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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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으로 남녀 간의 갈등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과연 여성은 약한 존재인가? 아닌가?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인간의 성적인 요소보단 사회적인 요소에서 찾으려 한다. 물론 사람마다 각각 다른 사고방식이 있고, 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만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개인의 판단은 그(여)가 태어나고 자라며 살아온 과정이 축척된 것과 같을 것이다. 군대생활을 나 같은 경우 일반 병사가 아닌 하사로 있었다. 나하고 같이 훈련받은 동기는 290명 가까이 된다.

 

그 중에 여군도 있었다. 군번도 나보다 빠르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내가 있던 훈련소대의 조교 중에 여군하사도 있었다. 육체적으로 여성이 약할 수 있겠지만, 여성 그 자체가 약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완전군장을 한 채 언덕 위에 있는 전투훈련장을 같이 구보로 뛰었던 동기들이 있었다. 키나 몸무게가 남자 동기보단 불리했으나, 그들은 모든 것을 해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을 뿐이지, 충분히 보통 남자보다 더 강한 신체능력을 가지지 못한 법은 없다.

 

이런 사례는 실제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상가는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근대민주주의를 만든 장 자크 루소다. 루소의 철학과 사상을 알아 가면서 그는 언제나 로마의 시대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았고, 또한 고대 스파르타 왕국의 강인함을 빼놓지 않았다. 프랑스대혁명의 절대적인 도서라면 <사회계약론>과 더불어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을 읽어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스파르타 여인들은 남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여성들이다.”

 

루소의 정치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정치가 ‘뤼쿠르고스’이다. 그는 스파르타가 아주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초석을 만든 인물이다. 뤼쿠르코스의 정치적 체계를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다소 거칠어 보인 점도 있지만, 스파르타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다시피 매우 강력한 군대가 있고, 그 나라의 남자들은 매우 용감한 전사다. 그런 전사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며 전장을 누빈다. 그런데 오로지 스파르타의 용감한 전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는 그의 아내만이 가능했다.

 

스파르타 어느 여성은 자신들의 국가의 여인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그럼요, 남자를 출산하는 것은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루소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스파르타의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지금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같이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독재정치를 하거나 또는 국민의식 수준이 저열하지 않았다. 로마의 세계는 양심인과 지성인으로 넘쳤으며, 그들의 관심사는 공명정대한 인물로 통해 공화주의 가치관을 확립하려던 것이다.

 

다소 플라톤적인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겠지만, 국가의 지도자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진정한 명예를 아는 자라면 스스로의 위치를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전쟁으로 과시하기보단 평화로써 번영을 누리고자 한다. 지금의 정치체계에서 외교적인 부분은 군사적인 무력충돌로 이어지고, 경제정책은 그 나라 생활의 질과 인구수를 움직인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이미 그 당시에도 충분한 답을 내놓는다. 스파르타의 화폐를 금과 은이 아니라 무거운 무쇠로 하는 이유는 빈곤한 자가 나오지 않으려면 사치가 없어야 한다는 점, 밭이 어느 정도 개개인에게 돌아가야 생계에 걱정이 없다는 점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권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거의 없어지는 과거의 국가를 뒤로 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거나, 혹은 기존의 국가의 정치적 체계를 발전시킨 자들이다. 각자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업적을 보고 있으면, 딱히 뭐라 쓸 수 있는 글이 없다. 각자만의 스타일과 추구하는 방향성은 다르나, 그들이 다른 사람과 차이 날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란 점, 그들의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가 태어나기 몇 백 년 전에 등장하여 플루타르코스가 죽은 지 2,000여 년이 지나도 계속 전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미술작품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푸생의 그림 중에 <사비나 족 여인들의 겁탈>이라던가 루벤스와 구에르치노 같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도 많다. 역사를 기록한 서적이 문학적 가치도 가지고, 또한 미술적 상상력까지 이어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등장하는 그림들은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때 활동하던 화가들의 명화를 소개한다. 어디서 얼핏 본 것 같은 그림이 등장하면서 르네상스라는 인문정신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책을 보고 있으면 영웅의 각 면모는 개성이 넘치는 당시 살아간 인간들은 우리하고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을 잘 발견한다. 단지 영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그 영웅으로 통해 보는 당시 세상을 안다는 것은 인류가 이때까지 살아온 흔적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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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5-2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만화애니비평 님.

언젠가 읽어야 할 책으로 항상 염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는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 비교가 빠진 책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은 원전의 구성에 맞춰진 책 같습니다. 이 책 번역은 어떠한가요? (요즘 분량 있는 책을 집어들 때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25 10:53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말하기가 어렵지만,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용이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중간마다 삽화나 동상, 그림 등이 들어가서 아주 이해하기 좋게 만들어진 겁니다.

이다희 번역자는 그리스로마 신화로 유명한 이윤기 선생님의 따님입니다. 그분의 영향을 받았으니 내용을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잘 포커스가 맞추어진 것 같습니다.
동서출판사 본은 살짝 보니 보는 사람에게 조금 불편하게 편집되었더군요.
2권짜리가 3권짜리 되면서 목차설정이 조금 그렇다고 하더군요.

마립간 2016-05-25 11:33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참고가 되었습니다.

루쉰P 2016-07-1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거 볼라구요 ㅋ

만화애니비평 2016-07-17 19:37   좋아요 0 | URL
오~
 

(자작 단문소설입니다!)서울시 집은 아파트 전세 24평형 사는 평범한 부부, 그들이 어렵게 결혼 후 이제 첫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남편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가장, 아내는 원래 같은 회사에 다녔지만, 출산에 따라 일을 그만 두었다. 육아 퇴직과 관련하여 회사에서 나온 퇴직금과 전송금으로 출산비, 산후조리원비용, 아기 옷이나 예방접종비 등을 계획했다. 병원 산부인과 수술실에서 힘들게 자연분만하던 아내가 드디어 첫 아기를 보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산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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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1>

간호사 : 축하해요. 잘생기고 멋진 왕자님이 태어났어요.

아내 : (남편을 향하여) 오빠! 큰일 났어요. 우리 아이 특목고에 명문대를 가지 못하면 삼성에 취직못해 평생 고생하고 솔로로 살 것 같에요. 군대 가서 사고사 당할까 무서워요.


<상황2>

간호사 : 축하해요. 이쁘고 귀여운 공주님이 태어났어요.

아내 : (남편을 향하여) 오빠! 큰일 났어요. 우리 아이 길가다가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하면 어쩌죠.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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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읽어본 괜찮은 서적으로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가 있었다. 마녀사냥을 두고 페미니즘 운동가이면서도 노동운동가인 그녀가 저술한 마녀사냥은 여러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마녀사냥은 결국 권력자드이 자신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장치적으로 태어난 현상이다. 과거의 마녀사냥은 용인되어도 지금은 법이 있기에 사법처리된다. 이번 일도 비슷한 사회구조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마음에 드는 이유는 마녀사냥 희생자가 여성도 있지만, 그 여성 중 특히 중년이나 노년의 여성의 희생을 잘 보여준다.


책에서 권력자의 횡포나 전쟁의 상처는 젊은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게 만들고, 그것을 목격하는 살아남은 여성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역사가가 된다.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사건은 언제나 그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에 의해 계속 재생산되어 새롭게 보여질 뿐이다. 신해철의 유고에서 이런 식의 문구가 생각난다. "여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진짜 X같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남자도 X같다." 여자들이 진짜 X같이 힘든 것은 인정하지만, 남자도 역시 X같은 일들이 많다는 점이다. 단지 여자들에게 더 많은 X같은 피해가 많을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를 읽다보면 여러모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적 문화를 알 수 있다. 그런다고 그 교수가 남자와의 투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남자와의 이성과 사회적 관계로서 대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남녀가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는 개인의 권리이나, 하지만 사회의 재생산성을 생각한다면 계속 자녀는 필요하다(그분은 자녀가 4명이나 있으니 언행일치).


어디 갈 때 버스와 지하철 타려면 운전기사가 필요하고, 그것을 수리하는 정비사가 필요하다. 어디 가서 커피 한잔 마실 때 응대해주는 종업원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미래의 우리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가는 것을 원하나, 현실적 문제해결은 필요하다. 그런데 피해의식만 무장하여 외치기만 한다면 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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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5-24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의 꽁트 ; 어느 산부인과에서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아니고, 자녀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상황 같은데요.

만화애니비평 2016-05-24 11:46   좋아요 0 | URL
이미 현실은 일어나고 있죠. 요새 산부인과에서 만나는 아기의 집안끼리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번 사건에 다른 추모글보다
자기집 딸 2명을 둔 어느 아버지의 추모글이 짠하고 다가오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진짜 어찌 해야 합니까.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

만화애니비평 2016-05-24 16:06   좋아요 0 | URL
헬조선인데..
문제는 근본원인을 찾는 것을 계속 놓치고
남혐여혐 서로 가지고 노는 것이죠.

전에 아는 동생과 김치녀 이야기하면서
김치녀를 만드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잘 먹고 잘 사고 남의 입장 따위 개나 주라는
그런 남자들이 만든 것이라 이야기했죠.

솔직히 딸 가진 주변사람 보면 대부분

내 딸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 보낼거야
이런 마인드부터 시작하니...참...헬헬헬헬..

마립간 2016-05-25 07:56   좋아요 0 | URL
여성들이 `내 딸은 (또는 나는)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 보낼거야 (갈꺼야)`등의 마이드로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에 여성들이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싫은 것이죠.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단어의 개념을 생각한 게 있다. 그것은 공간(空簡)의 지박(止泊)이다. 왜 공간에 대한 지박인가? 최근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아주 슬프고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를 우리는 뉴스에서 접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이 휘둘린 흉기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직 20대라면 연애나 취업 혹은 결혼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살해당한 분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회를 박탈되어 억울하게 구천을 헤매게 되었다. 진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있으면 매우 슬플 것이다. 우선 자신이 죄도 없이 희생당한 점이고, 다른 것은 그 분의 죽음을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분명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애도와 함께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후폭풍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이에 대한 반발영역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서로 엉겨 붙어 진정한 의미의 추모보단 분노를 넘어 광기의 집착과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의 죽음 억울하고, 어느 사이트에서 내건 군인들의 죽음 슬픈 일이다. 하지만 2가지의 죽음은 서로 다른 개념이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고 생각해야 할 점이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라는 구조에서 볼 일이고, 군인들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국방군사 지휘 및 무기체계, 그리고 대외 정치외교 관점에서 생각해야 해야 하는 점이다. 단순히 어느 한 개인 여성의 죽음과 다수의 남성군인의 죽음에서 어디가 더 무겁냐고 물어보면 그건 참 애석한 일이다. 어느 누구든 다 소중한 목숨이고, 어느 누구나 그 당사자의 가족과 친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것이 사회적으로 더 심각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의 죽음은 많은 인명을 희생되었고, 국가적으로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그럼에도 전자에게 선택하는 이유는 군인은 처음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이유는 국민들이 적으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로부터 안전하게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다. 공화주의국가,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 공화주의는 그 나라의 국민이 다른 국가에 의해 목숨과 재산의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곧 헌법으로써의 권리이다.

 

조금 애석한 사실은 군인들의 죽음은 희생에 비해 그들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적절하지 못하다. 매년 자살하는 군인,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이다. 인권에 대한 개념에서 어느 특정 신분만을 봐서는 안 되고 전 방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강남지하철역 참사에서 왜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가? 극우적인 여성혐오 사이트와 극단적으로 남성혐오 사이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행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번 추모에서 서울강남을 시작하여 서울 전 지역으로 또 다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추모에 대한 열기는 나쁘지 않으나,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추모 그 자체에 대한 부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슬픔으로 기억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사람다운 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내가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왜 강남지하철에서 죽은 한 개인의 죽음이 이렇게 큰 이슈로 되었는지 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우리들은 흔히 산업재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 사회에 대한 부조리와 정부행정의 공정성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낀다. 내 아버지는 안전사고로 인해 산업재해를 당해 부상을 입자, 회사에서 강제로 퇴사시킨 것도 모자라 산업재해로 인한 병원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느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4개월 전후로 내리게 하여 퇴직금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고, 어느 회사에서는 퇴직금조차 주지 않았다.

 

내 친구는 원조파견과 하청관리 부실, 안전관리 미흡으로 인해 변을 당해 사망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화장터에서 화장 후 유골단지를 무덤에 묻는 그 순간까지 있었다. 내 친구의 사고는 인터넷 신문기사 올라왔고, 그는 그렇게 세상의 흐름 속에 사라져갔다. 이런 일을 겪은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사회적 약자가 되거나 혹은 그 약자의 주변인으로 세상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 친구의 죽음, 혹은 군인의 사고사, 그밖에 죽음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내 억측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바로 공간적 지박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다. 땅이나 땅에 매겨진 부동산 가격, 사람, 지하에 매설된 상하수도관로 등등이 모두 공간적 존재다. 내가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 어디에 살거나 혹은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공간이란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 공간이 어디에 속해있는지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다. 신분에 따라 공간적 지박이 작용한다.

 

군인의 죽음은 군부대 영내나, 혹은 육상의 훈련이나 전투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군인의 죽음에서 대부분 군인들은 남성이다. 군인의 죽음은 남성의 죽음과 연결되고, 공장 노동자나 공사장의 노동자 역시 남성들이 많이 차지한다. 요새 군인, 노동자 등과 같은 부류에서도 여성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나, 대부분 남성이 많은 인력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일정한 장소, 일정한 직업, 일정한 패턴에서 죽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 강남역살인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분명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지만, 그 공간적 위치와 그 공간 안의 건축물 용도기능이 작용한 곳이 강남역이었을 뿐이다. 왜인가? 살인을 저지른 자가 여기가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기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곳이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느 공간과 상관없이 불특정 대다수의 여성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군인의 사고사나 노동자의 산업재해는 어느 특정장소와 상황이 존재한다. 즉 불특정 대다수가 아니라 특정 다수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이 위험한 이유는 특정대상을 지칭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미야자키 쓰토무라는 일본인은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방을 조사하니 그가 가진 롤리타콤플렉스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범죄는 즉 어린아이라는 대상, 특정대상을 상대로 한 범죄이다. 강남지하철역 사건과 비교하자면, 정신병적인 살인자가 무엇인가 살인대상자에 대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길에 보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과거에 있었다. 의정부역에서 칼을 들고 지하철 이용승객을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묻지 마 범죄이다. 그런데 묻지 마 범죄에서 의정부역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사람을 향한 것이다. 무차별적인 공격성향이 일으킨 범죄고,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무차별적으로 행한 것보다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향한 증오에 의한 범죄다. 즉 살인자가 살해할 대상을 두고 목적성은 없지만, 살해하는 목적성은 가진다는 점이다.

 

살해할 대상의 목적성과 살해의 목적성에서 이번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사회적 큰 불편한 점을 건들었던 것이다. 만일 범죄자가 눈앞에 보였던 사람이 단지 20대 여성이었을 뿐이라는 우연성이었다면,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국의 젊은 여성을 노리고 싶다는 적대의식에 사로잡혀있기에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런 의식은 언제 어디서라도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는 말 그대로 우발적으로 예상하지 못할 상황이나,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을 우발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든 비극이다.

 

게다가 강남지하철역은 단순히 공간적 목적성에서 공간의 지박에 의해 저지른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강남지하철역에서 다음은 신도림역으로 혹은 신촌역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공포가 사람들을 자극하고, 추모와 맞지 않은 성적차별로 파생된 혐오가 증폭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분명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살인자에게 있겠지만, 이 사건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자에겐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런데도 혐오감을 표출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신경질적으로 해소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다.

 

결국 사회적 문제에 대해 논리적인 접근으로 해결하기보단 어떤 특정대상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비뚤어진 논조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들의 집단군중적인 폭력적 의식은 자신에게 하나의 정의감이란 허울 좋은 쾌감을 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누군가 맞장구 치주면 그것이 잘못된 가치관이라도 옳은 게 된다. 왜 독일이 나치에 의해 통치되고 잔인한 행위를 보였는가?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을 해도 자신들은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정의를 집행한다고 여긴다. 집단적 광기가 무서운 이유는 윤리적 가치를 떠나 도덕적 가치란 결국 자신들의 광기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사에서 평화롭거나 혹은 아무 이상 없는(허위와 가식으로 얼룩진 그 사회에는 내부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다) 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외부로부터 받은 피해가 정당하지 못함에 따라 폭력적으로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 정당하고 곧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할리우드 영화가 가끔 보면 3류 수준밖에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방식을 그대로 학습하기 때문이다. “너 나 건들었어(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자신을 건든 쪽을 확실히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 그럼 너 좀 다시는 못 까불게 조져야겠어.”

 

이런 내러티브 구조는 인간의 오랜 이야기인 신화에서 시작하여 역사에서도 자주 본다. 이런 방식은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혹은 현실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상대방이 더 악을 쓰고 저항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외치는 정의감이란 허황된 정신은 더 고무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서로 핑퐁게임을 하다보면 사건은 해결이 아니라 이상한 조류를 타고 낯선 바다에 표류한다. 원래 추모의 의미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자면 이런 죽음을 두고 기억하는 것은 좋으나, 사회적 문제를 두고 공간의 지박에서 벗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강남역지하철역 지나치다 추모하는 사람이나 그 공간과 멀리 있는 자라도 슬픈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공감해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산업재해로 죽거나 해고로 인한 노동조합투쟁과정에서 재판에 패소하여 거액의 벌금을 갚을 방법 없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 군대에서 사고나 의문사 당한 이들에 대한 추모와 아픔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바로 공간의 지박에 갇힌 한국사회를 생각한 것이다. 무차별적 살해의도가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노리는 것은 분명히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특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이들의 희생 역시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조금 크게 보자면 세월호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이나, 518에서 학살당한 광주시민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희생을 단지 그 공간적 범주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혐오해야 하는 것은 그저 눈에만 보이는 가시적 요소보단 그렇게 되어버린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과 성찰 없는 증오는 아무런 대안과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단지 시간낭비에 타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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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2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삼가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22 21:45   좋아요 0 | URL
올해 1월1일 장지로 떠나보내면서 참 뜻깊은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친구가 하늘에서 고통없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길게 적지 않겠습니다. 이런 글 써서 조금 기분은 내키지 않으나, 적겠습니다.(참고로 이 글 내리거나 지우고 싶지 않네요). 보는 분들 제가 문제 있으면 제게 조언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억울하게 인신공격 받은 것을 생각하시면 그냥 그렇구나 인정하면 됩니다.


전에 북플 알림에서 "솔직히 글에서 노땅의 향기가 풍기네요. 걍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을 보시거나 원문이 영어로(이하 덧글이 변경되어 종적을 끝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775792147/7596040


이 글이 제가 서평으로 작성한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 변론, 크리톤, 파이돈>입니다. 읽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결코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플라톤 전집에 대한 문헌 그 자체를 논하는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기록한 플라톤의 기록을 보면서 후대 그것을 번역한 분의 역자서문과 해석, 그리고 그 분이 독재시설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 대해 중의주의 내지 혹은 민주주의 자질을 과연 따질 수 있는지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제 개인적인 논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옥"이란 분이 덧글을 적어주더군요. 


타인의 서평에 적는데 우선 "노땅"이라고 표현한 점이 참으로 불쾌하고요. 번역본에서 왜 "영어"를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 돈을 주어 도서구매 후 읽거나 혹은 도서관의 서적을 대여하여 보든 그건 제 마음입니다. 제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플라톤 전집을 읽는 게 한글로 되어 있는 게 편하고, 우선 고대 그리스어가 번역되는 분들의 서적을 읽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대 왠 영어? 성균관대학교 박종현 교수가 플라톤 번역 및 연구가로 유명한데, 제가 그 사람의 언행불일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의 번역 자체를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교체되었지만 교체 이전의 덧글에 대한 답글로 적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이 덧글에서 제가 "알옥"이란 분에 대해 인신공격이나, 혹은 대놓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한 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덧글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어제 저는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알옥"님 저는 님이 무얼 하는 분인지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아무 관심 없습니다. 적어도 남의 글에 두고 덧글 적을 때 최소한의 예를 갖추고 적어주는 게 우선이 아닐까요. 저보다 많이 아실 것이고, 만약 전공자라면 철학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윤리학이 아닌가요? 제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해당 대학교수를 비판했습니다. 나머지 서평에 대해 부족하면 그냥 부족하여 보충하면 될 것이지. 왜 저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십니까? 솔직히 기분이 불쾌하네요. 저 기분 정말 상해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독재시대 눈치밥 먹거나 대놓고 협력한 자들이 이제 와서 자유주의에서 시민의 권리나 의무 따위 논하는 행동이 더 심각한 궤변론자들이 아닌가요? 제가 천병희 선생님을 고집한 것은 그분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고를 치룬 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 고전을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정암학당이든 서광사이든 천병희 선생이 좋다고 한 겁니다. 겨우 지방의 공과대학을 나와 어느 순간 궤변론을 주장하는 철학자가 되어 제가 진짜 출세한 것 같네요. 지방 공대생은 플라톤을 읽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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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29   좋아요 1 | URL
서재에 가보니 약간 산듯하게 해놓았던데, 저런 말투라 놀라울 따름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이렇게 친절하게 대응하시고 그러십니까. 다음에는 조낸 물어뜯으세요.. 딱 보니 노땅 같네. 요즘 애들은 노땅이란 표현 잘 안 씁니다..ㅋㅋ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29   좋아요 0 | URL
그럴까요.....
꼰대기질이 다분해 보였습니다. 그분..

cyrus 2016-05-1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신공격하는 댓글을 발견하면 무조건 사진 캡처해야 합니다. 작성자가 몰래 댓글 내용을 수정하니까요.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30   좋아요 0 | URL
저것 신고가능한가요?

cyrus 2016-05-19 18:29   좋아요 0 | URL
이 정도 내용 가지고는 신고 대상이 되지 못할 겁니다. 댓글 작성자가 딴 소리 할 까봐 증거용으로 저장하는 것뿐입니다. 악성 댓글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에게 알려봤자 그냥 대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05-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당해보니까 많이 배운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더군요. 많이 배운 것보다 그 배운 걸로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냐가 더 중요한 듯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2:27   좋아요 0 | URL
제 서평 목적이 그건데 말이죵

2016-05-1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2:26   좋아요 0 | URL
그게 답인듯 하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생긴 분인가 봤더니 아프니깐 청춘이다를 좆도 감명깊게 읽었다고... 아, 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3: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걸 본후 너무 감명깊게 충격받아 그냥 그럴려니 합니다...
 
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역사 관련 학자 중에서 개인적으로 한명기 교수의 글이 참 와 닿는다. 전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대한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자료와 고찰을 담은 글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사회에서 독서를 한다면 대부분 서양철학사와 서양사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는 마련이다. 물론 서구화라는 거대한 조류에 의해 우리가 서양에 대해 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숙명적인 상황이다. 그런다고 우리의 과거를 내놓는다면 우리는 나중에 큰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

 

예전에 영화 <광해>를 통해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 정치적 지도자가 가져야할 위품에 대해 큰 호응이 있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 열기를 살려 대국민적으로 고찰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 반성적 자세보단 그저 감정소모라는 엔터테인먼트에 치중해버렸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른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감정을 소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감명을 받으면 여기서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을 그 감정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마치 자신이 나름 좋은 인간이란 것은 집단주의적인 승인만 하고 끝이 난다.

 

안 좋게 말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 종일 바쁜 일과 중에 뭔가 매달려 여유가 없으면 모르나, 문화콘텐츠란 것은 여가를 이용하여 즐기는 것이다. 문화를 즐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봐야 할 것들이 있다. 문화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축척물이다. 문화는 역사적 토대 위에 새겨진 하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문화 자체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역사와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재생산하는 매체인 것이다.

 

그 매체를 이어주는 것은 누군가? 바로 인간이고, 한국의 문화는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론 외국과의 교역과 교류 역시 문화적 요소로 발전한다. 그 문화적 요소가 반영되면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다. 영화 <광해>를 보면서 군주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한편으로 광해군이란 인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서 광해군은 당시에도 혹은 지금에도 크게 이상하게 변질된 인물이다. 물론 그가 우유부단한 요소와 후에 궁궐 재축조로 많은 혈세를 낭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조선의 한의학을 발달시키고, 역사와 학문을 세웠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약을 타가는 사람들은 모두 허균의 <동의보감>에서 덕을 본 것이다. 허균은 광해군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고, 불사의 기록인 <동의보감> 역시 탄생하지 못했다. 한국의 의학에서도 광해군이 이룩한 400여 년 전 성과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은가? 이런 광해군을 영화 <광해>에서 다루기 전에 한명기 교수가 <광해군>이란 서적을 21세기 초에 내놓았다. 책을 읽어봤지만,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 이후 광해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사라지고, 조작되었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광해일기,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에 대한 부분이 여러모로 변경된 점이다. 선조실록은 북인이 작성하고, 광해와 인조는 서인이 주도했다. 물론 실록은 서인이 노론이 되어 또 시도했다고 한다. 광해군과 인조반정은 여러 가지 문제가 숨어 있다. 우선 연산군에 대한 반정 이후로 조선은 신권이 강한 권력을 잡게 되었고, 중종은 신권에 의해 노심초사하여 결국 신규 사림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중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로 넘어오면서 사림이 대거 진출하고, 선조는 아주 이기적인 군주로서 신하들을 실험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나 혹은 다른 붕당정쟁에서 교묘히 이용하여 신권 세력을 내려찍는 행위를 한다.

 

제일 말도 안 되는 행위가 의병활동을 남인과 북인이 주도했지만, 의병장에 대한 공신품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오히려 의병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에 질투하던 인물이다. 그런 질투 대상은 자신의 아들 광해군 역시 그렇다. 조정은 한 나라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권한을 아들 광해군에게 넘겨주어 자신은 전쟁터로부터 도망치고, 백성의 원망과 반기를 잠재우기 위해 광해군에게 모든 사무를 처리토록 한다. 광해군은 세자로 임명받아 전쟁 중에 전쟁터를 누비며 전투지원과 사무지원, 그리고 의병장을 소집하였고, 왕세자가 직접 교지를 내려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조선에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까지 전쟁의 피를 알고, 나머지는 전쟁의 피를 몰랐다. 세조가 반정해도 그는 자신의 궁궐에서 피를 보았지 전쟁의 피를 본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태종 이후 전쟁터에서 임무를 수행한 왕은 광해다. 전쟁을 안다는 것은 구중궁궐에서 편히 있는 게 아니라 직접 백성들과 마주하며, 수시로 오는 전시판단을 내려야 한다. 명과 외교관계, 신하와의 사무조정, 무장과 작전회의, 백성에 대한 구휼정책에서 광해군이 가진 지도자적인 정치력은 탁월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중에 도망치기 바쁘다, 후에 전쟁 후 조정이 안정되자 몰려온 사대부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중의 폐단은 군사력의 약함도 있지만, 장병이 되어야 하는 백성들이 너무 가난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대동법을 실시하려도 많은 양반들이 반대를 했고, 이것은 당연히 임진왜란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보아도 실리 없는 명분, 명분이란 허울이 우습게 보인다. 유학에서 사대부란 무릇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의 억울함 없이 삶의 업무에 종사토록 하는 게 책무다. 그런데 오히려 사대부란 소리치는 이들은 백성의 억울함을 방관했다.

 

길거리에 배고픔 사람들이 넘쳐 죽고, 심지어 시체를 뜯어먹으며, 다른 사람을 살해하여 배를 채우는 아귀들의 싸움에서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개할 것은 무엇인가? 전쟁 중에도 혹은 전쟁이 끝나도 가장 어려운 문턱은 국경 밖의 외국군이 아니라 궁궐 아래 말을 내놓는 권력가들이다. 광해의 실각은 이런 문제점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명분에만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똑똑한 바보들의 활약도 마찬가지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주장하다 어느 순간 인조가 청나라에 머리를 숙여 치욕을 벌일 때,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재산만 지키기 급했으며, 후에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을 때 명국에게 한 것처럼 하였다.

 

광해군이 전쟁을 최대한 말린 이유는 전쟁을 하려면 많은 병사가 필요하나, 조선에는 임진왜란 중에 많은 사람이 죽은 점, 전쟁에 참전하면 많은 군량과 재원이 필요하나 굶어죽는 백성이 넘친다는 점이다. 명과 청의 군사 분쟁에서 명나라에 군사지원을 적극적으로 보내자는 것은 조선을 아예 멸망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대신들은 그런 광해군을 비판했고, 반정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이 그 운명의 바람에 서 있을 때 그들은 광해군이 했던 조치를 따라했지만, 광해군만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서인(노론)에 의해 평생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비난당해야 했던 강홍립은 사실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여 광해군의 뜻을 따랐다. 정묘호란 때 강홍립은 청나라 군대의 장수로 출전했고, 조정대신의 부탁으로 청군이 철수할 때 민가에 대한 노략을 최대한 방지해달라고 했다. 강홍립을 그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그는 과거에 청군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기에 항복하여 조선병사의 희생을 막았으며, 청국에서 광해군에게 서신을 보내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까지 올라가면서 명국의 사신과 장수로부터 청국의 민족인 여진족의 용맹을 익히 들었다.

 

21세기 한국도 국방군사 전략에서 정보전은 필수다. 우수한 보안설비와 첩보 활동은 외국의 움직임을 읽고, 내부의 정보를 최대한 절제하여 위기를 막아야 한다. 최근에 보이는 것은 단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감시에만 치중한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17세기 인조 시기도 마찬가지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정 대신은 자신의 당파가 아닌 자들을 시시각각 감시하고,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꼴이 인조가 청나라 장수 앞에서 땅에 머리를 박고 치욕을 겪은 일이다. 외교적 전략은 자신을 위한 것도 되지만,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백성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했다.

 

광해군이 얼마나 백성을 아꼈는지 모르지만, 일반 조정대신보다 훨씬 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조선을 보았다. 그의 마지막은 비참하고 외롭게 마무리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 정식으로 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귀양지의 천민에 의해 염을 마무리했다.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잡혀가고, 아들내외 모두 죽었다. 심지어 자신이 왕족이고도 불구하고, 종이나 천민들의 조롱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점, 그런 물거품으로 일어날 대참사가 어떻게 될 것이란 점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광해군은 대북에 의해 집권했지만, 정권 초반에는 이원익이나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과 남인 계열 대신을 정승으로 올린 이유는 정치적 당파의 원군도 중요하나, 실무에 대한 원활한 처리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여립모반 사건 이후 어느 한 정당이 조정에서 퇴각하게 되는 상황에서 탕평책을 가장 먼저 실현하려 했던 왕이 광해군인 셈이다. 물론 이항복과 이덕형은 천수를 다해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광해군은 최대한 인재를 불려 사용하려 했다. 이런 점은 최명길 같은 인조반정 공신을 불러오는 화가 되었지만, 정말 그를 내려 보는 것은 부당하다.

 

광해군은 개혁을 주도했던 임금이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군주다. 21세기 군사작전은 무기의 첨단능력과 장병들의 자질이다. 무기와 군수물자 납품비리에 로비를 주도하는 군인들이 넘치는 일들을 보면 참으로 나라가 걱정된다. 인조 때 호란의 패배원인으로 군사훈련이 부족하고, 무기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정권이니 다시 쿠데타에 의한 전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총을 들고 와서 장거리 사격을 하는데, 명중도와 타격도가 낮은 활로만 응전하려 하니 상대가 되겠는가? 무기비리와 군수물품으로 장난치는 상관이 있으면 부하들이 제대로 말을 듣겠는가?

 

지도자의 자질이 바로 여기서부터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가진 문제는 있지만, 현장중심의 실무와 이권에 연연한 권력층의 압박에 굴하지 않은 점이다. 원칙을 고수하되 유연한 대응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계책이었다. 청국과 명국의 불온한 상황에 일본과의 수교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말로만 이러쿵저러쿵해도 막상 일 터지면 나 몰라라 도망치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이런 모습이 낯설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친구와 통화하면서 다음 대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친구가 지지하던 후보에 대해 듣자 조금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사람이 해야 하지 않은가 라고 했으나, 사람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현대까지 이어온 것을 얼마나 다시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반정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겉으로 반정과 반정공신의 문제를 보면 겉으로 명분만 내세우나 그 이면의 문제점은 항상 같다.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기득권과의 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반정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반정공신은 과거의 낡은 유물철폐라고 하나, 그들이 몰아내고 싶은 자들이 해놓은 일들이 다시 원위치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역사를 왜 배우는 것인가? 다시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바꾸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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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의 최고의 입담이라 회자되는 한명기 교수~^^ 책도 물론 좋지만, 강의가 끝내주게 좋더이다~ 한 때 한국사학과 학생들이 개부럽게 느겼졌던 때가 있었지요..ㅎ

만화애니비평 2016-05-19 08:16   좋아요 0 | URL
직접 들어보셨나요~~
아유 부러워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