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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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을 읽다가 쉼보르스카가 쓴 한 구절에 마음이 꽂혔다. 이렇게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오랜만.

 

그 구절이 내 마음을 쉼보르스카 시집을 찾아 읽게 만들었는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끝과 시작"은 쉼보르스카 시선집이다. 12권의 시집에서 고른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읽다가 내 마음을 끈 시구를 발견했다.

 

'박물관'이라는 시에 있는 구절이다.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란 구절... 이 구절 다음에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70-71쪽)라는 구절이 따른다.

 

유한한 인간 생명. 인간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 인간보다 더 오래 남아 인간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 어쩌면 우리는 유한한 생명이기에 무한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것 중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

 

물질로 남길 수 없다면, 물질로 남기고 싶지 않다면 사람들은 이름이라도, 아니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일.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박물관에 남기게 된다. 인간 삶이라는 박물관에.

 

이렇게 반가운 구절도 만나고, 시대순으로 엮인 이 선집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럽 역사와 폴란드 문화와 성경에 있는 내용 등등. 참으로 방대한 내용을 시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

 

이 시선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이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시로 나타내지 않았나 싶은데...'단어를 찾아서'라는 시에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15쪽)고 절규하고, '뜻밖의 만남'이라는 시에서는 '우리 인간들은 /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84쪽)고 호소하기도 한다.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인간들, 그들은 결국 가식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미소'라는 시에서 '세상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 /거물급 정치가들은 늘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어야만 한다. /.. ./ 일상적인 슬픔을 얼굴에 맘 놓고 드러낼 수 있을 만큼 / 이 시대가 편안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235-236쪽)라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만 보이는 시대, 속을 드러낼 수 없는 시대. 너무나 많은 가식들과 위선들이 판치는 시대. 이런 시대를 끝내야 한다. 이런 시대가 계속되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인류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간 전쟁이 20세기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겉모습만을 보이는 그런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 이런 모습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전쟁도 끝이 있다.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다. 이 시선집 제목이 [끝과 시작]이다. 이렇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끝을 보게 한 사람들이 비켜주면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끝과 시작'이라는 시는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전히 끝을 보지 못했다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시작을 위해, 몇몇은 끝에서 머무르지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함을, 그리고 자리를 비켜줘야 함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꼰대가 되지 않는 길... 바로 이 시에 나와 있다. 너무도 마음에 와 닿은 시다.

 

끝과 시작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 지나갈 수 있도록 /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 소파의 스프링과 / 깨진 유리 조각, /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 대들보를 운반하고, / 창에 유리를 끼우고, /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 모든 카메라는 이미 /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를 손에 든 누군가가 / 과거를 회상하면, /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 열심히 끄덕인다. / 어느 틈에 주변에는 /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 이 풀밭 위에서 /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년. 325-327쪽

 

이렇게 쉼보르스카 시를 읽으며 우리 현실을 끊임없이 소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시인들이 무엇을 노래해야 할지, 또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우리도 전쟁의 끝을 볼 때가 되지 않았다. 끝에 다다렀으므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쓰레기 더미로' 가져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쓰레기 더미마저 치워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 때, 우리가 '청소하고 잔해를 치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읽기 시작하면서 시집에서 손을 떼기 힘들었다. 그만큼 많은 시들이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인지.. 폴란드어를 알 수 없는 내게는 그래도 한글로 된 이 시선집을 읽으며 마음으로 느끼는 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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