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세 아이 이야기 미래주니어노블 2
앨런 그라츠 지음, 공민희 옮김 / 밝은미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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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그러나 사실에 기반해서 쓴 소설이기 때문에 논픽션이라고 해도 된다. 논픽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실제 사건들보다 더 밋밋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민에 관한 뉴스에서 소설 속 사건보다 더한 사건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이렇듯 현대에도 세계 도처에서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난민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우리나라에도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놓고 찬반 논쟁이 치열했던 일도 있었으니.


난민을 놓고 그들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마느냐로 토론을 한다? 이게 토론거리가 되나? 이건은 찬반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애를 실현하느냐 마느냐, 즉 우리가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선택을 하느냐, 아니면 나만 살면 된다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선택하느냐가 아닌가 싶은데... 그러니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로 토론이 되어야 하는데...


나만 잘살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세상에 난민은 존재하기 힘들어진다. 힘들게 온갖 고난을 뚫고 다른 나라에 도착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설은 시대와 나라가 다른 십대가 된 세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난민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하려는 유대인 가족(주인공은 십대인 조셉. 조셉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요셉일 터)과 쿠바를 벗어나 미국으로 가려는 가족(이자벨)과 내전 중인 시리아를 벗어나 독일로 가려는 가족(마흐무드)이 나온다.


이들은 그 나라에 살 수가 없다. 정치적인 이유든, 종교적인 이유든 또는 다른 사정이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살기 위해 독일을 벗어나 쿠바에 정착하려고 하지만 쿠바 정부는 이들의 상륙을 허가하지 않는다. 세인트루이스호... 이 배에 타고 있던 조셉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 이들은 결국 선장의 결단으로 유렵(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에 정착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쿠바 바로 앞까지 갔지만, 그곳에 정착할 수 없고, 그래서 미국에 상륙하려 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해 다시 유럽으로, 독일 이웃나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운명을.


여기에 곧 2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영국에 정착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럽 다른 나라에 정착한 사람들은 나치의 박해를 또다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셉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조셉의 여동생 루시만이 살아남게 된다.


이 루시가 나중에 마흐무드 가족을 받아들여주는 독일 가족이 된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듯이...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과 아랍인 자치정부인 팔레스타인 사이에 갈등이 있음에도 시리아를 탈출한 마흐무드 가족을 유대인인 루시의 가족이 보살펴주게 된다.


마흐무드의 가족이 시리아를 떠나 그리스에서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까지 오는 과정. 배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조셉의 여정보다 훨씬 힘들고,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30-40년대 난민보다 2000년대 난민이 더 힘들게 자신들이 살아갈 나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적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두 아랍인들에게 적대적이지는 않고, 자신들이 도움을 받았듯이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대인들 또한 많이 존재할 테니... 소설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소설적 구성을 십분 활용한다. 


이자벨의 가족이 쿠바를 벗어나 미국으로 갈 때 마이애미 해변을 코 앞에 두고 미국 경비정에게 추격을 당할 때 이자벨의 외할아버지는 과거 쿠바에 왔지만 상륙을 허가받지 못한 세인트루이스호를 떠올린다. 그때 자신은 경찰이었고,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하선하지 못하도록 결국 그들이 돌아가도록 했던 사실을.


그는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이 되어 경비정을 따돌리고 가족이 무사히(?) 미국에 도착하게 한다. 이렇게 소설은 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이유로 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려는 가족을 다루고 있지만, 이들은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지구인이다. 인류다. 굳이 땅덩어리에 금을 긋고 내 땅, 네 땅하면서 서로 오가지도 못하게 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광활한 우주 한 귀퉁이, 지구라는 별에 사는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속할 수 있겠는가. 소설은 우리에게 난민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함을 그들이 겪는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다.


다만, 그렇게 만든 거대한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고 있다.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만든 가난은 미국의 봉쇄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 시리아에서나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이 겪는 고난에 유럽이나 미국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난민이 된 소년(소녀)의 행동에만 중심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이점이 무척 아쉽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소년-소녀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소설에서는 잘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도. 그래서 우리가 난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시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울 것인가로 논점이 옮겨가야 한다.


난민 문제 역시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지 않다. 우리나라도 난민을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는 나라 아니던가. 아니 난민을 받아들이는 책임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지구인이라는 점,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지구에 금을 긋고 장벽을 세우는 일을 하기보다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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