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단어의 개념을 생각한 게 있다. 그것은 공간(空簡)의 지박(止泊)이다. 왜 공간에 대한 지박인가? 최근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아주 슬프고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를 우리는 뉴스에서 접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이 휘둘린 흉기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직 20대라면 연애나 취업 혹은 결혼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살해당한 분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회를 박탈되어 억울하게 구천을 헤매게 되었다. 진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있으면 매우 슬플 것이다. 우선 자신이 죄도 없이 희생당한 점이고, 다른 것은 그 분의 죽음을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분명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애도와 함께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후폭풍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이에 대한 반발영역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서로 엉겨 붙어 진정한 의미의 추모보단 분노를 넘어 광기의 집착과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의 죽음 억울하고, 어느 사이트에서 내건 군인들의 죽음 슬픈 일이다. 하지만 2가지의 죽음은 서로 다른 개념이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고 생각해야 할 점이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라는 구조에서 볼 일이고, 군인들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국방군사 지휘 및 무기체계, 그리고 대외 정치외교 관점에서 생각해야 해야 하는 점이다. 단순히 어느 한 개인 여성의 죽음과 다수의 남성군인의 죽음에서 어디가 더 무겁냐고 물어보면 그건 참 애석한 일이다. 어느 누구든 다 소중한 목숨이고, 어느 누구나 그 당사자의 가족과 친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것이 사회적으로 더 심각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의 죽음은 많은 인명을 희생되었고, 국가적으로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그럼에도 전자에게 선택하는 이유는 군인은 처음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이유는 국민들이 적으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로부터 안전하게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다. 공화주의국가,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 공화주의는 그 나라의 국민이 다른 국가에 의해 목숨과 재산의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곧 헌법으로써의 권리이다.

 

조금 애석한 사실은 군인들의 죽음은 희생에 비해 그들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적절하지 못하다. 매년 자살하는 군인,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이다. 인권에 대한 개념에서 어느 특정 신분만을 봐서는 안 되고 전 방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강남지하철역 참사에서 왜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가? 극우적인 여성혐오 사이트와 극단적으로 남성혐오 사이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행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번 추모에서 서울강남을 시작하여 서울 전 지역으로 또 다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추모에 대한 열기는 나쁘지 않으나,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추모 그 자체에 대한 부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슬픔으로 기억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사람다운 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내가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왜 강남지하철에서 죽은 한 개인의 죽음이 이렇게 큰 이슈로 되었는지 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우리들은 흔히 산업재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 사회에 대한 부조리와 정부행정의 공정성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낀다. 내 아버지는 안전사고로 인해 산업재해를 당해 부상을 입자, 회사에서 강제로 퇴사시킨 것도 모자라 산업재해로 인한 병원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느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4개월 전후로 내리게 하여 퇴직금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고, 어느 회사에서는 퇴직금조차 주지 않았다.

 

내 친구는 원조파견과 하청관리 부실, 안전관리 미흡으로 인해 변을 당해 사망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화장터에서 화장 후 유골단지를 무덤에 묻는 그 순간까지 있었다. 내 친구의 사고는 인터넷 신문기사 올라왔고, 그는 그렇게 세상의 흐름 속에 사라져갔다. 이런 일을 겪은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사회적 약자가 되거나 혹은 그 약자의 주변인으로 세상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 친구의 죽음, 혹은 군인의 사고사, 그밖에 죽음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내 억측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바로 공간적 지박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다. 땅이나 땅에 매겨진 부동산 가격, 사람, 지하에 매설된 상하수도관로 등등이 모두 공간적 존재다. 내가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 어디에 살거나 혹은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공간이란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 공간이 어디에 속해있는지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다. 신분에 따라 공간적 지박이 작용한다.

 

군인의 죽음은 군부대 영내나, 혹은 육상의 훈련이나 전투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군인의 죽음에서 대부분 군인들은 남성이다. 군인의 죽음은 남성의 죽음과 연결되고, 공장 노동자나 공사장의 노동자 역시 남성들이 많이 차지한다. 요새 군인, 노동자 등과 같은 부류에서도 여성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나, 대부분 남성이 많은 인력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일정한 장소, 일정한 직업, 일정한 패턴에서 죽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 강남역살인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분명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지만, 그 공간적 위치와 그 공간 안의 건축물 용도기능이 작용한 곳이 강남역이었을 뿐이다. 왜인가? 살인을 저지른 자가 여기가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기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곳이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느 공간과 상관없이 불특정 대다수의 여성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군인의 사고사나 노동자의 산업재해는 어느 특정장소와 상황이 존재한다. 즉 불특정 대다수가 아니라 특정 다수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이 위험한 이유는 특정대상을 지칭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미야자키 쓰토무라는 일본인은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방을 조사하니 그가 가진 롤리타콤플렉스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범죄는 즉 어린아이라는 대상, 특정대상을 상대로 한 범죄이다. 강남지하철역 사건과 비교하자면, 정신병적인 살인자가 무엇인가 살인대상자에 대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길에 보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과거에 있었다. 의정부역에서 칼을 들고 지하철 이용승객을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묻지 마 범죄이다. 그런데 묻지 마 범죄에서 의정부역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사람을 향한 것이다. 무차별적인 공격성향이 일으킨 범죄고,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무차별적으로 행한 것보다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향한 증오에 의한 범죄다. 즉 살인자가 살해할 대상을 두고 목적성은 없지만, 살해하는 목적성은 가진다는 점이다.

 

살해할 대상의 목적성과 살해의 목적성에서 이번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사회적 큰 불편한 점을 건들었던 것이다. 만일 범죄자가 눈앞에 보였던 사람이 단지 20대 여성이었을 뿐이라는 우연성이었다면,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국의 젊은 여성을 노리고 싶다는 적대의식에 사로잡혀있기에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런 의식은 언제 어디서라도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는 말 그대로 우발적으로 예상하지 못할 상황이나,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을 우발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든 비극이다.

 

게다가 강남지하철역은 단순히 공간적 목적성에서 공간의 지박에 의해 저지른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강남지하철역에서 다음은 신도림역으로 혹은 신촌역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공포가 사람들을 자극하고, 추모와 맞지 않은 성적차별로 파생된 혐오가 증폭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분명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살인자에게 있겠지만, 이 사건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자에겐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런데도 혐오감을 표출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신경질적으로 해소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다.

 

결국 사회적 문제에 대해 논리적인 접근으로 해결하기보단 어떤 특정대상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비뚤어진 논조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들의 집단군중적인 폭력적 의식은 자신에게 하나의 정의감이란 허울 좋은 쾌감을 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누군가 맞장구 치주면 그것이 잘못된 가치관이라도 옳은 게 된다. 왜 독일이 나치에 의해 통치되고 잔인한 행위를 보였는가?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을 해도 자신들은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정의를 집행한다고 여긴다. 집단적 광기가 무서운 이유는 윤리적 가치를 떠나 도덕적 가치란 결국 자신들의 광기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사에서 평화롭거나 혹은 아무 이상 없는(허위와 가식으로 얼룩진 그 사회에는 내부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다) 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외부로부터 받은 피해가 정당하지 못함에 따라 폭력적으로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 정당하고 곧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할리우드 영화가 가끔 보면 3류 수준밖에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방식을 그대로 학습하기 때문이다. “너 나 건들었어(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자신을 건든 쪽을 확실히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 그럼 너 좀 다시는 못 까불게 조져야겠어.”

 

이런 내러티브 구조는 인간의 오랜 이야기인 신화에서 시작하여 역사에서도 자주 본다. 이런 방식은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혹은 현실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상대방이 더 악을 쓰고 저항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외치는 정의감이란 허황된 정신은 더 고무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서로 핑퐁게임을 하다보면 사건은 해결이 아니라 이상한 조류를 타고 낯선 바다에 표류한다. 원래 추모의 의미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자면 이런 죽음을 두고 기억하는 것은 좋으나, 사회적 문제를 두고 공간의 지박에서 벗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강남역지하철역 지나치다 추모하는 사람이나 그 공간과 멀리 있는 자라도 슬픈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공감해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산업재해로 죽거나 해고로 인한 노동조합투쟁과정에서 재판에 패소하여 거액의 벌금을 갚을 방법 없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 군대에서 사고나 의문사 당한 이들에 대한 추모와 아픔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바로 공간의 지박에 갇힌 한국사회를 생각한 것이다. 무차별적 살해의도가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노리는 것은 분명히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특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이들의 희생 역시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조금 크게 보자면 세월호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이나, 518에서 학살당한 광주시민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희생을 단지 그 공간적 범주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혐오해야 하는 것은 그저 눈에만 보이는 가시적 요소보단 그렇게 되어버린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과 성찰 없는 증오는 아무런 대안과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단지 시간낭비에 타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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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2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삼가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22 21:45   좋아요 0 | URL
올해 1월1일 장지로 떠나보내면서 참 뜻깊은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친구가 하늘에서 고통없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길게 적지 않겠습니다. 이런 글 써서 조금 기분은 내키지 않으나, 적겠습니다.(참고로 이 글 내리거나 지우고 싶지 않네요). 보는 분들 제가 문제 있으면 제게 조언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억울하게 인신공격 받은 것을 생각하시면 그냥 그렇구나 인정하면 됩니다.


전에 북플 알림에서 "솔직히 글에서 노땅의 향기가 풍기네요. 걍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을 보시거나 원문이 영어로(이하 덧글이 변경되어 종적을 끝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775792147/7596040


이 글이 제가 서평으로 작성한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 변론, 크리톤, 파이돈>입니다. 읽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결코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플라톤 전집에 대한 문헌 그 자체를 논하는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기록한 플라톤의 기록을 보면서 후대 그것을 번역한 분의 역자서문과 해석, 그리고 그 분이 독재시설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 대해 중의주의 내지 혹은 민주주의 자질을 과연 따질 수 있는지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제 개인적인 논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옥"이란 분이 덧글을 적어주더군요. 


타인의 서평에 적는데 우선 "노땅"이라고 표현한 점이 참으로 불쾌하고요. 번역본에서 왜 "영어"를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 돈을 주어 도서구매 후 읽거나 혹은 도서관의 서적을 대여하여 보든 그건 제 마음입니다. 제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플라톤 전집을 읽는 게 한글로 되어 있는 게 편하고, 우선 고대 그리스어가 번역되는 분들의 서적을 읽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대 왠 영어? 성균관대학교 박종현 교수가 플라톤 번역 및 연구가로 유명한데, 제가 그 사람의 언행불일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의 번역 자체를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교체되었지만 교체 이전의 덧글에 대한 답글로 적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이 덧글에서 제가 "알옥"이란 분에 대해 인신공격이나, 혹은 대놓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한 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덧글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어제 저는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알옥"님 저는 님이 무얼 하는 분인지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아무 관심 없습니다. 적어도 남의 글에 두고 덧글 적을 때 최소한의 예를 갖추고 적어주는 게 우선이 아닐까요. 저보다 많이 아실 것이고, 만약 전공자라면 철학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윤리학이 아닌가요? 제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해당 대학교수를 비판했습니다. 나머지 서평에 대해 부족하면 그냥 부족하여 보충하면 될 것이지. 왜 저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십니까? 솔직히 기분이 불쾌하네요. 저 기분 정말 상해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독재시대 눈치밥 먹거나 대놓고 협력한 자들이 이제 와서 자유주의에서 시민의 권리나 의무 따위 논하는 행동이 더 심각한 궤변론자들이 아닌가요? 제가 천병희 선생님을 고집한 것은 그분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고를 치룬 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 고전을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정암학당이든 서광사이든 천병희 선생이 좋다고 한 겁니다. 겨우 지방의 공과대학을 나와 어느 순간 궤변론을 주장하는 철학자가 되어 제가 진짜 출세한 것 같네요. 지방 공대생은 플라톤을 읽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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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29   좋아요 1 | URL
서재에 가보니 약간 산듯하게 해놓았던데, 저런 말투라 놀라울 따름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이렇게 친절하게 대응하시고 그러십니까. 다음에는 조낸 물어뜯으세요.. 딱 보니 노땅 같네. 요즘 애들은 노땅이란 표현 잘 안 씁니다..ㅋㅋ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29   좋아요 0 | URL
그럴까요.....
꼰대기질이 다분해 보였습니다. 그분..

cyrus 2016-05-1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신공격하는 댓글을 발견하면 무조건 사진 캡처해야 합니다. 작성자가 몰래 댓글 내용을 수정하니까요.

만화애니비평 2016-05-19 17:30   좋아요 0 | URL
저것 신고가능한가요?

cyrus 2016-05-19 18:29   좋아요 0 | URL
이 정도 내용 가지고는 신고 대상이 되지 못할 겁니다. 댓글 작성자가 딴 소리 할 까봐 증거용으로 저장하는 것뿐입니다. 악성 댓글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에게 알려봤자 그냥 대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05-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당해보니까 많이 배운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더군요. 많이 배운 것보다 그 배운 걸로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냐가 더 중요한 듯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2:27   좋아요 0 | URL
제 서평 목적이 그건데 말이죵

2016-05-1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2:26   좋아요 0 | URL
그게 답인듯 하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9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생긴 분인가 봤더니 아프니깐 청춘이다를 좆도 감명깊게 읽었다고... 아, 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9 23: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걸 본후 너무 감명깊게 충격받아 그냥 그럴려니 합니다...
 
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역사 관련 학자 중에서 개인적으로 한명기 교수의 글이 참 와 닿는다. 전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대한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자료와 고찰을 담은 글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사회에서 독서를 한다면 대부분 서양철학사와 서양사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는 마련이다. 물론 서구화라는 거대한 조류에 의해 우리가 서양에 대해 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숙명적인 상황이다. 그런다고 우리의 과거를 내놓는다면 우리는 나중에 큰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

 

예전에 영화 <광해>를 통해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 정치적 지도자가 가져야할 위품에 대해 큰 호응이 있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 열기를 살려 대국민적으로 고찰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 반성적 자세보단 그저 감정소모라는 엔터테인먼트에 치중해버렸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른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감정을 소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감명을 받으면 여기서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을 그 감정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마치 자신이 나름 좋은 인간이란 것은 집단주의적인 승인만 하고 끝이 난다.

 

안 좋게 말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하루 종일 바쁜 일과 중에 뭔가 매달려 여유가 없으면 모르나, 문화콘텐츠란 것은 여가를 이용하여 즐기는 것이다. 문화를 즐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봐야 할 것들이 있다. 문화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축척물이다. 문화는 역사적 토대 위에 새겨진 하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문화 자체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역사와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재생산하는 매체인 것이다.

 

그 매체를 이어주는 것은 누군가? 바로 인간이고, 한국의 문화는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론 외국과의 교역과 교류 역시 문화적 요소로 발전한다. 그 문화적 요소가 반영되면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다. 영화 <광해>를 보면서 군주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한편으로 광해군이란 인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서 광해군은 당시에도 혹은 지금에도 크게 이상하게 변질된 인물이다. 물론 그가 우유부단한 요소와 후에 궁궐 재축조로 많은 혈세를 낭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조선의 한의학을 발달시키고, 역사와 학문을 세웠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약을 타가는 사람들은 모두 허균의 <동의보감>에서 덕을 본 것이다. 허균은 광해군이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고, 불사의 기록인 <동의보감> 역시 탄생하지 못했다. 한국의 의학에서도 광해군이 이룩한 400여 년 전 성과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은가? 이런 광해군을 영화 <광해>에서 다루기 전에 한명기 교수가 <광해군>이란 서적을 21세기 초에 내놓았다. 책을 읽어봤지만,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 이후 광해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사라지고, 조작되었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광해일기,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에 대한 부분이 여러모로 변경된 점이다. 선조실록은 북인이 작성하고, 광해와 인조는 서인이 주도했다. 물론 실록은 서인이 노론이 되어 또 시도했다고 한다. 광해군과 인조반정은 여러 가지 문제가 숨어 있다. 우선 연산군에 대한 반정 이후로 조선은 신권이 강한 권력을 잡게 되었고, 중종은 신권에 의해 노심초사하여 결국 신규 사림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중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로 넘어오면서 사림이 대거 진출하고, 선조는 아주 이기적인 군주로서 신하들을 실험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나 혹은 다른 붕당정쟁에서 교묘히 이용하여 신권 세력을 내려찍는 행위를 한다.

 

제일 말도 안 되는 행위가 의병활동을 남인과 북인이 주도했지만, 의병장에 대한 공신품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오히려 의병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에 질투하던 인물이다. 그런 질투 대상은 자신의 아들 광해군 역시 그렇다. 조정은 한 나라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권한을 아들 광해군에게 넘겨주어 자신은 전쟁터로부터 도망치고, 백성의 원망과 반기를 잠재우기 위해 광해군에게 모든 사무를 처리토록 한다. 광해군은 세자로 임명받아 전쟁 중에 전쟁터를 누비며 전투지원과 사무지원, 그리고 의병장을 소집하였고, 왕세자가 직접 교지를 내려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조선에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까지 전쟁의 피를 알고, 나머지는 전쟁의 피를 몰랐다. 세조가 반정해도 그는 자신의 궁궐에서 피를 보았지 전쟁의 피를 본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태종 이후 전쟁터에서 임무를 수행한 왕은 광해다. 전쟁을 안다는 것은 구중궁궐에서 편히 있는 게 아니라 직접 백성들과 마주하며, 수시로 오는 전시판단을 내려야 한다. 명과 외교관계, 신하와의 사무조정, 무장과 작전회의, 백성에 대한 구휼정책에서 광해군이 가진 지도자적인 정치력은 탁월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중에 도망치기 바쁘다, 후에 전쟁 후 조정이 안정되자 몰려온 사대부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중의 폐단은 군사력의 약함도 있지만, 장병이 되어야 하는 백성들이 너무 가난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대동법을 실시하려도 많은 양반들이 반대를 했고, 이것은 당연히 임진왜란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보아도 실리 없는 명분, 명분이란 허울이 우습게 보인다. 유학에서 사대부란 무릇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의 억울함 없이 삶의 업무에 종사토록 하는 게 책무다. 그런데 오히려 사대부란 소리치는 이들은 백성의 억울함을 방관했다.

 

길거리에 배고픔 사람들이 넘쳐 죽고, 심지어 시체를 뜯어먹으며, 다른 사람을 살해하여 배를 채우는 아귀들의 싸움에서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개할 것은 무엇인가? 전쟁 중에도 혹은 전쟁이 끝나도 가장 어려운 문턱은 국경 밖의 외국군이 아니라 궁궐 아래 말을 내놓는 권력가들이다. 광해의 실각은 이런 문제점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명분에만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똑똑한 바보들의 활약도 마찬가지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주장하다 어느 순간 인조가 청나라에 머리를 숙여 치욕을 벌일 때,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재산만 지키기 급했으며, 후에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을 때 명국에게 한 것처럼 하였다.

 

광해군이 전쟁을 최대한 말린 이유는 전쟁을 하려면 많은 병사가 필요하나, 조선에는 임진왜란 중에 많은 사람이 죽은 점, 전쟁에 참전하면 많은 군량과 재원이 필요하나 굶어죽는 백성이 넘친다는 점이다. 명과 청의 군사 분쟁에서 명나라에 군사지원을 적극적으로 보내자는 것은 조선을 아예 멸망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대신들은 그런 광해군을 비판했고, 반정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이 그 운명의 바람에 서 있을 때 그들은 광해군이 했던 조치를 따라했지만, 광해군만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서인(노론)에 의해 평생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비난당해야 했던 강홍립은 사실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여 광해군의 뜻을 따랐다. 정묘호란 때 강홍립은 청나라 군대의 장수로 출전했고, 조정대신의 부탁으로 청군이 철수할 때 민가에 대한 노략을 최대한 방지해달라고 했다. 강홍립을 그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그는 과거에 청군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기에 항복하여 조선병사의 희생을 막았으며, 청국에서 광해군에게 서신을 보내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까지 올라가면서 명국의 사신과 장수로부터 청국의 민족인 여진족의 용맹을 익히 들었다.

 

21세기 한국도 국방군사 전략에서 정보전은 필수다. 우수한 보안설비와 첩보 활동은 외국의 움직임을 읽고, 내부의 정보를 최대한 절제하여 위기를 막아야 한다. 최근에 보이는 것은 단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감시에만 치중한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17세기 인조 시기도 마찬가지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정 대신은 자신의 당파가 아닌 자들을 시시각각 감시하고,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꼴이 인조가 청나라 장수 앞에서 땅에 머리를 박고 치욕을 겪은 일이다. 외교적 전략은 자신을 위한 것도 되지만,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백성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했다.

 

광해군이 얼마나 백성을 아꼈는지 모르지만, 일반 조정대신보다 훨씬 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조선을 보았다. 그의 마지막은 비참하고 외롭게 마무리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 정식으로 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귀양지의 천민에 의해 염을 마무리했다.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잡혀가고, 아들내외 모두 죽었다. 심지어 자신이 왕족이고도 불구하고, 종이나 천민들의 조롱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점, 그런 물거품으로 일어날 대참사가 어떻게 될 것이란 점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광해군은 대북에 의해 집권했지만, 정권 초반에는 이원익이나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과 남인 계열 대신을 정승으로 올린 이유는 정치적 당파의 원군도 중요하나, 실무에 대한 원활한 처리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여립모반 사건 이후 어느 한 정당이 조정에서 퇴각하게 되는 상황에서 탕평책을 가장 먼저 실현하려 했던 왕이 광해군인 셈이다. 물론 이항복과 이덕형은 천수를 다해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광해군은 최대한 인재를 불려 사용하려 했다. 이런 점은 최명길 같은 인조반정 공신을 불러오는 화가 되었지만, 정말 그를 내려 보는 것은 부당하다.

 

광해군은 개혁을 주도했던 임금이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군주다. 21세기 군사작전은 무기의 첨단능력과 장병들의 자질이다. 무기와 군수물자 납품비리에 로비를 주도하는 군인들이 넘치는 일들을 보면 참으로 나라가 걱정된다. 인조 때 호란의 패배원인으로 군사훈련이 부족하고, 무기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정권이니 다시 쿠데타에 의한 전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총을 들고 와서 장거리 사격을 하는데, 명중도와 타격도가 낮은 활로만 응전하려 하니 상대가 되겠는가? 무기비리와 군수물품으로 장난치는 상관이 있으면 부하들이 제대로 말을 듣겠는가?

 

지도자의 자질이 바로 여기서부터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가진 문제는 있지만, 현장중심의 실무와 이권에 연연한 권력층의 압박에 굴하지 않은 점이다. 원칙을 고수하되 유연한 대응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계책이었다. 청국과 명국의 불온한 상황에 일본과의 수교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말로만 이러쿵저러쿵해도 막상 일 터지면 나 몰라라 도망치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이런 모습이 낯설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친구와 통화하면서 다음 대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친구가 지지하던 후보에 대해 듣자 조금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사람이 해야 하지 않은가 라고 했으나, 사람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현대까지 이어온 것을 얼마나 다시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반정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겉으로 반정과 반정공신의 문제를 보면 겉으로 명분만 내세우나 그 이면의 문제점은 항상 같다.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기득권과의 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반정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반정공신은 과거의 낡은 유물철폐라고 하나, 그들이 몰아내고 싶은 자들이 해놓은 일들이 다시 원위치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역사를 왜 배우는 것인가? 다시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바꾸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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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의 최고의 입담이라 회자되는 한명기 교수~^^ 책도 물론 좋지만, 강의가 끝내주게 좋더이다~ 한 때 한국사학과 학생들이 개부럽게 느겼졌던 때가 있었지요..ㅎ

만화애니비평 2016-05-19 08:16   좋아요 0 | URL
직접 들어보셨나요~~
아유 부러워라..ㅎㅎㅎ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라 구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양면의 검을 가진 인물이다. 무척이나 강직하고 엄한 사람이기도 하나, 때로는 밑에 사람들의 말을 매우 귀를 기울여 주는 현명한 사람이다. 무관이던 그가 고을의 현감이 되어갈 때 조카를 데리고 갔는데, 대개 고을의 원님이 되어 친족들을 많이 데리고 가면 지역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므로, 삼가게 했었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한 문책상소가 올라왔으나 이순신은 눈물을 흘리며 조카들은 형제 내외가 먼저 세상을 하직해서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들을 돌보고 먼저 출가시키려 했다.


그는 과감한 무인이기도 하나, 약자에게 매우 다정한 인물이다. 여기에 다양한 모습이 있겠지만, 이순신을 거론하는 점에서 한국은 임진왜란을 당한 지 약 520년이 지났지만,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뜨겁고, 통영시의 충무공 사당은 언제나 하례객들로 붐빈다. 그러나 지금의 이순신에 대한 모습과 당시의 모습에서 너무나도 아이러니를 느낀다. 이순신은 당시 당쟁에 참여하는 자는 아니나, 당쟁의 피폐를 너마나도 당한 사람이다. 이순신의 친구는 그 유명한 명정승은 서애 유성룡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고, 이황은 정암 조광조의 학문을 이은 성리학자다.


퇴계 이황을 이은 율곡 이이가 등장하면서 학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다. 다시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두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진다. 북인도 추후에 소북과 대북으로 갈린다. 대개 국가와 민족이 서로 다르면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단지 승자의 기록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퇴장한다. 하지만 같은 나라 안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누군가 엄청난 피해를 받고, 후예들조차 자신의 선조들의 모함조차 풀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이란 자 역시 동인이었고,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의 친한 친구이란 이유로 모진 일을 당한다.


충무공의 죽음에 의문이 많으나, 그날이 유성룡이 서인과 북인에 의해 탄핵당해 파직되던 날이다. 유성룡의 모습은 마치 중종 때 조광조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중종의 질투는 조광조를 유배지에서 사약을 내렸다. 단지 유성룡이 사약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가 전쟁에서 많은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변방의 전장에서 임금은 바라볼 수 없어도 옆자리의 군무를 보는 문관을 지켜볼 수 있다. 임금의 자질이 신하의 운명을 좌우하고, 국가의 운명을 뒤집어버린다. 서애 유성룡 이후 조선의 명재상으로 정조가 즉위할 때 번암 채제공이다.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과 유성룡의 연계성에서 유성룡이 가져야할 진정한 가치는 정조가 알아보았다.


정조가 남인을 기용하려던 점은 노론의 권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을 정리한 <유성룡>이란 서적에서 유성룡의 행동들은 분명히 옳으나 매우 여의치 않은 입장이었다. 중종시대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유는 권력층의 비리를 타파하고, 기득권의 모순과 부조리를 개혁하려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보자면 일본 왜군이 넘어온 것이지만, 그 과정과 전개정황은 조선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정쟁, 선조의 질투, 명군의 간계, 왜군의 전황, 심지어 무관들의 행동조차도 도저히 정리하기 어려운 변수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결한 인물이 유성룡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치질이 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한데도 선조가 불러 거의 기어가서 어전의 임금을 뵙고, 그런 그를 본 의원방의 하인이 계속 따라와 통곡하는 장면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유성룡이 1607년 서거하자, 길가의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마치 자기의 어미를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조광조가 죽을 때나, <유성룡>에서 서애를 기록하던 백호 윤휴가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3명의 사대부는 백성을 사랑하고, 기득권 세력을 부수어 개혁을 주장하다 죽음과 배신을 당했다.


그래도 조선의 명운을 살리기 위해 유성룡은 정치적으로 싸워나가고, 전쟁 이후 고향에 내려간 이래 일절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벼슬을 내려도 받지 않고, 공록을 줘도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선조, 병자호란의 인조를 생각하면 아마 조선 시대 가장 멍청한 임금이었을 것이다. 선조의 멍청하고 이기적인 행동은 충신을 죽이고, 선비들에게 큰 화를 끼쳤다. 이미 기축옥사에서 억울한 죽음으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선조의 이기심과 자만심, 그리고 권력을 잡고 상대 세력을 몰아내는 붕당정치의 폐단은 이미 이준경의 유언처럼 남인과 서인의 피로서 피를 씻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개혁을 주장한 자들은 모두 당쟁에서 몰려 화를 당하고, 그 결과는 조선의 국운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국가가 약해지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없고, 세금을 낼 사람이 없으며, 국가의 북가 축적되지 않음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처럼 유성룡 역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야하고, 특히 세금의 폐단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양반과 관리, 아전, 심지어 재산 많은 백성까지 반대했다. 전쟁을 승리를 이끈 그가 그런 대우를 받은 이유는 개혁의 실천이고, 윤휴 역시 사약을 받은 이유도 권력자들이 부조리하게 모은 재산을 걷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보고, 또한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거짓 이야기가 다시 그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었다.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것으로 알지만, 선조실록에는 그런 말은 없었다. 단지 병정을 키우기 위해 세금문제를 해결하고, 부조리한 제도의 결점을 정리해야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책에서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이 가진 국정철학을 억지로 갖다 억지로 꾸며대고, 그것이 현재에도 먹힌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제일 놀란 점은 학봉 김성일에 대한 부분이다. 김성일은 일본에 사신으로 넘어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할 때 같이 가던 자와 다른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원래 일본의 야욕은 알고 있었으며, 유성룡도 일본의 위기감을 알 정도라면 그가 거짓보고 했다는 것은 매도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외교정사를 볼 때 침착하게 원칙적으로 수행했으며, 다른 관리와 다르게 합리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출전하여 전사한다. 현재 임진왜란에서 단순히 이순신만을 추앙하는 현실에서 전후관계 및 당시의 여러 인물을 알아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집에 족보를 보면서 직계 할아버지가 명종 때 무관이 되어 훈련원사(군사를 훈련시키는 기관의 수장)를 맡았으며, 광해2년 1610년 향년 74세 북쪽 여진족을 지키다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명종에 임관하여 광해 초반에 돌아갔으니 임진왜란을 겪지 않을 리가 없다(당시 친척 분은 선조가 대피할 때 어가를 수호하던 무관이었으나 추후 이억기와 같이 출전하다 전사한다). 조선시대 60살 이상이면 장수한다고 들은 시절에 나이 70 넘어도 변방에서 국경을 지킨 점은 아마 선조와 유성룡, 이순신 그리고 당쟁의 무리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문중은 조선시대에 남인이었다. 유성룡과 그를 아끼던 종친 이원익이 있었더라도 전쟁의 승기를 잡은 남인의 영수가 내치게 된 점에서 오히려 변방에서 백발무장으로 수호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명성을 날린 의병장과 무관에 대해 선조는 상당히 질투했다. 이몽학의 난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아무 상관없는 김덕령의 이름을 거론했고, 김덕령 장군은 무고에 의해 옥사하여 순국했다. 그의 죽음은 죄가 없으나 권력자들의 가시거리란 이유로 제거 당했다. 유성룡은 반란자들을 한곳에 모아 심문하여 김덕령 장군의 누명을 벗기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순신 역시 일본군의 계략과 당쟁의 이익, 그리고 유성룡에 대한 견제를 하고자 하는 정치적 노림수가 숨은 것이다. 다소 과정적이지 모르지만, <유성룡>을 저술한 이덕일의 주장은 현재 역사학계는 노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노론도 조선 말기에 몰락했다고 하나, 을사오적 중에 하나가 노론명가의 후손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째든 유성룡의 활약을 보자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정부터 군사업무, 외교까지 두루 섭렵하고,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긴장관계도 조율했다. 명나라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하여 구왕파 선조 그리고 신왕파 광해군으로 대립하여 조선의 내정을 크게 개입하려했던 정치적 공작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유성룡의 노년은 참으로 허무하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친구를 죽이게 만들고, 자신을 모함하며, 백성을 외면했으니 말로 하지 못할 울분은 얼마나 큰 것인가. 정치적 이익을 떠나 상대세력이라도 정말 옳다면 그 상대가 곤란한 처지에 있더라도 유성룡은 포용해주었다. 자신도 명문 사대부집안이고도 계급을 차별하고 유용한 인재를 두자고 했다. 이런 유성룡을 두고 성웅 이순신만이 아니라 성현 유성룡이라고 칭송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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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나의 고전 읽기 1
손택수 지음, 정약전 원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서평 적을 때도 인용한 내용이기도 하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에서 처음 등장한 장소가 전남 강진이다. 물론 강진을 가기 위한 여정으로 영암을 지나쳐오는 것은 사실이나 모든 시작은 강진군에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강진군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랑생가도 있고, 많은 절과 문화재도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곳은 거기에 다산초당이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목민관과 탐정 중에 하나였고, 19세기 이후부터는 조선만 아니라 일본과 베트남을 지나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은 분이다. 바로 유홍준 교수는 한국에서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다산 정약용이라 한다.

 

하다못해 지식인뿐만 아니라 정치인까지 정약용이란 이름을 올리고, 어느 누구의 서재에 다산 정약용의 책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는데, 가끔 어떤 인물의 하는 행동을 본다면 과연 정약용 선생의 책이나 혹은 그에 대한 연구도서 1권 읽었을까 라는 의문도 들지만, 정약용의 이름은 한국에서 거의 떼어낼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다. 한국의 소개, 한국의 문화, 한국에 대하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각종 인기스타나 스포츠, 문화, 음식물로 도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막상 세계에 나가보면 그들이 진정 진정으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이다.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가끔 한국에서 역사의 자부심에 대해 논하는 자들을 이야기를 듣자면 잠도 재우지 않고, 임금도 잘 주지 않거나 적게 주며, 때로는 구타와 폭언으로 삶의 희망을 빼앗아 성장한 감추어 만든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진정 자랑스러운 역사라면 부조리와 모순을 은폐하고 겉모습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 숨쉬어온 인간이란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각 개인에게 국민성으로 이어지고,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해왔으며,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랐는지를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는 사상과 철학과, 문학과 정치, 예술과 종교까지 다양한 영역까지 이어져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방문하여 신해사옥에서 참형을 당한 진사 윤지충에게 시복을 내렸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사촌형제고, 정약용의 형님이 정약종, 정약종의 자녀들은 모두 한국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역사라는 아이러니는 바로 저런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된다. 1800년 정조가 붕어하고, 1801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가 일어나서 정약종은 참수되고,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유배를 떠난다. 조선에서 유배를 받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자신의 죄보단 권력의 희생물로서 가능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불운한 종말을 겪기도 한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하는 게 편안 유배생활이라 생각할 줄 모르나, 당초 처음 갔을 때 자신이 기거한 곳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아무도 자신에게 찾아와주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온 것처럼 동네주민들은 두려워했고, 부모님을 존경하는 문화에서 죽은 부모님의 신위를 태우고 부정하는 사람과 연루된 것만으로 본다면 공포 그 자체의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처음에 경상도 장기에 머물다 황서영백서로 국문을 받은 후 강진에 올 때 그의 기분은 참으로 반갑기도 혹은 우울했을 것이다. 강진 옆에 해남이 있어, 어머니의 본가가 해남 연동에 있는 점, 그리고 다산의 매우 가까운 친구 윤서유가 도암면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화가 일어나면 그 지목되는 대상의 가족과 친구, 심지어 문하생까지 잡아들여 치조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일들이 흔했다. 윤서유도 신유옥사와 황서영백서로 관청에 끌려와 문초를 받았으니, 단지 자신의 친구네 또는 아버지의 친구네(윤서유의 아버지 윤광택은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하고 친구다)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했으니, 당시 그 살벌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나마 후에 다산은 자신의 외가의 먼 친척의 산장인 다산초당으로 가서 많은 제자를 받아들였고, 그곳에 다산학단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언제나 마음의 고독이 숨 쉬고 있었다.

 

바로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에 대한 그리움이다. 정약전은 정약용이란 인물에 가려워져 있지만, 정약용의 기록에 보면 자신보다 훨씬 월등하게 능력이 있는지 인물이고, 인품 역시 매우 훌륭하여 형에 대한 감정이 애틋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살아있을 적에 어느 아무개는 형이 아우보다 낫다고 했으니, 그 아무개가 바로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말한 것이다. 정약용은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청백했으나, 그의 뻣뻣한 모습에서 많은 친구와 적을 만들어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인물이라면 존경할만한 조정대신이나, 뇌물과 이권을 노리는 간신배에게 원한의 대상이다. 그가 신유사옥으로 구금될 때 주변 권력자들은 정약용을 사형시키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약전은 정약용만큼 활동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의 형이란 이유만으로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던 것 같았다. 정약전이 유배지로 가기 위해 포졸과 같이 가면서 헤어지게 되자, 포졸은 정약전을 떠나보내면서 눈물을 흘렸고, 흑산도에 유배 간 정약전을 두고 섬마을 주민들은 서로 정약전을 모시려고 했으며, 정약전 다른 섬에 가려하자 모두가 길을 막고 가지 못하도록 했다. 유배지에 천주학쟁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온 사람에게 마을주민들은 오히려 자신들과 있어달라고 애원한다.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바로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한 곳, 흑산도에 가서 정약전이 머물다 간 삶의 향기, 그리고 남은 마을주민들에서 듣는 정약전을 다시 확인한다.

 

정약전의 신분은 양반에다 집안에서 옥당 즉 임금을 알현할 수 있는 당상관 자리에 계속 올라간 명문가 집안이다. 아무리 죄인처럼 쫓겨나도 신분으로 보자면 상당히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섬에 들어가는 순간 진정 유학자의 참된 길을 보여준다. 늙은 노파가 병에 들어 앓아누워있자 정성스럽게 병간호를 해주었고, 섬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알려주었다. 어민들의 삶에 대해 깊게 관찰하면서 <자산어보>를 저술했고, 바로 이 책은 우리 문화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가 되었다. 정약전은 어민의 말을 최대한 들어주어 기록했고, 물고기별로 크기, 생김새, 성품, 사용용도를 적었다.

 

의원이 귀하고, 약이 귀한 시절, 병에 걸리면 손도 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으므로 어류를 약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많은 해양 관련 글을 남기면서 한국의 해양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남은 부분은 복어에 대한 부분이다. 복어는 맛은 좋으나 독이 많기에 잘못 먹으면 인명이 달리한다. 배고프고 가난한 백성들,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약탈당하고, 주변 못된 양반세도가들에게 노역으로 시달린다. 배고픈데 먹을 게 없어 해안가에서 복어를 잡아먹다가 복어 독에 걸려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이니 주변 어민들에게 얼마나 신기한 존재였을까?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를 저술한 작가는 흑산도에 들어가 박씨 할아버지에게 정약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마을에 정약전 선생이 없었다면 글을 몰랐을 것이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조선말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어느 한 개인의 불운한 운명이 때로는 그 지역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역사라는 것은 이토록 기구한 것일까? 정약전 선생은 정약용 선생이 해배되기 전 2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신다. 정약전에 애써서 만든 <자산어보>가 정약전의 유배하던 집의 벽창호로 사용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가장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했던 것은 형님이 살던 집에 가서 형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자산어보를 발견하고, 정약용은 자신의 제자 이청으로 하여금 자산어보를 복원하도록 했다. 만약 그것을 복원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해양학, 해양생물학, 해양문학에 큰 빛을 잃을 뻔했다. 정약전은 엘리트 이상의 지식인이었다. 그 말은 매우 총명하였지만, 인품은 모든 사람들을 품으려했다. 사대부 집안의 일원이 아니라 그 시대 살아가는 어민들의 뜻과 마음을 모우 자산어보에 담아내었다. 살아생전 붕당정치의 소용돌이에 먼 곳까지 귀양살이로 운명을 마감했으나,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현재는 제3자처럼 볼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소용돌이 중심과 주변에 있던 자들에겐 큰 멍에가 되었고, 그 멍에는 후손들에게 큰 짐이 된다.

 

영광의 업적은 슬픔과 좌절의 상처가 있어야 새겨지는 것인가? 시골이 있는 강진군에 갈 때 가끔 다산초당에 들릴 때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 올라간 이유는 거기가 외가 식구와 먼 친척이란 점도 있지만, 거기선 강진포구가 보이고, 그 바다를 통하면 형님에게 갈 수 있을까라는 사무친 그리움이 스며있다. 그리고 다산에 그리움 역시 강진에도 많이 스며든 것 같다.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보니, 다산 선생님이 처음 강진에 왔을 때 머물던 초가 ‘사의재’의 액자사진과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많은 책들이 방에 꽂혀 있었다. 지금이야 정약용 선생의 책들이 많이 읽혀지고 있겠지만,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정약용 선생을 탄압하던 자들의 후예들이 계속 탄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치 높은 문화를 지키는 것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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