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unger>를 보면서 2가지 영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2가지 영화 모두 흥행성보단 작품성 그리고, 작품 안에서 보여주는 예술적인 감각으로 인정받았다. 예술이라 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여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끔찍하고 두렵고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큰 전달력을 전해줘야 한다. 아직도 한국 대중사회는 이런 예술적인 요소보단 대중성에 두고 “예술이야!”라고 말한다. 예술은 입맛을 맞추기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입맛의 다양한 선택을 늘려주는 천연 향신료다.
천연 향신료는 내가 직접 따서 먹지 않은 이상 맛을 볼 수 없다. 인스턴트식으로 가공한 조미료는 당장의 입맛에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게 없다. 오히려 그 입맛에 물들여 최후에 감각이 둔화하여 감성을 메마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가? 어떤 만화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에서 대답은 욕심이었다. 욕심을 생각하면 사랑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 역시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욕심의 대상의 자신이냐? 타인이냐 혹은 그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욕심은 어떻게 보면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은 그래서인지 용납될 수 있거나 또는 되지 않을 있으며, 그것이 정당할 수도 아니라면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욕심이란 단어가 과연 나쁜지 아닌지는 도덕적인 사회상과 윤리적인 보편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영화 <Hunger> 역시 그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마주쳐서 보는 이유는 2가지의 이유다. 하나는 <남영동 1985>의 교도소 내에서 이뤄지는 잔혹한 행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아일랜드의 비극을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일랜드라고 하면 그런 나라가 있지만,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기타리스트였다. 영원한 기타 키드의 우상이자 미친 듯이 기타를 연주하는 Mr. Guitar Crazy 게리 무어(Gary Moore, 1952.4.4~2011.2.6)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에 하나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쳤던 사나이”다. 그의 기타소리는 그의 감성이 탁월한 것도 있으나,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란 점이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했지만, 완벽한 독립을 하지 않았다.
영국의 세력이 닿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에서 벌여진 비극은 한국으로 따지자면 한국전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만큼이나 잔혹한 비극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원했다. 영국은 겉으로 아일랜드라는 나라만 인정했지, 영국여왕에게 충성하고 정치적으로 많은 간섭을 하였다. 아일랜드는 독립을 하기 위해 영국과 투쟁했으며, 영국은 아일랜드 사람끼리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독립 아닌 독립을 해준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인들이 가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아일랜드 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난은 조선이 일제 강점기 일본에게 당한 것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잔인했다.
아일랜드 전통게임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하는 것을 적발하면 무참한 폭력이 일어났고, 폭력의 잔인함은 결국 사망으로 이어졌다.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이런 국가적 민족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항쟁하기 위해 투쟁하고, 그 역사의 기간은 조선독립운동사 만큼이나 처절했다. 실제 영국 첩보기관은 죄 없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과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았고, 아일랜드 인들은 영국인들의 폭압에 분노를 넘어 증오로서 대했다. IRA은 매우 거칠고 과격하며, 테러를 일으켜 폭행과 살인까지 저지른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을 보여준 비극이라면, <Hunger>는 1980년 전후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수상 집권 시기에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 영화를 감상하면 대처의 연설이 나온다. 대처는 1970년대 경제위기에서 새로운 내각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이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적 위기를 타진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국가에서 이른바 케인즈의 이론, 거시경제학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통화량이 증가하고 임금이 올라가면 인플레이션이 닥치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계속 오르게 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한다.
이때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경제정책은 거시경제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환된다. 그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대표적인 정치인이었고, 영국은 대처의 집권으로 초반에 안정화되었던 것처럼 보이나, 추후 큰 문제를 일으킨다. 대처의 노동탄압도 큰 문제였지만, 그와 더불어 아일랜드 인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개인적으로 대처는 노동문제의 갈등을 외교문제로 국민의 눈을 돌리려 했는지 않을까 싶다). IRA가 급격한 테러를 하면 그들을 정치범으로 수용했다. 정치범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위험이 될 수 있으며, 반국가적 세력으로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하는 인물로 보겠지만, 대처는 IRA 요원들을 그저 흉악범으로 취급했다.
흉악범은 정치범과 다르게 정치적 성향이나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타인을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희생시키는 반윤리적 인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다르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 작용하나, 윤리는 권력의 힘으로 볼 수 없다. 도덕적 권력이 IRA를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이다. 아일랜드 죄수를 수용하는 감옥은 열악하고, 비정상적인 공간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IRA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벽에다 똥칠하고, 샤워도 하지 않고 최대한 영국 간수에 대해 반항한다.
영화 처음 나오는 인물은 IRA 요원이 아니라 영국인 간수다. 그는 조심스레 현관을 나서고, 차 밑에 혹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 게다가 아내는 창문 너머로 남편의 출근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는 감옥 밖에서 담배를 피며 눈 내리는 모습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바라본다. 손가락 윗면 관절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상처가 나있다. 그의 임무는 샤워를 거부하는 아일랜드 사람을 목욕탕 욕조에 집어넣어 비누를 몸에 바른 후 긴 빗자루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다. 이때 저항하는 죄수를 저지하기 위해 매우 심각한 폭행을 휘두른다.
그런다고 IRA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면회를 가정하여 서로 간의 정보를 교환하고, 면회자들과 물품을 교환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입안에 메모지를 넣어 어느 여인과 키스를 하여 건네거나, 라디오를 받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면회객으로 온 여성은 자신의 손을 치마 안에 집어넣어 남의 손이 함부로 가서는 안 될 곳에서 용기를 꺼내어 죄수에게 건네준다. 목숨을 거는 투쟁은 잊을 수 없다. 영화 <남영동 1985>가 생각나는 이유는 故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로부터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을 당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 끌려온 주인공은 갖은 고문을 당할 때 자신만 울고 절규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고문을 지켜보던 형사들도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고문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사람 모두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처럼 <Hunger> 역시 그렇다. 영화에서 IRA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IRA 요원이 영국정부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 최후의 저항인 단식투쟁을 한다. 이때 시작한 주인공이 66일 동안 단식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로 9인이 추가로 사망한다. 이때 IRA은 그 감옥의 영국인 간수 26명을 살해하는 일이 벌여진다.
분명 어느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해서 그런 더럽고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Hunger>는 피해자가 아일랜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아일랜드 사람을 감시하고 폭행하는 영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죄수를 목욕시킬 때 그들은 철저하게 반항한다. 진압부대가 곤봉을 들고 와서 아일랜드 죄수들을 가차 없이 봉을 휘두른다. 이때 처음 온 한 영국인이 광기어린 진압장면에 슬퍼하며 벽 뒤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영화는 꿈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듯이 신임 경찰대원은 파란색이 보이는 복도 쪽이었고, 진압하는 자들은 어둡고 컴컴한 감옥 복도에서 미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옥에 와서 12년을 선고받은 IRA, 손등에서 피가 나는 간수, 단식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IRA, IRA에 의해 살해당하는 간수들을 보면 이 모두가 피해자였다. 역사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쇠사슬처럼 옭아맨다. IRA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공화주의였다. 공화주의란 인간이 생명의 위기나 고통에 고통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은가? 공화국이란 자신들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최종목표다. 아일랜드 죄수들이 선택한 것은 삶의 의지가 없는 평온함이 아니라 큰 위기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를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죽음으로 큰 여론을 형성해도 정치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미래를 위한 길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이의 곁을 떠나고 싶을까?
하지만 그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비참하고 노예와 같은 삶이라면 그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다면 삶의 목표와 희망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Hunger>는 매우 불편하고 끔찍한 영화다.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영화 <Hunger> 감독은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식을 시도한 아일랜드 죄수 한 명이 가톨릭 신부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는 롱 테이크(Long take)이다. 영화 카메라에서 일정한 화면을 맞추고 거기서 계속 쇼트(화면의 전환) 없이 계속 촬영하는 모습이 대략 15분 정도 아닐까 싶었다(그 모든 대사를 외웠고 완벽하게 소화했으니!). IRA 요원은 단식투쟁을 하기 앞서 신부님에게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신부님은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IRA 요원은 자신이 그렇게 죽어도 그 일을 할 것이라 말한다. 어린 시절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자신이 모든 책을 졌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이길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의 적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다.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은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라고 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뒤쫓는 부류가 많다. 개인적으로 타인의 고통과 약자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은 자들이 사회의 정의나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것만큼 가식적이고 멍청한 인간이 없다고 여긴다. 과연 그들은 이때까지 진심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편안함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짊으려 했을까?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희생을 만들게 했는지 우리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