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본 영화중에 <한공주>라는 작품이 있었다. 평소 여자연예인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 마음에 드는 연예인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공주>에서 주연을 맡은 천우희 씨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정말 잘 했기 때문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잔혹한 장면들이 사실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것이라 한다. 과거 밀양에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한 여중생은 자살했는데, 그 이후 거기에 가담한 남학생들이나 그 남학생 주변의 인간들은 사회에 나가도 잘 먹고 잘 사는 어이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서 일본 2CH에서 어떤 히키코모리가 고등학교 당시 자신을 엄청 괴롭힌 4명으로 24살 되도록 세상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사연을 보았다. 동창회에 가기 싫어 억지로 가보니 자신을 괴롭힌 4명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 가담자 1명은 공무원이 되었다는 인터넷(Face Book 화면갈무리) 게시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나두고 떳떳하게 얼굴을 내미는 세상이 되었을까? 아무튼 세상이 이상하게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하게 당한 부조리를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는 세상, 과연 이게 정당한 도덕적 가치관인가?

 

이번에 본 영화 <귀향>, 귀향이란 하면 귀향(歸鄕)이란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귀향(鬼鄕), 즉 귀신같은 넋이나 혼과 같은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에서 억지로 끌려나와 먼 곳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했던 소녀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유골조차 고향 뒷동산에 안치되지 못하고, 설사 살아와도 그때 이후로 시간은 멈추었다. 예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만화애니메이션축제에서 프랑스 앙골렘 만화축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지지 않는 꽃”이란 전시회를 보았다. 만화작가가 그린 하나의 만화서사도 있었지만, 위안부에 끌려갔던 살아남은 소녀들의 그림도 있었다.

 

점점 갈수록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의 한 맺힌 분노는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상처에 시들어간다. 이미 “지지 않는 꽃” 전시회에서 <나비의 노래>를 통해 보았다. <귀향>에서도 내림굿을 받은 소녀가 상처투성이 소녀와 나비를 보았다고 한다. 나비, 자유로이 날개를 펼치면 날아가는 생물, 그 나비를 마치 무참하게 밟은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일본군 장교가 나비의 표본작업 중 날개 하나를 잔인하게 부순다. 자유를 향해 날고 싶은 소녀들을 마치 포악하게 파괴하듯이 말이다.

 

시놉시스적인 부분에서 정말 표준적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에게 충격의 연속일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보다 더 화가 나는 장면은 과거 위안부에 끌려간 살아나온 영희(손숙 선생님 배역)가 TV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관공서에 가서 신고해달란 기사를 보고 관공서로 향한다. 그때 앉아있던 남자직원에게 차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서는 순간, 직원들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업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걸 신고하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라는 말에 화가 난 영희의 억울함이 더 먹먹해졌다.

 

자신의 나라가 없을 때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나라가 있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억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한공주>와 <귀향>을 놓고 내가 이렇게 대조하는 것은 바로 이게 우리 사회의 암적인 모습인 것이다. 왜 피해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고 계속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화냥년이란 말이 있다. 화냥년이란 원래 환향녀(還鄕女)에서 나 말이다.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다시 고향에 올 때 돌아온 것은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의 미소가 아니라 마치 오랑캐에게 몸을 팔았다고 여기는 더러운 눈빛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도 내가 느끼는 딜레마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모순이다. 물론 전쟁이란 엄청난 재난은 인간을 하여금 가학적인 요소로 변질시킨다. 죽음에 맞대 있기에 그 증오와 불안을 여성에게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과 망각으로 이어지므로 연속적인 가학성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성폭행에서 단순히 폭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사디스트적인 성적쾌락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폭력성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해 오히려 당하는 대상을 억압하는 모티브가 된다.

 

<귀향>은 전쟁에서 위기에 봉착한 일본군, <한공주>에선 인격과 무관하게 돈과 성공만 강조하는 한국사회, 모두 강박관념이 약자에 대한 배려보단 약자를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 <귀향>을 보면서 연출적인 부분에서 딱 2가지가 충격적이었다. 그로테스크, 즉 보기가 흉하고 끔찍하여 상당한 불쾌감을 주는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하이앵글 각도에서 수많은 위안부소녀들이 그 작은 방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폭행당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것도 방 하나가 아니라 방이 수십 개나 되는 벌집처럼 말이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위안부소녀들의 착취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말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자, 살해 후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모금해준 분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이 그렸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위안부소녀 시체를 불태우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을 모티브가 된 장면은 시체가 기름에 의해 타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 일본군복을 입혀 총알받이가 되게 하거나, 식량이 없다면 인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총을 쏴 죽이고, 칼로 찔려 죽이고, 동굴에 화염방사기로 태우거나 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한지 신이 해본 실험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아닐까 싶다. 인간을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폭격과 독가스, 세균전, 핵폭탄이 이때 최고조로 달했다. 이런 일이 있고도 반성하는 국가는 영원히 그때의 비극을 잊지 않은 반면, 어느 국가는 그때를 오히려 영광의 순간으로 여긴다. 다른 국가는 어느 국가의 만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영광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발끈하지 못한다. 오히려 할머니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인간도 있다. 어떤 블로그에 글을 봤는데, 분명히 여성분 같은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위로되지 못할망정 망언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남자라면 그 남자의 아내, 딸, 손녀까지 모두 위안부 같은 곳에 끌려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 말이 정답이지 않을까도 싶다. 물론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한 사람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에게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해보라고 하는 것이 다소 윤리적인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남에게 인륜적 가치를 대하지 않은 이상 자신에게 그런 가치를 받을 자격은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본다. 영화 <귀향>에서 무속인이 굿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천도제인 오구풀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연 그 소녀들의 영혼은 하늘로 혹은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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