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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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부동산 재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유민주주의를 선도한다는 미국에서.


이 때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이 소개되었다. 대체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대서양 횡단 비행으로 인기를 얻은 린드버그가 1940년대에 미국 대통령이 된 상황을 가정해서 전개된다.


린드버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어린시절 위대한 비행사,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그가 전쟁을 반대했으며, 반유대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고, 반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은 몰랐다.


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대통령이 된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의 반유대주의나 반공산주의를 펼칠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심각한 상황까지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반공산주의는 뒤에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만약 자신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었다면, 반공산주의 뿐만이 아니라 반유대주의가 미국에서 기승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바로 그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나라로 칭송한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


소설 속 인물은 린드버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서서히 다가오자 그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어떻게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맡게 되었을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내가 환각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거야."(274쪽)


과연 이것이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이 말을, 이 태도를 우리에게 그대로 돌려주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또다시 그는 대통령 후보로 나오겠다고 설치는 이 시대에, 또한 한때의 인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로도 슬퍼진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고, 이 삼권이 독립적으로 권한 행사를 하면서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데... 소설 속 미국에서는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이고, 그런 추세 속에서 삼권분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여전히 삼권분립을 믿는다. 아니,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민주주의를 포기한 순간, 그는 이민을 가든지 하는 방식으로 그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이 한 말...


"... 우리의 대법원은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요."(276'쪽)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의 대법원은? 소설보다도 못한 현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인물처럼 이렇게 대법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좋겠는데... 


2023년 11월 대법원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해경 수뇌부는 무죄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비난을 받을 수 있어도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세상에 높은 자리는 높은 만큼 권력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판결. 다시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아니 기소라도 할 수 있는지, 이런 대법원을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 소설 속 인물은 아직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고 해야 할지.


이런 대체 역사 속에서 유대인 가정이 겪는 일들이 펼쳐지는데...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은 언제든지 있다.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서 겪어온 일들을 보면.


그런데 소설은 유대인 가정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지금 현실은 이제 반유대주의는 유럽에서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에서 반이슬람주의로 바뀌었지 않나 싶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반공산주의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나라로 자리를 잡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사람들, 또 기독교의 적이라고 일컫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 소설을 반유대주의의 대체 역사소설로 읽어도 좋지만 반이슬람주의를 경계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교와 집단을 바꾸어서 읽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소설에서는 어떠한 종교나 집단에 대해서 경원시 하고 그들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과 함께 이루는 공동체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대인 가정을 지켜주려는 이탈리아계 이민 가족의 모습,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는 기독교 가정,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을 보호해주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이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반유대주의가 설 자리는 없지만 반이슬람주의는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을, 인물을 이슬람 가정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어떨까? 그러면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가 옳지 않음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점. 절대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 정치에 대해서, 인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어야 한다.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었다면 이 책 뒤에 실린 등장인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사실을 꼭 읽어야 한다. 이것이 대체 역사소설을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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