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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 ㅣ Entanglement 얽힘 4
예소연.전지영.한정현 지음 / 다람 / 2025년 12월
평점 :
세 명의 소설가가 각기 쓴 소설이 얽히게 되는 편집이다. 각 작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과도 얽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관계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용이 아니라 소설집의 편집이 바로 삶처럼 독립적이되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전지영, 한정현, 예소연 세 작가가 참여했고, 소설집의 제목이 된 구절은 예소연의 '나의 체험학습'에 나온다.
'고맙습니다. 같이 가. 혹은, 그러지 마. 우리 사이 금지된 말에 대해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이별에 대해 생각하고 만다.'(84쪽)
이 말들에서 이별의 의미나 기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세 말이 지닌 공통점을 억지로 생각해 보면 나와 너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는 말이 이 말들 아닐까 한다. 즉 나와 얽혀 있는 너에게서 거리를 느낄 수 있는 말, 말로 무언가를 규정하는 순간 거리가 생기고, 이 거리가 틈이 되어 이별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이별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이별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지. 예소연의 소설에서 그러한 이별을 받아들이는데 두려움이 있기에, 자신의 상상을 마력이라고 또는 저주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마력, 저주를 삶의 일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 그때서야 금지된 말들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소설에서 '미미 이모'로 지칭되는 인물에게서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묻고 그것을 보러 가는 것. 이것은 이별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여주는데, 소설 속에서 엄지손가락을 묻은 자리에 정자가 생기고, 나중에는 문이 잠기는 일까지 생긴다.
그렇다. 언제까지고 엄지손가락과 이별을 하지 못한다면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당해낼 때, 그때서야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소설인 전지영이 쓴 <나쁜 가슴>도 마찬가지다. 가슴으로 지칭되는 여성성, 아이를 가진 다음에는 수유로 지칭되는 가슴의 모성. 이것들은 사회적 압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성을 하나의 틀에 가두려는 모습. 그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한 것이 바로 '나쁜' 가슴이라는 말일 테다.
세상에 나쁜 가슴이 어디 있는가? 나쁜 손이라는 말을 할 때 이는 도덕적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손을 지칭할 때 쓴다. 즉 손은 그 자체로 나쁘다 좋다고 하지 않고 행위의 비도덕성(불법성)과 연결될 때 비로소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쁜 가슴'이라는 말은 젖이 잘 나오지 않는 가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도덕(법)을 떠나 모성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엄마의 역할을 아이에게 수유를 잘하는 존재로 축소시키고 만다.
산후조리원 원장의 이 말... "애는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라." (30쪽) 이는 아이를 위해서 엄마는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슴은 여성의 것이 아니고 아이의 것이라는 말이 되고, 아이에게 풍부한 젖을 제공하지 못하는 가슴은 '나쁜' 가슴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아이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바꾸어놓는 말,, 어쩌면 이 말이 즉 여성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산후조리원에 온 모든 여성을 '엄마'로 지칭하는 그 행태들이 바로 '금지된 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산후조리원에 창살을 설치한 이유가 엄마들이 뛰어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여성이라는 주체를 아이 엄마라는, 오로지 아이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이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가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려 한다. 아이 역시 제 삶을 부모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도록 지켜본다.
'모든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니까. 제 몸을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 길고 지난한 연습만이 우리의 가슴과 이름을 지켜줄 거라고.'(41쪽) 되뇌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규정된 존재가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정현이 쓴 '가짜 여자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을 하나의 존재로 규정하면 안 된다는 것.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인간이라는 것. 고모를 통해서 그런 점을 보여준다. 소위 운동권이라 할 수 있는 고모는 반미를 외치지만 미제 영화를 즐기며, 국산을 애용해야한다고 하지만 일본제를 선호하기도 한다.
또한 여성주의를 주장하지만 자신의 외모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갇히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한다.
소설에서 '고모는 데모의 달인이 아니라 그저 고모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74쪽)고 표현하고 있다.
데모 역시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으리라. 그래서 고모는 성추행을 하는 교사가 교단을 떠나게 하며, 사회에서 내몰리는 여성을 위해 시위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고모고, 그런 고모를 지켜보는 '나'에겐 세상의 복잡함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세상의 복잡함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들이 이 소설에는 두 명이 더 등장하는데, 한 명은 소위 '학주'라고 불리는 교사와 윤리 선생이다. '학주'는 학생주임의 줄임말인데, 학생들을 폭력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전교조 활동가였다고 하면서, 그가 지닌 교육관이 학교에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실천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성추행을 하는 교사의 과목이 윤리인데, 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즉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 불일치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불일치를 구분해야 한다.
이렇듯 세 소설이 각기 다른 인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책을 관통하는 단어가 'Entanglement'다. 소설집의 뒤에 '얽힘'이라고 했는데, 각 작품들을 통해서 각자의 삶도 얽혀있지만, 전혀 다른 삶들과도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전지영의 소설에 나오는 소재 중에 '정주못'이 세 소설에 공통적으로 나오면서 얽힌다면, 비닐봉지와 본드는 한정현과 예소연의 소설에서 얽히게 되고, 정글짐은 전지영과 예소연의 소설을 얽히게 만든다.
이렇게 '얽힘'이라는 주제로 세 소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개인의 삶에서도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얽힌 존재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런 복잡한 존재인 우리들을 어떤 특정한 언어 속에 가두려는 행위, 그러한 말은 바로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