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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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시작이다. 하야타는 조국의 재건을 고민하면서 떠돌던 중에, 탄광의 모집인에 이끌려 갈 뻔했다. 그때 하야타의 잘못된 선택을 막아준 아이자토 미노루를 만난다. 아이자토 역시 탄광 모집인이었지만, 탄광도 분위기가 달랐다. 아이자토는 조금 더 인간적이고 덜 힘든 탄광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싶어 하는 이다. 하야토는 처음에 탄광에 관심도 없었지만, 아이자토를 만나고 그를 따라 스스로 탄광으로 간다. 하야토는 아이자토의 무엇에 이끌렸을까. 어차피 같은 일본인, 엘리트인 하야토의 신분을 속이고 탄광에 넣어줄 이, 하지만 분위기가 묘한 아이자토를 믿고 따를 수 있다는 맹목적인 마음으로 그를 따른다.

 

아이자토를 따라간 탄광은 일본인 광부가 전부였다. 때는 패전 후였으니, 조선인들은 모두 떠났다. 그래도 탄광은 유지해야 하니, 정부는 일본인 광부들을 고용하면서 탄광을 이어간다.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탄광은 매 순간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작업 현장이다. 갱으로 내려갈 때마다 다시 온전하게 올라올 수 있을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강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미신에 의지하면서라도 안전을 기도한다. 그들이 믿는 여우 신.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좋다. 광부들의 안전과 그 가족의 안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신이라도 필요했으리라.

 

어느 날, 이 여우 신을 교묘하게 인용하여 살인이 일어난다. 하야타가 믿고 따르는 아이자토가 갱이 무너져 매몰되었다. 곧 탄주에서는 탄광의 '기도'가 죽었다. 금줄에 목을 맨 채로. 기도의 사연을 잘 아는 이들은 그가 자살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면서 광부 기타다가, 그리고 니와가 기도와 같은 모습으로 죽는다. 이쯤 되니 이들 모두가 자살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자기 방 안에서 죽었고, 그 방의 방문과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죽였다면 도대체 어디로 탈출했단 말인가. 거듭되는 밀실 살인으로 탄광은 분위기기 뒤숭숭하고, 누가 범인일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야타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탄주의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는 순간, 그는 이 죽음이 절대 살인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들을 죽이고 있는지 찾아내야 했다. 하나씩, 차근차근, 하야타는 살인이 행해진 밀실을 살펴본다. 살인에 쓰인 금줄과 밀실로 만들어버린 도구들을 눈여겨본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런 장면으로 스쳐 지나갔을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피며 죽은 이들의 인생과 죽음의 이유를 살핀다.

 

어떤 사람은 면사무소 직원에게 "일본으로 간다"라는 말만 듣고 군청까지 끌려왔다. 거기서 높은 사람의 연설을 듣고서야 자신이 탄광에서 일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444페이지)

 

지금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건.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겪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고통이 바로 연결된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면서 데려간 곳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만들었고, 강제 징용으로 탄광으로 끌고 갔다. 그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한국인으로 채웠고, 그들이 부족한 것을 한국인의 노동력으로 끌어냈다. 인간답지 못한 생활을 제공하면서,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싶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게 했다. 전쟁은 끝났고 우리나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그때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대한민국을 아프게 한다.

 

이 소설이 특이하게 다가오는 건, 태평양전쟁 직후라는 역사적 배경에 호러미스터리의 요소를 완벽하게 녹아내면서, 일본인의 시선으로 보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심정을 담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광부들의 죽음, 시간을 거슬러 찾아낸 그들의 연결고리, 연쇄살인처럼 벌어진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작가의 전작들이 어땠는지 알 수 없는 이 무지한 독자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이 작품으로 미쓰다 신조에게 입문하는 즐거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검은 여우를 모시며 마음속 불안을 잠재우는 사람들의 믿음을 죽음에 덧입히면서, 귀신의 장난인지 누군가의 잔혹한 계획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만든다.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범인인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던 걸 보면, 작가가 잘 직조한 이 소설의 짜임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결론에 다다를 때 느끼는 그 사건의 결말과 원인, 인간적인 복수심에 누가 감히 벌을 줄 수 있을까.

 

이미 미쓰다 신조의 팬이라면, 이 소설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처음 접한 나는, 어떻게 이런 소설을 독자에게 내놓을 수 있을까 싶어서 놀랍기부터 했다.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하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읽으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빠져드는 건 처음이다. 왜들 그렇게 이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는지 몰라서, 그 궁금증에 언젠가 한 번은 완독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특이했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는 그 무게감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라면 언제든지 또 펼쳐 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마 작가의 이름을 모르고 읽었다면 한국인 작가가 쓴 소설이 아닐까 착각을 할 만큼, 누구보다 한국 독자에게 더 사랑받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소개글의 어떤 문장처럼, '참혹한 역사와 칠흑빛 공포, 합리적 추리의 완벽한 하모니'였다.

 

역사와 미스터리의 조화가 이렇게 완벽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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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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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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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입양된 나나는 극작가이자 배우이다. 프랑스에서는 ‘나나’로 불리며 양부모에게 불편함 없이 자랐다. 어느 날 나나에게 이메일 한통이 배달된다. 예전에 나나가 한국 신문에 응했던 인터뷰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젊은 감독 서영의 의뢰였다. 나나는 선뜻 서영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으나, 곧 자기가 헤어진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 곧 엄마가 될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 한 가지, 그녀의 생모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거다. 생모를 만나거나 생모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한국에서 살던 시절 나나에게는 ‘문주’라는 이름이 있었다. 철로에서 기관사가 발견하고 그의 집에서 1년 정도 문주를 돌봐주면서 불렀던 이름. 문주는 서영에게 묻는다. 문주의 뜻이 무엇이냐고. 이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물으며 그 뜻을 읊조리는 문주의 행동이다. 어쩌면 문장에서 그대로 문주의 표정이 그려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주는 누군가의 이름에서 그 사람의 역사를, 의미를 찾는다. 이름의 뜻으로 그 사람의 시간과 이미지 같은 것을 그린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의 뜻을 먼저 말하면서 문주와의 소통을 이룬다. 어쩌면 문주에게도 분명히 사랑받았던 의미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체류 동안 문주가 찾아다니던 것들, 그 흔적들의 발자취를 영상에 담으면서 서영의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그 분량을 채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 한 분, 서영의 거처를 내준 문주가 아래층 ‘복희식당’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된 묘한 기류. 복희식당의 할머니는 문주가 입양아인 것을 알아챈다. 왜 식당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냉담한 할머니가 문주를 대하는 태도는 의외였다. 따뜻한 밥을 내어주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흑인 혼혈 여자아이. 그 아이가 할머니와 어떤 사연을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흔한 인연은 아니었으리라. 소녀를 마냥 그리워하는 할머니, 소녀가 갔다던 벨기에는 어떤 곳이냐며 묻기도 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그리움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를 보는 문주는 원망의 대상이 한 명 더 는 것만 같다. 기찻길에서 발견된 문주는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엄마를 원망했다. 복희식당의 할머니도 버린 아이를 두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마치 자기 엄마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를 버린 사람이 여기 또 한 명 있네?’

 

내가 원한 보상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버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느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기관사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망상이었다.

생모나 기관사를 찾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거나 미비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한 대가였다. 그들과의 만남이 결국 손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나는 더더욱 외로움에 매몰됐다. 외로움의 끝은 무력감이었다. (27페이지)

 

입양된 아이 문주와 입양 보낸 아이를 생각하는 복희식당 할머니.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슨 추리소설처럼 과거로 거슬러 간다. 문주는 발견된 그 시점을 찾아가면서 그 시간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복희식당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다른 사연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문주가 자기 근원을 찾아가듯, 복희식당 할머니가 만나고 싶은 이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누군가의 진심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문주는 배속의 아이 우주에게 점점 더 의미를 부여한다. 우주라는 이름부터 삶이라는 완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대신 보여주는 흐름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문주가 프랑스로 입양된 해가 1986년이다. 1980년대는 한국의 해외 입양이 세계 1위였던 때라고 한다. 특히나 미혼모의 아이가 다수를 차지했고, 혼혈아들이 많았다고도 한다. 소설의 복희식당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아이는 입양아가 맞다. 복희식당 할머니 추연희가 직접 해외로 입양 보낸 아이다. 그 아이가 추연희의 아이는 아니다. 불임으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기지촌의 간호사로 일하던 추연희가 기지촌에서 일하던 백복순과 이룬 대안 가정에 속했던 아이였다. 80년대의 기지촌과 미혼모와 혼혈아. 그리고 입양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었다.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이 임신하고, 그렇게 태어난 혼혈 아이는 아이들의 세상에 속할 수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온전한 가정이 아닌 미혼모라는 이름의 엄마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해외 입양.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으며 사는 것보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해외가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차별의 정도나 모양새만 다를 뿐이지, 온전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는 시간은 그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흐름은 입양아와 입양 보낸 사람을 모으고 있다. 한때 해외입양 1위로 불명예를 날리고 있던 시절의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부모의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모여서 한때 대안 가족을 만들었던 추연희의 시간을 되돌려준 것 같다.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추연희라는 이름을 한번 되찾은 복희식당 할머니를 문주가 보내주면서 정리하고, 곧 태어날 문주의 아이 우주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의 동그라미가 되어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 소모해 버린 몸을 버리고 이제 곧 무형의 암흑에 도착하게 될 연희는 씨앗이나 연기처럼, 혹은 한 줌의 물질이거나 에너지가 되어 영원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수십억 년의 진화를 거슬러서, 이 세상에 오기 전 하나의 세포로도 존재하기 이전에 그녀가 그러했듯이. 고생했어요. 나는 말했다. (235페이지)

 

자기 이름의 역사를 찾아가는 일. 누구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누구의 보살핌이라도 닿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랐을지도 모를 그 시간을 조금은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생각하게 한다. 문주의 기억 속 철로는 문주가 버려진 곳이 아니라 그저 발견된 곳이었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달라질 삶의 의미들 말이다. 추연희는 떠나면서 자기 이름을 한 사람에게 기억하게 했고,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를 새기면서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의도와 손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이 소설 때문에 가끔은 잊고 지내던 따뜻한 타인의 손길을 한 번쯤은 기억하게 된다. 미처 몰랐던 어느 진심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를 만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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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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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대학가 근처에는 원룸이나 소형 아파트, 기숙사가 학생들을 주거를 흡수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대학가는 흔히 자취방이라고 부르는 옛날식 원룸이거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하숙이 대세였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녔기에 이런 방식의 독립은 경험하지 못한 때였다. 다행인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친구 덕에 기숙사 구경도 해 보고, 그 친구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 앞에서 하숙했기에 하숙집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독방에 세면시설이 있었고, 식사만 다른 하숙생들과 같이했다. 복도식 아파트의 축소판처럼 각각의 하숙방이 쭉 있는데, 나중에는 옆방 남자 선배와 친해지기도 하고, 다른 학부의 친구를 알게 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가졌던, 로맨스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설정이 현실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은 각자의 학교생활 충실히 하고 졸업과 동시에 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잠깐의 식구(?)였다.

 

이상하다. 이런 로맨틱한 상상은 그 이후로도 가끔 떠오르곤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그래, 언젠가 나에게도 옆집의 남자와 부딪힐 사건이 벌어질지 몰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괜히 화내거나 성질내지 말고 성격 좋은 여자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엉뚱한 계획까지 세웠다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은 정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 간혹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복사해서 붙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 '정말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일어났더라고요!' ? 그거잖아.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머무는 거지... 라고 다짐하지만, 또 상상하고 기대하고 설레고 싶어지네, ~!

 

베스 올리리의 셰어하우스는 독자의 이런 간질간질한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설이다. '내 로맨스가 아니면 관심 없다! 소설이나 영화의 로맨스는 사양한다!'라고 외치는 독자에게 은근히 스며들기 좋은 이야기로,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과 두근거림,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오해들, 좀 더 성숙한 사랑을 위해 이들이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현실에 맞는 상황들과 약간은 소설 같은 설정에, 인생의 단짠단짠을 그대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사는 게 뭐 있나, 이렇게 힘들다가도 인생 전화위복이 되는 거, 그렇게 행복에 한발 다가서려고 애쓰면서 사는 게 사는 거지.

 

애인과 헤어진 티피는 같이 살던 애인의 집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지만, 그녀가 가진 돈은 부족했고, 살 곳은 필요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셰어하우스 광고. 집주인은 야간에 일하는 간호사여서 서로가 집에 있는 시간이 다르니 자기가 집에 없는 시간에 집을 대여한다는 것. 이용 시간을 정해놓고 같은 집을 시간대 나눠서 둘이 같이 쓰자는 말이다. 월세도 괜찮은 가격에 좋은 조건이지만, 집주인 남자와 동거(?)한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티피는 집주인 리언과 계약하게 되고, 시간차 동거를 시작한다.

 

서로가 '윈윈'하는 계약이었지만,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간을 쓴다는 것, 서로 성별이 다르다는 것,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의 공간이 공유된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등 혼자 살 때와 다른 게 너무 많지 않은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지켜야 할 게 많고, 나만의 공간이 아니니 여러 가지로 물어볼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의사소통은 필요했다. 티피가 리언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두 사람의 의사소통은 쪽지였다. 집안 곳곳 발길 닿는 곳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적은 포스트잇 쪽지를 붙여놓는다. 세면대 진열장에, 냉장고에, 침대 옆에, 식탁 위에 등. 음식을 많이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고,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고, 어느 공간을 어떻게 바꿨으니 이해해달라는, 정리되지 않은 짐의 처리 방식 같은 그 공간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다. 이 정도면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온도가 괜찮지 않은가? 적당한 거리와 딱 필요한 내용만 주고받으면 되는 일. 참 심플하다.

 

그런데 말이다. 읽다가 보니 이 동거의 단점보다는 장점, 감정을 건드리는 설정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꾸 설렘설렘하더라. 21세기의 유럽이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애인을 정리하는 것도 참 심플하게 느껴졌는데(리언의 경우), 왜 티피와 리언이 만들어가는 사랑은 아날로그 시대를 보는 것 같을까? 느려도 너무 느리다. 뭔가 말랑말랑한 게 피어오를 것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워서 좀 더 살펴보다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좋게 보면 사람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성격이고, 나쁘게 보면 답답해서 독자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냥 핑계 하나 만들어서 서로 얼굴 보란 말이야~! 그러다가 둘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 곳이 리언의 집 욕실이다. ㅋㅋ 티피는 어쩜 그렇게 타이밍도 잘 맞췄는지, 첫 만남이 훌러덩 다 벗은 누드 차림과 속옷 차림인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서로 민망한 꼴을 먼저 보고 시작했으니, 뭔가 급히 전개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나뿐만이 아닐 터.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아날로그적 사랑법이 두근거리면서 다가왔던 건 둘이 주고받는 포스트잇 쪽지였다. 얼굴도 모르고 통화도 안 하는 두 사람은 집안에서의 쪽지와 급할 때 사용하는 문자였다. 말로 하면 몇 초 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쪽지로 오고 가면서 차곡차곡 쌓인다. 소소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일상이 그렇지 않은가. 하루하루 소소하게 살아가는 시간. 누군가와 종일 이야기했어도 정리하려고 보면 일상의 안부를 나누는 일이었다는. 티피와 리언이 처음에 나누는 메모는 집안의 정리나 서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서로의 일상을 작게나마 적기 시작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묻기에 이른다. '리언, 괜찮아요?' 같은 걱정의 말, 출판사 편집자인 티피가 만든 책의 감상을 전하고, 일터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누는 것도 두 사람 사이에 점점 커지는 일상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며 상대의 마음을 읽고, 때로는 눈앞에서 마주하고 말할 때보다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수단인 편지의 힘을 확인한 것만 같다. 하고 싶은 말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은 세상에서,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전달되기만 하면 되는, 속도보다 진실한 마음에 중요함을 강조한 것 같아서 괜히 흐뭇해지기도 했다.

 

냉장고 문에 이마를 잠시 얹었다가 종이 쪼가리와 포스트잇 쪽지들을 손가락으로 훑어본다. 엄청난 양이었다. 농담, 비밀, 이야기, 두 사람의 인생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는 광경. 두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가는 광경. 아니면 뭐랄까. 동시에 똑같이 바뀌는 장면이랄까. 다른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251페이지)

 

이 소설이 의미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데이트폭력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티피의 전 애인 저스틴은 다른 여자가 생기고 같이 살던 티피를 내보낸다. 오히려 동거하는 동안 발생한 지난 비용까지 청구한다. 사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티피의 말을 듣고, 이런 놈과 헤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피는 저스틴의 연락에 다시 그를 마음에 담으려고 한다. ? 저스틴과 오랜 세월 연애하는 동안 티피는 저스틴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그의 모든 말에 점점 수긍해가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말이 옳고, 사실을 왜곡해서 기억하게 하고, 강요와 압박으로 상대가 잘못했다고 결론짓고 인정하게 만드는 일들. 저스틴은 교묘하게 티피를 조종했고, 티피는 그것도 모른 채로 저스틴과의 반복되는 헤어짐과 연애에 익숙해진 거다.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저스틴이 티피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저스틴과 연인으로 지내면서 티피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는, 그와 헤어진 후에 나타난 후유증과 같다.

 

 

한 사람은 전 애인의 감정적 학대에 속으로 무너져 내렸고, 한 사람은 내성적 성격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며 죽음을 일상으로 보면서 산다. 우울함이 내재하면서 언제든 극단적으로 치닫는 마음에 나쁜 선택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이런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만났으니, 두 사람을 지켜보는 독자의 염려도 저절로 커진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이 단순히 로맨스 소설로만 비치지 않는 이유, 어쩌면 연애의 시너지효과가 제대로 발휘한 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티피와 리언은 진짜 연애와 사랑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줬고, 정신적인 아픔까지 치유되어 가는 것을 증명했다. 분명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의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까지 아우르며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자격이 아닐까? 티피와 리언의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에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한마디가 간섭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각자의 인생이지만, 또 같이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준 이들 때문에 흐뭇하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발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내내 웃으면서 읽었다.

 

"때로는 예전대로 사는 게 더 쉽게 느껴져요. 더 안전한 것 같죠. 하지만나는 당신이 해내는 걸 봤어요. 당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을. 당신이 얼마나 용감한지 봤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괜찮겠어요?" (441페이지)

 

눈물보다 웃음을 더 많이 기억할 수 있다면,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연애 괜찮은 것 아닐까? 그동안 로맨스 소설 읽어오면서 로맨스에 관해 나름의 정의를 여러 가지 세웠었는데, 어느 정도 현실에 맞게 떨어지는 정의는 '동반성장'이었다. 상대와 함께함으로써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 동시에 상대방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더 발전된 인간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 그렇게 상대를 존중하고 공감의 존재가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연애가,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달콤함과 말랑말랑함에 인간미까지 얹어진, 로맨스와 자기 성장이 잘 어우러진 소설이었다. 홍보 문구의 한 문장처럼,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로맨스는 여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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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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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한정’이라는 말에 혹해서 망설이던 책을 주저하지 않고 책을 산 적이 있다. 초판에 한정하여 양장, 저자 사인본 같은 이유로 예약판매 버튼을 누르고야 마는 일. (가장 최근에 산 초판 한정 책은 뭐였더라...) 아니면 리커버 출간본이거나. 지금 당장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출간을 기다렸던 책이 아니라, 그저 나중에 사는 사람과 다른 책을 받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것도 책을 향한 욕망이라면 욕망일까. 그럼 인간의 욕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정확히 알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인간의 욕망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며, 채우고 만족해하는 삶의 일부분이라는 거다. 그저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하고 급기야 나의 것이 되어야만 만족에 이르는 것. 하지만 이런 욕망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할 것임에도, 어느 순간 그 선을 넘어 범죄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개인의 욕망이 지켜야 할 그 선을 넘어 범죄자가 되어버린 깃털 도둑에 관한 이야기다.

 

에드윈 리스트는 플루티스트다. 어렸을 적 배운 플라이 타잉에 흠뻑 빠져들어, 어느 순간 그 세계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발휘한 청년이 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행해지는 플라이 타잉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온라인상에서 그가 배운 그대로 플라이 타잉 비법을 전수하기도 하는, 어리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재능을 흠뻑 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취미든 돈이 들게 마련이다. 플라이 타잉에 필요한 건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깃털은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은 염색하거나 깃털 비슷한 재료로 장식해도 좋을 테지만, 마니아층 사이에서 플라이 타잉의 매력은 진짜 깃털 그것도 ‘아름다운 깃털’로 만든 것이어야만 했다. 희귀한 새의 깃털이나 19세기 깃털 모자의 유행으로 사용되었던 깃털 같은 거 말이다. 에드윈은 음악에 필요한 플루트도 좋은 것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플라이 타잉에 최고점을 찍기 위해 아름다운 새의 깃털에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2009년 영국의 트링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새 가죽을 훔쳤다.

 

 

 

처음에 박물관은 도난 사실을 몰랐다. 500여일이 지나서야 도난 사실을 알고 수사를 의뢰했으나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수사가 길어지는 동안 에드윈은 자기의 범죄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사라졌다. 훔쳐 온 새의 가죽과 깃털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팔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왕립음악원에 다니고, 플루트를 연주하고, 플라이 타잉에 빠져 지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에드윈이 저지른 일은 완전범죄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 들려오는 이야기와 세상에 알려진 것을 보면 그의 완전범죄는 실패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에드윈이 희귀한 새의 깃털을 신나게 팔아댈 때 그에게 깃털을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깃털의 출처를 의심하는 이도 있었던 것. 그렇게 단서를 잡은 경찰은 에드윈을 찾아갔고 그도 순순히 자백했다. 남은 것은 그의 범죄를 낱낱이 밝히는 일과 그에 맞는 처벌을 내리는 것인데...

 

 

원래 플라이 타잉은 강에서 송어를 잡기 위해 인조 미끼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플라이 타잉을 무슨 예술 작품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더 아름답게, 더 멋지게 만들어 자기만의 플라이 타잉을 구축하는 것.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새의 깃털을 사용하게 되는 건데, 보통은 일반적인 새의 깃털에 아름다운 색으로 염색해서 사용해도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아름다움이 처음부터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과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이 분야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속설이나 가진 자의 우월감을 뽐내려고 희귀한 새의 깃털을 소장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된 구하기 힘든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 방식이 이들의 갈증을 심하게 만들었고, 고가로 거래되는 깃털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급기야 박물관에 전시된 새를 훔치게까지 한 것이다.

 

 

 

혹시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저 박물관의 저 새들을 가져올 방법이 없을까? 아무도 없을 때 그냥 훔쳐 올까? 아니야, 불가능할 거야... 상상으로만 멈춘 일을 에드윈이 해낸 것일 뿐, 그래서 박물관의 전시품을 훔친 에드윈을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드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마음은 나중에 수사 과정이나 저자가 인터뷰를 시도하려고 했을 때 보이던 커뮤니티 회원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멸종되어 더는 알아야 할 가치가 없는 새들, 더는 연구할 게 없어진 대상을 좀 가져갔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이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연구하는데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플라이 낚시는 수온, 유속, 날씨, 물고기의 활동성, 플라이의 정확도, 깔끔한 캐스팅이 전부였다. (351페이지)

도대체가 궁금하다. 송어 낚시를 하는데 새의 화려한 깃털이 왜 필요한가? 희귀한 새의 깃털은 송어 낚시에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 분야에 심취한 이들의 은근한 경쟁 심리 같은 게 작용해서 시작된 대결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흡사 요즘에도 어느 덕후들의 세계에서 보는 일반적인 모습 같다. 희귀템을 먼저 손에 넣어야 하고, 이런 희귀템은 중고시장에서도 상당히 고가로 거래가 되며, 마침내 그런 제품들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채워지는 이 충만감이란! 덕질은 개인의 취향이지만, 그 개인의 취향에 인류 역사의 연구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들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때로 자기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에드윈의 이런 기이한 행동도 인간이 내재한 욕망을 거스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여러 방면의 학자들과 박물관은 그들의 집착과 욕망에 맞서 싸워야 했다.

 

 

에르메스 가방과 크리스찬 루부탱 구두가 나오기 전까지 신분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은 죽은 새였다. 더 이국적이고 더 비쌀수록 더 높은 신분을 상징했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새의 깃털일 것이다. 수컷 새는 암컷 새의 눈길을 끌기 위해 자신의 깃털을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어왔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그 깃털을 이용해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고, 사회적 신분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새들은 수백만 년 동안 자기들끼리만 지내면서 너무 아름답게 변해버렸다. (70페이지)

 

깃털을 처음 장식으로 이용한 건 19세기였다고 한다. 19세기의 거의 마지막 30년 동안 수억 마리의 새가 인간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늘날의 명품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신분을 표현하는 최고 수단으로 새의 아름다운 깃털을 선택했다. 깃털은 희귀하고 비싸게 거래될수록 높은 신분을 상징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왜가리 깃털을 올림머리에 꽂아 넣은 후, 100년이 지나지 않아 새의 깃털은 전 세계 여성의 모자를 장식하는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모자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볼 수 없던 이들은 깃털 사용을 막으려고 했고, 깃털 관련 업체들은 경제 위기를 들먹이며 반대했다. 법으로 막을수록, 지하에서 거래되는 깃털은 더 귀한 게 되었고 부르는 게 값이 되었을 테지. 가벼운 깃털 하나에 묵직한 인간의 역사가 빼곡하게 담긴 것도 모르고 말이다. 보존해야 할 것들로 찾아낼 수 있는,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이들의 욕망은 집어넣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범죄 실화라고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저자의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한 가독성이 있다. 절도와 범인, 범인을 추적하는 이의 구도를 넘어서서 범죄의 시작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에서 찾기도 하는 내용이 너무 흥미롭다. 그 바탕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금지되는 것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있었다. 당신에게도 수없이 나타날 수 있는 욕망, 그 욕망이 춤을 출 때마다 인류 역사의 귀한 자료들은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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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06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이런 책이었어요? 저는 깃털 도둑이라고 해서 은유적으로 말한 미스테리 소설일거라고 생각했어요. 와..

구단씨 2019-12-07 15:41   좋아요 0 | URL
네. 그렇답니다. ㅡ.ㅡ;;
실화라는 게 더 놀랍더라고요.

반유행열반인 2019-12-0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팔할 쯤 읽고나서야 아 논픽션이네 했어요 ㅎㅎ그만큼 재미있고 유익하더라구요.

구단씨 2019-12-07 15:4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도 위의 다락방님처럼 소설일 줄 알았어요.
한참 읽다가 보면, 진짜 놀랍기만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