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 이성아 소설집
이성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엔 참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그렇고, 국어시간에 배운 소설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또 소설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서점에 가면 어떤 소설들이 나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는 작가의 소설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사기도 했었는데...

 

하다못해 최신 경향의 소설을 알아야 한다고 문학상 작품집들을 읽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 부터 소설이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에 사 모았던 소설들은 헌책방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이럭저럭 소설을 잘 읽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현실이 더 소설 같아서. 도대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들이, 아니 소설보다 더한 일들이 현실에서 펑펑 터지는데, 소설을 읽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또 소설들이 지나치게 무슨 기법을 시험하는지,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들도 많았으니, 이래저래 소설에서 멀어지게 되었는데...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문학사회학에서 주장을 했고, 따라서 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다가갈 수 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문제적 개인이었고, 이 문제적 개인에 대한 판단에 따라 어떻게 우리 삶을 꾸려갈 수 있나를 고민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요즘은 삶이 너무 팍팍한데, 소설을 읽으면 더 삶이 퍽퍽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소설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거리두기, 소설을 읽을 때도 필요한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베르테르 효과도 소설에 거리를 두지 못한 결과 아니던가. 그런데, 요즘 소설은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만든다. 현실이 더 팍팍한데, 어떻게 소설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지, 소설을 읽으며 오히려 현실과 비교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는지, 이제는 소설의 인물에 몰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읽으면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나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소설의 장년에 비유한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자신의 삶의 치열성에서 조금은 빗겨난 나이... 그러한 나이에 읽는 소설은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소설은, 이러한 장년의 나이도 아니다. 읽으면서 이 소설은 노년의 나이에 읽어야 하는 소설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총 8편의 단편들로 묶여 있는 소설집인데, 이 책의 제목이 된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는 단편의 제목이 아니다. 이는 이 소설집의 첫번째 소설인 '저 바람 속 붉은 꽃잎'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로 제목을 삼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은 제목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가 아니라, 태풍이 지나간 다음,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는 태풍, 우리 인생에 한 번쯤 휘몰아치는 그런 광풍을 고스란히 겪은 후 그 다음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소설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듯이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고, 또 아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이,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편지를 읽듯이 읽을 수 있게 소설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특히 주요 인물들이 인생의 격랑을 거친 여성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성주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 시대는 여성성을 회복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여성성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들이 이 소설집에는 많다.

 

삶의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오롯이 겪어낸 여성이 이미 나이가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들... 그 과거의 장면은 바로 태풍이 몰아치는 장면이고, 잠시 행복했던 순간은 태풍의 눈에 들었던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평온하고, 행복에 젖어 있더라도 그 순간이 태풍의 눈 속의 순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네 삶은 결국 태풍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편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속칭 불륜에 빠지기도 하고, 장애인 자식을 두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한 강인함, 그 강인함을 부드러움으로 감싸안는 사랑, 이것이 바로 여성성이고, 이 소설에 나타난 모습이기도 하다.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아니, 이 소설의 제목을 바꾼다.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바로 내 인생에서 태풍은 지금 다가오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한 번 겪고, 지금은 잠시 평온한 상태인 태풍의 눈에 있을까, 아님 태풍의 눈 시간이 지나고 다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 있을까?

 

이 소설에 나오는 여인들은 이미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태풍을 겪던 시절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노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삶은 어디쯤 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삶에서 지금 태풍은 도대체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태풍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낼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의 황량함. 태풍이 지나간 삶의 황폐함. 그러나 삶은 살만한 것이므로, 그 황폐함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습. 이미 쓸려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비록 비루할지라도.

 

따라서 이 소설은 노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