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 불멸의 아티스트 17명의 초상
박명욱 지음 / 그린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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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멋있는 제목이다.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라니. 이 제목 앞에서 "시대와의 불화"라는 제목은 밋밋해지고 만다.

 

이 제목은 작곡가 '에릭 사티'의 말에서 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고 한다.

 

"나는 너무 낡은 세상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84쪽)

 

그렇다. 예술가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너무 낡은 세상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만족했다면 그런 예술이 나올 수가 없다.

 

무언가 다른 것을 느끼고 찾는 것, 시대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짊어지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몸부림, 그것이 바로 예술가들의 자세 아니던가.

 

이 책에는 그런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짤막하게 그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는 얘기다. 너무 낡은 시대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않고, 그들이 왜 너무 젊었는지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장황하게 설명하면 이미 너무 낡은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17명의 예술가들의 초상을, 마치 그림에 비유한다면 캐리커쳐를 그리듯이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런 간략한 설명을 통해서 그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엿보다가 더 마음에 들면 이제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그 예술가에 대해서 찾아 읽으면 된다.

 

이 책은 그렇게 17명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해 깊게 알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 쓰여 있는 글(뒷표지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을 그대로 옮긴다. 그 글을 읽으면 17명의 예술가들이 누구인지, 왜 저자가 그 예술가들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파졸리니에게서는 집단적인 악과 난투하는 개인의 도덕과 아름다움을,

가우디에게서는 광대한 시와 상상력의 대지를,

플라스에게서는 피를 걸고 하는 세계에 대한 도발과 공격을,

사티에게서는 귀순과 타협을 모르는 미학과 실존의 불행을 견인하는 좌세(坐勢)를,

스티글리츠에게서는 자신의 삶과 당대의 문화를 기획하는 힘을,

다자이에게서는 세계의 배후를 바라보는 자의 처절한 순결주의를,

콜비츠에게서는 투쟁과 사랑을 하나로 녹이는 모성적 용광로를,

상드라르에게서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는 정신의 자유를,

브랑쿠시에게서는 운명을 역전시키는 등푸른 용기를,

로르카에게서는 시와 풍토와 혁명의 동거를,

아버스에게서는 인간 현실과 대면하는 면도날 같은 긴장을,

위트릴로에게서는 술집과 정신병원 사이에서의 아름다운 추수를,

클림트에게서는 지옥의 사랑을 혹은 사랑의 지옥을,

니진스키에게서는 한 경이로운 춤꾼의 고독과 파열을, 

셀린에게서는 세계를 거시하는 자의 날카로운 풍자를,

카파에게서는 자기 앞의 생을 향해 돌진하는 박력을,

보슈에게서는 인간의 어둠에 대한 깊고 무서운 통찰을,

 

나는 그것을 읽어내고 싶었고, 또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 (9-11쪽)

 

이런 예술가들에 대해 저자는 물론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기가 '모두 여의치 않았다(11쪽)'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런 예술가들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다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예술가도 있지만, 모르고 있는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엿보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맛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젊게 예술가들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더 말해 무엇하리, 그냥 읽어보고, 더 마음에 드는 예술가는 더 찾아보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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