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의 정원 대산세계문학총서 125
바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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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진(巴金), 이름만 듣다가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중국 소설가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작가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다니. 그간 중국 소설 쪽에는 고전(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서유기)을 제외하고는, 루쉰의 작품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작가의 작품을 읽은 적은 있지만 (빨간 기와, 로빙화와 같은 작품들)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냥 넘어갔었는데...(나중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모옌의 작품을 읽을 생각)

 

최근 장아이링의 작품을 시작으로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세계문학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서양 쪽으로 치우친 독서 경향을 바로잡으려는 마음도 작용하기 시작했고.

 

바진은 중국 격동기에 살았던 작가다. 약력을 보면 그는 아나키즘에 많이 경도되었다고 하던데... 바진이라는 이름도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첫자와 끝자를 따서 지은 필명이라고 하고.

 

처음으로 읽은 '휴식의 정원'은 나름대로 읽을 만했다. 중국이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몰락한 한 가정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회는 변해가는데 자신은 과거에 얽매여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죽음에 이르는 양씨 집안 셋째와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그의 아들 양도령, 그리고 지금 부자로 지내고 있는 친구 라오야오와 그의 아들 샤오후. 이를 바라보는 소설가인 나, 라오리.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산다. 바로 양씨 집안의 셋째가 그렇다. 그는 재산을 탕진만 하고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축첩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든지, 체면에 얽매여 몸을 움직이는 일, 남 밑에 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집안이 망해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과거의 습성에 젖어 있다. 반대로 그의 큰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생활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이미 근대인인 것이다. 그가 우정국(우리말로 하면 우체국)에 취업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족에게 쫓겨난 그, 하지만 그의 둘째 아들 양도령은 그런 아버지도 역시 아버지라고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양도령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있는 양씨, 그러나 그는 비렁뱅이로 지낼지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병을 고쳐 새로운 생활에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이 양도령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사라지고 만다. 죽음으로 영원히.

 

이것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또다른 과거의 인물이 등장한다. 양씨는 이미 어른인 과거라고 하지만, 작가의 친구인 라오야오의 아들 샤오후는 미래를 살아갈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그가 하는 행동은 양씨의 행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미래를 살지 못한다. 아니 살아갈 수가 없다. 이미 양씨의 몰락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그래서 그를 죽음으로 이끈다. 과거의 인물이 발 디딜 곳이 이제는 중국에서도 없는 것이다. 이젠 과거의 인물을 대신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

 

친구와 재혼한 부인인 자오화가 임신을 한 것이 그 예가 된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도령도.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인물이 비극으로 사라져 줌으로써 미래의 인물이 희극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다.

 

바진의 이 소설은 그래서 비극적 삶을 다루고 있지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자오화가 소설가인 주인공에게 요구한다. 왜 소설에 비극만 있냐고. 소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해주면 안 되냐고.

 

이것이 소설가인 주인공에게 다른 결말을 지닌 소설을 쓰게 한다. 소설 속 소설과 이 소설이 함께 하면서 새로운 희망, 아름다움,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과거의 인물을 사라지게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사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고,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소설가는 세상을 봄더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잖아요. 눈물 흘리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모든 이가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요.' (75쪽)

 

라오야오의 아내인 자오화가 영화를 보고 오면서 작가인 라오리에게 하는 말. 이 말이 바로 작가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도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희망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세상이 아무리 암흑일지라도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꼭 있다. 그 빛으로 인해 사람들은 견뎌내고 어둠을 이겨내는 것이다.

 

바진의 이 소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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