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은 영광의 날보다 어둠에 가려진 날이 더 많았다. 조선이란 국호를 지닌 국가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잃었고, 조선의 인민(국가 이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들은 나라를 잃은 채 일제의 총칼에 억압을 당했다. 해방의 광복이 오는가 하더니 이제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독재로 다시 어둠 속에 방황했다. 역사란 단절된 시간이 아니다. 역사란 바로 지금 현세대를 구축한 하나의 과정들이다. 그래서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항상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하며 이어져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2017년 큰 방향을 보여준 한 해였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이후 헌법재판과정에서 탄핵되었다. 민중이 보여준 촛불혁명은 그 이전의 1987년의 혁명 이후 다시 찾아온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였다. 하지만 1987년과 2017년은 조금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유사한 점은 헌법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법치주의국가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의 주권을 보여주었지만, 1987년의 주권은 거의 박탈된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고, 2017년 국민의 주권이 가진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그 차이는 바로 국민의 선택점은 과거는 없었으나, 현재는 있었다는 반증이다. 권력의 주권행사에서 독재정부에서 비밀투표를 하거나 선거인단을 권력의 입맛에 맞춘 자들로 포섭했다. 북한에서 선거하면 거의 100%에 가까운 찬성이 나온다. 투표자는 선택할 후보자가 1명이니 무슨 의미인가? 그런 비슷한 인들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하다못해 과거 군부대에서 부재자투표를 하면, 병사들의 투표용지를 검색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재투표하게 만든다. 물론 덤으로 온갖 구타와 욕설은 매우 후하게 대해준다.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독재자의 후예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처럼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군화발로 국민을 밟은 자들이 이래저래 설치고 다녔다. 꾸준한 노력과 온갖 희생들이 지금의 현실로 만들었다. 예전에 386세대란 단어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이가 30,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어난 이들을 두고 지칭한 말이다. 이제는 586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어린 시절 286XT가 있었고, 도스를 디스켓에 넣고 부팅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386 컴퓨터는 모니터도 컬러이고, 286과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게임과 소프트웨어를 실행할 수 있었다.


지금 80년대들은 도스와 윈도우 초기버전을 알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386은 고물이지만, 이제 그들은 586 펜티엄으로 돌아왔고, 조금 더 지나면 초특급 PC버전과 맞먹는 숫자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80년대 대학가 청년들은 20대 시절을 독재와 싸웠고, 이제는 또 다른 현실하고 싸운다. 영화 <1987>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30년 전의 암울한 한국사회는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고, 돌아온 것까지는 

아니나, 그 당시 권력의 자리에서 국민들을 억압하던 이들과 그에 동조하던 세력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주 급박한 느낌이 많이 든다. 국가는 온간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민주투사들을 체포하고, 시위현장이나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은 무참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영화는 암울한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고문 장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변호인>이나 영화 <1987> 역시 고문이 그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이란 자들이 국민치안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나 국민을 상대로 불심검문하거나 불법으로 체포구금하거나 더구나 가족과의 연락을 차단한 채 어두운 방에서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문과 관련하여 가장 끔찍한 영화는 <남영동 1985>이다. 영화 <1987>보다 2년 전의 배경을 토대로 제작한 영화는 민주주의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선생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김근태 선생의 수기록 <남영동>을 읽으면 그분이 받으신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와 소설에서 고문은 인간의 육체도 파괴하지만, 정신 역시 파괴하여 영혼까지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정신적 고통은 비단 당하는 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깊은 상처를 받는다.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계속 당하는 민주주의운동가가 계속 포기하지 않자,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조차 그에게 제발 포기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도 집에 가면 가족이 있고, 아이들도 있다.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은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더 나아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분이다. 고문을 가하는 자 역시 자녀가 있다면 그런 암울한 세계에서 폭력과 감시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은 제외이다. 그들은 그런 폭력과 감시를 토대로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김근태 선생은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을 듣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비참한 현실 속에 들려오는 라디오의 이야기는 일그러진 환상세계의 잔인한 농담이기 때문이다. <1987>에서 라디오는 등장한다. 라디오에서 DJ의 목소리도 나오고, 테이프 카세트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때 등장하는 유명한 가수와 노래가 등장한다. 김현식 3집은 대한민국 대중음반 역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명반이다. 그 노래들은 지금도 리메이크 되거나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도전곡목으로 등장한다. 3집 앨범에서 가리워진 길이란 노래가 있다. 본래 김현식과 친한 유재하의 곡이나, 그 역시 천재의 운명인지 일찍 요절한다. “가리워진 길이란 가사는 상당히 시적이나, 당시 상황과 정말 잘 어울리는 곡이다. 가사를 보면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길 없네.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고,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어떻게 보면 독재와 싸우던 지난날의 그들은 민주투사도 있으나, 억압과 횡포 속에서 힘들게 숨을 죽이면 살아간 이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암울한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최루가스가 바람을 따라 거리를 메우고, 군중의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곤봉을 들고 있는 백골단이 무참히도 시민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 회장으로 나온다. 그가 신입생을 모집할 때 보여준 영상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518의 비극이었다.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광주시민들 사이로 아직 시대는 암흑기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국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사격하던 그들, 독재의 칼날은 국민들을 사육장 안에 가두는 짐승과 같이 다루었다. 영화를 보면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가 많이 나온다. 전두환 정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프로파간다 방법으로 3S(Sports, Sex, Screen)이었다. 덕분에 한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명곡이 가장 많았다. 연예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TV가 흑백에서 칼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스포츠는 야구가 최고였고, 성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도 많이 나왔다. 잡지의 특징은 미모의 여성이 수영복을 입은 화보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기사에는 각종 연예계의 가십거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보다 오락과 재미를 더욱 치중하게 했다. 그런 시기였으니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두고 아직도 북한의 소행이라 말하던 정신병자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독재에서 벗어나 그 무지개를 향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지개는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연희는 이한열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한다. 연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민주주의 운동을 하다가 변을 당했고, 외삼촌 역시 그런 사람하고 엮여 있는 것이 두려웠다.

 

이들은 왜 힘든 선택을 하였는가? 영화에서 고문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론 연기와 설정상의 연출이라 하지만, 그 행위를 한다는 자체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 영화는 3가지 세력이 대조적으로 흘러간다. 한 세력은 경찰과 국가, 다른 한 세력은 몰래 숨어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 마지막은 이들 중간에서 방황하던 사람이다. 연희는 3번째에 속하는 인물이다. 국가권력이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외삼촌이 고문경찰에 끌려가자 결심을 한다.

 

어째 보면 혁명의 시작은 원대한 이데올로기만으로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의 시작에서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이상적 가치가 있어야 구심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루소는 루이왕정 세력과 파리시민에게 조롱거리 대상만 되었을 뿐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19세기에는 마르크스와 혁명가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20세기에는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정신은 루소가 되었더라도 혁명의 주체는 시민들이 되었다. 보통 시민들이란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 여성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젊은 대학생들, 군것질 하며 집에 돌아가는 학생까지도 포함되고, 노상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나 트럭을 몰며 짐을 나르는 운전사들도 그렇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사람들이 모두 거리를 나와 독재의 부당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반항한 이유는 자신들이 봐도 부조리한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희의 외삼촌은 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이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교도소의 교도소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다. 폭력과 억압을 자행하던 그들의 행실에서 진정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하도 내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하가 반항하면 부하의 가족까지 섬멸한다고 협박한다.

 

실제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마저 유기하고 은폐하였으니 당연히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끄는 주체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장악하고 있는 박처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지역에 살다 피난 온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주워온 아이가 어느날 자신의 가족 모두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지주계층에 대해 공사주의자들은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이념적 토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만 부여했다. 그런 만행에서 가족을 잃은 박처장은 한국정부에 반항하는 세력을 모두 반국가행위자로 본 것이다.

 

그게 남영동의 고문실에서 박종철이 사망했고,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된 후 바로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진다. 박종철의 부모가 부검에 참관하지 못하고, 그의 삼촌만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오열한다. 사람이 죽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병사 되거나 의문사 처리된다. 자신의 가족을 병으로 잃은 것도 한이 맺히는데, 젊은 청년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얼마나 한이 맺히는 일인가? 그것도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 절망은 그들이 살아간 인생의 길에서 가리워진 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외롭고 괴로우며,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갈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영화 <1987>는 그런 그들에게 길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서울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 억울한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 집에서 숨거나 길거리에서 움츠리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같이 그 길을 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영화 <1987>과 더불어 6월 항쟁을 보여준 책으로 최규석 작가의 <100>란 만화책이 있다. 물이 100가 되면 액체에서 기체로 되고, 수증기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된다. 그 책에서 권력 아래 순종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그 권력 앞에서 저항한다. 대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희생과 눈물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고문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쳤으며,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일상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지금 정치권에 다시 대두된 이들은 그 당시 그들과 같이 광장에 서고,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투쟁하던 이들이다. 그동안 10년 동안 시간은 과거로 간 듯 했다. 그러나 그 10년은 멈추고 다시 시계는 미래를 향하여 가고 있다. 촛불혁명이 한참이던 작년 늦가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나와 같이 시위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당시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 욕을 했다. 가령 XX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약간의 다른 사상적인 부분에서 옆에서 나무라던 분들이 있지만(이 사람들은 정말 그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욕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분들이 욕하던 이유는 독재군부 시절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잡혀갈 수 있다는 공포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가 이제 스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모임에서 그냥 나라에 대한 불만을 조금이라도 발성하면 주변사람 모르게 남영동 지하고문실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히던 세상이다. 당시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벌이는 자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국가라는 이름을 지닌 공권력에 두려움을 지니고 살았을까? 2017년 혁명은 독재의 청산이 정치권력이란 시스템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그러면 1987년의 혁명은 어떤가?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을 모든 시민들이 도전한 시기다. 가리워진 길은 내 눈앞에 펼쳐진 안개 속만이 아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영혼의 상흔조차도 가리워진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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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24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좋아요 한 200개는 눌러야 되는 글인데 말이지요.....

만화애니비평 2018-02-24 13:15   좋아요 0 | URL
아쿠쿠 감사합니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