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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레퀴엠>을 읽고 있는데, 처음에 모더니즘에 대해 보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아방가르드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많다. 예술로서의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예술이란 도구를 파괴하기 위한 도구인 아방가르드, 하지만 부정하는 테제에 걸린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아이러니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딜레마이리라.

 

예전에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책에서 러시아혁명과 트로츠키에 대한 글을 봤는데, 폭력이야 말로 위대한 해방의 출구면서도 또 다른 억압의 시초다. 러시아혁명 이후 차르체제의 백위군과 주변 열강의 견제에서 좌파적 성향에서 다시 우파적 성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소비에트연방이었다. 스탈린 집권 이전 그나마 레닌이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레닌 사후 그것이 금이 가고, 결국 스탈린은 좌파라는 이름을 빙장하여 견고한 수구체계를 만든다. 그것을 알고 있는가?

 

극좌는 극우와 별로 차이 없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근본과 원인에 대한 고찰과 연구 개선이지, 절대적인 가치관 아래 무조건적 복종과 거기에 대한 불복종은 숙청이란 정치적 수단은 러시아의 1937~1938년 대숙청을 일어나게 한다. 수백만 명이 죽고, 대부분 머리에 총을 맞고 관통상으로 죽었다. 인간의 죽음에서 대부분 이들의 죽음과 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자는 죽음에 대해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여하지 않고 멀리서 손가락으로 지시한 자들이 문제다.

 

그것을 다룬 도서가 레퀴엠이다.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본 자크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에서 전쟁과 스펙타클은 공존한다. 전쟁터의 병사들은 자기의 의지로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전장에 나가고, 결국 영화나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되는 게 아니라 한줌의 시체로 변한다. 이때까지 진중권 교수의 서적을 몇 권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아마 <네 무덤에 침을 뱉어주마!>까지 읽지 않으나, 그 책이라면 왠지 나올 만하겠다. 그러나 아직 읽지 않았기에 최근에 모던 걸의 열풍에 읽어보아야 할 서적이다. 일단 레퀴엠으로 가자. 레퀴엠이란 죽은 이를 위한 위로곡이다. 사실 위로라는 것은 죽은 자보다는 살아있는 자를 위한 곡이다. 레퀴엠 예전에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에서 사실 그것은 죽은자 보다는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다.

 

왜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로 하여금 스스로 위로 받아야 하는가? 우리 인간의 역사는 항상 투쟁의 역사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관계없는 자라도 누군가는 필요하다. 진중권 교수가 군대시절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이 교수의 인간적인 요소를 보았다. 물론 X자가 나오나 분명히 그것은 개였을 것이다. 사고로 죽은 병사가 어머니를 두고 먼저 떠나가면 그것을 보는 병사가 욕을 한 것이다. 그 병사에게,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고 죽다니 말이다.

 

생각하면 왠지 공감 가는 내용이다. 군대생활이야기다. 내가 대대본부에서 3년 동안 근무했기에 제법 일 잘하기로 소문났다. 물론 야근과 잔업, 사람들이 싫어하는 보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군인 주제, 시청과 구청, 환경부 관한 기관, 항공청(공군이므로), 공항공사(공군이자나!), 농촌공사 등과 같은 관공서 협의를 돌면서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대대본부에 내가 근무하는 부서 이외에도 다른 부서가 있었다. 이름은 영일이었던가? 아마 일병이었을 것이다. 다소 몸집이 작고 말이 많지 않은 사병이었는데, 내가 근무한 사무실에서 문을 열고 가면 20m 복도만 지나면 다른 대대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이 친구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유는 간질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의 흰자만 보인 채 숨을 거두었다. 평소 몸이 좋지 않았는데, 억지로 군에 왔다. 이때 생각하거만,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둘 한심한 것은 여성가족부 국방부 이야기할 때 군대 가는 이들은 대부분 특권층이 아닌 일반 국민이다. 자신들도 군대 가면서 그런 사회지도부의 비리나 부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여자만 욕하고, 여자들도 남자들을 욕하는 모습에 짜증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이 아닌 일부가 하나, 그 일부가 마치 전체인 것처럼 한다.

 

문제는 병사가 죽으면 누가 가장 슬퍼하느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 사병을 통증을 견디고 낳은 어머니란 점이다. 그러면 군인이 죽으면 남자가 슬퍼할까? 여자가 슬퍼할까?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가?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1장 병사들의 노래에서 고향에 좋아하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흠모하는 여자를 나두고 온 병사들은 <릴리 마를렌>을 매일 밤 955분에 듣고 위로받는다.

 

이 책을 먼저 읽게 된 동기는 블로그 이웃 중에 고등학교에서 수험을 준비하는 분이 나에게 레퀴엠에 대해 인상 깊이 읽었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 진중권 교수의 서적에서 욕을 의미하는 글자가 나올 줄이야! 이 책을 보면 전쟁을 혐오한다고 한다. 평소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서적을 읽은 적이 있기에 전쟁 역시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 총균쇠에서 1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총과 칼보단 화학전과 세균전으로 더 많이 죽었다는 내용에 경악했다. 따라서 전쟁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수도 아니면 그 이상일 수 있다.

 

러시아혁명사나 혹은 프랑스혁명사에서 외국군의 개입에서 전쟁의 수행은 필사적이니 말이다. 전쟁으로 통해 인간 투쟁의식만 불을 지피는 모습이 안타깝다. 담론을 잘 하고 좋아하는 진중권 교수가 서문에 매력적인 글을 남긴다. 늘 내가 생각하고 공감하는 내용이다.

 

전쟁에도 미학이 있을까? ‘전쟁의 미학이라 하면 두 가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을 그야말로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파시스트 미학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라는 현상을 미학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태도다. 이 책을 전쟁의 미학이라 할 때, 나의 것은 후자에 속한다.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드러난 곳은 충격과 공포라는 제목이 붙은 디에스 이레부분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얼마 전 현대인의 미적 감정이 숭고시뮬라크르의 상반되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의 책을 쓴 바 있다. 이번에 드러난 현대전의 양상이 마치 현대예술을 흉내라도 내듯이 동일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예전에 미소의 섬사라는 애니메이션인가? 시대는 일본 전국시대 정도인데, 러시아 금발의 거유여성이 6연발 매그넘 권총으로 적을 제압하는데, 살인하지 않은 점과 큰 가슴을 흔들면 가슴 사이에서 탄알이 나와 탄환 집에 총알이 들어간다.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이라고 할까나? 아무튼 어느 여행에서 유곽에 가는데, 그곳 주인은 원래 잔인한 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과 죽음에 대한 회의감에서 유곽을 차리고, 남자들을 오게 하여 무기는 해제하고 쾌락의 세계에 빠지자고 한다. 아직 책은 다 읽지 않으나 <레퀴엠> 마무리에 보면 다비드의 작품 중에 하나인 <사빈의 여인들>이란 작품에서 서로 전장에서 싸우려는 두 남자무리 사이에 여자들이 아이를 안고 중재를 한다.

 

중앙에 보인 어느 한 여성의 옷의 실루엣에 유두가 비친다. 다소 에로티즘한 느낌이 없지 않아 보이나, 중요한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대는 지나친 출산 역시 전쟁의 원인은 맞는 것은 분명하나, 그런다고 죽은 자가 불쌍할까? 산자가 불쌍할까? 객관적으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나, 그 끝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결론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전쟁은 예술인가? 파시스트에게 파괴의 미학이고, 다시 만들고 싶은 자에겐 기회의 예술이다. 그러나 일단 목숨이 가능해야 가능하다. 죽으면 무슨 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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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퀴엠은 너무 짧다는 한계 ( 분량이 ) 가 있습니다.
전 이상하게 일단 책은 두꺼워야 함... ㅋㅋㅋㅋㅋㅋ.
글구 보니 전 처음 진중권 책을 읽은 게 바로 네 무덤'이었네요.
도서관에서 제목이 하도 특이해서... 옛날에 유명한 야시시한 영화 제목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가 생각나서 그냥 진중권이란 이름도 모른 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1-11 10:33   좋아요 0 | URL
재미있고도 조금 가슴 시리는 책이었죠
진 교수가 그래 분량이 적은 도서를 적는 양반이 아니니 말이죠
적나라한 표현과 제목 좋아요. 교수님이.ㅎㅎㅎ
저도 예전의 글을 발췌해 곰곰발까지는 아니나 생각할 거리
만드는 사람으로 등단을...ㅎㅎ
1년 안에 거의 알라디너 세계에서 상당히 올라갔더군요.축하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14:59   좋아요 0 | URL
알라딘 마을이 워낙 좁아서 그렇죠... 뭐... 허허...
 

2012년 작성 글이지만, 2014년에도 유효한 것은 인간이 신화적 욕망을 탐하기 때문이죠.

 

 

안철수의 이름을 모르는 이 한국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안철수에 대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가 제조한 V3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은 모든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대국민적인 서비스를 안내해주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이면서 의사이면서 매우 뛰어난 엘리트다.

 

그가 보여준 경력이나 지식을 보자면 대한민국에서 당연 손꼽을 인물이다. 그런 만큼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번 안철수 대선문제에 대해 나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때까지 대통령으로 간다고 말한 적도 없으며, 딱히 정치를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대신 그가 저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간 변호사 박원순 씨의 지지를 선고하는 바람에 그의 정치적 위치가 드러났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에도 대통령으로부터 정보통신부 장관의 자리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여태까지 정치에 대해 딱히 큰 입장을 보이지 않은 안철수가 작년에 서울시장의 여세에선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 이후 한국에는 4월 총선과 더불어 5년마다 큰 변화를 주는 대선이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가 대선으로 가는 길에 큰 딜레마로서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고로 나는 안철수의 생각을 읽어보지 않았다(2013년에 읽어봤습니다. 글쓴 기준이 2012년입니다). 단지 안철수의 생각이란 도서를 본 사람들의 글을 보았다. 정치적 내 입장에선 참여정부에 가깝지만, 적어도 참여정부 편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치에선 모든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것을 잡는가에서 정치적 판단이 달라진다. 안철수의 생각이 읽든 안 읽든 굳이 읽지 않아도 그의 서적이 말하고픈 것은 대략 짐작한다.

 

그것은 기존 한국 정치의 낡은 관행과 더불어 어려운 경제상황,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입장을 밝힌 도서다. 어떤 인물들이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내놓는데 있어서 현실 비판과 미래 대안을 추구하지 않겠는가?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읽지 않아도 그의 생각은 기존 한국 정치사회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것이다. 적어도 보통 사람 이상으로 이성적 능력이 탁월한 자라면 그런 서적은 충분히 만들고도 남는다.

 

한 주에 도서사이트에 가보면 정치사회 관련 도서가 수십 권 씩 쏟아진다. 사람들이 그런 책들을 찾아 너나 나나 할 것이 찾아보나, 그들에게 그 책들을 읽으면 그저 동의만 할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그 생각은 쉬워도 그 실행은 어렵다. 안철수의 행보나 업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철수가 설사 대통령이 된다고 하던지 혹은 그 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던지 대통령 이전에 생각하거나 계획하던 일들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화장실 나올 때와 들어갈 때와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변수가 생기는데, 국가라는 조직은 거대한 조직과 조직, 사회와 사회, 단체와 단체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외교의 여파는 상당히 민감하다. 미국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동맹을 기본에다가 일본과 중국은 무역과 문화교류에서 매우 중요하며, 게다가 유럽사회와 소통도 중요하다.

 

오히려 그런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우월한 자만이 대통령의 자리로 빛날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100단이나 정치학은 노란 띠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치학은 정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등등 수많은 학문을 토대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이 서구사회의 문물을 받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도 그 미국이란 국가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 속에서 모순도 모르며,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아직도 자유와 평등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모순도 모른다.

 

한 마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쇼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관심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계몽적인 이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심리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신화적 존재로 형성된다. 안철수란 인물은 바로 그 신화의 인물이다. 신화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이 새로이 재생산 되는 것이다. 신화의 존재는 항상 억압과 욕망, 그리고 합리주의와 공리주의를 추구한다. 대신 그것에는 윤리나 이성은 없다.

 

본래 신화의 세계에는 비합리적 상황에서 인물들이 합리적으로 해결하고도 다시 비합리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길거리에서 어느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는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그때 자신의 친부인 라이오스가 있었다. 또한 테베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스핑크스를 물리쳤지만, 그 과업의 대가는 테베의 왕녀와 결혼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오카스테였고, 오이디푸스의 친모였다.

 

이른바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인류의 죄악에서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합리를 추구했으나, 결국 비합리적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의 자식 4명 중에 2명의 아들은 서로 싸우다가 죽었고, 그의 딸인 안티고네 역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한탄하며, 죽기 전 두 눈을 칼로 찔러 장님이 되는데, 장님이 되는 것은 결국 보는 것은 중지하고, 듣는 것만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 중에서 이성 판단력에 큰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눈이다. 눈으로 통해 사물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귀로 듣는 청각은 뇌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자극하기 쉽다. 결국 눈이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의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이성이란 예전처럼 합리와 비합리로 구분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해졌다.

 

인간의 눈이 가진 한계가 바로 착시현상이 존재하며, 가상과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이른바 hyper-reality 극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령 실제로 범죄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언론에서 마치 사회 위험분자로 몰아 그 사람들을 사회적 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이런 행위들은 독재국가와 부패언론의 조합으로 많은 사례가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가진 눈이 TV나 신문으로 간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로 이성적 판단력으로 연계되는가는 미지수란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책만 듣고, 그 입장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인 etic에서 사람들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 정치적 입장과 사회과학적인 분별력, 인간의 의식을 알 수 있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다면 어느 것이 진짜 현실성이 있는지 그 주장이 올바른지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안철수의 책에서는 그런 좋은 내용이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진실로 객관적 분석을 하는 행동인 emic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분명히 안철수 원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나,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위치로서는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낸 것도 아니고, 사회유명인사가 유명인물을 만나 이야기하거나 사회적 약자를 만나 소통을 하거나 또는 정치적 쓴 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통령의 선택이라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때까지 단 1번도 출마선언을 하지 않았다. 단지 주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국민들이 대통령을 하겠는데 라고 말할 뿐이다.

 

그 심리적인 상황을 보면 상당히 신화적인 것이다. 왜 안철수에게 신화가 몰리는 것일까? 인간은 언제나 위기나 상황이 닥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그 자유로움에서 책임의 회피를 꿈꾸는 도피의식까지 연결된다. 즉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데, 그 정의를 대신할 존재가 필요하고, 그 대상자가 잘 못될 경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취소하는 최선의 수단을 가진 것이다.

 

이때까지 국민들의 선거를 본다면 그것이 과연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서 나온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전반을 위한 공리주의와 공공선의 추구인가? 라는 질문에서 그렇게 한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후보자들의 정책들에 대해 과학적 기준으로 보거나 합리적 의문을 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한다. 그 합리(合理)적 요소는 이성적인 요건의 합리가 아니라 합리(合利)에 의해서다. 결국 이익에 따른 것이고, 그 이익은 정말 자신의 생활주변의 혜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익, 즉 자기만족이다.

 

그 자기만족은 심리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투표이다. 정치라는 것에서 이성적인 영역은 오로지 그리스 폴리스국가일 때만 가능했다. 하지만 그때는 단 10%의 성인남성만 가능한 제한적 직접민주주의였으며, 다르게 보면 귀족민주주의다. 그 뒤에 노예에 대한 학대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결코 윤리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국민을 토대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미국에 다녀오면서 토크빌의 책을 읽은 것처럼, 오히려 국민 대부분의 정치참여가 오히려 대중의 폭력성을 정치에 반영한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여기나, 그 합리는 결코 합리적이지 못했다. 단지 자신을 합리적으로 만들어줄 뿐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비합리적 판단들이 합리적으로 변하는 순간 오이디푸스가 처한 신화의 세계에 이끌려간다. 결국 신화에서 비합리와 합리에서 어긋난 비합리가 합리로 변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합리를 삭제 내지 제거해야 한다. 사람을 치면 죽음이란 점이다. 광기라는 것은 결국 문명을 이루어온 인간의 비합리를 합리로 바꾸어온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번 안철수와 관련하여 대통령 출마할 경우 비밀을 폭로한다는 사실 역시 그런 신화의 연쇄에 맺힌 하나의 스캔들이다. 아직 결정된 바도 없이 자세를 유지하는 안철수 진영에 대한 비합리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합리를 추구했다. 안철수 측의 금태섭 변호사가 발표하고, 박근혜 측의 정준길 공보의원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 협박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상대방에게 그런 협박을 했다는 자체는 크나큰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이며, 만약 친구간의 농담이라고 한다면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그렇게 친구로서 대화라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어불성설이다.

 

만약 진짜 그것이 정준길 공보위원의 친구로서 농담이라면, 바로 공보위원 자리에서 물릴 이유는 없다. 이 또한 신화의 탄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화라는 서사는 희생제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화(巫俗神話)는 단순히 무속(巫俗)이란 전통사회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차라리 오늘까지 이어오는 공시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신화의 영속성에서 가능한 것은 인간의 욕망과 억압과 해방의 미학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신화에서 누군가로 통해 이익을 보려는 개인이기주의의 집단화로 이어진다. 공리주의와 합리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 근거가 된다고 하나, 그 이면에는 소수약자의 희생과 외면이란 하나의 희생제의가 따른다. 남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올라가는 신화적 욕망에서 그 희생의 주체자가 반사이익을 꾸준히 누리던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왜 조선 개국공신들을 태종 이방원이 주도 아래 죽어가야 했을까?

 

그들은 이성계를 도와 고려무신인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를 멸망하게 했다. 고려라는 아버지를 조선이란 아들이 거세한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성계의 주변 인물들은 태종의 정치권력과 그의 아들 세종에게 큰 벽이었던 것이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아버지에 대한 살해성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세종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었다. 아들이 거세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충성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아버지에 대한 권위가 흔들릴 경우 다른 아들들이 위험에 빠지면 누군가를 희생을 내야 한다.

 

그 희생자는 온갖 비난과 비방, 의혹과 불문을 품고 정치의 뒤 무대로 사라진다. 그런다고 희생자가 모든 것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화제의에서 희생을 선택한 바리데기는 죽어가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은 후에 신이 되었다. 신화란 희생과 더불어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신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은 계몽이나,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계몽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깨어나기이나, 한국에서는 억지로 주입하는 억압에 의해 신화가 깨어지고, 또 다른 신화로 메워진다. 안철수가 신화적 존재가 되는 것은 과연 누구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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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이 책 별로다. 우연히 형수 집에 갔는데, 형수는 책을 잘 읽지 않으나 동생은 읽는 편이었다. 하지만 책을 들어보는 순간 너무 깨끗하여 아직 읽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으나, 사회구조나 현실적 조건에서 경제란 중요하다. 단순히 경제성에서 화폐자본의 움직임만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경제성이란 연료효율부터 신체능력을 낭비하지 않음도 그렇다. 실컷 낮잠을 자다가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 역시 경제성이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단시간 내에 많은 식량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자본주의에 그저 찬양하는 사람의 책이란 사실을 알았다. 경제학의 아버지란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 이전에 윤리도덕학자였다. 그가 주장한 <국부론>을 현대 경제학자들 중에서 많이 우려먹는데, 그것은 사기꾼이다. 애덤 스미스의 경우 경제에 윤리적 가치를 집어 넣지 않고, 공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경제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라 했다. 비정규직이나 혹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데, 힘든 일을 하여 어떻게든 벗어나는 것에서 도저히 길이 없다면, 급여에 대한 부분에서 애덤 스미스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덤 스미스는 베이커리 가게의 빵이 잘 팔릴 것에 대해 시작하는 점이다. 빵을 사는 것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란 점이다. 빵은 먹는 것이고, 생계수단에 필수적이며, 인간의 생명을 오고가게 하는 중요한 물건이다. 빵을 사는 돈을 버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다. 그것은 이익보다 더 급한 생존성이다. 생존에 대한 노동과 이익에 대한 노동은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을 두고 윤리도덕을 무시하는 자태는 오히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적 가치를 하락 시키는 것과 같다.

 

내가 알게 된 동기는 마르크스편이었다. 이 저자는 기본적으로 철학은 모른다. 철학적 관점에서 경제를 보지 않고, 오로지 돈버는 경영자의 입장에서 경제를 보았다. 경제학적 구조에서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는가? 아니면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로 보는가에서 이 사람은 후자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잘하든 못하든 시시콜콜한 사생활의 험담하는 꼴을 보고 학자로서의 가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고로 여기서 존 스튜어트 밀이 나오는데,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 영국에 마르크스가 망명온 시절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자유주의철학에서 매우 중요한데, 조금 마르크스와 다른 개념이라도 그 근본은 비슷하다. 인간의 사회구조적인 부분을 강도의 차이에 두지, 문제점을 확연히 같이 생각했다. 어째든 존 스튜어트 밀은 제레미 벤담의 가르침과 아버지 제임스 밀의 가르침을 받은 철학자 겸 경제학자다.

 

철학의 기본없이 경제학에 두고 경제사를 말한 저자에 대해 본다면 경제는 인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경제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과 같이 오랜 기간동안 철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를 지닌 국가에서 나온 책과 이 사람의 책을 보면 감이 온다.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방에 대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롯한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별했는데, 그런 개념조차 모르니 그저 뚜꺼운 경제학역사서라고 보면 된다. 영국에서 애덤 스미스가 나온 점과 리카도, 맬서스,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영국인이니 영국의 경제에 대한 역사서적이 좋을 것이다.

 

미국이 성공한 이유는 케인즈의 <일반이론>에 의해서다. 밀턴이나 후반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아나, 케인즈주의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으로 안다. 그러나 경제학과 경제를 바라보는 것은 조금 다르다. 경제는 정치적인 이익이 관여하므로, 존 롤즈의 <정의론>을 조금 참조해야 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거장으로 자유주의철학에서 기라성 같은 책이다. 물론 한국에서 롤즈는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것이다. 안타까우나. 그리고 더 안타까운 사실은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퇴임교수가 존 롤즈의 연구대가인데, 이분이 롤즈의 책을 저술할 때 전두환 시절이었다. 그 속에 자유에 대한 기본개념이 나오는데, 그 책을 번역하고, 머리말 내지 여러가지 활동을 생각하면 자신의 철학적 연구가치관을 전혀 행동하지 않은 분이다. 철학자들에서 한국은 철학이 부족한데, 이론만 가득하고 권세만 누리는 철학교수가 많은 것 같다. 차라리 <만민법>을 번역한 장동진 연세대학교 교수님 라인은 그나마 활동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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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1-0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책을 읽으셨네요.저도 읽고 싶은데 어려운 책을 보면 자꾸 졸리는 체질이라...ㅡ.ㅡ
그나저나 늦었지만 만화애니비평님 서재의 달인 등극 축하드리면 새해 복많이 받으셔용^O^

만화애니비평 2014-01-08 08:49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제가 서재의 달인인가요? 아직 몰랐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최근에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의 인생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등장했다.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고, 예전에 <여보 나 좀 도와줘>와 <운명이다>를 보면서 부림사건 때 그 치안검사와 짜고치는 고도리를 치는 판사가 지금도 공위공직에서 혹은 높은 자리에서 나라녹을 먹으며, 국민이란 이름을 말할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과거에 죄없는 사람을 가두어 때리는 것도 모자라 전기고문, 물고문과 같은 비윤리적인 행위조차 서슴없이 하던 그들이 이제는 국민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대의를 말할 때마다 입가에 쓴 웃음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왜 이리 노무현이 생각나는가?

 

사실 노무현이란 사람을 나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다. 정치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말조심하지 않으면 끌려간다는 주변 어른 이야기만 들었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심취한지라 세월아 네월아 보냈다. 하지만 2001년 부산 북구에 폐기물조사 나갈 때 우연히 국회의원 사무실에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이름도 까먹었다. 단지 현재나 앞전 정권에 실세에 가까운 인물이고, 대단한 권력자란 사실만 안다.

 

뭐 모르고 간 대학생에게 거기 비서진인지 졸개 쓰레기 너부렁탱이 같은 자식이 와서 욕을 하며 우리를 내쫓은 것이다. 그냥 "학생 여긴 올 때가 아니야." 정도만 했다면 아무런 감정도 없다. 나에게 "야이 쌔끼야 어디라도 오는거야! 빨리 안 꺼져 쌔꺄!"라고 하였다. 덕분에 그 시대 한XX, 신XX는 나에게 철철부지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2002년 대통령 투표를 처음으로 하고, 당시 노무현이 되었다. 당시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읽어보고 선택한 것 같았다.

 

지금 우리 집에 1권 16쇄가 있는데, 2005년에 나온 것이다. 상당히 많이 팔린 도서고, 볼 때마다 자신의 자랑보단 가슴 쓰리고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이야기만 있다. 문송면 군이 15세 수은중독으로 괴로워하며 죽는 것, 노동자가 시위하여 체루탄 맞고 사망한 것, 원진레이온 이야기는 아직도 울화통이 난다. 그때 그렇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한 놈들이 지금도 버젓이 큰 소리 치며, 뻔뻔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이 비정상적인 공간에 그저 혀를 찰 뿐이다.

 

그래서일까? 대통령 이전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퇴임한 노무현은 너무나도 호불호가 갈린다. 아마 우리 나라 인권운동가, 노동운동가 중에 부림사건부터 국회의원 노무현, 대통령 이전 노무현 만큼 힘든 투쟁을 한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만큼 가장 욕 많이 먹고 그 만큼 퇴임 후에 사랑받을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변호인이 나오고, 페루애님도 노무현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무현에 대해 엄청나게 비판적으로 대하여 좋아하지 않았으나, 노무현 서거날에 무척이나 울었다고 말이다. 페루애님도 그러하거니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학자 겸 문화평론가인 진중권 교수도 그랬다. 유시민과 토론도 하고, 참여정부시절 많은 비판을 날렸다.

 

  

 

 

 

 

 

 

 

 

 

 

 

 

<빨간 바이러스>에 노무현과 노사모에 대해 비판했고, <레퀴엠>에도 역시 노무현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글을 쓴 것이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이란 도서에서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너무나도 논리적으로 작성한 이성적인 글이기에 왠지 조금의 아쉬움도 남으나, 진중권은 알고 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신이 지지한 사람이라도 비판해야 한다고 말이다.

 

진중권 교수가 처음 노사모가 나올 때, 노무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웹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노사모처럼 자발적 지지자를 가진 정치인은 노무현이 유일합니다! 원래 정치는 이래야 합니다! 이게 표준이어야 합니다! 노사모 회원 수는 당비를 제대로 납부하는 민주당원 수 6천 명을 능가합니다! 이게 뭘 말하겠습니까?”

 

민주당과 구태의연함과 노무현의 참신한 개혁성의 콘트라스트(대비)지요! 게다가 이인제는 필패지만, 노무현은 후보만 되면 그 잠재력 폭발력을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지요!”

 

진중권 교수는 루소의 일반의지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주의적인 논조로 정치에 이야기하려고 한다. 물론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으나,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적어도 약자를 억압하고, 외면하지 않는다. 단지 입이 독설로 가득할 뿐이다.

 

그래서 페루애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순간 진중권 교수가 생각이 났다. 개인적으로 내가 진짜 노무현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권변호사? 노동운동가? 보다는 군대시절이다. 국내에서 반대하던 이라크파병에 관련된 일이다. 내가 있던 부대에 공군수송기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 주변에 몇몇 사람들이 이라크에 몇 개월 동안 갔다. 내 사무실 직속 고참도 자이툰부대로 가고, 내가 전역 전에 온 다른 고참 역시 자이툰부대에서 돌아왔다. 이라크 파병 생활을 옆에서 직접 간 사람에게 들었으니, 너무 고마웠다.

 

어느 장병을 끌어안아 주는 모습에서 안아주는 것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전쟁의 중앙에 가서 그것도 좋은 비행기도 아니 공군수송기를 반나절 이상 타고 갔다는 사실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국민보단 예비역 공군 부사관으로서 노무현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진보적인 가치만 아니라 보수적인 가치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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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28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이름이 등장했네요... ㅎㅎㅎㅎㅎ. 많은 공감을 얻어서 핫 코너에 등록되어으면 하네요... 전 오바마를 지지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면 비판을 하겠다고, 어디에다 쓴 적이 있습니다. 진중권도 노무현을 지지했지만 대통령이 되자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죠. 전 이게 옳은 태도라고 보여집니다. 박근혜 지지자가 무서운 것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박근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했기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뭐.. 그냥 개인적 생각입니다.. 헤헤...

만화애니비평 2013-12-28 18:35   좋아요 0 | URL
그네보나파르트 내지 루이 그네파르트라고 생각합니다..ㅋㅋ

비로그인 2013-12-31 16:5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서재지수 높은 두 분 비판하러 알라딘으로 왔써염..

비로그인 2013-12-3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묘하죠.
사람들이 노무현 관련해선 어떤 드라마적인 추억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총각 때 제가 살던 지역구 의원 출마하신 적 있어요.
당시 종로구를 꽉 잡고 있던 터줏대감 격 후보한테 밀렸지만 그때 우연히 유세 보고 들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인간적으론 여러 모로 끌리는 사람은 분명한 것 같아요.

만화애니비평 2014-01-01 13:43   좋아요 0 | URL
노무현 자체가 인간드라마입니다. 신화적 욕망에서 오히려 이명박이 더 신화적 욕망에 부여받을 수 있으나, 일종의 억압에 대한 해방에 대한 욕망을 노무현이란 인물이 가지고 있죠. 그래서 인간드라마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그것을 이룬 사람, 노무현 대통령하고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의 강의를 듣거나 직접 대화해보니, 정말 옆에 있던 사람 맞아? 라고 할 정도로 권위적인 요소는 없고, 진짜 인격적으로 대해주더군요.
그가 잘하고 못하고의 공과 실은 분명하나, 우리나라 사회구조적인 여건과 현실을 생각하면 저만큼 잘한 대통령은 없습니다.

비로그인 2014-01-01 16:24   좋아요 0 | URL
제 덧글은 폄하가 아니에요.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굴곡을 겪었고 인간적이라는 점은 사실이죠.
또한 당시 그 자리에 그나마 노무현이란 사람이 있어서 이 정도였다는 생각도 들구요.

허나 너무 신격화(? 어폐가 있지만 마땅한 다른 어휘가 안 떠오르네요)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히딩크가 떠오를 정도.
세상에 접사해서 보면 삶이 인간드라마 아닌 사람 없습니다.

참, 그나저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명박을 끌어다 비교를 하세요?
제 정치적 정체성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지 않는 한.. 이거 섭섭하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1-01 21:27   좋아요 0 | URL
아이고 오해를 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글의 맥락을 제가 잘못 잡았군요. 이명박을 두고 비교한다는 자체가 논센스이나 신화적인 욕망, 즉 한국사람이란 특유의 신화적 심리로 접근한다면 하는 개인적인 논평이죠.
당연히 새벽님의 덧글이 펌하가 아니란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혹시라도 오해하여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드릴게요.

비로그인 2014-01-02 05:19   좋아요 0 | URL
오해 풀렸습니다. :)
바로 그 이명박,을 성공신화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욕망..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밀양 송전탑에 대해서 말이다. 밀양 송전탑이 어떻게 되었든, 자신과 무관한 일이므로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은 것이 현대인이다. 우리가 접하는 생활고로 죽거나 혹은 무척 어려운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내가 가장 증오하고 싶은 인간이 바로 나만 잘 되면 된다거나 혹은 자신의 우리한 떡밥만 찾는 인간이다. 물론 인간은 이성을 따르기 전에 본성적인 이익에 따른다.

 

인간이 비록 사회적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해도 결국 사회적이기 전에 동물이다. 동물적 본능이 결국 인간을 하나의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만든다. 최소한 동물은 자기 종족에 대해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공격하거나 죽이지 않으나, 인간은 서로 죽이기를 한다. 만인 대 만인이라는 인간형의 투쟁의식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닌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던 시절,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어느 정도 동의 하였으나, 반대한 부분이 민주주의적인 요소에서 이성을 중시한 그로서 정치적 참여권을 전 국민참여적인 민주제가 아니라 귀족적 민주주의로 하기를 바란 것이 있었다. 분명 나는 그것을 반대한 이유가 일종의 계급의식에 따라 부르주아만 정치참여권에 해당된다는 인식이 잘못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나 역시 정치권에 대한 참여에서 제한을 두는 것이 맞다고 여겨진다. 정치적인 행보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프랑스인권선언문에서 개인의 자유나 이익을 침해되서는 아니되나, 오직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공공사업이란 것이 진정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들며, 정치적 입장에서 정경유착이란 부분이 계속 뒤따라오며, 특히 지역감정에 따른 이분법적인 형태에서 전혀 무관한 것에도 아전인수격인 파렴치한 정치인들을 볼 수 있다.

 

가령 지역사회에서 개발하거나 유치한 사업이나 행정계획이 국회와 무관하고 시의회나 구의회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좋은 일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 막상 행정적 절차나 업무진행은 그 담당기관이나 부서 혹은 밑에 고생하는 말단이란 점이다. 관료주의적인 부패한 사고방식이 바로 이런 점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올바르지 못한 정치인을 나오지 못하도록 해야 하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그런 정치인이 나와도 여전히 표를 준다는 사실이다.

 

지역감정이란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올바른 정치적 참여를 위해서는 투표권을 제한하는 게 바르다는 점이다. 자치 민주주의국가의 대의 속에서 그것은 특혜와 이권을 부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심정이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투표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투표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차를 이행하여 그것에 만족해야 하는 점이다. 까막눈 할머니나 혹은 무조건 1번이나 또는 정치인의 부도덕함을 보지 않고 당락만 보고 결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국가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토크빌의 말처럼, 정치인에 대한 선거, 출마, 지정 등을 선거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해야 하는 점이다. 투표할 권리를 남용하는 것만큼 위험한 발상은 없다. 선거를 할 수 있는 시험을 보되, 시험에 합격하면 5년 동안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시험을 보지 않으면 투표를 시행할 수 없다. 또한 투표권을 가지고 투표하지 않으면 남은 기간동안 투표권을 회수하고, 5년의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시험1회를 유보한다.

 

시험문제는 기본적으로 헌법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 대한 의식과 국민에 대한 의무와 자격, 그리고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소양이 필요하다. 존 롤즈의 <정의론>을 시작하여 <만민법>이란 정치적 자유주의 국가사회에서 지식인이 가지야할 시민윤리의무를 적은 도서가 있다. 칸트주의에서 비롯한 정치적 자유주의에 도달은 결국 이성의 자유라는 점이다. 이성의 자유가 없는 현실에서 내가 제기한 담론은 무리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정착되어야 어느 정도 나라가 발전을 할 것이다.

 

기본소양과 윤리의무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어설프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나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말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자유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다. 한국에서 그것조차 어려운 세상이니 참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론은 "모에를 얻는자 만이 세계를 구한다!"처럼 마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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