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역사 관련 학자 중에서 개인적으로 한명기 교수의 글이 참 와 닿는다. 전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대한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자료와 고찰을 담은 글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사회에서 독서를 한다면 대부분 서양철학사와 서양사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는 마련이다. 물론 서구화라는 거대한 조류에 의해 우리가 서양에 대해 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숙명적인 상황이다. 그런다고 우리의 과거를 내놓는다면 우리는 나중에 큰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

 

예전에 영화 <광해>를 통해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 정치적 지도자가 가져야할 위품에 대해 큰 호응이 있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 열기를 살려 대국민적으로 고찰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 반성적 자세보단 그저 감정소모라는 엔터테인먼트에 치중해버렸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른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감정을 소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감명을 받으면 여기서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을 그 감정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마치 자신이 나름 좋은 인간이란 것은 집단주의적인 승인만 하고 끝이 난다.

 

안 좋게 말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 종일 바쁜 일과 중에 뭔가 매달려 여유가 없으면 모르나, 문화콘텐츠란 것은 여가를 이용하여 즐기는 것이다. 문화를 즐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봐야 할 것들이 있다. 문화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축척물이다. 문화는 역사적 토대 위에 새겨진 하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문화 자체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역사와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재생산하는 매체인 것이다.

 

그 매체를 이어주는 것은 누군가? 바로 인간이고, 한국의 문화는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론 외국과의 교역과 교류 역시 문화적 요소로 발전한다. 그 문화적 요소가 반영되면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다. 영화 <광해>를 보면서 군주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한편으로 광해군이란 인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서 광해군은 당시에도 혹은 지금에도 크게 이상하게 변질된 인물이다. 물론 그가 우유부단한 요소와 후에 궁궐 재축조로 많은 혈세를 낭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조선의 한의학을 발달시키고, 역사와 학문을 세웠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약을 타가는 사람들은 모두 허균의 <동의보감>에서 덕을 본 것이다. 허균은 광해군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고, 불사의 기록인 <동의보감> 역시 탄생하지 못했다. 한국의 의학에서도 광해군이 이룩한 400여 년 전 성과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은가? 이런 광해군을 영화 <광해>에서 다루기 전에 한명기 교수가 <광해군>이란 서적을 21세기 초에 내놓았다. 책을 읽어봤지만,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 이후 광해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사라지고, 조작되었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광해일기,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에 대한 부분이 여러모로 변경된 점이다. 선조실록은 북인이 작성하고, 광해와 인조는 서인이 주도했다. 물론 실록은 서인이 노론이 되어 또 시도했다고 한다. 광해군과 인조반정은 여러 가지 문제가 숨어 있다. 우선 연산군에 대한 반정 이후로 조선은 신권이 강한 권력을 잡게 되었고, 중종은 신권에 의해 노심초사하여 결국 신규 사림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중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로 넘어오면서 사림이 대거 진출하고, 선조는 아주 이기적인 군주로서 신하들을 실험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나 혹은 다른 붕당정쟁에서 교묘히 이용하여 신권 세력을 내려찍는 행위를 한다.

 

제일 말도 안 되는 행위가 의병활동을 남인과 북인이 주도했지만, 의병장에 대한 공신품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오히려 의병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에 질투하던 인물이다. 그런 질투 대상은 자신의 아들 광해군 역시 그렇다. 조정은 한 나라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권한을 아들 광해군에게 넘겨주어 자신은 전쟁터로부터 도망치고, 백성의 원망과 반기를 잠재우기 위해 광해군에게 모든 사무를 처리토록 한다. 광해군은 세자로 임명받아 전쟁 중에 전쟁터를 누비며 전투지원과 사무지원, 그리고 의병장을 소집하였고, 왕세자가 직접 교지를 내려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조선에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까지 전쟁의 피를 알고, 나머지는 전쟁의 피를 몰랐다. 세조가 반정해도 그는 자신의 궁궐에서 피를 보았지 전쟁의 피를 본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태종 이후 전쟁터에서 임무를 수행한 왕은 광해다. 전쟁을 안다는 것은 구중궁궐에서 편히 있는 게 아니라 직접 백성들과 마주하며, 수시로 오는 전시판단을 내려야 한다. 명과 외교관계, 신하와의 사무조정, 무장과 작전회의, 백성에 대한 구휼정책에서 광해군이 가진 지도자적인 정치력은 탁월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중에 도망치기 바쁘다, 후에 전쟁 후 조정이 안정되자 몰려온 사대부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중의 폐단은 군사력의 약함도 있지만, 장병이 되어야 하는 백성들이 너무 가난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대동법을 실시하려도 많은 양반들이 반대를 했고, 이것은 당연히 임진왜란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보아도 실리 없는 명분, 명분이란 허울이 우습게 보인다. 유학에서 사대부란 무릇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의 억울함 없이 삶의 업무에 종사토록 하는 게 책무다. 그런데 오히려 사대부란 소리치는 이들은 백성의 억울함을 방관했다.

 

길거리에 배고픔 사람들이 넘쳐 죽고, 심지어 시체를 뜯어먹으며, 다른 사람을 살해하여 배를 채우는 아귀들의 싸움에서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개할 것은 무엇인가? 전쟁 중에도 혹은 전쟁이 끝나도 가장 어려운 문턱은 국경 밖의 외국군이 아니라 궁궐 아래 말을 내놓는 권력가들이다. 광해의 실각은 이런 문제점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명분에만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똑똑한 바보들의 활약도 마찬가지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주장하다 어느 순간 인조가 청나라에 머리를 숙여 치욕을 벌일 때,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재산만 지키기 급했으며, 후에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을 때 명국에게 한 것처럼 하였다.

 

광해군이 전쟁을 최대한 말린 이유는 전쟁을 하려면 많은 병사가 필요하나, 조선에는 임진왜란 중에 많은 사람이 죽은 점, 전쟁에 참전하면 많은 군량과 재원이 필요하나 굶어죽는 백성이 넘친다는 점이다. 명과 청의 군사 분쟁에서 명나라에 군사지원을 적극적으로 보내자는 것은 조선을 아예 멸망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대신들은 그런 광해군을 비판했고, 반정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이 그 운명의 바람에 서 있을 때 그들은 광해군이 했던 조치를 따라했지만, 광해군만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서인(노론)에 의해 평생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비난당해야 했던 강홍립은 사실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여 광해군의 뜻을 따랐다. 정묘호란 때 강홍립은 청나라 군대의 장수로 출전했고, 조정대신의 부탁으로 청군이 철수할 때 민가에 대한 노략을 최대한 방지해달라고 했다. 강홍립을 그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그는 과거에 청군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기에 항복하여 조선병사의 희생을 막았으며, 청국에서 광해군에게 서신을 보내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까지 올라가면서 명국의 사신과 장수로부터 청국의 민족인 여진족의 용맹을 익히 들었다.

 

21세기 한국도 국방군사 전략에서 정보전은 필수다. 우수한 보안설비와 첩보 활동은 외국의 움직임을 읽고, 내부의 정보를 최대한 절제하여 위기를 막아야 한다. 최근에 보이는 것은 단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감시에만 치중한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17세기 인조 시기도 마찬가지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정 대신은 자신의 당파가 아닌 자들을 시시각각 감시하고,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꼴이 인조가 청나라 장수 앞에서 땅에 머리를 박고 치욕을 겪은 일이다. 외교적 전략은 자신을 위한 것도 되지만,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백성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했다.

 

광해군이 얼마나 백성을 아꼈는지 모르지만, 일반 조정대신보다 훨씬 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조선을 보았다. 그의 마지막은 비참하고 외롭게 마무리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 정식으로 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귀양지의 천민에 의해 염을 마무리했다.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잡혀가고, 아들내외 모두 죽었다. 심지어 자신이 왕족이고도 불구하고, 종이나 천민들의 조롱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점, 그런 물거품으로 일어날 대참사가 어떻게 될 것이란 점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광해군은 대북에 의해 집권했지만, 정권 초반에는 이원익이나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과 남인 계열 대신을 정승으로 올린 이유는 정치적 당파의 원군도 중요하나, 실무에 대한 원활한 처리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여립모반 사건 이후 어느 한 정당이 조정에서 퇴각하게 되는 상황에서 탕평책을 가장 먼저 실현하려 했던 왕이 광해군인 셈이다. 물론 이항복과 이덕형은 천수를 다해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광해군은 최대한 인재를 불려 사용하려 했다. 이런 점은 최명길 같은 인조반정 공신을 불러오는 화가 되었지만, 정말 그를 내려 보는 것은 부당하다.

 

광해군은 개혁을 주도했던 임금이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군주다. 21세기 군사작전은 무기의 첨단능력과 장병들의 자질이다. 무기와 군수물자 납품비리에 로비를 주도하는 군인들이 넘치는 일들을 보면 참으로 나라가 걱정된다. 인조 때 호란의 패배원인으로 군사훈련이 부족하고, 무기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정권이니 다시 쿠데타에 의한 전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총을 들고 와서 장거리 사격을 하는데, 명중도와 타격도가 낮은 활로만 응전하려 하니 상대가 되겠는가? 무기비리와 군수물품으로 장난치는 상관이 있으면 부하들이 제대로 말을 듣겠는가?

 

지도자의 자질이 바로 여기서부터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가진 문제는 있지만, 현장중심의 실무와 이권에 연연한 권력층의 압박에 굴하지 않은 점이다. 원칙을 고수하되 유연한 대응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계책이었다. 청국과 명국의 불온한 상황에 일본과의 수교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말로만 이러쿵저러쿵해도 막상 일 터지면 나 몰라라 도망치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이런 모습이 낯설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친구와 통화하면서 다음 대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친구가 지지하던 후보에 대해 듣자 조금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사람이 해야 하지 않은가 라고 했으나, 사람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현대까지 이어온 것을 얼마나 다시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반정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겉으로 반정과 반정공신의 문제를 보면 겉으로 명분만 내세우나 그 이면의 문제점은 항상 같다.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기득권과의 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반정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반정공신은 과거의 낡은 유물철폐라고 하나, 그들이 몰아내고 싶은 자들이 해놓은 일들이 다시 원위치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역사를 왜 배우는 것인가? 다시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바꾸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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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의 최고의 입담이라 회자되는 한명기 교수~^^ 책도 물론 좋지만, 강의가 끝내주게 좋더이다~ 한 때 한국사학과 학생들이 개부럽게 느겼졌던 때가 있었지요..ㅎ

만화애니비평 2016-05-19 08:16   좋아요 0 | URL
직접 들어보셨나요~~
아유 부러워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