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르와 장 창비세계문학 9
기 드 모파상 지음, 정혜용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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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이 뭔지 정말 궁금하긴 하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곤 하는데, 분명 축하할 일에 기쁜 것 맞는데, 그 축하와 함께 찾아오는 질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 상황의 질투는 비단 가족에게서만 생기는 건 아니다. 친구나 동료,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감정이라 더 궁금하다는 거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며칠 전에 이 지역에서 정말 뜨거운 경쟁률의 아파트 청약이 있었는데, 주변에 당첨된 사람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 남편의 직장 동료가 당첨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진짜? 잘 됐다, 식구도 많은데 작은 집에서 고생하더니, 이제 3년만 참으면 넓은 새집으로 이사하네? 근데 부럽다. ㅠㅠ 너무 좋은 일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면서 축하의 말을 남겼는데, 축하하는 내 마음도 진심인데, 부러운 건도 진심이라서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런 마음은 일상의 곳곳에서, 특히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하게 되면 더 속상하다. 나의 진심이 전하면서도 부러움 역시 소화해야만 하니까.


막연한 질투, 형제나 자매 사이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거의 눈에 보이지 않게 점점 자라나다가 결혼식이나 상대방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행복을 계기로 터져 나오고 마는 질투, 그처럼 가라앉아 있는 질투 때문에 두 형제는 우애와 뒤섞인 무해한 반감의 불씨를 서로에게 품고 있었다. 물론 둘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를 탐색했다. (37페이지)


롤랑의 두 아들, 삐에르는 의사이고 장은 법을 공부한다. 곧 변호사가 되겠지. 둘 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인 것 같은데, 이 가족의 삶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하다. 어느 날 아버지의 오래된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다. 그 친구는 가족이 없이 사망했는데, 그가 유언으로 장에게 이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왜 콕 찍어서 장일까? 가족이 없어서 롤랑에게 유산을 남길 정도면 그냥 롤랑 가족에게 남기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롤랑도 아니고, 롤랑의 두 아들도 아니고, 두 아들 중 하나인 장에게 유산을 남기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싶다. 하지만 롤랑은 자기 아들에게 갑자기 뚝 떨어진 돈에 흥분한 나머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죽은 친구를 잠깐 기억하는, 오래전에 만나고 못 봤는데 자기를 기억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그와의 인연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하는 감탄 정도가 전부였다.


이때부터 각자의 생각에 바빠진 장의 가족이다. 장은 이 돈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돈을 받으면서 피어날 자기 인생을 생각한다. 롤랑은 자기 돈은 아니지만 자기 가족에게 생긴 돈에 같이 부자가 된 기분을 즐긴다. 자식이 부자가 되었는데 아버지가 나쁠 일은 없겠지. 장의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꿈꾸며 그 돈으로 변호사로 살아갈 장의 집 꾸미기에 푹 빠졌다. 단 한 사람 삐에르만이 이 상황을 마냥 즐길 수 없었다. 동생에게 질투도 났지만, 이 가족의 분위기가 한 번에 변한 게 더 화가 났다. 아름다운 미망인 로제미유 부인이 장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짜증이 난다. 장에게 돈이 생겼으니 더 매력적으로 보이겠지? 무엇보다 이 유산 상속의 상황을 하나하나 짚어보니 뭔가 꺼림칙하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부자연스럽고,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의문은 점점 의심으로 짙어지면서 삐에르는 이 유산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게 된다. 사실은 엄마의 정부가 장에게 유산을 물려준 것은 물론이고, 장은 그 정부의 아들이었던 거다.


그는 어머니가 이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이고, 그러한 고통이 자신의 원한을 덜어주고 어머니의 타락으로 생긴 빚을 줄여준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만족한 판사처럼 어머니를 응시했다. (155페이지)


막장드라마는 한국에만 있는 건 줄 알았는데, 프랑스에도 있었네그려. 이 모든 상황을 알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에게 따질까? 세상에 폭로하고 장의 유산이 더러운 돈이라고 떠벌릴까? 아버지에게 먼저 말하고 어머니와 장을 내칠까? 삐에르가 이 사건의 내막을 알아가기까지 굉장히 흥분하면서 읽었다. 이거 훤히 보이는구먼, 수상하다 수상해. 그 과정에서 조금씩 비치는 삐에르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이 소설이 막장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라는 걸 말한다. 상황이 만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장에게 어머니의 비밀을 터트렸지만, 삐에르가 이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점점 어머니의 목을 죄어오듯 하는 삐에르의 태도는 잔인하게 보이면서도 이해가 된다. 어머니의 불륜을 알고 난 후에 어머니를 어떻게 봐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고 새집을 구하고 꾸미기에 바쁜 장이 얼마나 미웠을까, 혼자 돈벼락 맞은 듯이 즐거워하는 아버지를 보는 마음은 또 어떻고. 잔잔하게 흐르면서 이 가족에게 떨어진 유산이 초반부의 흥분을 고조시켰다면, 소설의 중반 이후로는 삐에르가 느끼는 혼란을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묘한 심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슴 속에서 들끓는 것을 꺼낼 수도 없는데, 이걸 또 담아둘 수도 없다. , 나는 이럴 때가 가장 싫더라. 나쁜 결정을 했을 때보다 더 정신이 피폐해지곤 하는 이유가 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떤 선택과 결정도 쉽게 이뤄지지 않을 때 말이다. 그것도 가족을 상대로 끊임없이 이 상황에 휘둘리고 있으니 어쩌면 좋은가. 문제는 롤랑을 제외한 이 가족 모두가 괴롭다는 거다. 아들이 알아버린 어머니의 불륜을 서로가 수면 위로 올리지 못하고 받아들이고야 마는 결정 앞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완벽한 해결은 아니니까. 어떤 식으로든 결론은 나기 마련이고,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그 해결의 주체가 장이 된다는 게 예상 밖의 흐름이었다. 순둥순둥해보이던 장에게도 인간의 본성이 있긴 했구나 싶다. 가진 것을 놓칠 수도 없고,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도 없으니, 뭐라도 해야 했겠지.


참 고약하지, 삶이란 건! 어쩌다가 거기에서 약간의 달콤함을 발견하면, 거기에 빠져드는 죄를 범하고 훗날 호된 댓가를 치르잖니.” (212페이지)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던 건 등장인물 모두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벼락 맞고 좋아하는 것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도, 지켜야 할 것을 먼저 계산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음을 또 한 번 확인한다.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는 소설이다. 여담이지만, 차라리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돈벼락이 즐거운 롤랑이 되고 싶기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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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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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카페에 가입한 지 1년 정도 되었다. 처음에는 이 동네 정보가 좀 필요해서 몇 가지 도움을 받고자 가끔 눈으로만 보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습관처럼 하루에 한 번은 카페에 접속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 동네의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누군가는 질문을 올리고 답변을 구한다. 한동안 나는 이 카페에서 올라오는 층간소음에 관한 글을 엄청나게 찾아 읽었다. 굳이 검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루가 멀다고 층간소음 피해 호소 게시글이 등장한다. 아이들인데 뛰지 말라고 할 수 없어서 괴롭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층에서 올라온다, 위층은 이 새벽에 공구를 사용한다는 등.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에 댓글을 남기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피해에 공감하는 마음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한 개의 댓글도 남기지 않았다. 댓글을 남기면 내가 사는 아파트가 노출될 거고, 나중에 이사해야 하는데 아파트 매매 글 올리면 우리 집이 층간소음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 테고, 그럼 사람들이 아니까 아파트가 잘 팔리지도 않겠지. 아니면 헐값에 내놓아야 조금 관심 가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웃기지만, 그랬다.


층간소음 문제 하나로 나는 몇 년 후가 될지 모를 문제를 지금부터 고민했다. 고충을 털어놓는 것도, 그 문제의 공감을 얻고 싶은 바람도 묻어둔 채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아파트에 사는 누가 이런 문제를 호소한다면 새겨듣는다. , 거기는 피해야지 하면서. 하지만 그건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일이다. 신축 아파트라고 층간소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건 사람의 문제고,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결론으로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게 뭐라고, 나는 내 마음을 돌보는 일보다 이 동네와 이 아파트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 말을 못 했을까.


어느 집단이든 이기주의가 판을 치기 마련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존재이니까. 태어나서 처음 인연 맺은 가족이라는 집단도 자기 가족 우선의 이기심이 발동하곤 한다. 내 가족, 내 새끼가 먼저이고 중요하다. 세상의 많은 것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건 인정한다. 나도 그러니까. 그런데도 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보는 건 이기심을 넘어선 개인의 욕망 때문에 누군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배려와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알아도 나를 먼저 생각하면 그런 행동도 가능하다. 내가 덜 아프고 상처받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편하고 많이 가지려고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보는 양가감정을 우리 모두 느끼고 살아간다는 게 현실이다.


서영동 동아1차아파트의 입주자 카페에 글이 올라온다. ‘봄날아빠는 아파트가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에 울분하고, 용산보다 여기가 못한 이유가 없다고 피력한다. 그에 사람들은 동조한다. 맞다고,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 제 가격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옆의 아파트가 1년 사이 1억이 오를 동안 자기 아파트만 그대로라고. 이 사람 참, 말을 잘하네 싶은데, 한편으로는 의심도 된다. 이 사람 누구지?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지만, 몇 마디만 쏟아내면 몇 동 몇 호의 누군지 아는 건 시간문제다. ‘은주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키우는 일에 집중한다. 그 동네에서 유명하고 오래되었다는 영어유치원에 보낸다. 내 아이에 최선을 다하는, 다른 아이들 보다 뒤지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희진은 전세 만기 때문에 집을 알아보던 중 살던 아파트와 같은 아파트를 무리해서 매매한다. 대출이 있지만, 그것도 갚아가면 다 재산이라고, 점점 부동산에 눈을 뜬 희진은 이제 15억짜리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산다. 행복하다, 고 생각했다. 서영동에서 대형 학원을 운영하는 경화는 천재적인 지능을 가진 아들을 무기로 보습학원에서 시작해 그 동네 제법 입소문을 탄 학원의 원장이다. 좀 더 좋은 곳으로 학원을 옮겼지만, 학원 확장 때문에 어려움에 부닥쳤다. 아들과의 사이는 멀어졌다. 경화 모자를 돌봐주던 엄마는 아프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인물이 안승복이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이면서, 시골에서 상경해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의 딸 보미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다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한없이 다정하고 무조건 딸을 믿어주던 아버지, 아버지가 마련한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보미에게 이제 아버지는 어떤 인물로 비칠까.


그냥 우리 건물 학원들이 좋은 거죠, .”

서영동 학교들은 입시 성적이 좋지 않다. 서영동 아이들은 그런 서영동 학교를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백은빌딩 학원은 떠나지 못했고, 서영동 인근의 아이들은 백은빌딩으로 학원을 다니면서도 굳이 서영동을 우습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들어오고 싶은 욕망과 나가고 싶은 욕망이 섞여 부글부글 끓는 곳. 학원장이자 학부모이면서 서영동 주민인 경화는 종종 그 입장들이 자기 안에서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149페이지)


얼마나 가지게 되면 욕심부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들은 각자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서도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 대부분 타인이 가진 것들은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으로, 나에게 결핍된 것들이다. 노력한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다. 이 지점에서 무엇을 우선에 두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나는 불행하지 않은 쪽을 택하곤 했다. 완벽하게 마음을 채울 수도 없고 언제나 모자란 것들이 나를 아쉽게 할 테니,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욕망이더라. 그러니 이 정도도 괜찮다라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니 나의 그런 마음도 다 위선인 것 같다. 집 안 팔릴까 봐 층간소음도 말하지 못하고, 나중에 더 오르면 좋지 뭐 하는 마음도 있고, 지금도 이 지역에 예정인 청약 소식을 듣느라 귀는 바쁘다. 너무 비싸서 청약이나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도 신축으로 가고 싶은 이 마음이 조금 웃기다. 나에게 이 정도는 얼마만큼이었을까.


집마다 저마다의 계획과 사정이 있다.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 안승복은 더 만족하기 위해 오늘도 1인 시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노인치매요양원이 내 영역 근처에서 웬 말이냐고 외치던 경화에게는 바뀐 상황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자꾸만 오르는 집값에도 넓은 집으로 갔던 희진에게 가족의 행복과 고마움은 여전할는지, 위대해 보이던 아버지의 투자 능력이 아직도 보미에게는 능력으로 보일지,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아파트 주인이 된 세훈과 유정 부부가 각자 본가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간 아영에게 편히 쉴 곳은 언제쯤 나타날까. ‘빚투영끌이란 말이 익숙해진 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지 불행을 쫓아가는 건지. 언제부터 부동산이라는 화두가 우리 인생에 계급을 만들고 이렇게 큰 논쟁거리가 되어 있었던가. 내릴 줄 모르는 집값과 내 집 마련의 꿈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사람들의 슬픔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지? 거기에 부모의 직업이 아이의 수준을 만들고, 비정규직의 불합리한 대우로 구별되는 삶의 차이는 알고 있으면서도 읽는 게 불편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전하는 현실적인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 그곳은 어디이며 무엇인가. 내가 사는 곳이 나를 더 살게 해준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사는 이 작은 동네가 서영동이었다.


그걸 왜 원장 선생님이 고민하세요?”

그럼 모른 척해요?”

그럼요. 남 일인데.”

그런가? 내가 이러는 거 웃기는 일인가요?”

아영은 그냥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원장이 혼자 대답했다.

근데 남 일이기만 한 일은 세상에 없더라고요. 나이 먹을수록 더 그렇고요. 그게 맞는 거고.” (238페이지)


지난번에 읽은 세대주 오영선이 부린이의 내 집 마련 입문기 정도로 읽혔다면, 조남주의 연작소설 서영동 이야기는 아파트를 둘러싼 서영동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집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읽으면서도 어느 동네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에 섬뜩해졌다. 살아가는 일이 사는 곳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 역시 다양해진 게 사실이다. ‘보금자리라고 불렸던 집은 이제 자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고, 굳이 내 소유의 집이 아니어도 괜찮은 이유가 생기기도 한다. 내 소유의 집이 있다고 모두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 그 상황에 내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을 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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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 제4의 벽 에디션 세트 - 전8권
싱숑 지음 / 비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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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 같은 이야기를 언제 떠올리는가? 오늘의 현실이 팍팍할 때, 어떤 달콤함을 상상하고 싶을 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뭐 이런 거 아닐까?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잠시 고통을 잊고자 할 때 몰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나 목적은 각자 다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 앞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


처음으로 소설을 읽은 순간을 기억한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 드넓은 백색의 대지에 꽃핀 까만 활자. 내 손으로 접어 넘기던 페이지의 감촉.

활자를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활자의 행간에 있단다.

책을 좋아한 어머니는 가끔 그런 말을 했는데, 적어도 어린 내게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활자와 활자가 만든 빈틈. 그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나만의 작은 설원(雪原). 그 공간은 누군가가 들어가 몸을 누이기에는 터무니없이 좁다랗지만, 숨기 좋아하는 어린 나에게는 꼭 맞는 장소였다. (8105페이지)


주인공 김독자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놓을 수 없던 연재 한편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기다리는 것을 잘 못 해서, 다음 회의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연재를 못 보는 나 같은 독자도 있지만, ‘김독자처럼 한 회 한 회 마음을 다해 빠져들면서 기다리는 독자도 있다. 그에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의 연재를 기다리는 것은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기다릴 희망이 되는 일이다. 그가 몰이하면서 읽는 그 소설은 그의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한 처방전과 같다. 거의 십 년 동안 그는 멸살법을 읽으며 견뎌왔다. 처음 그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많았으나, 연재가 계속되고 오랜 시간 이어져 오면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김독자는 그 소설의 유일한 독자로 남았다. 이럴 수 있을까?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이런 상황은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해 버티는 작가나 그 글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독자나, 이 상황은 말 그대로 일대일, 유일한 작품에 유일한 독자 아닌가. 작가는 마지막 연재를 끝내고 김독자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김독자가 작가의 선물을 받은 그 순간, 그의 현실 속 세계가 변한다. 멸살법 속 이야기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SF영화 속 한 장면처럼, 도깨비의 등장과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션이 주어지는 상황이 몰아친다. 지하철 속 사람들은 그가 소설 속에서 본 인물들과 맞춰지고, 이제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그는 금방 눈치챈다. 하지만 그가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이 상황이 쉽게 풀어지지도 않는다. 어쨌든 소설 속 상황과 거의 일치하면서 흐른다고 해도 그가 그 순간을 해결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의 현실과 다른 세계, 하지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게 비슷한 이 세계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마치 실감 나는 게임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주어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그 대가로 코인을 얻는다. 이 코인은 후에 그들이 목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는 데 사용된다. 매번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완성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성좌들에게 코인도 받는다. 그들의 능력을 활용할 배후도 선택하고, 때로는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각자의 스킬을 장착함으로써 위기를 탈피할 무기로 쓴다.


흥미롭다. 등장인물 모두 다양한 캐릭터였다. 어린아이부터 아이 엄마, 학생, 군인, 조폭까지. 갑자기 닥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어쩌겠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든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면서 그 결말에 다다라야 했다. 그 가운데서 김독자의 활약은 빛난다. 그는 이미 이 소설을 읽었던 사람이고, 이 소설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였으니,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응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스킬, 그 스킬은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무기가 되고, 김독자의 스킬은 다른 사람의 정보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txt)였다. 이미 읽은 소설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고, 등장인물들이 가진 무기, 생각 등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김독자는 이 세계의 시나리오는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 된다. 많은 사람이 죽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누군가를 따르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김독자를 따른다. 그의 스킬은 매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데 필요했으며,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다. 그런데 뭔가, 그가 아는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소설 속에서와 뭔가 다른, 스킬의 속도와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 이제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나리오는 클리어될 것인가. 누가 살아남아 이 소설을 완성할 것인가.


무수한 활자들이었다.

활자는 모여서 단어가 되었고, 단어는 모여서 문장이 되었다. 문장은 모여 문단이, 다시 문단은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곧 사람이 되었다. (8254페이지)


읽는 내내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자꾸 그려진다. 처음 그들이 갇히듯 사건이 시작되었던 지하철, 여러 다른 지하철역에서 완성해가는 싸움의 결말들, 소설과 다르게 흘러가는 장면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매번 위기를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 긴장감은 고조된다. 목숨을 건 일이니 그들이 살아남아 이 시나리오를 끝낼 수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에 관심을 보이고 코인을 날려주는 성좌들은 또 어떤가. 그리스 로마 신화, 건국 신화 등 국적 가리지 않은 많은 신화 속 인물이 성좌로 나오며 신비한 분위기까지 풍긴다. 물론 이 성좌들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 각자가 살아남는데 굉장한 힘이 되어주니까. 거기에 각자가 가진 스킬을 활용하면 살아남는 건 노력의 결과로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중에서 능력을 더 보이는 김독자의 활약이 대단한 것도 당연하다. 이 소설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십 년의 세월 동안 이 소설연재의 유일한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게, 주인공 김독자가 이 세계를 구할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다. Part 1 보는 것도 이렇게 흥미진진한데, 다음 이야기는 또 어떻게 펼쳐질까. (Part 2 빨리 내주세요) 김독자가 마주한 인생의 장르가 바뀐 순간은 이제 또 어떻게 바뀔 것인가 궁금하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조심스러운데,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완성하는 데 집중하면서 읽다가 8편에서 만난 김독자와 엄마의 이야기는, 그동안 살아온 그의 시간과 그가 연재되는 소설에 빠져들면서 읽게 되었는지 공감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현실 회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고단한 현실을 이기고 건너갈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에 빠져들고, 꼭 생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몰입하고 싶은 게 있다. 그 순간 위로가 된다면, 이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 고통을 마주할지라도 말이다.


매력적인 인물들, 역사와 신화를 가미한 요소들, 이야기에 빠진 세계, 시공간을 초월한 이 소설에 빠져들 이유가 충분하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하며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 소설로만 남지 않을 매력이기도 하다. 김독자가 이 소설의 결말까지 어떻게 이끌어갈지, 어쩌면 그가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소설을 연재하든 출간하든, 작가가 있다면 독자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작가가 없다면 독자를 이야기를 만날 수 없고, 독자가 없다면 작가의 이야기는 읽히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소설의 역할을 더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왜 소설(이야기)을 읽는지, 그 소설 속에서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그 안의 인간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남기게 될지. 당신은 소설에서,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찾고 있는지...


이번 ‘PART 1(8)’은 전체 이야기 중 약 1/3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이번에 출간된 건 페이퍼백 에디션이고, 올해 여름 페이퍼백 에디션 PART 2-3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거기에 하드커버 에디션 PART 1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어마무시한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오랫동안 이 소설 출간을 기다려온 독자에게 기쁨이 되겠습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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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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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브래스카의 작은 마을 스위트워터에는 포레스터 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저택이 있다. 평범한 그 집에 포레스트 대령과 그의 아내가 산다. 누구라도 그 마을을 지나면서 머물 수 있는 곳, 마을 사람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철도사업으로 부유한 포레스터 대령의 집을 부러워했을 수도 있겠지. 사람들이 보는 그 집은 그런 부러움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대령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항상 환대했으며, 포레스터 부인은 집을 둘러싼 숲에 찾아오는 아이들도 반갑게 맞아주며 가진 자의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 모두 그 부부를 좋아했을 것 같다. 그렇게 그 집에 판사인 삼촌과 함께 드나들던 소년 닐. 그는 상냥한 포레스터 부인을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부인을 보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던 중 포레스터 부인을 향한 그의 마음은 변한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단순히 외모의 변화만은 아닐 테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시선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것,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영향이 있는 어떤 것에 시선을 두기도 한다. 닐이 바라보는 포레스터 부인이 그랬다. 그의 눈에 부인은 아름다운 여인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대령에게 최선을 다하는 아내로 보였다. 대령 역시 아내와 잘 지냈다.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의 불화나 나이 차이 때문에 오는 불안함 따위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포레스터 집안이 쇠락해가고 대령의 몸이 아프고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인의 마음은 예전과 같지 않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제 올 게 왔군 싶을지도 모른다. 나이 많은 남편을 돌보는 일이 이제 지겨워졌겠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혀를 차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상황이 변하면서 생기는 시골 생활의 지겨움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춤을 추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그녀가 겨우 한숨 돌리는 시간은 남편의 돌봄을 잠시 맡겨두고 집 근처의 물가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겨울이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고 오는 삶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고 갇힌 듯이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 인간이 가지는 욕망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어쩌면 그녀의 이 욕망을 본 순간 닐의 시선도 변했으리라. 내가 아는 부인은 저런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부인이 저럴 수가 없는데? 뭐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어린 그가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을 이제 서서히 보게 될 것이다. 누구라도 다르지 않을 그 마음 말이다.


그러면서 점점 부인과 상대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대령이었다. 처음 대령을 봤을 때는 그저 나이 많은 남자가 돈을 무기로 젊은 부인과 사는 건가 싶었다. 그에게는 두 번째 아내였고, 시골의 조용한 생활에 익숙한 동네 유지 정도로 보였는데, 그가 참 어른이구나 싶어 보였던 일화가 그를 추락시켰음에도 그는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으로 다시 보인 거다. 그가 임원으로 있던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그는 집을 제외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며 은행 고객을 지켰다. 사람들의 신임을 다시 굳건히 하면서도 그는 가난한 삶으로 들어왔다. 그런 선택을 누군가는 말렸을 테지만, 그는 인간으로 우선 돌봐야 하는 것을 선택했다. 포레스터 부인은 그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가난한 삶은 그녀가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령을 떠나지 않고 돌봤으며, 대령 옆에서 아내의 역할을 해냈다. 포레스터 플레이스에 찾아오는 많은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대령은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느 날 문득 닐이 느꼈던 것처럼, 아마도 대령은 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 모두가 그녀를 아름다운 작품처럼 여기던 것도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물기 위해 고요히 있던 것일까.


그 무엇도 아니었다. 아내는 남편이 옆에 있어서, 남편은 아내의 옆에 있어서 존재감을 갖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나고 보니 다시 보인다. 포레스터 부인은 대령의 옆에서 아내의 모습으로 있던 게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아마도 소년 닐이 처음 포레스터 부인을 마음에 두게 되는 건 이 장면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소년의 눈에 자연스럽게 보이던, 아내가 남편의 옆에 머무르는 게 익숙한 그런 거 말이다. 부인은 그곳에서의 삶을 힘들어했는데,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는 무료한 시간을 감당할 수 없던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인생과 자꾸 멀어져가는 불안함에 어느 곳에도 마음 두지 못했겠지. 대령은 점점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가고, 포레스터 플레이스는 쇠락해가며 남은 게 없고, 부인은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서라도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했으니. 닐이 바라보는 부인은 점차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추한 인간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 누가 봐도 비열한 청년 아이비와 함께 있는 부인을 보는 닐의 마음은 절망이었으리라. 부인이 그럴 수는 없다는 확신, 그런 부인에게 그동안 가졌던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순간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는 떠났다. 자기 인생을 살아야 했기에.


세월이 흐르고 닐에게 들리는 부인의 소문은 좋을 수만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도 마을을 떠났고,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지.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거나. 누군가 그녀를 돌봤다면 잘 돌봐줬으면 좋았겠다 싶은 바람만 남았을 즈음, 그에게 들려온 소식 한 자락은 그를 안심시킨다. 그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그 시간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는 다시 그녀를 찾아갈 수도 없었을 텐데, 그 불편한 마음을 다독여준 그녀의 안부는 오히려 그를 더 성장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어떤 것을 다시 느꼈으리라. 치열한 삶 앞에서 포기하거나 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누구나 그런 순간 앞에서 어떤 선택도 완벽하지 않음을, 한 사람의 인간에게 담긴 아름다움은 한 가지 모습은 아니라고. 그녀를 향해 독처럼 뱉은 말을 되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썩은 백합이 아니라 살아가려고 애쓰던 질긴 잡초였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다를 것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 역시 각자의 몫이려니. 대령이 부르던 그 아가씨를 우리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가씨의 모습은 삶이 다양하게 만드는 거라고. 인간에게는 살아가려는 욕구, 의무가 있으니 말이다.


남자에게 의지하는 여성의 삶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건지도 모르겠고, 남편의 그늘에 머무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던 시절의 시선을 반박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포레스터 부인의 인생이 대령의 존재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은 없는데, 주변의 남자들이 보는 그녀는 위대한 남자들 모두의 과부라고 여기곤 했던 것. 한 시대가 끝났다고, 그녀의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그녀 스스로 소멸하기를 원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대령(남자)이 없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마을을 떠난 그녀의 생활 역시 달라지지 않았지만(다른 남자를 만났다), 닐이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들으면서 점점 그녀의 삶과 인간의 변화를 알게 된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를 예술품으로 바라볼 수도 없고, 인간 역시 단순하지 않다. 삶이 만드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 대상이 당신의 첫사랑이어도 인정해주기를,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라고. 당신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그 장면을 다시 그렸다.


아직 살아 계실까?” 닐이 물었다. “만나러 가볼 생각마저 드는데.”

아니, 3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건 확실해. 스위트워터를 떠난 다음에도 어디에서 살든지 매년 현충일에 대령님 무덤에 꽃을 놓아 달라고 그랜드 아미 포스트에 송금하셨거든. 3년 전에 영국인 노인네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포레스터 대령님의 무덤을 앞으로도 계속 관리해 달라며 수표를 동봉했대. ‘내 아내, 메리언 포레스터 콜린스를 추모하며라고 적혀 있었고.”
그럼 부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살핌을 잘 받았다고 확신해도 되겠구나.” 닐이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그렇게 느낄 줄 알았어.” 따뜻한 감정의 물결이 얼굴을 스치며 에드 엘리엇이 말했다. “나도 그랬거든!” (20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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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조현병
나카무라 유키 지음, 김성우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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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조현병이라는 말을 뉴스에서 자주 보게 됐다. 주로 나쁜 소식에, 누군가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이 다치게 될 때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해자가 이런 질병을 앓고 있었다면서 범죄의 원인에 갖다 붙이던 병명이 아니었던가. 그래서인지 조현병에 관한 인식이 매우 나쁘게 각인된 듯하다. 내 주변에도 조현병 앓는 사람이 있었는데, 좋은 관계가 아니어서 그런지 나랑 상관없는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조현병이 100명 한 명에게 있는 질병이라는 말에 이 병이 다시 보인다. 누구나 갖고 있을 질병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단지 진단만 받지 않았을 뿐이지 누구나 조금씩 조현병 증상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엄마 본인이 이 병에 관해 잘 알고 싶지만, 항상 약을 먹다 보니 설명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읽어도 금방 잊게 된다고. 게다가 전문 서적은 너무 어려워서 읽을 수조차 없었다는 말에, 저자는 엄마가 오랫동안 앓아온 조현병에 관해 조금 쉽게 설명하는 책을 보여주고자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저자의 엄마가 34년째 조현병을 앓고 있기에 가능한 생생함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역자의 아내 역시 조현병을 앓고 있다. 아내를 위해 조현병 관련 서적을 찾다가 이 책을 만나고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사정이 있다.


백화점 직원 수진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사회초년생 주인공의 현재 상황과 조현병 발병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수진은 친구에게 애인을 뺏기고, 직장생활에서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는데, 그게 참, 사람 불안을 최고조로 올려놓는다. 누군가 자기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자기를 두고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고, 안절부절못하고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또다시 실수할까 걱정되고.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누군가 계속 나쁜 말로 공격하는 것처럼 들리는 거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 서기도 어렵고, 자꾸만 집안에 숨어들게 되고, 과격한 성격도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의 도움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가 진찰받지만, 그 후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주인공이 처음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면서 본격적인 조현병 진단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조현병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 저자가 겪은 시간을 바탕으로 했는데, 일단 병원에 간다는 것으로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인데, 문제는 그 후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우왕좌왕한다는 거였다. 진찰과 처방된 약을 먹고, 그 후에는?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사회적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지, 계속 이렇게 약에 의존하면서 사회생활이 멈춰 있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한다. 무엇보다 조현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왜 발병하는지 알 수 없던 것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그 치료의 시작을 연다. 저자는 이 만화의 주인공 사례로 수진과 그 가족이 어떻게 이 병을 마주하고 감당해 나가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조현병에 관한 선입견과 진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조현병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을 굉장히 상세하게 들려주는데, 이런 설명이 실제 조현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에게,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알 것 같다. 오랜 세월 경험한 저자의 상황이 이런 비법을 만들었다. 조현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내비게이터 유미네 가족을 등장시켜 문제 원인과 대처 방법, 조금 더 잘 건너갈 수 있는 팁을 정리해서 알려준다. 갑작스럽게 재발할 수도 있고,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서 약 복용을 중단했다가 악화하기도 하고, 약 복용의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이 문제와 마주한다. 이 상황에 더 어렵고 힘들어지는 생활에 도움을 받고 활용할 방법도 알려준다. 하나씩 차근차근, 자기 병과 마주하며 나아갈 방법을 적용해보면서, 잃었던 일상을 되찾고 살아갈 수 있는 귀한 팁이 가득하다.


이 책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목자에서 이미 그 섬세함도 보인다. 크게는 조현병의 증세와 조현병을 알아가는 과정, 치료하면서도 조현병을 예방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경험자로 들려주는 방법은 신뢰가 생긴다. 특히나 이 병이 무서운 게,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힘들게 하면서 병을 잘 치료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에 다시 악화할 수도 있는, 언제든 급성기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니 꾸준한 관찰과 치료에 힘써야 한다는 것. 말로 하니까 쉬워 보이지만, 실제 이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몹시 어렵고 힘든 시간일 테지. 중요한 것은 조현병이 인류의 태초부터 현재까지 유병률이 1%라고 하니,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책 속의 말처럼, 조현병은 인류가 종으로 생존해가는 데 필요한 질환이라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많은 병이 스트레스로 시작된다고 한다. 흔하게 겪는 위장 질환, 불면증, 폭식, 암 등 우리 육체에 생기는 병이, 마음과 정신의 시달림 때문에 생긴다고 하니 정신과 육체가 연결되어 우리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일본어판을 우리나라의 현실과 상황에 맞게 많은 감수와 검토, 확인과 취재를 통해 가다듬었다고 한다. 조현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과 주변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조현병을 바라보던 선입견을 많이 버렸다. 조현병은 단순히 정신 질환이 아니라 뇌의 병이며, 적절한 치료로 회복 가능하다고 한다. 누구보다 주변 사람의 도움과 전문가의 치료가 필수라는 것도 알았다. 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사회적인 문제임이 분명한 것을 이미 많은 사건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사회적 시스템이 많이 갖추어져, 우리 일상에서 빈번하게 찾아오는 이 병을 치료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조현병의 이해와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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