과 마찬가지가 되는 걸까요.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 P91

여기에 끌려와서는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도 저의 이마에는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겠지요.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P130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 그분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을 테다. 그 사람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내 거야. 그 사람을 남의 손에 넘기느니, 차라리 그전에 내가 죽여 버리겠어. 「직소」 - P143

실로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저는 아아, 이제 이 사람도 내리막 뿐이다, 꽃은 시들기 전까지가 꽃인 것이다, 아름다울 때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남들이 아무리 미워해도 상관없어, 하루라도 빨리 저분을 죽여 드리지 않으면 안 돼 하고 괴로운 결심을 점점 더 굳혔던 것입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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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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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있는 사람 없어. 나하고 나 자신, 그리고 또 나뿐이지.」


30대 초중반에 읽었고, 40대 초반에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반항기 어린 성장소설로만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냉소와 어른들의 위선에 대해 퍼붓는 독설이 좋아서, 당시 나에게 큰 충격을 준 명작이었다. 10년 가까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읽은 지금은 그 충격이 덜하다. 대신 길잃은 방랑자의 고독을 느꼈다.


홀든 콜필드는 짧은 여행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경멸한다. 그런데 그 경멸하는 표현이, 왠지 밉지 않다. 과도하게 들리지 않고 오히려 공허하다. 중반부에서 그가 밝히길 무척 외로워서 그런 것이고(마치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에 고백하듯, 그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읽을 때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명작으로 읽힌다. 또 10년이 후 읽게 되면 나는 홀든의 부모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고, 다른 느낌이겠지만 역시 명작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 않다. 우선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자니 내가 너무 지겹기 때문이고,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했다가는 부모님이 뇌출혈이라도 일으킬 것 같기 때문이다. - P9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 P19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 P32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 P113

망할 놈의 돈 같으니라구. 돈이란 언제나 끝에 가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 P154

「같이 있는 사람 없어. 나하고 나 자신, 그리고 또 나뿐이지.」 - P201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빌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 P229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 P247

「...빌헬름 스테켈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쓴 글이다. (중략) 이렇게 쓰고 있어.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P248

「교육받고 학식이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후략)」 - P250

「그 밖에도 학교 교육이란 건 많은 도움을 주지. 학교 교육이라는 건, 어느 정도까지 받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지. 자기의 사고에 맞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돼. 나중에는 자기 사고의 일정한 크기에 어떤 종류의 사상을 이용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될 거야.게다가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상들을 하나하나 시험해 보는 데 드는 시간도 절약해 주고 말이지. 결국 학교 교육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알게 해주고, 거기에 맞게 이용하게 해주는 거야」 - P251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끝>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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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 1 - 바이러스 밀리언셀러 클럽 70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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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을 원작으로 한 영화 '쇼생크 탈출'과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좋아하지만 책은 처음이다.  '스탠드'를 선택한 동기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군부대에서 실험용으로 쓰던 바이러스가 유출됐고 미국 전역이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 바이러스를 매개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임신한 여대생, 막 뜨려고 하는 무명가수, 농아인 등은 각자의 위치에서 바이러스의 희생자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1권 말미에 새로운 빌런의 등장을 예고한다.


최고의 이야기꾼답게,읽어나가는 속도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왜 그의 작품들을 할리우드가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완독 여부는 일단 1부가 끝나는  2권까지 읽어보고 결정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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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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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금의 샘』과 『반지의 제왕』을 추석을 기회로 끝냈는데, 벽돌을 둘이나 동시에 읽었던 터라 쉬어가자는 마음에, 서점에서 한 시간 가량 읽다가 구매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안 건 책을 1/3 쯤 지나고나서였지만.


거의 10년 전 나오키상 수상작들을 한창 몰아 읽을 때,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트콤 같은 설정이 무척 인상적인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 작가가 '식물학'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돌아왔다니. 처음에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고 플랜테리어나 조경 좀 공부해볼까 하고 집어들었더랜다. 그런데 웬걸, 식당 남자 종업원 얘기로 시작하더니 그가 식물학과 대학원에 배달을 갔다가 막내 여학생으로부터 '애기장대'라는 잡초를 연구하는 얘기를 듣는다. 그 얘기가 끝까지 간다. '식물학자'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책이 쉽지 않은 건 유전학과 실험에 대한 작가의 정밀한 묘사 때문이다. 과알못인 나로서는 그토록 그런 세밀함을 따라가기 쉽지 않아 진땀을 뺴고 두어번씩 읽어야 했다. 이 점 하나만으로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데 식물학이라니?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한 일본은 기초과학 매우 튼튼해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 자부심과 열정을 갖고 연구를 기울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는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최고의 영예인 노벨상이라도 있지, 식물학은 그런 것도 없는 사각의 사각이다. 지도교수인 마쓰다가 기혼인지 미혼인지 아무도 모른다. 옷은 거의 갈아입지 않고 연구실에는 책과 논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몇 명밖에 되지 않는 연구원, 대학원생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는다. 돈이 안 되고, 전망도 없기 때문에 새학기가 되어도 신입은 들어오지 않는다. 거기에, 예쁜 꽃도 아니고 '애기장대'라는, 아무도 모르는 잡초의 '잎'을 연구하는 일은, 발견했을 때 짜릿함과 논문 외에는 별다른 보상도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식물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연구대상인 식물은 사랑없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 연구자들은 그것을 한없이 사랑한다는 역설. 


정말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는데, 작가의 표현력과 묘사는 이제는 한때 유행했던 TV장르인 시트콤을 보는 것 같다. 두 번이나 고백했으나 차였으면 어색할 법도 한데, 계속 처음의 관계를 유지하는 그들을 보면서 흐뭇하기까지 하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담아낸 명작이다.



* 강양구 추천

** 서점에서 구입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중략)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 P96

모투모라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는 세계를 대하는 후지마루의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이 존중받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중략) 서로가 열정을 기울이는 세계는 달라도 언제까지나 함께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언제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모토무라는 하고 있었다. - P123

모토무라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다가 독특한 형태의 세포를 발견하고 ‘어‘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느꼈던 그 느낌. 아마 마쓰다가 산울타리 너머로 동백나무를 발견하고 ‘어‘했던 순간에 느꼈을 그 느낌. 그것은 지금 모토무라가 후지마루와의 사이에서 공감을 확인하고 느끼는 그 느낌과 다르지 않다. 찌릿한 기쁨의 충격이 내달리는 느낌이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연구를 그만둘 수 없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사는 것을 그만 둘 수 없다. - P194

모토무라는 취미든 일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거듭한다.
그러자 신기하게 생각되는 건 역시 식물이다. 뇌도 신경도 없는 식물은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 같은 게 없어도 빛과 물만 있으면 그것을 식량으로 하여 얼마든지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다. 먹을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과는 ‘산다‘는 것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 같다. - P229

큰 발견을 하면 칭찬받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화려함하고는 거리가 먼 실험의 나날을 오랜 기간 계속할 수 없다. 그저 식물을 좋아해서, 식물을 좀 더 알고 싶기 때문에 연구한다.
사랑,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 P279

"아니"하고 모토무라는 고개를 흔든다. 아니, 전혀 다르지 않아. 요리나 실험이나 같아. 예정대로 실험을 진행해서 예정대로의 성공을 얻을 수 있을까. 기일까지 박사논문을 제출할 수 있을까. 그런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내가 틀렸어.
실험에 짜인 줄거리는 없어. 연구에 기일 같은 건 없어. - P349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 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한다.
반대로 인간은 뇌와 언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뇌도 기쁨도 모두 뇌가 내놓은 것이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은 물론 인간이기에 맛볼 수 있는 묘미겠지만, 관점을 바꿔놓고 보면 인간은 뇌의 포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화분의 식물보다도 더 좁은 범위에서밖에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 P352

"직감을 너무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마쓰다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에 손을 들었다. "내가 말하는 직감은 신으로부터 들은 갑작스러운 계시 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우직하게 관찰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직감을 말하는 겁니다. 모토무라 씨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P362

실험이란, 식물이란,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이제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사는 것을 그만둘 수 없듯이, 학부생 때 ‘왜?‘"알고 싶어‘하며 묻고 바랐던 것은 낭비도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알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신기하고 매력적인 존재, 식물을 알고 싶다. 앞으로도 계쏙 살아가기 위해서 연구자로서 살아갈 거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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