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 Entanglement 얽힘 4
예소연.전지영.한정현 지음 / 다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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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소설가가 각기 쓴 소설이 얽히게 되는 편집이다. 각 작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과도 얽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관계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용이 아니라 소설집의 편집이 바로 삶처럼 독립적이되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전지영, 한정현, 예소연 세 작가가 참여했고, 소설집의 제목이 된 구절은 예소연의 '나의 체험학습'에 나온다.


'고맙습니다. 같이 가. 혹은, 그러지 마. 우리 사이 금지된 말에 대해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이별에 대해 생각하고 만다.'(84쪽)


이 말들에서 이별의 의미나 기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세 말이 지닌 공통점을 억지로 생각해 보면 나와 너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는 말이 이 말들 아닐까 한다. 즉 나와 얽혀 있는 너에게서 거리를 느낄 수 있는 말, 말로 무언가를 규정하는 순간 거리가 생기고, 이 거리가 틈이 되어 이별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이별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이별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지. 예소연의 소설에서 그러한 이별을 받아들이는데 두려움이 있기에, 자신의 상상을 마력이라고 또는 저주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마력, 저주를 삶의 일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 그때서야 금지된 말들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소설에서 '미미 이모'로 지칭되는 인물에게서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묻고 그것을 보러 가는 것. 이것은 이별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여주는데, 소설 속에서 엄지손가락을 묻은 자리에 정자가 생기고, 나중에는 문이 잠기는 일까지 생긴다.


그렇다. 언제까지고 엄지손가락과 이별을 하지 못한다면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당해낼 때, 그때서야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소설인 전지영이 쓴 <나쁜 가슴>도 마찬가지다. 가슴으로 지칭되는 여성성, 아이를 가진 다음에는 수유로 지칭되는 가슴의 모성. 이것들은 사회적 압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성을 하나의 틀에 가두려는 모습. 그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한 것이 바로 '나쁜' 가슴이라는 말일 테다.


세상에 나쁜 가슴이 어디 있는가? 나쁜 손이라는 말을 할 때 이는 도덕적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손을 지칭할 때 쓴다. 즉 손은 그 자체로 나쁘다 좋다고 하지 않고 행위의 비도덕성(불법성)과 연결될 때 비로소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쁜 가슴'이라는 말은 젖이 잘 나오지 않는 가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도덕(법)을 떠나 모성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엄마의 역할을 아이에게 수유를 잘하는 존재로 축소시키고 만다.


산후조리원 원장의 이 말... "애는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라." (30쪽) 이는 아이를 위해서 엄마는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슴은 여성의 것이 아니고 아이의 것이라는 말이 되고, 아이에게 풍부한 젖을 제공하지 못하는 가슴은 '나쁜' 가슴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아이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바꾸어놓는 말,, 어쩌면 이 말이 즉 여성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산후조리원에 온 모든 여성을 '엄마'로 지칭하는 그 행태들이 바로 '금지된 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산후조리원에 창살을 설치한 이유가 엄마들이 뛰어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여성이라는 주체를 아이 엄마라는, 오로지 아이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이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가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려 한다. 아이 역시 제 삶을 부모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도록 지켜본다.


'모든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니까. 제 몸을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 길고 지난한 연습만이 우리의 가슴과 이름을 지켜줄 거라고.'(41쪽) 되뇌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규정된 존재가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정현이 쓴 '가짜 여자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을 하나의 존재로 규정하면 안 된다는 것.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인간이라는 것. 고모를 통해서 그런 점을 보여준다. 소위 운동권이라 할 수 있는 고모는 반미를 외치지만 미제 영화를 즐기며, 국산을 애용해야한다고 하지만 일본제를 선호하기도 한다.


또한 여성주의를 주장하지만 자신의 외모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갇히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한다. 


소설에서 '고모는 데모의 달인이 아니라 그저 고모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74쪽)고 표현하고 있다.


데모 역시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으리라. 그래서 고모는 성추행을 하는 교사가 교단을 떠나게 하며, 사회에서 내몰리는 여성을 위해 시위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고모고, 그런 고모를 지켜보는 '나'에겐 세상의 복잡함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세상의 복잡함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들이 이 소설에는 두 명이 더 등장하는데, 한 명은 소위 '학주'라고 불리는 교사와 윤리 선생이다. '학주'는 학생주임의 줄임말인데, 학생들을 폭력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전교조 활동가였다고 하면서, 그가 지닌 교육관이 학교에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실천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성추행을 하는 교사의 과목이 윤리인데, 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즉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 불일치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불일치를 구분해야 한다.


이렇듯 세 소설이 각기 다른 인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책을 관통하는 단어가 'Entanglement'다. 소설집의 뒤에 '얽힘'이라고 했는데, 각 작품들을 통해서 각자의 삶도 얽혀있지만, 전혀 다른 삶들과도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전지영의 소설에 나오는 소재 중에 '정주못'이 세 소설에 공통적으로 나오면서 얽힌다면, 비닐봉지와 본드는 한정현과 예소연의 소설에서 얽히게 되고, 정글짐은 전지영과 예소연의 소설을 얽히게 만든다.


이렇게 '얽힘'이라는 주제로 세 소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개인의 삶에서도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얽힌 존재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런 복잡한 존재인 우리들을 어떤 특정한 언어 속에 가두려는 행위, 그러한 말은 바로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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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무진 지음 / 요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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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나 사건'이라고 되어 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또는 합리와는 거리가 먼 일들을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는데,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면 그러한 사건이 중심이 될 것이다.


이성과 합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로는 귀신이야기가 있다. 귀신 자체를 이성으로 설명하기는 좀 힘들지 않은가. 귀신을 믿는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현실이니까.


그렇지만 귀신이야기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이성과 합리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우연들이 우리들의 삶에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이 소설집은 이러한 '미스터리'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읽다가 끝부분에 가서야 전체적인 맥락이 꿰어지는 그런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주로 귀신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귀신들이 사람을 해코지 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 봄'이란 소설을 읽다보면 엄마가 어째서 일 년에 한 번, 절로 아이들을 찾아올까? 왜 스님은 지장전에서 그들만 있게 할까? 이런 의문을 지니면서 읽게 된다. 거의 끝부분까지, 앞부분에 나온 복선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지 않다면, 재혼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면 아니구나, 그것이 아니었어, 왜 그랬는지 정리가 된다. 그런 구조를 지닌 소설들이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교통사고, 의료비로 인한 가정 파탄, 불법 사채업, 투신 자살, 화재로 인한 사고사' 등이 소설의 제재로 등장하면서, 이들이 겪는 고통,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작가는 귀신을 등장시킨다.


문제를 일으키는 귀신과 문제를 해결하는 귀신. 결국 귀신 역시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들인데, 귀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기에 작가는 우리나라 고전 설화(삼국유사에 나오는 '비형랑' 이야기를 차용한 '비형도', 불로초를 찾아 왔다는 '서복 설화'를 차용한 '서모라의 밤'이 이에 해당하는 소설이고)나 유명한 소설 (황순원이 쓴 '소나기'를 차용한 '피, 소나기')을 차용해서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이 모두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어떤 반전이 있을까? 도대체 누가 귀신일까?를 추리하면서 읽는 재미를 준다. 


게다가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미스터리 속에 사회 현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임진왜란 직후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상사화당'이란 소설을 보면,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권력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밀봉은 4년째 귀매혼으로 훈련도감의 포수들을 잡고 있었다. 아이 하나를 죽여 아이 열을 죽일 자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  죄 없는 백성들이 포수들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간다고 아무리 고해도 관과 임금은 모른 척했다. 활개는 왜놈들이 아니라 포수들과 관군들이 쳐댔다.'(212쪽)는 표현을 보라.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 권력자들이 구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밀봉이 하는 행위가 정당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열 명의 아이를 구한다고 해도 죄 없는 한 명의 아이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정의로운 일일까? 이에 대한 토론이 필요할 것인데...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밀봉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는 동기가 좋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이루려는 행위는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희생당해 귀신이 된 아이는 자신이 잠시 지내던 옹기장이 할아버지의 손녀가 일본으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첫 소원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아이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는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존재는 권력자들이 아니고 같은 처지에 있는 존재들임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서모라의 밤'은 불로초를 찾아 떠난 서복이 제주도에 들렀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불로초가 중심이 아니다. 바로 중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여행이라는 환상적인 장치를 이용하고 마약 떡볶이를 통해서 중독의 위험성을, 그리고 서복이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떠났다는 데서 현재 아이돌에 대한 열광과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미스터리한 내용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 소설들인데... 짧은 단편들이지만 어떠한 반전이 일어날지 끝까지 호기심을 지니고 읽게 만들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해서 으스스한 기분이 들게 하는, 마치 예전 '전설의 고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들도 있지만,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래서 원통함을 푸는 해원(解寃)의 매개자로 등장하는 귀신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오히려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한다. ('이중 선율'이라는 소설이 그렇다)


어떤 작품을 읽어도 흥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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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이 아닌 네트워크


  이번 호에 실린 글 중에 우리나라 지방자치를 이야기하는 글의 제목이다. 광역시와 도를 통합하겠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런 통합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제기.


  통합이 자칫 독점으로 갈 수 있고, 다양성보다는 단일성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래서 통합보다는 다양한 지역들의 네트워크가 더 바람직하다고... 다양성이 확보되면서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어느 힘센 지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글.


이 글을 세계에 적용하자.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미국과 이란-레바논 전쟁. 후자를 과연 전쟁이라고 해야 하는지, 일방적인 침공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논란이 있고, 트럼프조차도 이는 전쟁이 아니라 군사작전이기 때문에 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것이 전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나라를 폭격하는 행위가 단순한 군사 작전이라고? 이 상태가 바로 힘센 자들이 다른 곳들을 통합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강자의 논리만 내세워 약자를 핍박하는 것. 자칫 통합이란 이런 식으로 강자에게 흡수되는 약자들의 모습을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각종 전쟁(자기 말대로 군사작전)을 벌이는 이유도, 약자들과의 협력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을 자신들에게 통합했을 때 미국의 이익이 더 커지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지녀왔던 패권을 잃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나라들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통합을 바라는 자, 결코 네트워크로 주체성을 지니면서 협력을 하는 상태를 원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 자이기에 자신의(그는 미국의 국익이라고 하지만, 미국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기득권을 지닌 자들의 이익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미국 시민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통합하려는 모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통합이 아니라 네트워크다. 어디선가 읽었던 내용인데,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을 매달기 위한 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종을 매달 구멍에 맞는 하나의 쇠줄은 종을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고. 


그렇게 굵은 줄 하나로는 매달 수 없었는데, 작은 줄 여럿을 꼬아 놓으니 종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는... 굵은 줄 하나를 통합이라고 보면, 작은 줄 여럿이 꼬여 있는 것은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몇몇 강대국으로 통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나라들이 서로 네트워크로 협력할 때 인류를 위해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자, 바로 트럼프다. 그는 세계를 미국이라는 나라로 통합하려 한다.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왜 그럴까?


통합은 성장주의의 토대


통합을 하려는 이유는 덩치를 키우려는 것이다. 왜 덩치를 키우는가? 바로 성장을 위해서다. 큰 것이 더 클 가능성이 많고 작은 것은 큰 것에 병합당할 수 있기에 덩치를 키우는 것. 그래서 통합은 바로 성장주의의 토대다.


많은 언론에서 성장률, 성장률한다. 성장률이 적으면 경제가 어렵고 마치 나라가 위험에 빠질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성장이 안 된다면 우리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성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과거에 비해 지구는 전체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행복해졌는가? 평등해졌는가? 성장의 과실을 있는 자들이 거의 독식하지 않았던가. 불평등이 더 늘고, 사람들은 더욱 바쁘고, 힘들게 살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는 상태. 


게다가 통합이 무조건 내쪽이 되어야 한다는 강압으로 나아가니, 그렇지 못한 존재들은 그 선 밖으로 추방당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성장을 추구해온 결과 아니던가.


바로 성장하기 위해서 통합을 하고, 통합을 하면 거기에 들지 못하는 존재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반복. 미국이 패권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성장이 지지부진하다고 여기는 트럼프는 미국의 성장을 위해서 통합, 관세든 전쟁이든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을 쓰고 있다. 


이런 미국식 통합이 트럼프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이번 호에 실린 '페트로 달러와 기후위기'라는 글에 잘 나와 있다.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하겠다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는... 이게 무슨 짓인지...세계적으로 거래되는 화폐조차도 통합을 하려 한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성장을 위해서였으니... 각 나라가 석유를 거래하는 화폐를 자국의 화폐로 해보라. 달러가 패권을 유지할 수가 없다. 페트로 달러를 통합이라고 한다면, 각국의 화폐를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이런 성장을 위한 통합이 결국 군사력까지 동원해 세계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성장주의는 제로섬 게임


바로 이렇게 통합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한 곳이 플러스(+)가 되면 다른 곳은 마이너스(-)가 된다.


다 같이 성장하지 못한다. 뭐 함께 성장한다 치자. 그건 인간에게만 해당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제국주의부터 인간도 함께 성장한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인간의 성장이 자연의 소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자연자원을 파괴하면서 인류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지구만으로 부족하니 이제는 달에서 자원을 얻자는 주장도 나오고, 화성에도 이주를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인류의 성장은 다른 존재들의 쇠퇴로 이어짐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이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 인류가 머리를 맞대어도 신통치 않을 판에, 인류끼리도 성장을 위해서 서로를 갉아먹고 있다. 미국의 성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압박하는 트럼프 행정부처럼. 


이제 이런 성장주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합을 주장하기보다는 네트워크를 주장해야 한다. 통합이 아니라 연합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덩치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작은 덩치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나라끼리도 연합, 한 나라 안에서 지역끼리도 연합. 그리고 그 지역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의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소규모 지역들이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면 그것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번 호를 읽으면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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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우리의 질문 - AI와 우리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 13
미리엄 메켈.레아 슈타이나커 지음, 강민경 옮김 / 한빛비즈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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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창발성으로 가는 길이다. 질문을 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의문을 지니지 못하는 존재는 입력한 대로만 결과를 산출하지 그것에서 다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라면, 그것도 아주 중요한 요소라면,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면 더더욱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질문부터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세까지도.


이 책의 저자들은 그렇게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인공지능에 대해서 너무 환호만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부정만 해서도 안 된다고. 적절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하여 책의 작은 제목에 'AI와 우리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 13'이라고 되어 있는데, 굳이 질문 13개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거역할 수 없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라고 보면 된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은 이 말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종말론과 기술의 유토피아를 넘어선 세상은 AI로 인간을 돕고, 더 강하게 만들고,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곳이어야지 대체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407쪽)


이 말에 의하면 인간이 좀더 편리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인공지능을 개발해야지,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서 개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전쟁에 사용되는 인공지능을 보라. 또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을 보라. 인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런 인공지능의 개발에 대해서 세계는 아직 공통된 규제 법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핵무기와 인공지능을 비교하고 있는 부분은 의미가 있다.


'핵분열과 AI에는 실제로 공통점이 많다. 우선 신속함이다. ... 원자폭탄과 AI는 둘 다 엄청난 효력을 보이는 기술이다. ... 원자폭탄과 AI의 세 번째 공통점은 이 두 기술이 모두 국제적인 경쟁을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 마지막으로 원자폭탄과 AI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특정 물질이 필요했다.'(395-398쪽)


하지만 원자폭탄과 같은 핵폭탄은 국제적인 협약이 -비록 전세계 모든 국가가 참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나라가 참여하고 있고, 그 방향에 대해서는 모두 옳다고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 있는데, 아직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협약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핵무기만큼이나 위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핵무기를 적절히 통제하고 그것을 에너지 자원으로 이용한 것처럼, 인공지능 역시 어떻게 통제하고 이용하느냐가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들이 주장하는 'AI로 인한 인류의 멸종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대신, 그 기술이 초래할 즉각적인 위험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 데이터 보호, 차별, 콘텐츠 조정, 책임 및 지속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389쪽)는 말을 참고해야 한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엄청난 에너지 소모를 유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서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개발에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인공지능을 개발한다는,따라서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쪽으로 인공지능이 사용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에 합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서로 공존하는 세상이 될 수 있다. 단지 인공지능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들과 함께 이 지구에서 공존하는 삶. 그러한 꿈을 인공지능은 실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파괴가 아니라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 그 길을 위해서 저자들은 이 책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 것이다.


질문하는 능력. 이것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한 방편일 것이고, 저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 역시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질문을 잊지 않기를,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인공지능이 초래할 세상을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로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당신은 어떤 세상이 오기를 바라십니까?라고 묻기라고 하듯. 


인공지능에 대해 여러 면으로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특히 인공지능에 대해서 질문을 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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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지음 / 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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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세상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이, 만물의 파괴자가 되고 있는 요즘이 아닌가 싶다.


인간들끼리 전쟁을 한다고? 아니다. 죽어나가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도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없이 죽어나간다. 죽어나갈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진다.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파괴하는 인간들.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으랴. 하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은 만물의 파괴자라고 해야 한다. 이대로 나가면 이런 이름을 벗어날 길이 없어질 것이다.


나희덕의 산문집이다. 2017년에 출간한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를 개정한 개정판이라고 한다. 예전에 출간된 글을 다시 손보고 낼 정도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장소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놓는 장소, 어디일까? 장소라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장소라는 말에는 사람도, 시간도 포함되고, 추상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포함된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존재라면 바로 '마음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산문집에서 많은 장소들이 나온다. 글쓴이의 글을 따라가면서 단지 글자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간다. 글쓴이가 마음을 주는 장소에 읽는 나도 마음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을 놓아두게 된다. 그 장소에... 또 글쓴이가 언급하지 않는 장소를 찾고 거기에 내 마음을 놓기도 한다. 내게도 마음의 장소가 있지, 그래, 누구에게나 마음의 장소가 있다. 


그 장소를 떠올리면서 자신을 추스리기도 할 테고... 이런 마음의 장소 중에 글쓰기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그것은 글쓴이의 이 문장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상적 시간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일이다.'(68쪽)


즉 글을 쓸 때 자신의 마음을 그곳에 놓아두게 된다. 마음을 놓아두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고 남이 본 뒷모습을 통해 내 뒷모습을 인식할 뿐인데...


그런 뒷모습이 바로 내 본연의 모습일지로 모른다는 생각. 스티브 잡스의 아버지(키워준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는, 그렇다면 내 뒷모습에 나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뒷모습이 바로 내 마음의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글쓴이는 '무엇보다도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86쪽)고 하고 있다.


뒷모습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정직할 수밖에 없다. 꾸미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가 마음을 놓을 장소가 거창하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 간이역처럼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는 작은 장소여도 된다. 


'빠르게 달리던 기차가 잠시 속도를 늦추는 간이역들은 앞만 보고 달려가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며 지금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되묻게 하다. 그 작은 모퉁이에서 꿈과 현실, 기억과 예감은 서로 흘러들어 오롯한 공간을 만든다.'(231쪽)


그렇다. 바로 이러한 간이역과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장소다. 그런 장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정직하고 겸손한 모습일 것이고,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함께하는 사람일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지 않고 만물과 함께하는 그런 존재라고... 그의 앞모습, 뒷모습이 모두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장소를 지닌 사람들이 많아질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글쓴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이지 않을까.


나도 내 마음을 놓을 오롯한 장소를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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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1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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