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287
박주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가 늘 만나는 대상인데, 그 대상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

 

이 시집을 보면 여행시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인이 지나쳤던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밝지 않다.

 

시집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다. 겨울, 저녁, 밤, 그림자, 적막 등등 이런 시어들을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2000년대에 나온 시집인데... 격동의 IMF시대를 겪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현실에서 나온 시집임에도 전체적으로 우울한데... 어디론가 여행을 갔지만, 마음 속의 우울이 해소가 되지 않은 상태. 그런 상태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의 풍경에, 내가 만나는 대상들에게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슬픔. 무언가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들을 받는데...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그러하다. 

 

제목만 보아도 그렇다.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카프카라는 사람 자체가 어둡지 않은가. 그의 소설들도 어둡지 않은가.

 

제목이 된 시를 보자.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해안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쓸쓸한 노래들이 한적하게 귀를 적시기도 했었지만

내게 병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새들이 지저귀어 나무 전체가 소리를 내고

덮거나 씻어내려 하는 것들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어느 한 고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네

나 다시 잠이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전율을 가르며 갈기털이 다 빠져나가도록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정적만 남을 때까지

 

박주택.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7년 2쇄. 54쪽

 

인생. 잘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못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렇다고 출세를 지향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오로지 낮은 것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삶을 살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의 화자는 잠을 잔다. 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달린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에 매여 있는지...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카프카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자신을 매어버린 것들에서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작품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현실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달아날 수가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이 더 지저분해진다고 느낄 때 그런 환멸을 피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에서도 세상의 어둠 끝을 보고마는 그런 때... 정말... 참을 수 없을 때 이 시에서처럼 모든 것이 없어지고 '정적만 남을 때까지' 달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절대 고요만을 남기고 싶다. 폭발을 예비한 고요. 우주의 빅뱅 직전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의 고요. 그 고요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절망 속에서 배태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정적은 고요는 무심함이 아니다.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폭발을 예비하고 있다. 우주의 빅뱅처럼.

 

고요

 

  여기 고요가 있다 고요는 분노의 무덤이다 보라, 연못의 둘레에 고요가 있다 저 고요는 오래되지 않은 것이어서 명상을 가장하지만 성난 황소의 뿔처럼 치명적이다 고요가 고요를 밀어내고 고요가 고요를 갈아엎는다 고요를 보라, 팽팽히 당겨진 시위에 걸려 있는 화살같이 독이 차 있다

 

  무엇이 이토록 굴욕을 고요로 만들었는가? 왜 고요는 핏물을 입 안 가득 물고 있는가? 노란 제 몸에다 왜 창백한 유서만을 새기며 싸늘히 웃음 짓고 있는가?

 

박주택.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7년 2쇄.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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