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unger>를 보면서 2가지 영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2가지 영화 모두 흥행성보단 작품성 그리고, 작품 안에서 보여주는 예술적인 감각으로 인정받았다. 예술이라 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여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끔찍하고 두렵고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큰 전달력을 전해줘야 한다. 아직도 한국 대중사회는 이런 예술적인 요소보단 대중성에 두고 “예술이야!”라고 말한다. 예술은 입맛을 맞추기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입맛의 다양한 선택을 늘려주는 천연 향신료다.

 

천연 향신료는 내가 직접 따서 먹지 않은 이상 맛을 볼 수 없다. 인스턴트식으로 가공한 조미료는 당장의 입맛에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게 없다. 오히려 그 입맛에 물들여 최후에 감각이 둔화하여 감성을 메마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가? 어떤 만화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에서 대답은 욕심이었다. 욕심을 생각하면 사랑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 역시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욕심의 대상의 자신이냐? 타인이냐 혹은 그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욕심은 어떻게 보면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은 그래서인지 용납될 수 있거나 또는 되지 않을 있으며, 그것이 정당할 수도 아니라면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욕심이란 단어가 과연 나쁜지 아닌지는 도덕적인 사회상과 윤리적인 보편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영화 <Hunger> 역시 그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마주쳐서 보는 이유는 2가지의 이유다. 하나는 <남영동 1985>의 교도소 내에서 이뤄지는 잔혹한 행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아일랜드의 비극을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일랜드라고 하면 그런 나라가 있지만,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기타리스트였다. 영원한 기타 키드의 우상이자 미친 듯이 기타를 연주하는 Mr. Guitar Crazy 게리 무어(Gary Moore, 1952.4.4~2011.2.6)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에 하나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쳤던 사나이”다. 그의 기타소리는 그의 감성이 탁월한 것도 있으나,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란 점이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했지만, 완벽한 독립을 하지 않았다.

 

영국의 세력이 닿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에서 벌여진 비극은 한국으로 따지자면 한국전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만큼이나 잔혹한 비극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원했다. 영국은 겉으로 아일랜드라는 나라만 인정했지, 영국여왕에게 충성하고 정치적으로 많은 간섭을 하였다. 아일랜드는 독립을 하기 위해 영국과 투쟁했으며, 영국은 아일랜드 사람끼리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독립 아닌 독립을 해준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인들이 가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아일랜드 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난은 조선이 일제 강점기 일본에게 당한 것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잔인했다.

 

아일랜드 전통게임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하는 것을 적발하면 무참한 폭력이 일어났고, 폭력의 잔인함은 결국 사망으로 이어졌다.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이런 국가적 민족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항쟁하기 위해 투쟁하고, 그 역사의 기간은 조선독립운동사 만큼이나 처절했다. 실제 영국 첩보기관은 죄 없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과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았고, 아일랜드 인들은 영국인들의 폭압에 분노를 넘어 증오로서 대했다. IRA은 매우 거칠고 과격하며, 테러를 일으켜 폭행과 살인까지 저지른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을 보여준 비극이라면, <Hunger>는 1980년 전후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수상 집권 시기에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 영화를 감상하면 대처의 연설이 나온다. 대처는 1970년대 경제위기에서 새로운 내각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이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적 위기를 타진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국가에서 이른바 케인즈의 이론, 거시경제학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통화량이 증가하고 임금이 올라가면 인플레이션이 닥치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계속 오르게 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한다.

 

이때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경제정책은 거시경제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환된다. 그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대표적인 정치인이었고, 영국은 대처의 집권으로 초반에 안정화되었던 것처럼 보이나, 추후 큰 문제를 일으킨다. 대처의 노동탄압도 큰 문제였지만, 그와 더불어 아일랜드 인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개인적으로 대처는 노동문제의 갈등을 외교문제로 국민의 눈을 돌리려 했는지 않을까 싶다). IRA가 급격한 테러를 하면 그들을 정치범으로 수용했다. 정치범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위험이 될 수 있으며, 반국가적 세력으로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하는 인물로 보겠지만, 대처는 IRA 요원들을 그저 흉악범으로 취급했다.

 

흉악범은 정치범과 다르게 정치적 성향이나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타인을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희생시키는 반윤리적 인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다르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 작용하나, 윤리는 권력의 힘으로 볼 수 없다. 도덕적 권력이 IRA를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이다. 아일랜드 죄수를 수용하는 감옥은 열악하고, 비정상적인 공간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IRA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벽에다 똥칠하고, 샤워도 하지 않고 최대한 영국 간수에 대해 반항한다.

 

영화 처음 나오는 인물은 IRA 요원이 아니라 영국인 간수다. 그는 조심스레 현관을 나서고, 차 밑에 혹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 게다가 아내는 창문 너머로 남편의 출근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는 감옥 밖에서 담배를 피며 눈 내리는 모습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바라본다. 손가락 윗면 관절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상처가 나있다. 그의 임무는 샤워를 거부하는 아일랜드 사람을 목욕탕 욕조에 집어넣어 비누를 몸에 바른 후 긴 빗자루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다. 이때 저항하는 죄수를 저지하기 위해 매우 심각한 폭행을 휘두른다.

 

그런다고 IRA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면회를 가정하여 서로 간의 정보를 교환하고, 면회자들과 물품을 교환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입안에 메모지를 넣어 어느 여인과 키스를 하여 건네거나, 라디오를 받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면회객으로 온 여성은 자신의 손을 치마 안에 집어넣어 남의 손이 함부로 가서는 안 될 곳에서 용기를 꺼내어 죄수에게 건네준다. 목숨을 거는 투쟁은 잊을 수 없다. 영화 <남영동 1985>가 생각나는 이유는 故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로부터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을 당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 끌려온 주인공은 갖은 고문을 당할 때 자신만 울고 절규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고문을 지켜보던 형사들도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고문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사람 모두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처럼 <Hunger> 역시 그렇다. 영화에서 IRA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IRA 요원이 영국정부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 최후의 저항인 단식투쟁을 한다. 이때 시작한 주인공이 66일 동안 단식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로 9인이 추가로 사망한다. 이때 IRA은 그 감옥의 영국인 간수 26명을 살해하는 일이 벌여진다.

 

분명 어느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해서 그런 더럽고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Hunger>는 피해자가 아일랜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아일랜드 사람을 감시하고 폭행하는 영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죄수를 목욕시킬 때 그들은 철저하게 반항한다. 진압부대가 곤봉을 들고 와서 아일랜드 죄수들을 가차 없이 봉을 휘두른다. 이때 처음 온 한 영국인이 광기어린 진압장면에 슬퍼하며 벽 뒤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영화는 꿈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듯이 신임 경찰대원은 파란색이 보이는 복도 쪽이었고, 진압하는 자들은 어둡고 컴컴한 감옥 복도에서 미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옥에 와서 12년을 선고받은 IRA, 손등에서 피가 나는 간수, 단식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IRA, IRA에 의해 살해당하는 간수들을 보면 이 모두가 피해자였다. 역사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쇠사슬처럼 옭아맨다. IRA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공화주의였다. 공화주의란 인간이 생명의 위기나 고통에 고통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은가? 공화국이란 자신들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최종목표다. 아일랜드 죄수들이 선택한 것은 삶의 의지가 없는 평온함이 아니라 큰 위기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를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죽음으로 큰 여론을 형성해도 정치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미래를 위한 길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이의 곁을 떠나고 싶을까?

 

하지만 그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비참하고 노예와 같은 삶이라면 그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다면 삶의 목표와 희망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Hunger>는 매우 불편하고 끔찍한 영화다.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영화 <Hunger> 감독은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식을 시도한 아일랜드 죄수 한 명이 가톨릭 신부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는 롱 테이크(Long take)이다. 영화 카메라에서 일정한 화면을 맞추고 거기서 계속 쇼트(화면의 전환) 없이 계속 촬영하는 모습이 대략 15분 정도 아닐까 싶었다(그 모든 대사를 외웠고 완벽하게 소화했으니!). IRA 요원은 단식투쟁을 하기 앞서 신부님에게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신부님은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IRA 요원은 자신이 그렇게 죽어도 그 일을 할 것이라 말한다. 어린 시절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자신이 모든 책을 졌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이길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의 적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다.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은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라고 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뒤쫓는 부류가 많다. 개인적으로 타인의 고통과 약자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은 자들이 사회의 정의나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것만큼 가식적이고 멍청한 인간이 없다고 여긴다. 과연 그들은 이때까지 진심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편안함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짊으려 했을까?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희생을 만들게 했는지 우리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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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 놓은 책 <슬픈 아일랜드>를 빨리 읽어보고 싶게 하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3-21 21:50   좋아요 0 | URL
하하
여러모로 제가 다이제스터 님의 책소화를 촉진하는 모양입니다..ㅎㅎ

yureka01 2016-03-2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의 역사를 보면 저항의 역사가 참 치열했구나 싶어요..잘 읽었습니다.
 


2011년 경제를 다른 애니메이션으로 "C(COLLAPSE)"란 작품이 있다. The Money of Soul and Possibility Control, 돈 그것은 영혼과 가능성을 결정짓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중요한 점은 돈의 그 가치를 나타내는 화폐에 본 작품은 경영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요가 키미마로는 일본 대학교 경제학부에 다니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점은 경영학은 사업적인 관리, 즉 개인이나 기업의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영학과 달리 국가 전반적인 생산과 소비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C"의 주인공이 보는 경제적인 관점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에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의 영역으로 이어간다. 일단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현재 조건을 보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릴 적부터 친척집에 자란 가난한 대학생이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견뎌내더라도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주인공 키미마로는 헤이세이대학(도쿄대학) 경제학과를 다닌 점에서 일본 내 최고의 경제학도이다.

 

그런대도 현실적으로 자신의 경제 상황을 정리할 수 없다. 경제학으로 경제를 아는 것과 자신의 경제적인 여건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경제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C"의 1화 첫 장면에서는 요가가 수업시간에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더라도 교수의 강의는 충분히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경제사(經濟史), 즉 경제의 역사이다. 경제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보통 일반인들은 경제라는 단어에 민감해도 경제라는 그 거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경제학의 명칭이나 개념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했으며, 정치철학 영역에서 경제가 등장한 사례로 플라톤의 <국가>이다. 어느 장소에 5명이 살고 있는데, 각자가 구두를 만들고, 집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혹은 어떤 특정 업무를 한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맡은 특기분야 대신 다른 것을 한다면 제대로 생산품을 만들 수 없으므로, 각자가 맡은 분야의 일을 맡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적 가치관이 그 당시와 비교하여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우선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익의 목적이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더 넓게 보자면 사회 시스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다시 “C"로 돌아가면 경제사에 대해 교수강의를 들어보면 경제의 시작은 물물교환에서 시작한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가진 재화나 혹은 상품이 넘친다. 하지만 다른 누구는 그 재화나 상품이 부족하다. 넘치는 상품은 내구력이 견고한 것도 아니고, 많이 있어도 보관하기가 귀찮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대안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주고, 대신 다른 것을 받아오는 것이다. 만약 그 사회의 부족사회 내지 가족단위의 사회라면, 친목과 평화 그리고 서로 간의 사랑이 통하므로 증여로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부족 안에서 생산되는 다량의 재화는 그 부족 어디라도 충분하므로 그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 혹은 사회그룹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진다. 그곳부터 경제가 시작되고, 경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를 넘겨주고 자신이 필요한 재화를 받아온다. 흔히 경제적인 관점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주로 금융, 화폐와 신용에 대해 생각한다. 신용은 화폐를 움직일 수 있는 가치나 척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화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화폐는 상품의 이동에서 물물교환이 비효율적인 부분에 따라 새롭게 개편된 시스템에서 등장한 도구다. 화폐가 어느 순간 모든 가치를 액수로 정하는 가치가 척도가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경제구조에서는 화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경제라는 것은 모든 것을 화폐로 통해 보는 것만이 아니라 화폐라는 척도로써 바라보는 게 정당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의 시작점은 필요한 재화의 이동에서 시작한 것이다. 경제학과 경영학이 복잡다양하게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지만, 사회전반적인 변화과정에서 경제라는 것은 생산과 소비에 대한 관계이다. 결국 돈을 투자하여 얼마나 이익을 얻고, 부의 창조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이익을 위한 경영이란 business Management, 사업에 대한 관리이다. 경제적인 부분은 경영적인 부분과 추구하는 목표는 다르나, 경영인들의 경영관리와 경제활동이 엮인다.

 

지금이야 식료품이 다양하게 넘치나, 과거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할 시기는 식량을 수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파나 홍수 또는 전쟁과 전염병 등과 같은 재난재해는 농지를 황폐화시키거나 노동인력을 크게 손실시켜 식량 생산력을 급격히 감소시킨다. 식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경우 그 나라의 국민들은 생존하기가 어려우며, 그 나라는 최후에 자멸하거나 타국의 침공에 의해 멸망한다. 식량에서 밀의 생산력은 곧 국민들의 배를 채울 수 있게 하고, 이에 따른 필요한 재화를 추가로 발생시켜 국민들에게 주어지게 하여 나라의 생산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바로 국가의 경쟁력이란 국민이 얼마나 건강한 육체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척도가 정치경제의 첫 걸음이고, 정치철학의 근본이다. 정치학에서 공공경제의 목적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국가의 모든 시작은 인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을 수입하고 파는 것은 상인들이고, 그들은 자기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타국의 상인과 농민조차 그런 자본에 의해 움직인다. 화폐가 지금처럼 달러나 위안화 등과 같이 세계의 무역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이었다. 상인들이 상품을 팔아 수익을 얻으면, 수익 일부를 국가세금으로 낸다. 상인들은 흉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위한 것도 아니고(어떻게 보면 통상적 가격보다 훨씬 높은 이윤으로 판다), 그들의 국가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자신의 이익, 경영관리로써 이윤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런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흉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과거 상인을 현대사회에서 대상인물과 대조해보면 자신(들)의 이윤을 목표로 활동하는 기업이 된다. 기업이 제때 물건을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 국민생활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기업에 일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기에 기업의 존속은 그 사회의 안정까지 이어진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시작에서 목표, 가치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어떻게든 서로가 연결되는 구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맹점이 발견된다. “C"에서 요가는 가난하나, 국가인 일본은 매우 부유하다. 국가는 부유한데, 왜 국민은 가난해지고 있는가이다?

 

우선 공공경제와 개인경제는 다르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경제에서 기업의 경영과 관련이 있다는 점, 기업의 이윤이 올라가도 그것은 세금으로 충당되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지만, 기업이 버는 돈 그 자체가 국가가 버는 돈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에서 얻는 이윤은 기업을 위한 이윤이고, 기업에서 고용한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이 생계수단으로 소비세로 지출되는 편이 더 많은 세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기업이 돈을 잘 버는 것이 국가의 공공경제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어느 기업에 속하거나 혹은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가족들의 생계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비가 더 높은 경제활동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기업이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한 재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이든 경영이든 모든 것을 화폐로서 이루어지고 이른바 금융에 의해 일어난다. 은행에서 화폐를 생산하여 시중 은행에 넘기어 시중은행은 필요한 사람에게 대여하고, 그 사람은 화폐를 이용하여 투자와 구매를 한다. "C"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화폐에 대한 부분이다. Midas 은행, 신화에서 어느 누구라도 그의 손에 닿는 순간 황금이 된다는 마이다스의 손, 작품에서 일본에서 발행된 화폐와 Midas bank에서 나온 화폐는 서로 다르다.

 

모르는 사람에게 같은 화폐로 보이나, 막상 금융가의 길에서 결투를 하는 사람에게 검은 돈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Midas Bank에서 나온 화폐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Midas Bank는 일본만 아니라 세계 금융가가 있다면 어디든 존재한다. 그들의 돈은 어디서 나오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그 돈이 들어온 나라에는 무한정적으로 유통되는 화폐단위가 증가한다는 점이고, 어느 순간 화폐의 액수가 0이 되는 순간 "C(COLLAPSE)"가 일어나고, 그 나라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심각한 경우 작품에서 세계지도에서 사라지는 비극이 탄생된다.

 

경제구조가 파탄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점이다. 그런데 왜 망하는 것인가? “C"는 인간의 자본에 대한 욕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딜레마라고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모든 것을 화폐로써 가치를 정한다. 그런데 그 화폐가 의도적으로 흘려보낸 뒤 마지막에 빼앗는 것이라면? ”C"는 바로 그런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을 고발한다. 요가가 마지막으로 일본의 국가를 "C(COLLAPSE)"에서 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금력과 투자할 수 있는 금전적인 규모가 작품에서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가의 캐릭터 에셋은 마슈이다. 마슈는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거느린 에셋과 비슷했다고 한다.

 

에셋의 주인 앙트러가 다른 앙트러와 대결해서 패배하면 에셋은 사라지고, 그의 신변에 큰 악몽이 탄생한다. 그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자본력을 많이 가지거나 혹은 공공 경제에서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일수록 그 피해정도는 심각해진다. 만일 대기업이 파산할 경우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해고되고, 금융권은 크게 요동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무너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무너지는 것을 받치기 위해 다른 자본을 동원하는 점이다.

 

빚을 갚기 위해 다른 누군가 빚을 갚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돈이 순전히 구매자의 자금력이 아니라 그 사람조차 빚으로 갚았던 돈이다. 미쿠니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보유한 순수금액이 아니라 Midas Bank의 대출금이다. 대출을 받으면 나중에 되갚는 문제가 있다. 대갚는 것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국가예산이 빈약해지고, 혹은 빚을 억지로 내어 대출을 갚으려면 또 다른 빚이 늘어난다. 일본에서 만든 화폐는 1000엔인데 다수의 은행을 통해 억지로 돈을 불리고 불려 10000엔으로 된다면, 빚은 9000엔이다. 문제는 갚아야 할 돈은 9000엔이 아니라 9000엔의 이자까지 포함이다.

 

사회적으로 본래의 화폐가 아닌 빚으로 만들어진 화폐가 유입되면 실제 존재하는 돈은 소규모라도 유통되고 있는 화폐액수는 계속 증가한다. “C" 마지막에 보면 미쿠니와 싸우는 요가는 개인 또는 국가의 미래를 담보로 돈을 움직이는 Midas Bank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화폐가치를 모두 종이로 만들어버린다. 즉 슈퍼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화폐가 시중 금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퍼뜨린 것이다. 미쿠니의 부하가 가로채려는 돈 액수만으로 충분히 인플레이션의 효과를 일으켰고, 결국 일본 화폐경제는 붕괴한다.

 

빚을 빚으로 갚는 것에서 이미 국가경제는 망하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점이 미쿠니는 Midas Bank에서 엄청난 대출을 받아 첫 번째 "C(COLLAPSE)"에서 일본의 피해를 피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인구 출산이 한 해 3명이란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그 와중에 계속 Midas Bank의 화폐가 유입되면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활기가 사라지고, 의욕이 사라져 희망조차 잃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

 

미쿠니는 지금의 위기를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요가는 미래의 존속을 걸고 싸운다. 미쿠니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여도 되는 것이고, 요가는 그 희생으로 인해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할 수 없다는 것에서 대립된다. “C"에서 미쿠니와 요가의 모습은 사실 현실의 우리 사회하고 많은 연계성이 보인다. Midas Bank의 화폐가 계속 시중에 유입되고, 그 화폐는 실재하지 않은 화폐, 즉 빚에 의해 만들어진 화폐이다. 우리는 빚으로 만들어진 경제구조 위에서 놀아나는 점이다.

 

마지막에 엔화가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달러를 이용하여 경제구조가 다시 시작된다. 일본의 화폐가 없어졌는데도 왜 경제활동은 가능한가?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어느 재화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재화를 팔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경제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 일본에서 없어진 것은 엔화라는 화폐이지, 화폐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경제라는 것은 인간의 생활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사람이 경제에 얽매인 노예가 되었다는 점이다.

 

경제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늑대와 향신료>와 <용사마왕 마오유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히 말하자면 나는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자가 아니고, 경제적인 관점이라 해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 많이 의존했다. 경제가 현재는 화폐를 중심으로 생각하나, 화폐의 입수보단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생필품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 그것은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경영자의 마인드고, <용사마왕 마오유우>가 더 경제적인 요소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용사마왕 마오유우>에서 감자를 악마의 열매라고 하나, 막상 감자는 식량으로 가치가 매우 높고,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한다.

 

그것을 전해준 사람은 악마의 종복이라 하고, 마왕은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한 악의 절대자로 묘사한 시대가 있다. 작품에서 항해술이나 망원경 등 각종 기술과 지식들은 그 나라의 부를 성장시키는 것도 있지만, 권력자들의 이익 즉 국가의 무력과 지배력을 확장시키며, 필요한 물품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이어진다. 경제라는 것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진행하여 결국 어떤 식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경제학은 어떤 방향을 추구하는지 모르나. 경제학의 시작인 <국부론>에서는 경제라는 것은 수요자의 보다 나은 생활을 만들기 위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늑대와 향신료>에서 생산품의 가격이 저렴한 곳에 가서 대량으로 물품을 구매하여 그것을 비싸게 팔리는 곳에 가서 금화와 은화를 받으려 하는 것은 경제시장구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의 경영관리 방법이다. <늑대와 향신료>의 주인공 로렌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하는 빵을 굽는 제빵사와 같은 사람이다. <국부론>에서 빵을 파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심에 의해 물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활동이 재화가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주고,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늑대와 향신료>를 보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상회나 상인들은 어느 상품에 대하여 독점이나 과다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약 독점이 일어나면 재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야 하고, 만일 그 재화를 구매할 수 없는 경우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분명 말하지만 경제의 목적은 필요한 사람에게 적재적소의 물품을 합리적으로 입수하게 하여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 조건, 기업과 정부의 정책과 시장논리는 이상하게 만들어낸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은 손”은 분명 그런 말이 아닌데, 혼용하는 경우가 다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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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컬랩스를 꼭 보겠어요! 불끈~~!

최근 알드노아 제로..보고 눈 베려서 안구 정화할 작품이 필요했는데, 정말 괜찮은 작품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당~!

만화애니비평 2016-03-07 19:1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님도 은근 덕후라니 좋습니다. 우후후
 

어찌 보면 괜히 폼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나, 개인적으로 영화는 대중영화보단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대중영화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흥행만 바라보는 점에서 이야기는 재미만 넣었지만, 막상 보고나면 무슨 내용인지 기억해내기가 귀찮아진다. 잊어버리는 것보단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자신의 무의식 공간에서 스토리의 흐름을 계산하고, 거기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에서 등장인물, 스토리, 배경이나 소재만 다르지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주제성은 거의 동일하게 흘러간다. 아슬아슬한 갈등관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로맨스나 신화적 영웅을 추구하는 게 보편적인 관객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솔직히 말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상으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세계가 친절하지 못하다.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이란 30분 넘는 영화를 보면 정말 불친절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아이폰4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이니 관객에 대한 친절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작품 그 자체이기에 영화는 진짜 영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을 찾아가는 정체성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는 3‧1절을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영화를 보았다. 아는 동생 녀석에 추천받은 <사울의 아들>을 말이다. 박감독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은 <사울의 아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사울의 아들>을 보는 순간,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추천할 수 없는 영화다. 내용이 정말 비참하고 끔찍하며, 화면에서 나타내는 카메라연출까지도 상당히 불편하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요소를 노렸다. 그렇게 불편한 장면과 서사들이 결국 예술이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사건이란 바로 전쟁이다. 전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인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를 하나의 쇼라는 블록버스터 장르로써 전쟁 그 자체를 하나의 스펙타클로 구축한다.

 

전쟁이란 공간은 영웅의 등장만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보단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전쟁은 전혀 친절한 얼굴을 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나머지 상황들을 버린다. 그러나 전쟁에서 언제나 카메라 중심은 우리 아군이라는 점, 아군의 승리와 패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군이 보여주는 활약이다. 살아남으면 승리의 영웅이고, 죽으면 고귀한 희생으로 추앙된다. 이기나 지나, 살아남으나 죽으나 어차피 영화는 주제성을 명확히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주제성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의미를 생각하여 만약 그 대상이 우리가 일반적인 범주에서 다가가기 어려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울의 아들>은 진짜 그런 영화다. 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멍청한 행위이면서 인류문명을 가속화시킨 원인 중에 하나다. 더 많은 적을 빨리 치명적으로 죽이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한다. 인류가 100세를 바라보는 이유도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시체, 그리고 비인도적으로 자행된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다.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국가로 일본 731부대, 그리고 독일의 나치수용소이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헝가리, 일본에 의해 정렴된 조선이란 국가는 전쟁에 의해 엄청난 수탈과 억압을 받은 나라다.

 

일본은 되도 않은 황국신민화 논리로 조선인을 제2의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전쟁에 보내나, 독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총알받이보단 신속히 가스실에 보낸다. 대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챈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시작한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밥과 음식을 제공 전, 먼저 샤워를 하라면서 옷을 모두 벗긴 채 어느 방 안으로 보내고, 잠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독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질식으로 모두 사망하고, 가스실은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나치독일의 만행, 가스실의 제노사이드다. 하지만 이 잔혹한 계획은 나치가 수행했으나, 모든 일처리를 “존더커맨더”라고 불리는 포로였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나치 감시 속에 업무를 맡다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처형된다. 죽기 전에 실컷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더러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의 얼굴에 그 어떤 희망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고, 굳어버린 표정과 타성에 젖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 더 심각한 절망과 증오가 불타오른다. 영화 <사울의 아들> 주인공 사울 역시 절망의 세계에 살아가는 한 남자다. 그는 평소대로 나치의 업무를 수행 중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독가스를 마시면 일반적으로 호흡곤란으로 모두 죽는 반면, 어느 포로들은 살아남은 경우가 있다. 어느 한 소년이 가스실에서 생존하여 침대 위에 올려지고, 군의관 1명이 와서 생존여부를 확인 후 소년의 목을 눌러 교살시킨다. 결국 소년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 사울의 눈빛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행동들을 일으킨다. 그 소년은 영화제목처럼 <사울의 아들>이었고, 사울은 눈앞에서 아들이 죽어가도 아비로서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은 다른 시체처럼 토막으로 취급되어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아들을 구할 수 없는 아버지, 그래도 그는 아들의 마지막을 불이 아니라 땅에 매장해주고 싶었다. 매장을 하려면 물론 땅을 파고 거기에 묻어야 하나, 문제는 랍비 즉 성직자가 필요했다. 종교는 구시대에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권력이었으나, 20세기 유럽에서는 정치보단 그 종교의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담당하던 문화적 역할이 컸다. 아이가 죽으니 랍비의 장례절차가 필요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죽은 아이에게 신의 은총이 내려지길 원한 것이다. 인간의 생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어가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선 영혼의 구원을 바란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랍비를 찾기 위해 사울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찾아보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가 되지 않고, 언제나 벽이 막힌 현실은 카메라의 연출에서 잘 볼 수 있다. 영화의 영상미가 참으로 불편한데, 보총 영화는 16:9나, 여기는 4:3이란 점, 더욱 놀라운 점은 보통 영화는 롱샷, 풀샷, 미디엄샷, 클로즈업 등이 골고루 배치하도록 연출하나, <사울의 아들>은 거의 모든 화면이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려 한다. 사울의 얼굴을 중심으로 다른 피사체는 아주 흐릿하게 보인다.

 

사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주변 인물과 대화하고, 상황과 장소 정도만 풀샷 정도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은 거의 2인칭으로 사울의 행동에 집중적으로 따라가며, 배경과 상황정도만 3인칭 정도로 보여준다. 사울은 언제나 주변의 눈치를 보고, 늘 위기와 감시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행동한다. 랍비를 찾기 위해 다른 반장의 작업장에 찾아가고,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사람의 일을 도와준다. 나치수용소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어느 수용자는 사진기로 촬영할 때 망을 봐주거나, 나치가 “존더커맨더” 작업인부 70명 정도 죽이려고 할 때 봉기를 위한 화약을 구하는 일도 맡는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되지만, 사울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랍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하필 그 날이 수용소 감독관이 전쟁포로 처리인원을 갑자기 늘리던 때였다. 도착한 포로들을 15분에 1번씩 가스실에 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며, 가스실의 사체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소각로가 모두 차게 되었다. 그러자 나치는 포로를 야외에 끌고 나와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을 벗기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사격한다. 그리고 야외에 만든 임시 소각장에 시체를 불태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만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사울은 랍비라고 말하는 남자를 찾아내나, 그것도 마지막에 허사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 나치는 작업반장을 죽이는 것을 시작하여 “존더커맨더”를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위험에서 사울은 아들의 시체를 매장하려 하나, 결국 그것도 되지 못한다. 나치에 봉기 도중 도망쳐야 했으며, 마지막에 나치가 보낸 염탐꾼의 첩보로 모두 죽는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로 유명한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 이 영화는 암울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간 것이라 말한다면, <사울의 아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는 매우 불편하고, 친절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다. 시체의 알몸, 해부실의 시체, 즉결총살, 불타는 시체 등등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간이 인간의 운명을 옆에서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냉소적인 인간, 이런 잔인한 영화가 왜 계속 나와야 하는 것일까? 불편한 시선과 달리 보기에만 좋은 작품들은 현실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그저 흘러가는 것들로 공중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같은 작품은 인류가 저지른 악몽과 지옥을 되새기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영화에서 본 지옥 같은 수용소, 악몽이 현실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삶과 세상을 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경우 비극은 또 다시 반복된다. 역사의 교훈은 바로 지나간 일들이 다시 미래에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왜냐하면 그 당시 인간들은 모두 죽었으니) 똑같은 방식과 형식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조차 열어갈 수 없으며, 자신의 눈앞에서 미래가 파괴되는 절망을 사울처럼 겪을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아들은 바로 미래와 희망이다.

 

사울은 바로 그 미래와 희망을 잃을 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얻었으나) 다른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 끌려왔고, 거기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미래와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고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겠지만, 지나간 것을 무시하면 앞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간다. 그리고 그 앞은 절벽이란 사실은 마치 무언의 약속처럼 등장하여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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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0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사울과 스포트라이트 둘 중 하나 고민하다 결국 후자 보았는데, 주말에는 사울도 봐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3-01 21:45   좋아요 2 | URL
오오~!
역시 주말은 이런 영화를 혼자 보는 재미가 있지요...

yureka01 2016-03-0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젤만 ㄷㄷㄷㄷㄷㄷ그러게요 ....ㅠㅠ

만화애니비평 2016-03-02 08:56   좋아요 1 | URL
주말과 휴일은 잘 보냈는지
 


예전에 본 영화중에 <한공주>라는 작품이 있었다. 평소 여자연예인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 마음에 드는 연예인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공주>에서 주연을 맡은 천우희 씨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정말 잘 했기 때문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잔혹한 장면들이 사실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것이라 한다. 과거 밀양에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한 여중생은 자살했는데, 그 이후 거기에 가담한 남학생들이나 그 남학생 주변의 인간들은 사회에 나가도 잘 먹고 잘 사는 어이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서 일본 2CH에서 어떤 히키코모리가 고등학교 당시 자신을 엄청 괴롭힌 4명으로 24살 되도록 세상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사연을 보았다. 동창회에 가기 싫어 억지로 가보니 자신을 괴롭힌 4명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 가담자 1명은 공무원이 되었다는 인터넷(Face Book 화면갈무리) 게시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나두고 떳떳하게 얼굴을 내미는 세상이 되었을까? 아무튼 세상이 이상하게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하게 당한 부조리를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는 세상, 과연 이게 정당한 도덕적 가치관인가?

 

이번에 본 영화 <귀향>, 귀향이란 하면 귀향(歸鄕)이란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귀향(鬼鄕), 즉 귀신같은 넋이나 혼과 같은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에서 억지로 끌려나와 먼 곳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했던 소녀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유골조차 고향 뒷동산에 안치되지 못하고, 설사 살아와도 그때 이후로 시간은 멈추었다. 예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만화애니메이션축제에서 프랑스 앙골렘 만화축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지지 않는 꽃”이란 전시회를 보았다. 만화작가가 그린 하나의 만화서사도 있었지만, 위안부에 끌려갔던 살아남은 소녀들의 그림도 있었다.

 

점점 갈수록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의 한 맺힌 분노는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상처에 시들어간다. 이미 “지지 않는 꽃” 전시회에서 <나비의 노래>를 통해 보았다. <귀향>에서도 내림굿을 받은 소녀가 상처투성이 소녀와 나비를 보았다고 한다. 나비, 자유로이 날개를 펼치면 날아가는 생물, 그 나비를 마치 무참하게 밟은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일본군 장교가 나비의 표본작업 중 날개 하나를 잔인하게 부순다. 자유를 향해 날고 싶은 소녀들을 마치 포악하게 파괴하듯이 말이다.

 

시놉시스적인 부분에서 정말 표준적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에게 충격의 연속일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보다 더 화가 나는 장면은 과거 위안부에 끌려간 살아나온 영희(손숙 선생님 배역)가 TV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관공서에 가서 신고해달란 기사를 보고 관공서로 향한다. 그때 앉아있던 남자직원에게 차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서는 순간, 직원들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업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걸 신고하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라는 말에 화가 난 영희의 억울함이 더 먹먹해졌다.

 

자신의 나라가 없을 때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나라가 있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억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한공주>와 <귀향>을 놓고 내가 이렇게 대조하는 것은 바로 이게 우리 사회의 암적인 모습인 것이다. 왜 피해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고 계속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화냥년이란 말이 있다. 화냥년이란 원래 환향녀(還鄕女)에서 나 말이다.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다시 고향에 올 때 돌아온 것은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의 미소가 아니라 마치 오랑캐에게 몸을 팔았다고 여기는 더러운 눈빛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도 내가 느끼는 딜레마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모순이다. 물론 전쟁이란 엄청난 재난은 인간을 하여금 가학적인 요소로 변질시킨다. 죽음에 맞대 있기에 그 증오와 불안을 여성에게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과 망각으로 이어지므로 연속적인 가학성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성폭행에서 단순히 폭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사디스트적인 성적쾌락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폭력성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해 오히려 당하는 대상을 억압하는 모티브가 된다.

 

<귀향>은 전쟁에서 위기에 봉착한 일본군, <한공주>에선 인격과 무관하게 돈과 성공만 강조하는 한국사회, 모두 강박관념이 약자에 대한 배려보단 약자를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 <귀향>을 보면서 연출적인 부분에서 딱 2가지가 충격적이었다. 그로테스크, 즉 보기가 흉하고 끔찍하여 상당한 불쾌감을 주는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하이앵글 각도에서 수많은 위안부소녀들이 그 작은 방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폭행당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것도 방 하나가 아니라 방이 수십 개나 되는 벌집처럼 말이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위안부소녀들의 착취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말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자, 살해 후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모금해준 분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이 그렸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위안부소녀 시체를 불태우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을 모티브가 된 장면은 시체가 기름에 의해 타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 일본군복을 입혀 총알받이가 되게 하거나, 식량이 없다면 인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총을 쏴 죽이고, 칼로 찔려 죽이고, 동굴에 화염방사기로 태우거나 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한지 신이 해본 실험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아닐까 싶다. 인간을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폭격과 독가스, 세균전, 핵폭탄이 이때 최고조로 달했다. 이런 일이 있고도 반성하는 국가는 영원히 그때의 비극을 잊지 않은 반면, 어느 국가는 그때를 오히려 영광의 순간으로 여긴다. 다른 국가는 어느 국가의 만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영광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발끈하지 못한다. 오히려 할머니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인간도 있다. 어떤 블로그에 글을 봤는데, 분명히 여성분 같은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위로되지 못할망정 망언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남자라면 그 남자의 아내, 딸, 손녀까지 모두 위안부 같은 곳에 끌려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 말이 정답이지 않을까도 싶다. 물론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한 사람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에게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해보라고 하는 것이 다소 윤리적인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남에게 인륜적 가치를 대하지 않은 이상 자신에게 그런 가치를 받을 자격은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본다. 영화 <귀향>에서 무속인이 굿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천도제인 오구풀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연 그 소녀들의 영혼은 하늘로 혹은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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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돌에 대한 인상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려 한다. 내가 예전에 데이트했던 여성 중에서 스타일이 엄청 좋으신 분하고 하천강변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연히 한국의 연예인들에 대한 부분이 나왔다. 나에게 물었다. TV에서 나오는 여자연예인들이나 아이돌가수 같은 사람하고 만나고 싶은지 말이다. 나는 2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1가지는 옆에 여성이 있기에 거짓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아닌 점(스타일만큼은 진짜 연예인에게 뒤쳐지지 않았다)과 다른 1가지는 내가 연예인 자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답변은 내가 여자연예인들을 만날 일도 없고, 만날 것에 대해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나에게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으니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래도 만약에 혹시나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말에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재미하고 그런 세계에 있는 사람하고 어울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이돌 마스터>를 리뷰 할 때, 아이돌에 대한 나의 관점이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관점에서 무엇을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술이란 것도 문화라는 것도 각각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기에 새로운 발전과 가치가 탄생한다.

 

그런 것은 학문이나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인 점은 분명하다. 아이돌에 대한 인상이 왜 중요한가? 우선 <아이돌 마스터>를 리뷰하기 전에 한국과 일본의 아이돌 문화가 너무 차이나는 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큰 전시회장에서 세계 음식문화를 소개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곳에 가니 한국을 시작하여 인도, 일본, 러시아, 대만 등 세계 다양한 나라의 음식이 전시되어 판매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행사는 아니지만, 갑자기 일본 후쿠오카 쪽에서 음식 소개와 더불어 지역아이돌의 즉석공연이 있었다. MR 반주를 튼 음향 속에서 3명의 소녀(고등학생 정도 되려나?)가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라이브로 하는 즉석공연에서 제대로 된 라이브콘서트가 아니므로 사운드나 무대의 크기는 한계성이 있었다. 그들의 키와 옷차림, 율동을 보면서 생각한 건, 한국의 아이돌과 뭔가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았다.

 

2. 아이돌 문화의 변화성

한국에서 아이돌을 살펴보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하여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가요시장에서 아이돌문화가 제패했다. 아이돌문화의 특징은 초반에 백댄서 내지 대형기획사에서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아이돌 스타 기획은 전 방위적으로 음반기획사에서 추진하게 되었다. 아이돌시장에서 비중이 큰 부분은 남성보단 여성이며, 과거 음반시장의 중심이 남성이었던 점에서 큰 변화가 발생했다. 남성중심은 이미지 메이킹보단 곡 그 자체에 대하여 비중을 차지했지만, 아이돌문화에서 여성에 대해서는 곡보다는 이미지 메이킹과 안무에 대한 효과를 중시했다.

 

생각하자면, 1990년대에도 컬러 TV가 보급되었으나, 대부분 음악방송은 정규방송에 의해 내보내졌으며, 인터넷에 의한 미디어콘텐츠는 걸음마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IT이 열광적으로 보급된 것은 스타 크레프트 블러드 워가 피시방을 석권한 점이 크다. 인터넷 온라인 게임이 피시방에 많은 사람들을 몰리게 하면서 인터넷문화를 기하학적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처음 인터넷을 즐기던 사람들이 피시방에 갔으나 대단지 아파트와 일반가정까지 인터넷이 보급되자, 인터넷은 어느 특정장소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활양식이 되었다. 최근 스마트폰이 2010년대에 대부분 한국사회에 보급되면서 미디어콘텐츠는 TV 중심에서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전환되었다.

 

아이돌문화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와 더불어 음반시장의 저하는 인터넷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매체적인 전환은 아이돌문화에서 색다른 전환이 이루어졌다. 아이돌의 발탁은 대형기획사에서 지망생 유치나 오디션으로 통해 선발했다면, 이제는 인터넷으로 통한 유 튜브나 각종 자발적 콘텐츠로 계속 그 시장을 확대했다. 아이돌문화의 발전은 콘텐츠의 발달로 인터넷으로 아이돌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증가한 것과 아이돌에 대한 시장의 공급이 증가할수록, 아이돌을 지망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3. 한일 아이돌의 차이성

그러나 한일간의 아이돌을 비교하면 조금 다른 점이 보인다. 한국에서 아이돌 캐릭터 이미지를 보면 미국이나 일본의 아이돌이나 연예인 컨셉을 이용하여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의상이나 가사, 댄스안무와 이미지 메이킹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한국의 아이돌과 일본의 아이돌은 각자에게 보이는 아우라가 틀리다는 점이다. 그 대상에 뿜어지는 분위기나 느낌에서 한국은 상당히 강렬한 이미지를 준다. 대부분 한국의 여성아이돌을 보면 상당히 미모를 가진 미인에 스타일의 조건도 매우 좋다는 점이다.

 

모든 아이돌이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인기 여성아이돌 그룹을 보면 섹시컨셉이 매우 강조한 점과 화면에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점이 명확하게 전달된다. 위에서 언급한 후쿠오카에서 온 3명의 아이돌은 한국의 아이돌과 달리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한국의 아이돌처럼 외적인 요소가 강렬하거나 안무에서 상당한 일원성을 보이는 것보다 다소 부드러운 이미지와 다소 엉성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일본의 메이저 탑 아이돌이라면 아주 철저한 안무와 이미지 메이킹을 했을 것이다.

 

그런다고 반드시 그렇게 다가온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대표적 아이돌 AKB48의 뮤직비디오를 본 순간, 화면에서 보인 그녀들의 모습은 정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상당히 유동적인 모습이었으며, 억지로 통일성을 부여하기보단 각자의 모습을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보니 정형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모습을 보더라도 스타일적인 요소도 한국의 아이돌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AKB48만이 아니더라도 많은 아이돌이 길거리에서 혹은 소극장에서 톱아이돌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도 댄스 팀들이 방송이나 프로가 아니더라도 따로 활동하지만, 일본은 그런 아이돌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점이다.

 

4. 애니메이션으로서 아이돌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이돌 마스터>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으며, TVA로 먼저 상영된 작품이다. <아이돌 마스터>가 비록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인물이 가상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도 분명히 리얼리티라는 현실적 요소가 기반되어 있다. 그 사회상이나 공간적 배경은 현대의 일본이고, 작품의 배경이나 주변 생활양식은 현실적 조건을 충분히 반영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역시 제작된 국가에 따라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녹아들어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돌 마스터>가 일본에서 제작된 이상, 일본의 건축양식, 교통체계, 음식문화, 거리상가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가 그대로 작품에 녹아든 것이다. 아이돌이란 모두에게 빛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빛이란 언제나 움직이는 에너지로서 존재한다. 빛이 어느 일정 구간에 놓인 한 줄기라면, 그 빛은 언제나 그 에너지가 닿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우주를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빛이란 한 번 움직이면, 방금 그 빛인 A는 없어지고, A-1, A-2... 등이 이어서 다가온다. 빛의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빛이 와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아이돌은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라는 파생실재로서 우리에게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아이돌은 실제 그 아이돌의 현실세계와 다른 존재이고,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단지 화면에 보이는 존재는 그렇게 아이돌로서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아이돌 역시 인간이고, 그들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가 화면에서만 바라보는 화려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빛이 우리에게 강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혹은 우리 주변의 모습이 밝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이돌의 빛남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그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에게 없는 빛을 타자로 하여금 찾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으로 아이돌문화 역시 사회적인 존재로 등장한 것이다. 아이돌 자신은 그 자체로 아이돌이 되는 것을 욕망했고, 그 욕망은 관객과 시청자로부터 갈채와 응원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고, 반대로 갈채와 응원을 보내는 관객과 시청자들은 자신의 일상에 존재하지 않은 빛나는 모습을 아이돌로부터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욕망의 운동에서 우리는 그 욕망에 대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너무 지나치지 않은 이상 우리 인간에게 삶의 원동력이나 활력소가 필요하다. 그 대상이 아이돌에 대한 동경이나 아이돌문화에 대한 취향으로 될 뿐이다. 단지 모든 것의 중심이 아이돌로 된다는 점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할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될 뿐이다.

 

<아이돌 마스터>는 본래 게임으로 제작된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문화적 현상이 있는 반면, 그 아이돌을 자기가 만들고 싶다는 욕망도 있다. 육성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게임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한다. 과거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나, 코에이에서 제작된 <삼국지>들은 육성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를 남겼다. 단지 전략이 되는 대상을 국가나 가족에서 아이돌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5. <아이돌 마스터>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미학, 그 시작점 아마미 하루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돌일 것이고, 그 아이돌이 활동하는 배경일 것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아이돌 그 자체이다. 아이돌로 등장하는 히로인이 누구인지, 그 히로인들이 어떤 모습과 재능을 보여주고, 어떤 개성을 살려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돌 마스터>라는 작품이 아이돌을 내세우는 장르라고 해도, 그 역시 전대물에 가까운 작품이다. 전대물처럼 모든 등장인물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대물처럼 다수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 안에서 누군가 중심이 되는 리더가 있다는 점이다. 리더의 자리를 보면 항상 가장 정의롭게 보이거나 또는 강하게 보이거나 또는 아름답게 보이는 인물로 설정된다.

 

리더로 선발된 이들은 주인공으로 자리를 차지한다. 리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대물 형식을 바라보면 위에서 언급한 요건들은 대부분 갖추고 있다. 아이돌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분명 아이돌 중에서 가장 눈에 잘 보이거나,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돌 마스터>는 그런 전대물적인 왕도에서 벗어난다. 같은 아이돌 장르에서 <러브 라이브>에서 가장 인상이 강한 인물로 마키가 선호되나, 주인공은 호노카 중심이다. 호노카의 경우 외모나 스타일로 보자면 마키나 에리보다 덜하다. 그런데도 리더가 된 이유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제일 먼저 행동하기 때문이다.

 

전대물 등장인물에서 리더의 조건에 강한 의지와 행동력이 호노카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Wake up Girls>에서도 리더를 맡은 나나세 요시노의 경우, 본래 모델과 CF에 등장할 정도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으며, 강한 인상을 가졌기에 리더의 자리에 적합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이돌 마스터>에서 리더를 맡은 아마미 하루카의 경우, 다른 아이돌 작품이나 전대물적인 요소에서 리더로 등장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녀의 외모는 애니메이션 여성캐릭터가 대부분 미소녀라고 할지라도, 미소녀적인 캐릭터에서 다소 멀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돌 마스터>에서 가장 재능이 넘치고, 외모나 스타일이 우월한 인물로 호이시 미키다. 작품을 보면 인기가 다른 그룹멤버에 비하여 좋을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배우 입성까지 할 정도이다. 춤도 잘 추고, 센스도 좋으며(피규어로도 잘 팔린다), 아이돌이 가져야 할 화려한 요소를 가장 잘 반영한 인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시장공략대상이 남성이고, 그 나이계층을 중고등학생이라면, 여동생캐릭터, 동급생캐릭터, 누님캐릭터로 나눈다면, <아이돌 마스터>에서 동급생 이미지로 호이시 미키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다.

 

다른 캐릭터에서 키와 머리색, 그리고 의상을 본다면 눈에 잘 띄는 인물로 타카츠키 야요이, 미나세 이오리, 시죠 타카네(내 개인적인 관점)으로 보인다. 나머지 캐릭터는 각자가 가진 개성과 특성에 따라 에피소드로 등장하면, 캐릭터의 이미지로서는 호이시 미키 외 강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돌 마스터>의 서사를 초반부터 보면 이야기의 진행은 아마미 하루카와 프로듀서로 전개된다. 프로듀서는 모든 아이돌을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는 디렉터라면, 아마미 하루카는 그 아이돌 중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TVA에서도 멤버들의 불화 속에서 그 중심이 되어 해결을 하던 인물은 하루카였다.

 

그런 하루카가 프로듀서를 대신하여 멤버를 이끌어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선택이다. 아마미 하루카는 강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이고, 그녀의 이미지 메이킹에서 머리에 달려있는 장식리본이 보이지 않는다면 캐릭터의 존재감이 매우 얇다는 점이다. 하루카의 성격이 밝고 친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나, 친절한 모습은 일상 내지 다른 아이돌과의 생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 밝은 성격도 다른 아이돌 역시 가지고 있는 요소이다. 하루카를 다른 아이돌 멤버와 비교하여 어떤 장점이나 특성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딱히 떠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돌이 되어 모두의 환호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6. 리더로서 보여주는 아마미 하루카

<아이돌 마스터>는 게임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여 게임 플레이어로서 육성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게임플레이어가 아니라 애니메이터들의 선택이나 관점에 의해 전개된다. <아이돌 마스터>에서 아마미 하루카가 주인공 중에서 리더로 선택되어 이야기에서 그녀가 보여준 행동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아이돌장르나 전대물에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영상서사인 애니메이션이라도 기본적으로 문학, 영화, 만화 등 다양한 서사물과 비교하여 처음이 있다면 결론이 있고, 그 이야기과정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이념이나 이상이 존재한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소리는 시청자에게 내러티브(Narrative)를 전달해주는 내레이터(Narrator)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아마미 하루카의 활약에서 우리는 <아이돌 마스터> 극장판 작품에서 의미하는 미적인 요소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서사의 시작과 마무리에서 어차피 765프로덕션은 관객과 팬들의 호응 속에서 좋은 공연을 하는 것이 목표다. 처음부터 초심자로 시작하여 큰 대스타가 되는 것은 어차피 서사적인 요건에서 크게 고민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플롯에서 보이는 갈등과 해결이 거대한 서사 안에서 서사로 등장한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TVA와 달리 2시간 이상의 런닝타임을 가진다. 2시간 넘게 상영되는 이야기에서 아마미 하루카의 존재성은 초반보단 오히려 후반에 가서 두드려진다. 아마미 하루카란 인물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카리스마 내지 확실한 기량이 보이지 않은 캐릭터다. 가창력으로 보자면 치야하가 뛰어나고, 댄스를 보자면 미키, 무술능력은 마코토, 스타일 그 자체로는 타카네가 뛰어나다.

 

캐릭터 가지고 있는 외적인 요소를 다른 캐릭터와 비교해도 아마미 하루카에겐 특이한 장점은 없다. 그런데 극장판에서 공연할 아레나 공연장에서 같이 백댄서로 활동할 아이돌지망생 중에 다른 6명은 모르나, 어느 한 소녀는 하루카에 대한 동경심이 매우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목표는 하루카짱, 아니 아마미 상이라고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아이돌 중에서 왜 하루카가 그런 대상이 되었을 까이다. 하루카를 동경한 소녀는 다른 지망생에 비하여 외모나 스타일이 특별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공연에 대한 부담감과 자신의 능력에 벽을 느끼는 바람에 과식을 하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사람마다 해결하는 방안이 다르지만, 폭식에 의한 스트레스 해소는 많은 여성에게 큰 치명적인 증세이다. 다른 백댄서 멤버들은 그 소녀에 대하여 다소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으며, 공연 날이 다가오자 모두들 그 소녀를 배제한 상태에서 라이브를 하자고 의견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오직 하루카만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이돌이 된 자신이지만, 그 과정이 아주 멀고도 힘들었으며,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소녀는 하루카에 대해 큰 우상으로 다가왔지만, 사실 하루카 역시 그 소녀가 느꼈던 초조함과 한계의 벽을 느꼈던 것이다.

 

멤버들의 불안 속에서 실력이 부족한 소녀를 배제하자고 한 다른 백댄서는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가 되니 그 노력을 무단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로 인해 모두가 고생한 시간을 날리고, 게다가 자신의 의도하고 상관없이 성과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루카에게 그 소녀를 지켜주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효율성과 다변성의 저울에서 다변성으로 중심을 둔 것이다. 백댄서의 발언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말이다. 그 말은 들은 이오리는 물론 자신도 여기에 있는 765멤버 모두 라이벌이라고 한다. 하지만 라이벌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7. 라이벌이란 무엇인가?

결국 효율적인 공연운영과 다변적으로 인원을 구성할 것에 대한 갈등에서 하루카는 다변성을 선택한다. 라이벌의 관계성에서 하루카가 고민할 때, 미키가 화장실에서 하루카에게 말을 건넨다. 자신은 프로듀서가 리더의 선택을 자신이 아닌 하루카에게 한 것에 대해 매우 부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은 하루카라고 말한다. 미키는 765멤버에서 대표적인 아이돌이다. 가장 활발한 활동과 인기를 받는 미키가 왜 하루카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미키는 전대물의 리더로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하루카에게 리더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키는 자신만이 월등한 아이돌이지, 아이돌 그룹 내를 모두들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에선 하루카에게 이길 수 없었다.

 

프로듀서가 리더를 하루카에게 지정한 이유가 바로 프로듀서는 단순히 일만 따오고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돌 모두를 돌보고 챙겨줘야 하는 가장이란 점이다. 가장의 필수요건은 어느 누구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이끌고 가야 하는 점이다. 하루카의 아이돌로서 빛나는 모습을 가진 것은 그 균형적인 모습을 지킨 것이다. 하루카는 알고 있었다. 라이벌은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때로는 같이 있어야 할 때도, 때로는 경쟁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이다. 아이돌 세계에서 자신만 혹은 자신들만 존재하는 것은 허무한 공간이다.

 

내가 아닌 타자가 있어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하루카가 TVA에서 라이벌 회사에서 활동하던 3인조 남성 아이돌에 대하여 계속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심을 가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이 이때까지 여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계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하나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루카가 그 소녀를 백댄서 팀에서 배제한다면 이때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8. <러브라이브>와 <Wake up Girls>의 비교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대표적인 아이돌장르 애니메이션은 <러브 라이브>와 <아이돌 마스터>이고, 그 2가지와 비교하여 인지도 낮으나 <Wake up Girls>가 있다. 물론 그 외 아이돌 장르의 애니메이션이 있으나, 2010년대를 기반으로 하여 아이돌 장르를 보면 3가지가 기억이 난다. 각각의 TVA와 극장판을 본다면 <러브 라이브>의 경우 현실적인 요소에서 매우 낮은 세계관이고, <Wake up Girls>는 아이돌세계에 대한 어둠과 부조리를 보여준 점에서 매우 현실성을 반영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나 작화 등의 문제로 <Wake up Girls>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어찌보면 TVA <아이돌 마스터>도 고비는 많으나 모든 멤버가 인기 아이돌이 된다는 설정으로 본다면 진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문제는 TVA를 지나 극장판에서 어떻게 보여준 점이다. TVA와 달리 극장판 <아이돌 마스터>는 상당히 현실적인 요소가 반영되었으며, 억지스러운 설정보단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를 넣었다. 개연적인 관계로서 본다면 매우 납득이 가는 일화인 점이다.

 

그러나 서사에서 비교해야 할 점은 현실세계에 대한 리얼리티 요소만이 아니라, 작품에서 보여주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러브 라이브>의 경우 모든 9인 멤버는 개성이 다르더라도 가지고 있는 목표는 같다. 인기 스쿨아이돌이 되어 학교 신입생을 늘리고, 3학년이 졸업하여 팀이 해산되더라도 영원히 Muse는 우리만이다. 모두가 같은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겉으로 보자면 매우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게다가 다른 학교 아이돌마저 스쿨아이돌의 최고를 보여주자는 설정은 작품에서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개방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폐쇄적인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아이돌 장르에 국한되기보단 걸즈 밴드나 걸즈 그룹으로 전위적인 모습을 보여준 작품으로 <케이온>이 있다. <케이온>에서 1학년으로 입학한 4명의 소녀는 이미 자신들이 부실에 오자말자 2월에 졸업한 선배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한다. 2학년이 되어 새롭게 멤버를 추가한 후 다시 그녀들이 졸업할 때, 2학년 멤버 1사람과 친구 2사람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상황적 조건은 분명 좋지 않지만, 그 자리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연속성이 존재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로만 끝내지 않는다.

 

<러브 라이브>에서는 Muse팀은 해체된다. 대신 아이돌부가 남아 다른 사람들이 이어가지만, 그것은 Muse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Muse라는 그룹을 하나의 아이돌세계에서 우상화된 존재로 남게 된 것 같은 것이다. 즉 소통의 대상이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러브 라이브>와 <아이돌 마스터>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같은 학교 안에서 찾은 멤버들에게 자아와 타자의 구분은 어렵다. 학교의 폐교를 구하자는 목표의식에서 이미 자아의식은 확고하다. 이에 반해 <아이돌 마스터>는 멤버의 목표는 아이돌로서의 성공이다. 학교를 지키자는 집단적 가치보단 그 집단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러브 라이브>와 <아이돌 마스터>는 같은 아이돌장르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Wake up Girls>는 실패한 아이돌 멤버와 처음부터 아이돌이 되려던 자, 그럴 생각조차 없는 자들이 모인 팀이다. 내부의 이야기에서 조율화음이 매우 시끄럽고, 계속 위기만이 다가올 뿐이다. 거기서 각자의 개성이 7가지의 무지개로 되었다는 점에서 다변적인 모습을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러브 라이브>는 <아이돌 마스터>와 <Wake up Girls>에 비해 아름답게 그릴 수는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물에서 장미는 예쁜 꽃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 민들레나 국화 같은 식물은 차로 마시거나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보이는 것과 우리가 그 대상으로 어떻게 사용하거나 여기고 있는지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합목적성을 가진 어느 대상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미적인 가치관이 바뀔 수 있다. 만약 장미가 몸이 편치 않거나 병이 든 사람에겐 아무 필요 없는 식물이나, 연애를 하려는 남성에겐 구애하고자 하는 여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다.

 

하지만 아이돌은 TV세계와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는 가장 화려한 꽃이다. 장미처럼 활짝 펴고 시들어버리면 버리게 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는 것이 아이돌이다. 그렇다면 아이돌에 대해 우리는 효용성만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까 아닐까? 팬들의 입장에서 아이돌은 계속 데뷔하는 끝이 없는 콘텐츠의 샘물이다. 언제나 많은 소녀들이 자신의 화려한 모습을 꿈꾸며 무대를 향하여 달려가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 등장하는 수많은 아이돌은 그저 선택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대중의 선택은 시장성과 연결되어 있기에 기업의 전략성에서 냉혹한 판단으로 이어지고, 대중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아이돌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다고 대중의 눈에 그렇게 비출지언정 아이돌 안에서 그 팀 내부적으로는 다르다. 대중과 아이돌은 팬과 스타의 관계로 전환되어도 아이돌 내부 팀원끼리는 가상의 세계로 만나는 게 아니라 실제 같이 생활해야 하는 구성원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내 같지가 않고, 나 역시 남같이 될 수 없다. 모두 각자의 특성과 장단점이 있으므로 다변적인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

 

내가 글 초반에 데이트를 했던 그 여성에 대해 언급한 점에서 그 분(<아이돌 마스터>에서 아즈사의 인상이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아이돌 마스터>에서는 타카네가 좋다.)이 확실히 스타일이 좋았다는 점과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고 유능해서 데이트를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만날 때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성향은 조금은 달랐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가치관을 서로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가서 자신에 대하여 말하라고 한다면, 분명 그 사람이나 혹은 나나, 또는 불특정 다사들은 자신은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도 하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남들과 비교하여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고 싶으나, 자신만을 특별히 알아주는 것에 대하여 타인과의 이질적인 요소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자신만의 특별함을 모두가 추구하고 느끼는 보편적인 성향이 등장한다. 자신의 특별한 날에 특별한 것을 받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특별한 날에 원하는 특별함의 기준선에서 멀어지면 특별한 게 아니라 특이한 것이 된다. 대중문화와 아이돌 관계에서 아이돌은 특별한 존재로 될 수 없다. 특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같은 특별하다고 여기고 보편적 성향에 따르면 다른 아이돌과 겹치는 경우가 분명 나타날 것이다. 자신만의 개성과 특징을 부각해야 어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어필이 되는 개성과 특징을 과연 멤버 내부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냐는 점이다.

 

그것은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요소도 있지만 분명 열등한 요소도 있다는 점이다. 개성적인 요소는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 수반되는 이중의 칼날이다. 하루카의 활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평범한 소녀라는 아이돌의 단점도 있지만, 그렇기에 모두의 리더로서 이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멤버들도 드러난 것도 있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많다. 하루카가 보는 빛의 너머에는 그 장단점을 모두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자기가 이미 탑아이돌이 된 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과정에 있었던 시간이 당연했을 뿐이다. 하루카가 자신을 알아주고 멤버를 알아주며, 댄스팀원까지 알아준 것은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지 못하나, 나와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얼마나 잘 알아갈려고 노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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