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노인 사이에도 사람이 있다 - 인생의 파도를 대하는 마흔의 유연한 시선
제인 수 지음, 임정아 옮김 / 라이프앤페이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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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병원에 다니는 거였다. 언제부턴가 병원에 갈 일이 너무 많아졌고, 다양한 병명이 나를 대신하고 있었다. 작년 말부터 나를 힘들게 하던 대상포진은 일 년 동안 두세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왔다. 감기와 구분이 되지 않아서 괴로웠던 비염을 진단받았다. 오랫동안 통증이 있었던 어깨는 염증이 생겼다고 반년 가까이 치료받고 있다. 너무 많아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이제 언젠가 엄마를 놀렸던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되돌려받았다. 사십 대는 그런 나이인가?


당신의 사십 대는 어떠한가. 나처럼 육체의 고단함으로 먼저 확인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십 대 삼십 대와 확연하게 다른 뭔가로 불안해하고 있는지. 흔히 중년이라고 불리는 나이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 책의 제목 때문에라도 한 번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였다. ‘소녀노인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는 뭐라고 불릴 수 있을까? 단순히 호칭보다는 그 나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이십 대, 삼십 대를 살면서도 불안했던 마음은 사십 대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왜 이런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물어봐도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단지, 다음 나이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의 예상과 계획대로 다음 나이대를 맞이한 적이 있었는지 되짚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십 대는 이렇게 살 것이다, 삼십 대는 저렇게 살아가겠지 싶은 생각 그대로 우리의 이십 대, 삼십 대가 그렇게 흘러갔더냐고 묻고 싶은 마음 말이다.


작가는 우리가 느끼는 이런 불안을 다 안다는 듯이, 자기도 그렇게 겪어왔던 시간을 그대로 풀어낸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우리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벅차게 달리고 있다. 최신 IT 기술보다는 신형 안마의자에 현혹되는 그 마음을 아실는지. ^^ 필요하다면 겉으로 보기에 예쁜 것보다 실용적인 것을 선택하게 되는,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위장 걱정하는 날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테다. 나도 비슷하다. 줄임말을 몰라서 못 알아듣기도 하고, 최신 스마트폰의 기능에 접근하기 어렵기도 한 일상. 초등학생 조카가 알려주는 몇 가지 얘기에 엄청나게 신기해하면서 듣기도 한다. 밖에서 나를 아줌마로 불러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병원의 물리치료실에서 뜨끈한 찜질팩을 깔고 누워있는 것도 좋다. 갑자기 찐 살이 너무 밉고 부담스럽지만, 살을 빼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외모가 아닌 건강 때문이었다. 뭔가 대단하고 우아한 사십 대를 예상했을지도 모르는데, 별로 변한 것 없이,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 시간을 산다. 여전히 실수투성이,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수다에 즐거워하는, 십 년 이십 년 전에도 살아왔던 그대로.


나이를 먹으면 다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작가도 비슷했을 듯하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라고 불리지만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젊은 날의 감성을 가지고, 때로는 깊이 있는 공부보다는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노지에 텐트 치고 숙박하는 게 아니라, 몸이 편한 숙소를 선호하기도 한다. 때로는 수준 높은 물건에 눈길이 가면서도, 일상에서 편한 것은 한 번 쓰고 버려도 미안해하지 않을 물건이 되기도 한다. 기분전환일 수도 있지만, 삶의 계획이나 우선순위를 살짝 변경하기도 하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여전히 변화에 둔할 때도 있고, 온갖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 익숙한 날들이다. 조금 전에도 오랜만에 접속한 쇼핑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찾다가 변경하기도 했던지라, 작가의 이런 에피소드가 왜 이렇게 공감이 되는지. 세상이 바삐 돌아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면 한참 뒤처지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한 나이. 사십 대는 그런 나이인가 보다. 젊음을 발산하기에는 힘에 버거울 때도 있고, 인생의 노련함을 뽐내기에는 부족한 것투성이인 지금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을 잘 살아가는 법을 작가에게 듣는다.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도 빠르게 변해간다. 일하는 남성의 종신고용과 연공서열, 전업주부의 무상 돌봄노동으로 지탱되던 경제는 진즉에 끝났다. 낡은 가치관에 매달려 있으면 남자들의 매일은 암담할 것이다아버지의 씩씩함을 보고 있으면 나도 배워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때는 좋았지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몸과 뇌를 점점 적응시켜간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제까지나 인생을 즐기는 비결이라고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가르쳐 주신다언젠가는 엄마를 만나러 가버리실 테니, 아버지가 숨 닿는 데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보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111페이지)


어쩌면 이렇게 긍정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는 나이 들어감의 대단함이 아니라 별일 없는 날들을 살아가는 오늘을 즐겁게 표현한다. 지나온 시간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닐 테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은 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산다. 서툴러서 긴장하고 알게 되면서 만만해 보이는 것도 생긴다. 그러다가 익숙해지는 것들로 나이와 경험을 채워가겠지. 여러 가지 위기를 힘겹게 통과해온 시절이 내 것일 수밖에 없듯이, 지금 살면서 겪는 모든 것도 내 것이 된다. 좋은 일 나쁜 일 찾아오는 게 인생일 텐데, 이왕이면 기쁘고 좋은 일에 더 마음 두면서 살아가도 좋겠지. 작가가 들려준 소박한 날들의 이야기가 그 증거가 된다. 일상의 곳곳에서 적당한 선을 지키며 관계의 비결을 발휘하고, 육체의 노화와 건강, 여행이나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면서, 결혼이나 출산, 동거와 같은 주제에 공감하며 행복한 날들을 만들어간다. 사십 대의 날들, 그동안 살아온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아간 날들과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제껏 살아왔던 것처럼, 그럭저럭 괜찮은 날들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비혼으로 살아가는 작가에게 일상은, 일이 중심이 되면서도 여성의 연대와 같은 우정이 큰 축이 된다. 각자의 삶은 다르지만, 그 영역에서 축적된 지혜로 서로를 돕기도 한다. 미혼(비혼)이거나 기혼이거나, 결혼생활 중이거나 이혼이거나, 그 생활에서 보이는 많은 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인생의 지침이 된다.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법 말고는, 여전히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정답도 없다. 매 순간 새롭게 덮쳐오는 파도를 견디는 수밖에. 그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작가의 일상으로, 이야기로 알게 됐다. 변해가는 세상에 적당히 스며들어도 좋고, 상황에 맞게 사고를 전환해도 좋다.


삶이 꼭 계획대로, 또 예정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순간에 집중하고 즐기는 것, 그것 또한 삶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64페이지)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느끼는 평범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 실수나 어설픈 것을 감추려고 하기보다는, 이래도 괜찮다고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유쾌했다고 해야 하나. 마냥 불안하게만 여기던 시기를 건너가는 것이 생각보다 재밌다고 말하는 것만 같더라. 괜찮았다. 미리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굳이 마흔이 아니어도, 사십 대가 아니어도 공감할 이야기다.


#소녀와노인사이에도사람이있다 #제인수 #라이프앤페이지 #에세이

##책추천 #마흔 #사십대 #인생 ##위로 #용기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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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2021년 서재의 달인 추카 합니다 ^ㅅ^

구단씨 2021-12-17 14: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스캇님도 축하드려요.
내년에도 다양하고 깊은 음악 이야기 계속 듣고 싶어요. ^^
 
거꾸로 소크라테스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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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팍팍할 때, 인생의 큰 벽을 만난 것처럼 여길 때 테스 형에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나훈아 아저씨의 노래로 대신에 하면서 계속 테스 형을 부르잖아. 혹시 모르지, 그렇게 불러대면 테스 형이 정답을 알려줄지도. ^^ 그만큼 철학적 사유는 우리 인생의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좀 더 현명한 답을 찾고 싶을 때,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더 좋은 방향이 보일 것 같을 때. 그건 비단 어른의 세계에서만 찾는 일은 아니다. 심각하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렇지,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어른이 보는 눈과 생각이 그대로 적용되곤 한다. 때로는 아이에게서 배운다고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이 책이 낯설지 않다.


처음에는 이사카 고타로가 무슨 어린이 대상으로 책을 쓴 건가 싶었는데, 초등학생을 주인공을 내세워 말하고 싶은 것은 연령대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주제였다. 선입관.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서 판단을 흐리게 하기도 하는 나쁜 시선.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각각의 소제목에서 내용이 보이기도 하지만, 더 재치 있는 건 제목이다. ‘거꾸로소크라테스, 슬로하지 않다’, ‘옵티머스, ‘스포츠맨라이크, ‘거꾸로워싱턴. 제목에 붙은 부정의 단어는 아이들이 보는 부당한 상황을 순수하고 재치있게 건너감으로써 의미를 바꾼다. 우리가 가진 선입관이 얼마나 큰 부정의 상황을 만드는지 보여주는데, 아마 속으로 뜨끔한 사람 많을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선입관을 생각하고 적어내느라 바빴으니까.


우리는 남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지.” (25페이지)


선입관으로 가득한 담임 때문에 한 아이가 상처받는 거꾸로 소크라테스, 어른의 선입관이 아이들에게까지 선입관을 심어준다는 교훈이었다. 옷차림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다고 여자 같다고 말하는 어른을 존경할 수 없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주눅이 든 채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아이들끼리 겪어가면서 적응해도 쉽지 않을 텐데, 그 어려움의 시작을 담임이 만들어버렸다니. 이런 몹쓸. 슬로하지 않다의 아이들은 왕따의 한 가운데 있다. 왕따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 사이에 있는 아이들까지 이 상황을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누구도 왕따당하지 않게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을 조심스레 제시하는 한 아이의 과거를 불러온다. 한번 가해자는 영원히 가해자인가?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니다.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이유가 당연하지 않다. 작은 선입관 하나, 스스로 상대를 무시하려는 이유 없는 생각이 상처를 만들게 된다.


비옵티머스의 한 아이는 매일 같은, 낡은 옷을 입고 다닌다. 매일 똑같은 낡은 옷을 입고 다니니까 가난할 거로 생각하는 일. 차림새가 그 사람을 판단하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지레짐작해버리고야 마는 일이 부끄러워지는 건 뭔지. 범죄자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언스포츠맨라이크의 다짐 같은 생각은 단순하지 않았다. 범죄자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간다. 어느 시점이 되면 범죄자를 죄의 대가를 치르고 사회에 복귀한다. 우리는 그 사람과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한번 죄를 저지른 사람은 또 죄를 저지를 거라는 선입관이 옳은 답을 찾는 걸 방해한다. 조금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꾸준히 고민하고 협의하는 일만이 이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은데 마냥 아쉬웠다. 어느 날 친구의 몸에 생긴 멍 자국으로 새아버지가 이 아이를 학대할 거로 생각한 거꾸로 워싱턴,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보일 것 같기도 하다. 매체에서 접하는 부모의 학대는 생각보다 많고 다양했다. 그런 것을 접하다 보니, 어느 날 결석한 친구를 찾아가 확인한 미심쩍은 상황이 학대로 연결되었다는 게 씁쓸했다. 많은 상황이 그렇듯, 확인하지 않은 상태를 단정 지어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딱 한 번 먹어본 적 있는 치즈가 떠올랐다. 냄새가 지독해서 상한 줄 알고 금방 뱉었다. 하지만 그 후에 엄마가 그건 고급 치즈야하고 가르쳐주자 별안간 그게 독특한 맛으로 느껴졌다. 알맹이는 변하지 않았는데도. 정보 때문에 맛이 달라졌다. (131페이지)


아이들의 모험 같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사례의 선입관이 나온다. 이런 선입관이 우리의 성장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나하나 배워가고 겪어가면서 습득하는 게 아닌, 어떤 단면 하나만을 보고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으로 상황을 종료해버리면, 편견 뒤로 숨어버린 진실은 어떻게 찾을 수가 있나. 이건 소설 속 어른이 보인 태도에 기인한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는 식의 태도가 아이들의 시선을 결정하려고 한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문답식 산파술이라는 방법으로 모든 사물과 신념, 진리를 의심했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배워야 할 자세를 어른들이 막고 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거꾸로 소크라테스가 되어, 옳지 않은 어른들의 선입관을 뒤집어버리게 된다. 어떤 가능성을 무한하게 하고, 상대를 판단하는데 보고 들은 그대로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한다. 아이들 특유의 엉뚱함과 재치로 하나씩 풀어가는 문제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소소한 상황 하나하나가 사고와 성장의 큰 역할을 한다.


때로는 우리가 가진 선입관이 맞을 수도 있겠지. 그 사람 겪어보니까 이렇더라, 지난번에 보니까 위험하던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이 스스럼없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을 거다. 어떤 일은 분명 전조 증상이 있는 것처럼, 일어나고야 말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부분이 어른의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이미 색이 입혀진 건 아닌지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힘이 부리는 편견일지도, 약자의 마음을 읽지 못한 잘못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이의 성장에, 어른의 올바른 사고에 큰 벽이 될 선입관은 우리 머릿속에서 지워도 좋겠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다시 시도해도 좋아질 일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다음이 있다. 지금이 아니라도 또 다른 기회를 만나면 되는 일이다.


린이가 주인공이지만 어린이 도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어린이가 읽기에는 어렵고 무거워서 힘들 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어른의 방식이 모두 옳은 건 아니라는 생각을, 어른에게는 오랫동안 쌓아온 선입관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흥미로운 모험 같은 이야기로 어른과 아이 모두 성장하는 시간이 되기를.



#거꾸로소크라테스 #이사카고타로 #소미미디어 #문학 #소설 #일본소설

##책추천 #선입관 #편견 #고정관념 #거꾸로생각하기 #아니라고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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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읽는 루이즈
세오 마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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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의 기운으로 그 사람의 운을, 미래를 점쳐주는 이가 있다. 제목 그대로 별을 읽는루이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한 듯 서술되는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가끔 점집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킨 것만 같다. 혹시라도 이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본 사람, 없지? ^^ 그렇지 않은가. 고민되는 일 앞에서 선뜻 결정할 수 없을 때, 이 괴로운 마음을 누군가 정돈해줬으면 하고 바랄 때. 누가 답 좀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찾아가는 곳,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길 원하는 그곳에 루이즈가 있다.


의외로 유명한 점술가 루이즈 요시다. 쇼핑센터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손님은 끊임없이 찾아온다. 정말 루이즈의 점괘는 그렇게 용한가? 나도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은데, 막상 루이즈의 근무 태도를 보면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정이 없는 점술가다. 루이즈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남들과 부대끼기 싫은 그녀에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매력, 신과 접선하여 점괘를 말하는 게 아닌 사람을 보는 눈과 그녀의 화술로 영업을 한다. 흔히 우리가 사주풀이 책 한 권 사면 누구의 사주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굳이 책을 사지 않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루이즈를 찾는다. 방문객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연애 문제, 직장 문제, 가족 문제. 여러 가지 이유를 안고 루이즈를 찾지만, 루이즈의 대답은 뭐랄까,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조언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이런 대답을 듣는데 복채로 3,000엔이나 낸다고? 손님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의뢰인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공통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어떤 답이 아니라,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는 것. 그들은 루이즈가 정확한 답을 알려주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 거다. 어쩌면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정해진 선택을 응원받고 싶었거나, 알고 있지만 시도하기 어려운 일을 시작할 용기를 갖고 싶었던 게 아닐까. 때로는 누구나 하는 그런 고민 정도로 루이즈를 찾아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는데, 그 이상함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는 걸 읽는 내내 느껴진다. 3,000엔의 이용료가 돈 낭비가 아니라, 작은 한 마디에 삶이 변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만큼 루이즈의 한마디는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겠지만,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리라.


루이즈는, 이런 점술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다. 간단하고 가벼운 고민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의 큰 결정이 될지 모를 문제를 안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찾아온 초등학생 손님은 아빠와 엄마를 선택해야 하는 게 괴로웠고, 어느 여고생의 짝사랑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풀어가야 했다. 어느 대학생의 진로를 같이 고민하면서 확인한 것은, 무슨 일 앞에서든 우리의 선택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 때로는 그 선택이 틀렸더라도,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다시 또 답을 찾아가야 하더라도, 그게 우리 인생이라는 듯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점괘를 믿고 싶은 바람도 비슷한 것 같다. 이대로 가도 괜찮다고 인정받고 싶은 것. 혹시나 다른 길이였다면 다시 되돌려 가도 괜찮다는 토닥임을 느끼고 싶었겠지.


너무 성실해서 믿음이 가는 점술가였다. 아이의 점괘에 답을 주기 위해 잠복 조사까지 하는 걸 보면, 단순히 시간만 채우고 돈을 벌겠다는 심보는 아니었다. 상대의 고민을 같이 해결해주고 싶다는 진심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직업 정신 때문인지 손님이 계속 찾아오는 곳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기 일 앞에서는 다른 의뢰인과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하는 그녀가 인간적으로 보이는 게 좋았다. 손님들의 걱정에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해주는 말이 그녀 자신에게 건너오는 것도 알아채는, 현명한 사람이다. 고민하는 사람들의 등을 살포시 쓸어주면서, 가볍게 토닥토닥. 이런 위로와 용기라면 언제라도 찾아가고 싶은 루이즈의 점집이다. 하고 싶은 말 누군가에게 하고 싶을 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뭔가 쏟아내고 싶을 때 찾아가도 좋을 곳. 루이즈의 점집이다.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그 관계는 가족에서, 친구에서, 직장에서 자연스럽게 맺어진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찾게 되는 원인도 대부분 사람 관계에서가 아닐까. 루이즈를 찾는 사람들에게서도 그 관계의 문제가 바탕에 깔려있었다. 그래서 루이즈의 점괘가 더 빛나지 않았을까 싶다. 신에게 묻지 않는, 기본적인 사주를 바탕으로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고 답을 내주는 게 오히려 현실적인 느낌이랄까. 경험으로 해주는 이야기 같아서 오히려 더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인생 선배의 조언 같은 느낌이 강했다.


차분히 듣고 있다 보면, 4가지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결국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답에 도달한다. 사람과의 관계 역시 변하기도 하고 다시 맺어지기도 한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혼자 일하는 게 좋다는 루이즈에게 조수가 생기면서 다른 일상을 누리기도 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이 왜 사람과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듯하다. 어떤 끝을 알고 있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한다. 나에게 불운이 닥친다는 예언에도 연연하지 않고 오늘의 할 일과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도 알겠다. 끝이라는 건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어떤 일에 끝이 있으면 또 다른 일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가슴을 토닥이는 한 마디가 필요하다면, 쇼핑센터 어느 곳에 자리한 루이즈를 찾아가 보라.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데워 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잘 지내시기를. 당신은 강하고, 어느 불안과 위기 속에서도 잘 건너갈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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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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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르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랑, 아닌 걸 알면서도 가고야 마는, 내 마음을 봐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사랑이 충만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겨도 좋은 일.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보는 일은 설렜다. 그러면서도 불안은 틈틈이 끼어들었다. 이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어서다. 아니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뛰어든 이들의 무모함이 궁금했던 건지도 모르지. 현실에서 마주했다면 분명 지금쯤 어떤 결말을 확인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랑 방식이 있지 않은가.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처럼, 사랑은 어떤 식으로도 고정적이고 완전한 정의가 없는 듯하다. 이렇게 다양한 사랑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공통점 한 가지는, ‘사랑이라는 것. 각자가 선택한 사랑 앞에 최선을 다한다. 뤼도빅의 사랑처럼, 누구의 시선도 중요하지 않고 그동안 가졌던 사랑의 정의도 다 바꾸고 변해버릴 만큼 그 순간의 감정을 선택하는 일. 괴롭고 힘들게만 했던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따위 무시할 만큼의 몰입이라면, 이게 사랑이겠지. 사랑은 그런 거니까. 그래야 사랑이니까. 프랑수아즈 사강이 들려준 사랑도 마찬가지. 내 마음이 끓어대는 그대로 하고 나니 과거와 다른 삶이 펼쳐졌다면, 그게 사랑이고 기적이 아닐까.


프랑스 지방 재력가 앙리 크레송의 저택 라 크레소나드가 배경이 된 이 소설은, 가면을 쓴 채로 움직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배우들은 가끔 그 가면을 벗으며 숨을 쉬려는 듯, 가슴 속 말을 적나라하게 쏟아내기도 했다.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가면이 더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부호 앙리의 아들 뤼도빅이 자동차 사고를 겪고 2년 동안 정신 병원과 요양원에 머물다 집으로 돌아왔다.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묻고 싶지만, 이미 뤼도빅의 아내 마리로르의 표정에서 답을 들은 듯하다. 남편의 귀가가 반갑지 않다. 바보 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처음부터 사랑을 찾지 않았던 그녀는 오직 저택의 존재와 앙리의 재산이 안겨주는 부유한 삶,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그런 거였다. 앙리의 두 번째 아내 상드라는 지적이지 못했고, 그녀의 동생이 필립이 저택에 머물고 있지만 역할 없는 기생충에 가까웠다. 뤼도빅의 아버지 앙리에게 아들은 체면을 위해서 챙겨야 하는 존재였으며, 그 아들이 아무 문제 없이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표명하는 자리라도 만들어야 했다. 앙리는 사람들 앞에 아들을 내보이게 위한 파티를 준비하며, 뤼도빅의 장모(마리로르의 엄마) ‘파니가 저택을 찾는다.


이 모든 일이 파티를 열기로 하면서 시작되었으니, 파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이들의 사랑에 나는 파티의 주최 여부가 더 궁금해졌다. 파티는 무사히 열렸을까, 이들의 가식과 침묵과 염탐이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들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걸까 싶은 마음. 권태롭고 우울한 분위기의 저택에서 버티는 건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그뿐, 타인의 마음 따위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 않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뤼도빅은 자기 존재에 관해 수도 없이 고민했을 터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 사랑하는 아내조차 외면하는 그 자신을 탓하며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때 저택에 들리던 피아노 소리와 그에게 다정했던 단 한 사람은 뤼도빅의 삶을 바꿔놓는다. 사고로 멈춰있던 그의 운전까지 가능하게 하고야 만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게 보이지만, 그들은 자기 마음에 충실하다. 욕망하면 욕망하는 대로, 불안하고 초조하면 그 마음 그대로 감당하면서 오늘의 사랑에 빠져든다. 이게 사랑이 맞는지 의심하지만, 어느 순간 깊숙이 파고든 사랑을 인정하는 모습마저 아름답다.


그들은 두려움도 호기심도 부끄러움도 없는 또 다른 영역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보다 열 살이 많든 적든, 그 일이 스캔들이든 아니든, 그것이 지속적이든 일시적이든, 이 사건, 피아노 옆에서의 그 두 시간이 그녀의 삶, 그녀의 습관과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194~195페이지)


가벼운 코미디 같은 장면이 군데군데 묻어나면서 소설은 리듬을 타기도 한다. 집사 마르탱이 저택의 곳곳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시선은, 그들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속으로 비웃는 것만 같다. 아내 상드라가 다쳤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사랑을 꿈꾸는 앙리의 헛물켜기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비밀을 알면서도 끝까지 지켜보기만 했던 필립의 속내가 위험해 보였지만 알 수 없어서 더 궁금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개 한 마리는 어느 순간 이 소설의 화자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의인화하고 싶은 대상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앙리가 파니를 초대한 이유에서 웃음이 나더라. 아들이 병원에 있을 때 찾아와 유일하게 눈물을 흘려준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니를 선택했다니. 장모가 사위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우는 일이 특별한 일인가 싶어 잠깐 머뭇거렸는데, 이 저택의 사람들을 보면 앙리가 파니의 눈물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아들을 무시하는 며느리보다 아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이가 먼저 생각나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내가 앙리를 잘못 판단한 건 아닐까? 아들을 아끼는 사람을 알아보고 초대한다는 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니까. 그건 뤼도빅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적 여유와 화려함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 마리로르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는(파니는 남편이 죽은 후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여유로운 삶은 아니다) 이에게 눈길이 간다. 물론 뤼도빅이 선택한 사랑의 대상이 존경의 이유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허세와 겉치장으로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 파니가 빛나 보이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부터 미완의 소설이라고 들어서일까. 어느 부분에서 부족한 게 있을까 찾는 마음으로 읽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 결말이 오히려 더 잘 어울렸다. 현실 속 상황이라도 해도 우리는 여전히 고뇌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언젠가는 이 사랑의 마지막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선택하겠지. 어떤 사랑도 끝은 있으니까. 결국은 지금 내가 선택한 것, 사랑이든 사랑의 끝이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사랑도 삶도, 어떤 날이 될지 모를 내일보다는, 지금 보고 있는 오늘의 순간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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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미완의작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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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리뷰 당선 추카추카 합니다^^

thkang1001 2021-12-1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리뷰에 당선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세대주 오영선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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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집값이 싸냐고 물으면 대개 똑같이 하는 말이 있다. “지금요.” 혹시나 집값이 내릴까, 더 좋은 집이 매물로 나오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망설일 때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거다. 어떤 결정을 해야 가장 만족하고 현명한 선택이라고 안심할 수 있을지 불안해서다. 그만큼 하루가 다르게 집값은 오르고, 내 몫으로 기다리는 집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어오는 집을 다 구할 수 있었다면 이런 고민도 없었겠지. 언제나 그놈의 돈이 문제다.


주인공 오영선은 29세 여성이다. 사무보조로 일하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남들은 왜 사무보조를 하느냐고 더 조건 좋은 일을 하라고 말하지만, 영선에게 사무보조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책임감이 무겁지도 않게, 단순 업무로 주어진 일만 하면 되니까 신경 쓸 게 거의 없다. 자기 일만 하면서, 타인의 시선 따위 무시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그녀는 회사의 누구와도 교류가 없다. 그녀의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오면서 이런 삶의 태도는 조금씩 변한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빌라에서 엄마와 동생과 함께 살다가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오영선은 이제 이 가정의 세대주가 됐다. 집주인은 곧 전세기한이 만기 되니 집을 비워달라고 한다. 그녀가 자라왔던 동네, 엄마의 체취가 묻어 있는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영선이 바란 것은 결코 특별한 삶이 아니었다.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미래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가난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자신감은 상실되어 갔다. (143페이지)


바라는 대로 다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영선에게 닥친 현실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쯤 되면 짐작했을 것이다. 그녀가 구할 수 있는 집을 찾는 일, 집값을 맞추는 일은 어려웠다. 여동생과 함께 살 집이니 의논해야 했고, 전세금을 빼고도 한참 모자라는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고민이 되겠지. 요즘에는 대출 없이 집을 사는 일은 드물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대출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아파트 노래를 부르며 결국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부모님이 은행에서 빌려 쓴 돈은 이 가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매달 갚아야 하는 돈이 생기면, 일상이 힘들어진다. 쉽게 사 먹었던 어묵꼬치 하나에도 주저하게 된다. 매달 갚아야 할 금액을 맞추느라 일이 힘들어도 쉬지 못했다. 그렇게 돈에 끌려다니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이때의 고생 때문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할 것 같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영선의 집 구하기 모험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실 돈만 여유로웠다면 이 이야기는 모험이 되지 않았을 테다. 언제나 같은 고민,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고 싶은 이상과 가진 돈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가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집을 구하느냐, ‘영끌해서 빚을 지더라도 내 집이라는 안도감을 누릴 것이냐. 그녀는 이 정도도 모르고 살아왔다. 부모님이 집 때문에, 빚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만 보면서 자라왔지 정작 서른을 바라보는 그녀의 현실에서는 꿈을 포기하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계획에만 몰두했다. 엄마의 부재로 이제 그녀에게 넘어온 공은 마치 그녀를 시험하듯 부동산이라는 세계에 밀어 넣고 어떤 길로 가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읽으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럼 다음 이야기가 뻔하니 소설이 재미없겠다고? 아니다. 오히려 오영선의 부동산 입문기가 생생해서 놀랄 정도였다. 어쩜 이렇게 취재를 가까이서 했는지 모르겠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부린이였다. 우연처럼 비밀을 알게 되어 안면을 튼 회사의 주 대리는 영선에게 부동산 스승이 된다. 물론 개인적인 일이니, 개입하면 안 되는 선이 있다. 주 대리는 그 선을 철저히 지키면서 영선의 현실 감각을 일깨워준다. 청약 준비부터 당첨 조건까지, 어느 지역을 돌아보고 어떤 이슈에 관심 두어야 하는지를. 주 대리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그녀 역시 스스로 부를 축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인생의 모든 중심이 부동산 투자와 성공에 있다. 영선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영선에게 현실을 조언해주고 세상을 더 정확히 보게 하는 주 대리는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소설 속 인물에 머물지 않는 그녀는 마치 현실에서 알고 지내는 언니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적에는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하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맛있는 거 먹는 것이 즐거움이었던 멤버들이,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모임에서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이야기로 그 자리를 채우는 게 낯설지 않다. 그 모임에 주 대리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양가감정에 힘들어지기도 하겠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주 대리를 비난하면서도, 주 대리처럼 하지 않으면 집을 갖지 못할 거라는 현실에 그녀를 부러워하거나.


정말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대출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과 같을까? 집을 구하려면 피할 수 없는 대출에 주 대리는 저런 명언을 남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대출은 어느 정도일까? ‘그만큼이란 역시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른 금액이겠지만, 주 대리의 말이 너무 와닿아서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돈 모아서 집 사려고 차곡차곡 모으면서 기다렸더니, 내가 모은 돈보다 집값 오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때 그냥 무리해서라도 집을 살 것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말이 스치고 지나간다. 인생은 비례가 되지도 않고, 성실하게 모으기만 한다고 다 이루고 살 수도 없다. 금수저라도 물고 태어났다면 좋으련만, 그건 다음 생에서나 가능할까 싶어 포기한 지 오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끔 로또도 사지만 왜 매번 내 번호는 피해가는지도 모르겠고. 없는 돈에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 속으로 벌벌 떨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만, 역시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소설 속 오영선처럼 크게 바라는 것 없이 소박하게,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저럭 살아왔다. 엄마가 계시는 시골집을 정리하고 적당히 지낼만한 아파트를 구해야지 고민하던 게 벌써 일 년.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시골집 팔아도 소형 아파트 한 채 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이런 시골에서, 이 정도의 집값으로 채무자가 되어 살아가는 일이 흔한데, 매일 뉴스에서 보는 집값 얘기는 어디 다른 나라 이야기 같다.


영선은 버스를 타려다가 걷는 걸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대학에 가서는 취업, 이후에는 결혼과 집 등으로 화제가 달라졌다. 마주해야 할 세계는 넓어지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감당해야 할 것과 책임져야 할 것들이 두터워진다. 하지만 영선은 그 모든 것들을 멀리하고 혼자인 것을 선택했다. 이건 도피일까. 아님 단단해지기 위한 몸부림일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이어지는 동안 영선은 화려한 불빛들이 줄 서 있는 번화가에서 벗어나 큰길에 이르렀다. (88페이지)


2021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한 편의 소설에서 봤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에 우울해지면서도, 어떤 방법을 알게 된 것도 같다. 물론 그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완전한 답이 없다면 최상의 답을 찾아가는 거 아니겠나. 어차피 선택은 자기가 하는 거지만, 이 정도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실적인 경제 서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소설은 소설이다. 이야기로 남겨두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집은 각기 다른 의미로 존재한다. 그 안에서 내가 가진 집의 개념과 같은 인물을 찾으면서 읽는 재미도 있다. 혹시나 다른 시선을 가진 인물이 보인다면 새로운 시선으로 지켜봐도 좋다. 꼭 내 집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영선, 자산 증식 수단으로 부동산이 최고이며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많다고 여기는 주 대리, 부동산으로 인생 파산까지 경험하고 다른 곳에서 위로를 얻으며 사는 카페 사장 휴 씨. 어느 한 사람에게만 마음 두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인물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충에 읽으면서 같이 힘들어진다. 지금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이러하다. 묻고 싶은 게, 듣고 싶은 대답이 많아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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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7 0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2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