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힘 문학동네 시집 92
김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시를 많이 읽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에는 삶을 생각하게 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다. 오죽하면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라거나 '탄광의 카나리아'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에 대해서 짧은 언어로 표현을 한다. 마치 고대 시대 신탁을 알려주는 사람들처럼.

 

그 짧은 말, 그것이 바로 시이고, 우리는 시를 통해서 세상을 읽고, 나를 읽게 된다. 짧은 글 속에 들어있는 넓고 깊고 풍부한 울림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지 한 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시를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들도 자신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위행위를 하는 것처럼 자신 속에만 갇혀 자신만 즐거운 그런 시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즐거운, 우리 모두 이해하고 자연스레 외우고 받아들이는 그런 시들을 썼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김진경이 이 시집은 읽을 만하다. 읽으면서 생각을 할 수 있다. 몇몇 시들을 외울 수도 있다. 산문처럼 풀어쓴 시도 있고, 아주 짧게 쓴 시도 있고(대표적인 시가 '뒷길'이란 시다. 뒷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도 상당한데, 함축적 의미를 따지기 전에 그냥 읽어도 좋다. 선운사가 좋다기에 찾아갔더니 / 절보다는 잔잔한 뒷길이 좋아 / 늦도록 숲속을 거닐다가 / 자갈 같은 별들을 밟으며 오다 '뒷길' 전문 48쪽), 적당한 길이의 시도 있으니 취향껏 골라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제목도 슬픔의 힘이지 않은가. 슬픔은 공감이다. 공감이 없으면 슬픔도 없다. 이 공감은 함께 함이다. 그러므로 슬픔은 함께 함이고, 함께 함은 고통의 분담, 고통이 줄어듦이다. 고통이 줄어듦은 무언가를 이룰 힘이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시인은 슬픔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슬픔이 세상을 태우는 불을 끄지는 못하지만 / 세상을 태우는 불길로부터 / 작은 사랑의 불을 지킬 수는 있을 거라고 / 그래서 때로 우리가 은은히 빛날 수도 있을 거라고.   - '슬픔의 힘' 부분. 19쪽.

 

이와 비슷한 시들이 이 시집에 많다. 많아서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기 전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 따스해진 마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슬픔의 힘은 우리를 바로 보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이것이 시의 힘인지도 모른다. 슬픔이라는 함께 함에서 세상을 바로 보고, 고치려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슬픔이기에, 이런 슬픔은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

 

가령 '치사량'이란 시를 보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를 읽어보면 과연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극물만이 독은 아니야 / 독국물은 치사량이 작은 독일 뿐이지 / 예컨대 밥도 많이 먹으면 죽지 / 치사량이 큰 독인 셈이야 / 그가 설명하는 동안 / 나는 소유의 차사량에 대해 생각한다 /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 그것은 빈곤 때문이 아니라 /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일 거라고       - '치사량' 전문. 82쪽.

 

이렇게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만드니 이 시를 읽는 순간 이미 세상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또는 남들이 선전하는 대로의 세상일 수가 없다. 내가 새롭게 읽어낸 세상이 된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그것이 비록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거창한 행동일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비상이고, 도약인지... 그 길이 사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이끌어내는지를 시인은 '비상(飛翔)'이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지구상의 생물들이 가장 크게 날아오른 것은

새들의 비상이나, 인간이 실현한 무엇 따위가 아니라는 거야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네 발처럼 어기적거리며

최초로 물 밖으로 기어나왔을 때

느꼈을 어마어마한 중력을 생각해보라는 거야

그 몇 센티미터의 간절한 비상!

 

- '비상(飛翔)' 전문. 55쪽.

 

시를 읽자. 이렇게 시를 읽은 행위 자체가 바로 '그 몇 센티미터의 간절한 비상'이 될 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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