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퀴드 러브 - 사랑하지 않을 권리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그림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의 사진을 모아 커다란 하나의 사람을 만드는 사진.

작은 사진 하나하나는 동일한 인물인데, 이렇게 각자 다른 인물들이 여럿이 모여 동일한 하나의 인물을 만든다.

 

과학을 잘 모르지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론을 아마 이런 데 적용하지 않았나 싶다.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아마도 유동하는 사랑 정도로 해석이 될 이 책은 이렇게 이런 그림 사진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속한 글들은 모두 하나하나의 독립된 글이다. 그냥 단편적인 글이다. 그러나

<사진출처 :http://news.naver.com/main/imagemontage/index.nhn?gid=966192#967384>

 

읽어보면 전체 글과 하나가 된다. 즉 부분들과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엄밀히 말해서 사회학 이론서라고 하기도 그렇고, 철학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필집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형식을 파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책이다.

 

하지만 전해주는 말은 분명하다. 어느 한 부분을 읽어도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똑같은 내용이 아니다. 다 다른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이 모여 하나의 글을 이루고 바우만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지금 사회는 일회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소비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담을 쌓고 있으며, 이 담으로 인해 너와 나를 구분하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일명 쓰레기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이 그런 사회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 바우만의 저서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다.

 

만남이 얼마나 일회서인가는 성적인 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속적인,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말은 우스워지는 시대가 되었고, 사랑도 인스턴트 사랑, 언제든지 만나고,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만남. 또는 연애를 쇼핑처럼 하는 시대.

 

인터넷이 이렇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면 휴대폰은 가족간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하여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함께 살지 않는다. 또한 늘 만나면서도 늘 만나지 않는다. 접속이 가능한 만큼 접속을 끊는 것도 늘 가능한 사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가 되었다.

 

이것은 정착할 수 없는 유동적인 근대의 모습이고, 지속성이라는 것은 과거에만 속하는 일이 되었다.

 

우리의 사랑조차도 그러하니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칸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지구는 둥글다. 우리는 이 둥근 지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둥근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얘기는 누구에게서 멀어진다는 얘기는 곧 누구에게 가까워진다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 우리가 쓰레기를 양산할수록, 그 쓰레기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쓰레기란 결국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윤리가 된다. 윤리를 넘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우리의 생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이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소통을 멈출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고...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유동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럿을 코뮤니타스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아마도 공동체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코뮤니타스(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소시에타스도 마찬가지지만)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수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178쪽)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의 모습이고, 공동체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이 글에 비추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읽은 바우만의 책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겹침은 앞에서 본 사진처럼 각자 다른 것이 모여 또 하나의 같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데.. 부분 역시 부분으로써 제 역할을 다한다.

 

이것은 우리네 인간들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바로 앞의 그림과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러니 남의 삶을 우리와 똑같이 만들려는 자세를 지녀서는 안된다. 다름이 바로 사회를 이루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앞의 그림 파일과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