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70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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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니, 무얼 느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대개 길어서 짧음을 기대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길고 또 무슨 무슨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범상치 않다. 무슨 오물 냄새, 정액 냄새가 진동하는 이야기들이다. 비루한 것들을 모아놓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라블레 소설에서 느끼는 몸의 충만함, 몸으로 넘침 같은 그러한 몸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무언가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 내놓아야 할 것이 아니라 감춰야 할 것이 시들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춰야 하고, 숨겨야 하고, 드러내지 않아야 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해야 하는데, 그것을 과감하게 밖으로 드러낸다.

 

그래, 나 이렇다. 어쩔래? 하는 투다. '나 이렇다'가 아니라 '우린 본래 이런 존재야. 내숭 떨지 마'라고 하는 듯하다.

 

가리고 싶은 이면을 굳이 드러내서 그것이 현실임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임을,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시집에 실린 시들은 난해한 시들도 있고, 도대체 이게 시가 되나 하는 시들도 있고, 어디 세상 뒷골목 이야기를 모아놓은 듯한 이야기도 있고, 적나라한 성, 성이라는 말이 그러면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들도 있다.

 

똥 냄새, 정액 냄새. 우리가 밑으로 뱉어낼 수 있는 냄새들... 결코 내세우고 싶지 않은 냄새들. 그러나 우리를 이루고 있는 원초적인 냄새들. 우리 삶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그 냄새들이 이 시집에서 진동하고 있다.

 

꼭 빌헬름 라이히의 이론을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인간을 오르가즘의 존재로 규정하고, 모든 병의 근원은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 데서 온다고 주장했던 그. 그래서 자유롭게 섹스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

 

진정한 오르가즘은 사람을 환희에 떨게 하고, 그런 기쁨으로 인해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움직이게 되니, 병도 자연스레 치유될 가능성이 있을테지만...

 

김민정의 이 시집에서는 아직 그 단계까진, 진정한 오르가즘의 단계까진 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쁨의 냄새보다는 무언가 숨기고 싶은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지... 하여튼.

 

그런데...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보면 도대체 그녀가 무엇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알 수 없음을 채우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이 시집의 뒷표지에는 '시라는 것'을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는 처음, 느낀 것은 무엇일까... 시일까? 삶일까? 아님, 이러한 비루함 속에서도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그 따뜻함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시임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냥 읽어 보자. 그냥 읽어 보라. 그녀가 처음, 무엇을 느꼈는지...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은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김민정,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사. 2014년 초판 6쇄.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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