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
김정호 지음 / 생각의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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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더운 여름날 봉하마을에서 제초와 행사보조를 하였다. 봉하마을서 봉사활동하던 때 언제나 마을을 지키시던 김정호 대표님, 책으로 내셨네요. 5월 23일 봉하마을에 못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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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종과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이란 임금은 재위기간이 매우 짧은 왕이었다. 본인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지만, 자신의 큰 형님이 병으로 죽어 아버지 세조를 대신하여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예종이다. 예종은 참으로 안타까운 왕이다. 그가 일찍 죽은 이유도 있지만, 아버지 세조는 역사의 역대평가에서 매우 좋지 못한 왕으로 평가되었다. 세조는 세종의 아들이고, 태종 이방원의 손자이다. 이방원은 철인군주에서 철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철인적 정치기반이 없다면 세종대왕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세종의 아들 문종과 세조, 형제는 매우 친하고 서로를 아꼈다. 사랑하는 친형을 보내고, 왜 조카를 죽이야 하는 삼촌이 되었을까? 태조 이방원은 고려를 역모하여 왕조를 일으킨 무관이다. 그의 아들 이방원은 무관의 아들로 태어나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임금이란 무릇 학문을 뜻을 두어 큰 대의를 지니어야 하나, 그가 가진 역사란 피로 얼룩진 나날이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자를 베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베였으며, 자신의 아들을 반항하려고 하던 자까지 베던 무정한 군주였다.
     
그러나 태종의 방침은 다 이유가 있다. 임금이란 무릇 만 백성의 아버지로 있어야 했다. 세자의 아들이나 혹은 왕실과 종친, 그리고 외척의 가족에 있어서 안 되었다. 만 백성이 아버지, 즉 어버이로 되려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했고, 백성의 억울함은 정치사회적 모순과 부조리고, 그 부조리를 일으키는 것은 권력을 잡은 인간이다. 권력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권력을 잡은 자는 임금이고, 임금은 측근에게 돌아가는 권력은 막강하다. 임금 스스로 권력을 좌지우지 하지 않으면 만 백성에게 일어날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멸사봉공, 말이야 쉽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감상하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왕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을까? 조선왕조실록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조선의 역사에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간극은 멈추지 않을 분쟁과 위기의 순간이다. 그 이유를 대자면 사실 세조가 일으킨 난이나 혹은 그 이후로 일어난 많은 역성과 반정, 전쟁과 조선의 패망조차 이 관계성에서 나온 하나의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2. 지루하나 들어볼만한 조선역사 이야기
세종대왕 시절,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 있었다. 그 이름은 황희 정승,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만한 이름이고, 황씨 문중에서 최근 어느 정치인 발언에 분노하게 만든 이름 중에 하나이다. 황희는 영의정이란 직책을 맡았다. 영의정이면 조선 정부조직 서열 2위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가난했고, 노년에도 세종의 엄청난 노동착취(인재 활용)에 의해 제대로 쉬지 못한 노인이었다. 황희 정승처럼 말 그대로 정사에만 몰두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황희가 너무 노약하자 그의 후계자로 장군 김종서를 키우려 한다. 김종서가 무관으로 생각하나 그도 역시 문관의 기질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조선의 왕은 군주이나, 조선 군주의 후예 모둔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왕의 후손 중 대군은 왕이 되지 못하고, 그의 후손은 사대부가 된다. 사대부가 되어도 입관하지 못하면 그대로 몰락할 수 있다. 그런다고 종실의 후손들은 왕족을 배신하지 않았다. 문제는 왕실이 사대부가 되듯이, 그 외의 사대부도 사대로 이어져 간다. 사대부(士大夫)에서 선비는 벼슬하지 않거나 5품의 벼슬까지 지칭하며, 대부는 4품 이상의 벼슬을 의미한다. 외국에서 군주가 있으면 귀족과 기사계급이 있다. 왕에게 충성하여 영지를 다스리거나 혹은 정사에 관여한다.
     
그러나 모든 귀족과 기사가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충성하는 것은 왕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모른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생명과 이기심에 충성하나, 그 이상으로 충성하거나 혹은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왕과 신하의 관계성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된다. 왕의 권력이 너무 심하면 독재가 있어날 수 있으나, 너무 약할 경우 신하에 의해 위축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왕권의 확립이 중요한 것은 다 그 이유가 있다.
     
3. 왜 왕권인가?
 
신하의 권력이 심하면 왜 문제가 생기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조선에서 왕권에서 신하의 권력으로 넘어간 계기는 다름 아래 중종반종이라 나는 생각한다. 중종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란 생각도 없었고, 그저 재야에 편하게 머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복형인 연산군은 무섭고, 그의 폭종은 더욱 무서웠다. 연산군 폭정이 길어도 기간이 10년이 넘는다. 그러다 어느덧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중종반정의 명분은 연산군의 폭정과 반륜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한참 그런 폭정과 폐륜을 일삼을 때 역성혁명을 일으킨 게 아니라 한참 뒤에 일어난 것인가?
     
연산군은 낭비가 심했다. 술과 연회, 거기에 들어가는 많은 경비, 이때까지 연산군의 주변에서 벼슬하던 이들이 갑자기 반정을 일으킨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낭비로 인해 부족한 재고를 채우기 위해 반정을 할 생각조차 없던 대신의 재산을 탐냈기 때문이다. 결국 재산, 가진 것에 대한 탐욕이다. 연산군의 어리석지만, 중종에 일어난 기묘사회처럼 중종시대 권력자들도 자신의 욕심으로 무고한 사화를 일으킨다. 예종이 왜 고민하고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인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보면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지 않은가?
     
4. 영화는 픽션이나 전후맥락적으로 다르다.
 
영화에서 과학적 근거로 통해 많은 미스터리를 푸는 예종의 모습이 나온다. 괴물물고기나, 흔들리는 호리병이나 기타 등등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종이 권력이 없다는 점이다. 아버지 세조는 반정에 의해 옹립된 군주이고, 군조로 옹립될 때 3정승 체계에서 6판서 체계로 이전하려 했다. 그 의미는 3정승이 6판서의 정치적 입안을 왕에게 직접 다 올리지 않고, 중간에서 조절하는 것이다. 왕에게 모든 처분을 맡기지 않으면, 나머지 신하가 처리하고, 게다가 이조는 문관의 인사권, 병조는 무관의 인사권을 결정한다.
     
인사권을 가지면,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에게 관직을 주고, 그 관직의 권력에 의해 정치적 변수가 일어난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에 의해 왕좌를 받은 인물이다. 반정공신은 아버지 세조를 돕기 때문에 그 권력이 막강하다. 세조가 문종과 단종의 충신 김종서를 죽인 이유는 권력의 유지와 더불어 권력이 신하보다 왕에게 더 가기 위해서이다. 예종은 영화에서 보면 외로운 임금이다. 이미 훈구대신이 혼사 정략으로 통해 사돈을 맺어 권력의 사슬을 굵게 다짐 이후에서 정사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5. 사관 윤이서의 등장
 
사관 윤이서는 아무런 권력적 사슬이 없다. 그가 사관이 되어 왕을 따르고, 다섯 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이유는 윤이서에게 권력의 이해득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은 계속 독살설이나 암살설에 시달리는데, 그 이유는 신하들 사이 권력의 관계성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군주는 오로지 백성을 위해 산다. 백성의 배불리 생업에 보장케 하고, 억울한 일에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예종의 조카, 형님의 아들은 추후 조선 명군 중 하나인 성종이 된다. 연산군의 아버지이나, 그는 인간을 매우 아꼈다.
     
실록의 기록에서 어느 한 여종노비가 다리가 잘린 채 추위에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극진한 간호를 명하고, 그 여종노비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도록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여종, 관비도 아닌 사비이면 그 처지는 비참했다. 그러나 성종은 그 노비를 위해 정성을 다 했으며, 조선왕조에서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서면 임금은 직접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스스로를 책문했다. 백성이 괴로운 이유는 그들의 물질적 주인인 양반이 문제였다. 권력을 가진 이유로 노비나 백성을 괴롭히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런 양반들이 계속 관직에 출세하고, 권력의 고리는 계속 연결되어 깨지지 않으면 어째 백성의 고통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벼슬 중에 특히 문관, 그중에 임금 곁에 있을 수 있는 자는 양반사대부 집안의 문관이다. 그런 문관이 권력과 밀접한 순간 왕의 개혁의지는 이미 수가 틀리게 되는 것이다. 윤이서는 권력 사슬구조가 없으며, 부당한 일에 납득하지 못한다. 예종이 그를 거둔 이유는 기존 구조의 문제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구조보단 그 구조를 이루는 인간이 문제였다.
     
6. 경제학적 관점
 
조선의 군주와 사대부는 백성의 경제적 상황이 중요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돈만이 아니라 배불리 먹고 제대로 된 물건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되는가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철광석이다. 철은 인류가 모든 발전을 하기 위한 물질이다. 무기에서 검과 창이 되고, 집과 배를 만드는 구조물이며, 인류역사에서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한 기초적 광물이 철이다. 그 철이 누군가 독점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조선은 자본주의 국가, 아니 근대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특성에서 재료의 중요성은 보인다, 지금도 건설현장에서 레미콘 톤당 가격이 무척 중요하다. 하물며 철이면 얼마나 더 심한가? 누군가 철광석의 존재를 숨기고, 그것을 독점하면 어찌 되는가? 국가는 비싼 것에 무기를 만든 원자재 철을 구매하고, 백성은 생활용구 원자재인 철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 결국 국가가 빈곤해지고, 백성 역시 삶이 수척해진다.
     
영화가 비록 조선이란 이전시대를 현대적 감각을 다소 반영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요건을 배제할 수 없다. 서양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경제학을 강조하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적재적소에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의 경제적 관념과 경제학의 경제관념은 다르지만, 영화에서 경제학적 관점은 백성에게 필요한 철의 제공이 원활하게 되어야 하나, 누군가 그 철광석을 일부러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이 보낸 밀사조차 암살당하고, 왕의 목을 노리는 자들도 속출한다.
     
7. 코미디지만 코미디가 아니다.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예종과 사관 2사람의 이상한 플레이로 웃음을 자아낸다. 모든 것을 기억하나 다소 얼이 빠진 사관, 그리고 똑똑하지만 엉뚱하고 자애로운 군주, 이들이 왕권을 위해 움직이려 하나, 주변은 온통 적이다. 장면을 보면 예종이 죽은 것처럼 소문나자 모든 고위대신들이 속이 편한 것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백성들은 철이 비싸서 생계에 많은 부담이 와도 이들에게 큰 문제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왕이 개혁안을 내놓으려 하면 백성의 이름으로 만류한다.
     
백성의 이름은 팔아먹으면서 백성의 등골을 빠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예종의 모습은 보면 엉뚱하더라도 성군(聖君)이고 명군(明君)이다. 하지만 그런 군주일수록 간신배에겐 그저 불편한 임금에 불과하다. 임금은 외로웠다. 그리고 백성들은 혼란에 빠진다. 예종이 보여주는 기상천외한 과학, 판단력, 인덕은 분명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가 넘지 못한 벽은 여실히 보여준다. 형님의 아들 성종을 아끼는 그의 마음에서 알 수 있다. 고위대신이 종실을 이간질하는 책략에서 예종은 오히려 종친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나온다.
     
성종 다음 중종은 명군 대신 용군(庸君)으로 통한다. 명종과 선조 역시 사화와 옥사를 일으키고 인조는 전쟁의 화를 만들고, 숙종은 용군의 특성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피를 흘리게 만든다. 정치적으로 군주의 위치가 불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 이간질과 정치적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종은 종실을 지킨다고 하나, 후에 그것은 좌절된다. 그래도 성종의 업적인 경국대전의 초석을 마련한 것이 예종이니 어찌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8. 영화의 흐름과 원작, 시대적 조건
 
영화는 예종의 엉뚱한 사관의 어설픈 행동을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만들어낸다. 웃음이 나오지만 웃음이 나오기도 어렵다. 이 영화의 원작은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원작은 만화책인 것으로 안다. 예종은 20살 정도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배우 이선균 씨는 나이가 제법 있으나 20살의 연기를 맡아야 했다. 게다가 예종은 젊은 나이에 운명을 하고 만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무술실력이 매우 뛰어난 장수이고, 이방원과 그의 후손 왕조 역시 무술이 뛰어난 군주(효종과 사도세자)는 많으나, 예종의 무술을 보면 너무 지나치게 수준이 높다. 무관으로 입관하여 오랑캐가 출몰하는 국경의 부사 내지 무관의 무술실력은 보통은 아니다. 작가의 마인드나 영화연출을 위한 장면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너무 예종은 띄워준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암수는 리뷰에 올리지 않겠지만,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이란 자리와 더불어 임금을 중심으로 둘러싼 신하들의 권력관계이다.
     
조선이 몰락하고 망한 이유는 바로 왕권의 몰락이다. 태종시대에 누가 조금이라도 백성의 재산을 탐닉하거나 혹은 국가 재산을 가로채면 용서란 없었다. 왕자의 난이 2번 일어나 형제를 죽인 정도이니 그 처참함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예종에겐 그런 증조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쓸쓸한 임금, 그 옆에 지키고 있는 오보 윤이서지만, 권력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영화 <사도>에서 송강호 씨는 영조를 맡는데, 그때 대사 중에 이 장면이 인상이 깊다.
     
단지 대사 모두가 기억나지 않지만, “왕이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하가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책임지는 잘기이다.” 이미 영조는 조선왕조의 권력이 임금이 아니라 신하에게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조선의 권력이 노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노론에 의해 임금이 된 왕이다. 형님 경종의 죽음에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평생 후회한 임금, 그 모든 것은 조선왕조의 권력이 군주정이 아닌 신하들의 중심이고, 그 신하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이익에 의해 움직이니 당연히 백성들은 슬퍼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예종이 그렇게도 바삐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어도 예종의 입장에서 픽션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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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 철혈의 오펀스> 시리즈가 완결되었다. 1기와 2기로 구성되어 철화단이란 팀이 성립하여 몰락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동안 건담 시리즈는 퍼스트 건담, 제트, 더블 제트, 썬더볼트 등을 감상했다. 기존 건담 시리즈를 보면 주인공은 특별한 선택적 존재가 강했다. 어디에나 있을지 모르나, 어디에나 없을 것 같은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란 속성이 매우 강했고, 그 비운의 존재는 부모가 정치인, 건담이나 기체 과학자 등 건담을 타게 된 동기는 어느 우연의 일치일 수 있겠지만, 그 일치는 어떤 정해진 하나의 숙명과 같은 일들이었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를 방영하면서 중간에 제작된 썬더볼트나 유니콘을 보면 그런 느낌이 매우 강하다. 특히 유니콘 시리즈를 보면 폰 프록탈은 샤아 아즈나블의 재림 내지 그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고, 건담 유니콘 조종사인 버나지 링크스는 베일에 쌓여진 가문의 사생아로 등장한다. 그와 같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히로인은 지온 총수의 영애 미네바 라오 자비는 이미 공주 신분이었다. 건담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이렇게 거대한 세력의 얼굴이나, 그 얼굴 아래 숨어 있는 거대한 뿌리의 원천과 깊은 연계성이 있었다.

 

그러나 철혈의 오펀스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인간이 아닌 하나의 기계였다. 건담 조종사들은 우주의 진화에 이끌려 이른바 뉴 타입으로 각성했지만, 그들은 뉴 타입 같은 초월적 능력을 가진 자도 아니고, 거대한 권력과 은밀한 권력을 가진 자도 아니다. 말 그대로 우주의 쥐 혹은 떠돌이 개들의 집단이라 해도 의문이 없을 정도였다. 건담 시리즈에서 이렇게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는 없었다.

 

기존 건담 시리즈를 보면 로봇메카닉 장르에 일본의 문화를 교묘하게 섞어 만들었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의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에서 형이하학적 일본 고유의 문화를 담론하게 되었고, 하드고어적인 요소를 메카 장르로 구성했다. 로봇이 큰 총을 들고 다니고,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으며, 게다가 전자 빔을 들고 다닐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막상 모빌 슈트의 전투 장면을 보면 군인들의 사격술 내지 검술로 볼 수 있다. 기계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사실은 인간을 대체하는 하나의 기호인 점이다.

 

건담에서 최종적으로 모빌 슈트의 전투는 칼과 도끼로 싸운다. 특히 도() 형태를 들고 싸우는 경우를 보면 사무라이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 마지막 장면에서 미카는 죽는다. 그의 죽음에서 상대편 파일럿은 자신의 모빌 슈트를 조종하여 건담 발바토스의 머리를 자른 후 칼끝에 그 머리를 걸어 놓는다. 이 장면은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벤 후 승리를 포효하는 형태이다. 칼로 일기토를 나누는 전쟁방식은 20세기 오면서 완전 사라졌다. 형이하학적 역사적 담론 부여는 바로 이런 부분이다. 한창완 교수가 지적한 일본이란 국가는 사무라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이 매우 깊게 있는 것을 착안한 점이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구분할 수 없다. 미카나 올가 모두 영어와 일본식 이름이 섞여 있고, 사실 그들은 말하는 게 일본어로 등장해도 사실은 영어로 모든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올가가 터빈스 두목과 의형제를 맺거나, 테이와즈 두령과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맺을 때, 그들의 모습은 서양보단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을 적을 때 붓을 이용하여 한자로 적어내는 모습에서 이번 건담 시리즈는 일본만의 문화를 깊이 드러내었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는 일본 야쿠자 문화를 철화단 및 기타 조직들에게 깊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나, 야쿠자와 철화단은 그런 집단 자체가 하나의 가족이란 인식도 있지만, 다른 방식이 있다. 야쿠자는 이른바 자신들에게 가지고 있다는 대의(大義)를 내세우나, 철화단은 대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야쿠자의 대의는 의리 내지 혹은 그밖의 신념이라 말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그들은 사회적 도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권경쟁에서 하나의 명분을 붙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철화단은 대의 내지 거대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1가지만 바란다. 우리는 기계나 소모품, 우주의 쥐가 아니라 생명을 갖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란 점이다. 철화단은 자신들이 어디서 태어난 것도 모르고,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들이 처해진 가혹한 환경과 여건에서 계속 생존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처음과 마지막으로 타인 내지 집단과 접할 때 보여주는 행동이 폭력이다. 폭력이 처음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등장하여 순간 적개심이 일어나는 행위이다. 낯선 존재와 조우는 곧 인간 본연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폭력은 대화와 어떤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이 통하지 않을 때이다. 철화단이 취한 폭력적 수단은 마지막이다. 그들이 전쟁을 선택하고, 죽음을 알면서 뛰어든 이유는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폭력이 왜 정당하면서도 정당하지 못하는가? 폭력을 취하는 것은 인간의 공포에서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철혈의 오펀스에서 미카만 아니라 많은 파일럿이 척추에 센서를 부착한 수술을 받았다. 아라야식 시스템은 인간에게 생물학적 영역에서 기계적인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전투 병기를 다룰 때 상상을 초월한 반응, 이성과 감성을 배제한 인간에게 유일하게 남은 생존본능이 폭력성을 키웠다. 문제는 그 폭력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 철화단은 기존에 상당히 부조리한 대우에서 일을 해야 했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도 계속 맡아왔다. 갈라르호른이 처음 침투할 때 기지에 남아 그대로 생명을 빼앗길 위기도 있었다.

 

구원이란 단어는 그저 의미 없는 존재이고, 미래라는 단어는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인간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아마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휴먼 데브리를 비롯한 우주의 쥐들은 죽음조차 무서운 것이 못되었다. 죽음이란 세계는 늘 자신과 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우주의 쥐를 보면 대부분 나이가 10대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이었다. 청소년인 아이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가혹한 환경에서 계속 살아온 인간이다. 어린 아이라면 누구나 보호받고 교육보장 및 문화적 삶을 보장 받아야 했다.

 

공부는커녕 하루조차 살기 어려웠다. 이 작품 히로인으로 등장한 코델리아는 타카키에게 공부를 하면서 세견을 넓히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고 했다. 타카키는 성인이 되자 정치인의 보좌관이 되었고, 그는 뒤에 그 정치인을 이을 후계자로 정해지도록 유능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그런 자리를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그것은 자신의 환경, 즉 후천적인 불평등이다. 이런 관점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볼 수 있다.

 

코델리아는 작중에서 혁명의 소녀로 나온다. 그녀는 마치 낭만주의 작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코델리아는 여론의 주목은 받지만, 그녀에게 힘은 없었다. 정치적 발언도 없고, 미카처럼 건담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철화단과 세계의 인류에게 보여준 건 오로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그 희망은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미래와 희망이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철화단은 자신들의 몸부림으로 많은 희생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철화단이란 이름은 없지만, 그 안에서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은 유일한 소망은 이루었다. 작중 철화단 적대세력 정점인 라스탈은 군인이면서 정치가이다. 그가 유일하게 바란 것은 대의의 유지이다. 위에서 대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존재는 대의가 사실 없는 존재에 가깝다. 대의라는 것은 제일 아래 고통 받는 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기원론>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이데올로그가 된 책이고, 19세기와 20세기에 많은 혁명가들의 복음서가 되었다.

 

혁명은 피를 부르나, 그 책은 피를 부르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 피를 멈추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더 이상의 피를 막기 위해선 또 다른 피를 흘러야 하는 최소악적인 조건이 따른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그런 폭력의 원천을 알았다. 그도 역시 철화단 어느 소년들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리드가 친구를 배신하고 죽인 이유는 그가 살아온 환경과 그의 친구가 살아온 환경은 달랐기 때문이다. 파리드를 따른 많은 청년 장교들은 갈라르호른의 부패에 불만을 가졌다.

 

작중에 지구인과 화성인을 따졌고, 변방의 인간들은 앞으로 출세조차 할 수 없고, 어디에나 가도 무시를 당했다. 파리드의 야욕은 절대적 폭력을 이용한 혁명이다. 그는 전설적 존재를 찾았다. 그가 추구했던 힘은 신화적 존재 건담 바알이고, 라스탈은 그동안 갈라르호른이 계속 유지해온 역사라는 서사를 제시했다. 파리드의 신화 서사와 라스탈의 역사 서사가 충돌했지만, 신화적 서사가 패배했다. 현대사회에 오면서 역사가 신화를 이기게 된 것이다. 갈라르호른이 부패한 이유는 정치제 구조였다.

 

갈라르호른은 세븐즈 스타 가문에 운영되었다. 갈라르호른은 지구방위와 치안유지로 공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질서의 유지는 추상적 개념이나, 그것을 운영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이므로 결국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한 법적인 운영은 어떤 인간들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린 셈이다. 그것이 개인의 이권에 결부되는 순간, 공권력은 질서가 아닌 이권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세브즈 스타를 보면 정치제 구조가 과두정이다. 소수 몇 명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면서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나, 그 견제에 의해 하나의 체계가 자리 잡히게 되는 점이다.

 


갈라르호른 내부항쟁과 철화단의 반격으로 갈라르호른은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라스탈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과두정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민주정의 우두머리로 되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소 민주주의적 요소를 보인 민주정인 셈이다. 대의를 외치기만 하고, 그 대의 너머의 문제점을 계속 방치하면 대의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결국 마지막에 휴먼데브리를 만드는 것을 중지시킨다. 그 이전에 갈라르호른은 휴먼데브리의 존재를 알았고, 심지어 그들을 이용하는 조직과도 은밀히 손을 잡았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대의라는 거대한 역사적 서사에서는 역사적 진보와 더불어 권력의 세계는 더 견고한 틀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화성의 식민지 정책에서 우회한 이유도 대의를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점이다. 코델리아는 처음에 세상물정 모른 아가씩였으나 마지막에는 정치적인 수완이 좋은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다. 물론 라스탈은 철화단과 코델리아 관계도 알고, 그녀조차 죽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오로지 대의라는 명분이다. 코델리아도 대의가 있지만, 그 대의를 이룰 힘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제거하려는 갈라르호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원수와 손을 잡아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 건담 철혈의 오펀스는 상당히 변증법적인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건담 시리즈는 서로간의 대의가 부딪혀 이해할 수 없어 사라져가는 존재들이 많았다면, 철혈의 건담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줄리에타는 가엘리오와 대화하면서 처음에 미카와 철화단이 인간이 아닌 괴물 내지 짐승으로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겐 전장이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생존의 순간을 두고 몸부림치는 인간 그 자체였다.

 


전쟁이란 대립관계가 놓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최후의 수단이 되는 행위이다. 철화단이 투쟁하게 된 동기는 정치사회적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그들은 정치사회적 관계를 염두하고 싸운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싸웠다. 내 옆에 친구가, 내 뒤의 동생이, 앞으로 태어나 살아갈 후예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짐승과 같은 시간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기 위해 투쟁했다.

 

한국문학가 성석제의 <투명인간>이란 작품이 있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동시에 한국전쟁으로 피난인의 후손들이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보여준다. 자신들에게 닥친 가난과 배고픔, 그 속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 그들은 당장 오늘은 먹고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생계가 조금 나아지고, 형제자매들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가게도 만들자 자신들만의 희망을 만들려했다. 어린 시절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은 자들은 하루 밥 한 끼 배부르게 먹고, 따듯한 방에서 푹 쉬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신에게 내일은 없다. 오직 오늘만 존재하고, 미래의 걱정은 없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면 1830년 프랑스 3월 혁명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다. 그림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총과 무기를 들고 나온다. 여신의 뒤를 보면 어린 아이가 권총을 들고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왜 어린 아이가 무기를 들고 죽음을 무릎 쓰고 나오는 것인가? 1870년 파리 코뮌이란 또 다른 혁명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팔 하나를 포격으로 잃은 남자아이가 대포에 포환을 넣는 장면도 나오고, 어린 소녀가 총을 들고 나오는 장면도 나온다.

 

그들은 아주 똑똑하거나 대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모르나, 단지 이것만은 안다. 부조리한 세상에 더 이상 희망과 미래는 없고, 오로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남은 목숨이다. 하지만 그 목숨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건담 철화의 오펀스에서 철화단원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죽음이 닥쳐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존재는 어린 아이와 여자로 등장한다.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약하기 때문에 폭력이 노출된 야만의 세계에서 희생되는 존재이고, 어린 아이는 그 성인 여성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약하기 때문에 가장 심한 희생양이 된다. 어린아이가 총을 들고 싸우고, 여자들이 위험한 일을 하는 세계란 제정신이 박힌 곳이 아니다. 아직까지 현대사회에서 테러조직은 아이들에게 자폭테러를 시키고, 여자들에 대한 인권탄압을 한다. 어린아이들은 죽음이란 관념을 모르기에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여자들은 폭력적 남성에 의한 성적 착취, 그리고 전투요원 재생산을 위해 출산도구로 만든다.

 

그런 여자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불행한 삶을 피할 수 없고, 그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죽음을 이겨내 어른이 되면 똑같은 테러리스트로 성장하고, 똑같은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한다. 철화단은 바로 그런 아이들이 모인 세계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건담이 가진 세계관은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적인 영역이다. 지온과 연방의 패권다툼은 인간불평등에 의해서였지만, 지온 총수의 이념 아래 결국 지온공국이 생성되었다. 자비가문에 의해 결국 지온총수는 암살당했지만, 지온이란 국가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국가들의 분쟁과 달리 철혈의 오펀스는 경제적 조건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였다. 관념론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상당히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이 진행된다. 살기 위해서는 현실조건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고, 현실은 자신에게 유리하지 못하며, 알 수 없는 변수들이 계속 충돌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했다. 유물론적 조건은 결국 코델리아라는 인물로 통해 정치적인 입장을 내세운다. 변증법에서 물질변환법이 있다. 어느 일정 양이 충족되면 질이 변경되는 점이다. 물을 100도까지 올리면 수증기로 변화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파리드와 철화단이 갈라르호른하고 전투를 벌이면서 기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게 한 셈이다. 모순의 한계성을 드러내자 결국 라스탈은 현 시점을 폭력을 폭력으로 마무리한 게 아니라 폭력으로 마무리를 한 것을 오히려 평화적 노선으로 변경한 것이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고 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말이다. 라스탈은 역사를 반복하기 위해 그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다소 많은 문제점들을 수용했다. 물론 가엘리오와 줄리에타 역시 자신과 대적하던 적들의 가치관과 삶을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의 방식은 그가 자라온 환경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경제적 조건, 문화적 혜택, 정치적 입장, 교육의 기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조건을 형성하게 해주는 기질이다. 처음부터 노예로 살아가야 할 인간은 없지만, 노예처럼 살아오던 인간은 많았다. 그런 인간들이 생기는 이유를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서 부패한 갈라르호른과 경제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회들이란 점을 보여주었다. 코델리아와 철화단을 도와주는 척하다 마지막에 위기에 빠뜨리는 인간도 있고, 자신의 이권을 위해 아버지와 조직의 간부조차 팔아먹는 인간도 나온다.

 

경제권의 세력가가 갈라르호른과 결탁하여 철화단을 공격하는 모습도 나오나, 애초부터 화성의 거주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경제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화성인의 경제력을 저하시킨 이유이다. 경제적 조건에 의해 정치적 체계가 이루어지는 형태는 유물론적인 형태이다. 물론 변증법적인 힘의 관계에서 철화단은 밀렸지만, 그들의 덕분에 휴먼데브리는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은 철화단을 잊었다고 한다. 철화단에 누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파리코뮌도 마찬가지이다. 팔 하나를 잃은 소년이나, 총을 들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그 누구도 모른다. 단지 그런 사람들이 그 역사에 있었기에 역사는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미카는 자신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코델리아에게 아트라와 아트라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부탁했다. 미카는 죽었지만, 미카와 아트라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또 다른 미래를 만들고 희망을 만든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다. 생물학적으로 삶을 위해 노예처럼 죽을지, 아니면 자신의 자유의지를 위해, 내가 아닌 나를 대신하여 이어갈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철혈의 오펀스는 후자를 선택한다. 나는 스스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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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이라는 어떤 것인가? 사실 생각해보자면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귀찮고, 미개한 존재이고, 정치인들이 본다면 분명 나라의 주인이나 오히려 그들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부분 서민은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가지만,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의식은 없이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혁명에서 시민혁명이 일으킬 때 주요한 계급이 쁘디 부르주아였다. 그런 점에서 소시민은 자신이 쁘디 부르주아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프랑스대혁명 때 머리가 아닌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내뿜은 사람들은 배고픔에 허덕이는 프롤레타리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은 가혹하다. 그 혹독하고 기구한 인생은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알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노동자라는 계급의식보단 그저 사회적으로 소외받아온 존재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고, 그 아들은 시골을 나와 도시로 나와 배고픔과 서러움 속에서 살아왔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고기잡이배에서 일했고, 거기서 받은 생선을 당시 이모부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시장에 내팔도록 했다. 잠수하다가 귀 안의 고막이 터지고, 배를 타게 되면서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오히려 한국 밖에서 있던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색맹이었다. 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기다가 평발이다. 월남전에 가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평발이라 가지 못했고, 색맹 특성상 운전이나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다. 처음에 생선 잡이 선원에서 어느 순간 화물을 실고 다니는 마도로스가 되었다. 외국에 다니면 해적에게 붙잡힌 적도 있고, 배에서 병에 걸려 3일 동안 계속 먹지도 못한 채 고통에 괴로워했다. 처음에 정규직에 일하다 정년 후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가혹한 노동환경에 저렴한 월급, 거기다가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고, 산업재해로 내려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지역차별을 당했으니, 가난으로 시작된 배고픔과 추위, 학력이 낮은 것과 지역이 다른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선천적 불평등과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불평등 2가지 모두 당한 셈이다. 평생 그렇게 일만 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신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2017217일 금요일 오후 1048분 사망신고가 내렸다. 아버지는 작년부터 담도암으로 고생했고, 수술을 받았지만, 암의 재발 및 전이가 되어 복막 전체에 암세포가 퍼졌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폐에 염증이 생겨 폐렴증세를 앓다가 결국 심장이 정지되어 그 힘든 인생의 막을 내렸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난 사람치고 키도 크고 어깨도 넓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편이나 가난하여 중학교만 마치고 생계전선을 뛰어들었다.

 

어릴 적, 배고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배고픈 상태서 무거운 지게를 지니 등이 펴지지 않은 이야기, 추위에 발이 얼어 동창에 걸린 이야기 등등 아버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추억보단 아픈 기억만 내게 이야기해줬다. 경남지역에 살면서 내가 노무현재단 마크를 차에 붙이고 타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 내가 지역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누군가 해를 당할까봐 그런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면서 힘들게 사신 분이 강자의 논리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온다.

 

내가 마르크스, 루소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이미 옆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 특히 배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선원들은 그 열악한 환경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 몸으로 확인했다. 작업안전사고로 대퇴부 뼈가 금이 가고, 용접하다 전기에 감전되고, 더운 기관실 열기 때문에 화상도 입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보니 심장과 신장이 나빠지고, 결국 암이 발병하는 이유 역시 유전자 요인보단 환경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마지막 모습까지 계속 지켜봤다. 처음에 고통에 괴로워하다 수술 후 좋아진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재발하여 밥도 드시지 못한 모습을 말이다. 끝내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조차 되지 않아 호스피스병동까지 이송되었다. 이송되기 전 선망증세로 며칠 동안 난동을 피우다가 다시 정신이 온 것 같더니 또 다시 선망증세로 이어진 후에 의식을 상실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진통제와 몰핀이 들어가도 몸부림을 계속 치고 또 쳤다. 그러더니 어제부터 의식을 잃다가 오늘 밤,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머니 곁으로 갔다.

 

아버지가 맑은 정신에 나와 대화한 것은 결혼에 대한 부분이고, 아버지가 나라는 사람을 알아본 것은 13일 월요일 낮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나보고 병신이란 말이었고, 아버지가 마지막을 의식을 가진 것은 13일 저녁 늦은 시간 내 조카를 보고 이름을 부른 것이고, 아버지가 선망증세에서 제대로 부른 단어는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심장이 정지하고, 입에 가려진 호흡기를 떼니 아주 평안한 표정이었다. 꿈에서 할머니를 만났던 모양이다. 다른 사망자처럼 온몸에서 체액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 드시지도 못하고 몸무게가 계속 줄어 뼈와 살이 붙을 수준이니 너무 깨끗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죽음을 보면서 또한 아버지 같이 병을 앓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대학병원 2인실에서 6인실로 갈 때 확실히 병실의 위생이나 쾌적함 등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좋지 못했고, 좁은 병실에서 그나마 남은 자리마저 보호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편했는가? 그렇게 몸이 상할 정도로 일하고, 병원에서도 편한 안정도 취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건 요양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올 때 맑은 공기와 탁 트인 전경이 마음에 드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7일만 가고, 나머지 3일은 고통의 몸부림에 나머지 2일은 의식 없이 돌아갔다.

 

아버지 죽음에서 고통의 몸부림을 치는 모습과 괜히 나를 보면서 욕을 하고 멸시하는 모습에 고통 없이 운명하시길 바랐다. 자아의 의식이 없는 인간에게 과연 인간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아보고 가지 못한 것이 슬펐다. 적어도 인간답게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말이다.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이재용의 구속사태까지 이어졌다. 삼성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암으로 죽고 투병 중인데, 오히려 진실은 가려지고 그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회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인간의 죽음에 경로와 과정 그리고 마지막은 다르지만, 적어도 부조리와 모순, 삶의 애한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그동안 삶을 보자면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 개인이 살아가는 구조는 세상의 부조리로 조장된 삶이다. 아버지가 고모와 삼촌들이 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암에 걸린 다치면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화병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아버지 같은 노동자들은 노동능력이 상실하는 50대 이후부터 온갖 잔병들이 찾아온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자본>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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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8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20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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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 이 작품!
소설보단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오타쿠로써 느끼는 것은 정말 섬세하다는 것!
덕질을 하면서 소설 한권을 보는 기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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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11-1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작품이 애니로도 나오나요! 일본애들은 신기한 게 소설이 괜찮다싶으면 만화 애니로 제작되네요. 일자리가 그만큼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거겠죠!

만화애니비평 2016-11-16 20: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오타쿠는 행복한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