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운동 - 공산주의 선언 나의 고전 읽기 11
박찬종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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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깐 초등학교, 그 당시 말로 국민학교 다닐 적이니 대략 20년 이전인 것 같다. 내가 아직 철없는 아이 무렵 마르크스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한 존재라는 것과 공산주의를 지닌 북한은 엄청난 괴수들이 사는 나라로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어린 시절 똘이 장군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본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덧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하면서 그 때의 일을 다시 돌이켜보면 뭔가 이상한 것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2010년 가을, 겨울 이때 국내에서는 경기가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어느 분야와 사업은 잘 되고 있으나 어느 분야와 사업은 모두 잘 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라 겉으로 보는 균형은 이상 없어 보이나 사실 내적으로 들어다 보면 많은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참고로 나는 하는 업무가 건설 엔지니어 쪽이다. 주로 대관협의와 관련 보고서를 적기 때문에 관공서 업무를 자주 하는 편이다. 기술력을 가진 엔지니어인 만큼 약간의 전문성을 가진 1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엔지니어 업무를 전국에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뭔가 건설과 엔지니어 계통에서 2010년 후반기로 접어들며 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건설 엔지니어 회사들이 재정난과 경기 난으로 큰 고통을 바고 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일상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런 후유증으로 우리 회사는 일부 직원이 자진퇴사 및 권고해직되었고, 월급도 몇 개월 동안 잠시 감축되었다. 물론 이런 과감한 회사추진계획에 나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당장 회사가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미래상을 듣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중소기업이다. 그런 중소기업들이 우리 회사처럼 뭔가 크나큰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건 비단 우리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는 인원감축에 못 미치는지 자기 회사를 다른 회사에 병합·인수되거나 혹은 아예 부도가 나버렸다. 심각한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업체는 직원 월급이 몇 개월 동안 밀렸다고 한다.

물론 그 고용주는 직원들의 월급을 고의로 주기 싫은 것은 아니다. 주고 싫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보고 당시 나 역시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있어야 하는가 또는 권고해직 대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물론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번일로 상당한 국내 경제상황에 대한 모순에 빠졌다.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인터넷 신문기사로 주로 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TV에 가끔 긴장감이 나도는 기사나 보도가 나온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이다. 물론 내가 위와 같은 일들을 겪기 전에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나쁘다거나 부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사유가 임금문제. 산업재해, 근로기준 등과 같은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높은 임금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파업을 하여 국민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준 노동자 부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노동자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이렇게 여길 것이다. “회사가 너무 하군”,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지? 그렇게 과격하게 시위할 필요가 있는가?”, “정부는 저런 것을 해결하지 않고 뭐하지?”라고 말이다. 막상 그런 내뱉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당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서 방관하는 태도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TV에 시위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주변에 누군가가 해고될지 모른다거나 산업재해를 겪으면 그들 역시 분노한다는 것이다. 물론 감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이성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그것은 노조, 사업자, 정부,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감정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을까? 


사실 정부기관과 사업자는 기본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받은 사람이나, 노동자는 높은 교육수준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사고할 수 있는 영역과 범위는 사업자와 정부기관보다 낮다. 솔직히 노동자들에게 이성적으로 표방하려고 해도 자신들의 지닌 한계점과 또는 높은 교육을 받더라도 정부기관과 사업자들이 서로 도모하여 의견을 나누지 않으면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런다고 해서 노동자, 사업자 모두 존재하지 않으면 국가경제나 그 당사자들의 경제활동에 큰 문제가 미친다. 그러면 이런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보고 생각해야할까? 이런 모순에 대해 아주 깊고 깊은 사고로 고민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본”을 지은 칼 마르크스와 “자본”을 엮어 책으로 낸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그들이 자본을 출간하기 전에 1848년 “공산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내가 어릴 시절에 공산주의는 북한과 소련의 정치사상으로 국민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는 어긋난 정치이념으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공산주의의 의미를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공산주의와 전혀 관계없고, 공산주의국가인 북한과도 전혀 관계없다. 마르크스가 원한 이 사상은 노동자를 이 사회의 주인으로 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관계를 찾기 위함이지 노동당이 국가정부요직이 되어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개인 자본 소유를 부정하나 막상 마르크스는 개인 자본을 인정했다. 만약 개인이 자본에 대한 소유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발전할 계기를 상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공산주의 선언 100%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 우리가 생각하고 봐야할 것들이 뭔지를 다시 돌아 본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깜짝 놀란 사실이 있었다. 현재 우리 한국사람이라면 “일일 근무시간 8시간”, “아동에 대한 노동학대 금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나이키에서는 개발도상국가 어린이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부여하고 1달라도 되지도 않은 일일임금으로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은 수제품이라 하여 고가에 팔려 나이키는 엄청난 이득을 본다.
 

나이키라는 회사가 높은 이익을 받는다거나 고효율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가려진 어린아이의 착취이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하면 이상하게 여길지는 몰라도 적어도 9, 10세 되는 아이들을 새벽에 깨워 밤늦은 시간까지 노동시키지 않는다. 이런 가혹한 행위를 하면 상당한 논란이 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있었던 19세기 유럽에선 당연한 관례이었다.

그렇게 마르크스가 주장한 만큼 그는 현실을 뒤엎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여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로 이 책에서 마르크스가 유럽지식인으로 인정받으면서 마르크스 사상을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보며 마르크스는 자신이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그저 공산주의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길 바랐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이 오히려 정치적인 지도자로 되기보다는 올바른 이론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잘 알던 마르크스와 달리 소련과 북한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표방했으나 역으로 국민들을 속인 것이다. 소비에비 연방이 해체 전에 노동자 2명에 국가기관 요원 1명이 붙어있으니 그런 모순이 얼마나 심할까?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라고 했으면서 속으로는 자본주의 국가 이상으로 착취와 탄압을 거행한 것이다.

정말 인간을 사랑하고, 약자 편에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로 통해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겠다니 농담의 한계를 벗어나 이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정도이다. 마르크스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현실을 보았다. 오늘날 내가 혹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어떠한가? 여전히 한국에서 마르크스는 악령으로 통하는 세계다. 그렇지만 막상 악령은 아니다. 그런 현실 속에 여전히 한국에서 노사관계 문제만이 아닌 남녀차별, 지역차별, 빈곤차별, 학력차별, 인종차별 등과 같은 모순이 발생한다.

자신은 그런 차별로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그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막대한 비난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가 하는 행동들은 차별을 하고 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그는 위선이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끔 나는 이래 생각한다.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라고 말이다. 그리고 서민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서민과 어려운 이웃은 파업하고 시위하는 사람이다. 물론 대다수가 그런 것은 아니나 이런 겉으로 들어나는 양심발언과 행동으로 보이는 차별대우는 여전히 이율배반적인 인간, 사회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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