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SF를 쓰는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F작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거릿 애트우드에 대해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F작품에 대해선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다. 공상과학소설이라고, 과학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공상이란 수식어를 붙여 생각했다. 어린시절부터 이런 용어에 익숙했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기 쉬운데, 공상이라는 말 때문에 SF소설은 어린 시절이나 읽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슐러 K. 르 귄을 만났다. SF소설이 공상이라는 말이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소설이라는 말도 무언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자체가 상상이 창조해낸 이야기 아닌가. 소설에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권력자가 되면 금서다 뭐다 하면서 소설에도 간섭을 하지 않나, 그렇다면 소설은 상상 이야기니 상상을 국한시키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애트우드는 사변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변소설, 생각을 밀고 나가는 소설.


이런 생각 덕분에 애트우드가 쓴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을 읽으면서 SF라는 생각보다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있음직하지 않은 세상, 그러나 있음직한 세상. 어쩌면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에서 그려진 사회의 모습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소설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이런 소설을 쓴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 읽어볼 만하다. 애트우드의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게 되고, 또 애트우드가 어떤 작가들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르 귄과 애트우드의 비슷한 점도 알게 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애트우드 역시 SF라고 해서 공상이 아님을, 현실을 그려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왜 SF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해내는 예술이니, SF든 아니든 작가는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품을 읽고 인간을,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애트우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유스토피아'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합쳐진 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유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디스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사실.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이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그 소설 속에 이미 유토피아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유토피아로 그려진 세상이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니, 애트우드가 말하는 '유스토피아'란 용어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정도의 유토피아와 어느 정도의 디스토피아가 결합된, 그래서 결정되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가능한 세상 아니던가. 우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이렇고, 앞으로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갈테니...


소설에 대한 애트우드의 글을 보자.


나는 스토리텔링이란 미완의 작업,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이들이 자문하게 되는 질문들을 통해 구현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체 우리는 이 행성을 얼마나 망가뜨려 버린 걸까?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깊이 파헤쳐 볼 수 있을까? 종 전체가 자기 구원을 위해 애쓰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더. 유토피아적 사고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이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이유는 유토피아적 사고란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 희망에 차 있는 종이므로, 그런 건 불가능하다. '좋음'이란 것이 있는 한, 언제나 '나쁨'이라는 쌍둥이가 존재할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더 좋음'이라는 다른 쌍둥이도 있다. (156쪽)


소설가의 거짓말이라 함은, 진실을 우회적으로 전달하고자 소설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진실이다. (197쪽)


그래서 소설을 SF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 또는 원치 않는 세상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간접 체험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가 흥미를 끌고, 2부에서는 다른 작품에 대한 애트우드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좋으며, 3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짧은 소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시녀이야기], [증언들]을 읽은 독자라면, 또 [눈 먼 암살자]를 읽은 독자라면 애트우드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