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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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있을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니, 내가 경험한 인간의 모습은 보통 힘든 순간에 더 절망하기 먼저 하기 마련인데. 아프기 시작하면 빨리 낫길 바라면서도 좋아질 거란 기대 먼저 하지 않게 되던데. 생각해보니 나는 너무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먼저 떠올리는 인간이 된 것 같아서 씁쓸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서글프다. 내 뇌를 개조하지 않는 이상 나는 여전히 나쁜 결말이나 슬픔을 먼저 떠올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이 소설 속 가족의 모습에 병아리 눈물만큼의 긍정 에너지를 찾기도 한다. 그래도 좋아질 거라고, 나아질 거라고 믿고 살아가는 거 말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싶어서 말이다.


15평 빌라에 여섯 식구가 모여 산다. 주인공 수경과 수경의 부모님, 수경의 남편, 남편의 조카 둘. 여기까지만 읽고 속이 답답했다. 15평 집의 크기를 상상하고, 그 안에 성인에 가까운 청소년 둘과 어른 넷의 삶을 그려보니 내 속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한 가족도 아닌, 사돈 관계에 가까운 이들이 모여 사는 건 어떤 걸까. 더군다나 이 가족 중에서 돈을 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유일하게 돈을 벌었던 수경은 일을 그만두고 몇 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동료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잠이 든 수경은 성범죄를 당할 뻔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직장에서는 이 문제를 조처하지 않았고, 수경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됐다. 특히 누군가 건네는 음식이나 음료수는 절대 먹지 않았다. 수경의 남편은 수익이 없는 전업 투자자였고, 수경의 아버지는 사기당하고 딸의 집에 얹혀산다. 수경의 엄마는 딸을 돌보려 청소 일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돈을 벌러 나가야 한다. 수경이 벌어오던 돈으로 버티던 가족이 이제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으니. 수경 역시 더는 이 문제로 버티고만 있을 수가 없다. 돈을 벌어야 했다. 마음의 수습 따위 현실 앞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소설가가 수경을 바라보았다. 수경도 소설가를 바라보았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힘들어.

너만 별 볼 일 없는 거 아니야. 나도 별 볼 일 없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그래. 그러니까, 마시자. (166페이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다. 바로 옆에서, 오랜 시간 같이 웃으면서 일한 동료가 설마 약을 탄 음료수를 건넬 줄이야. 수경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겠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됐겠지.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바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마저 의심하게 되는데, 어떻게 사람을 상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돈을 벌어야 했고, 사람을 볼 수는 없고. 수경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비대면으로 할 수 있는 일, 처음에는 택배 일을 한다. 노동자는 아닌데 노동자처럼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고, 노동자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사업자(?) 신분이고.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선택받지 못하면 일을 받을 수 없고, 내 맘대로 쉬자니 다음 일을 장담할 수 없는 논리가 적용된 일을 그래도 해야 했다. 수경과 엄마는 이렇게 택배 일을 시작하고, 가끔은 남편이 돕기도 한다. 수경의 아버지는 걸어서 음식 배달을 하고, 남편은 앱으로 콜을 받고 대리운전을 한다. 어쩌다 보니 온 가족이 플랫폼 노동자가 되었다. 그렇게 이 가족은 앱 도우미 헬프 미 시스터의 세계로 스며든다.


흔하게 주문하는 음식 배달 앱, 누군가는 한 잔 술에 필요한 대리운전, 지저분해지는 곳을 청소해주는 일, 물건 주문하고 기다리는 택배. 너무 일상이 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과정으로 소비자의 앞에 닿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소설로 그 세상을 조금 더 들여다본 것 같지만, 여전히 다 알지는 못할 테다. 그런데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전하는 플랫폼 노동자의 삶을 보면서, 분명 새로운 노동의 현장이긴 한데 이상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는 걸 보게 된다. 법이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언제나 그 빈틈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조리가 끼어 들어온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또 권리를 위해 싸우면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쟁취한 것들로 만족하며 살아간다. 수경의 경우, 더 절실한 상황이어서 그럴까. 이 가족의 도전이 의외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의욕이 없는 아버지, 고무장갑을 가지고 다니는 엄마, 헛된 꿈을 좇는 남편, 사람이 두려운 수경. 뭐 하나 도전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모여서 하나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기적 같았다.


이 가족을 보면서 이런 생각만 들었다. 좋은 일이 있을까. 더 절망으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구나.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삶이라고 여기고 싶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벼랑 끝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을 살고 있었다. 의욕도 없고, 겁은 나고,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고. 그런데도 숨이 붙어 있으니 또 살아가기는 해야겠고. 모여 있으니 더 나쁜 것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가족으로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이 가족이 밖으로 나가고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는 걸 보니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부딪히다 보면 가슴 속에 쌓였던 불안함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에 속고 돈에 무너졌던 상처가 이렇게 치유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 말이다. 가장 큰 상처를 받은 듯했던 수경이 가장 먼저 그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누구도 돈을 벌지 않았던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런 수경을 돕자고 나섰던 가족들의 한 뼘들이 어느 순간 이렇게 자라났다. 이쪽으로 옮기고 저쪽으로 가보면서 만난 플랫폼 노동자의 삶은 이 가족에게 또 어떤 세상을 보여주려고 할까.


이상한 가족 구성이었다. 남편의 조카들과 아내의 부모가 같이 사는 집. 쉽게 볼 수 있는 가족의 형태는 아니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게, 원래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자연스러움은 이들의 연대로 이어진다. 수경과 엄마가 헬프 미 시스터에서 보여준 여성 연대의 세상이 색다르게 보였다. 여성 의뢰인, 여성 도우미, 남성과 마주칠 일 없어서 걱정 없이 의뢰하고 받아들이는 서비스의 형태. 이런 형태의 서비스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수경의 엄마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왜, 이런 서비스가 필요한 세상에 살게 되었는지 묻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손을 잡는다. 연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변화와 치유가 증명하듯이, 우리는 밖으로 나가고 나아지는 삶을 그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것처럼, 함께 일어서서 웃는 기적을 만든다. 작은 차에 다섯 식구가 타고 나들이 같은 의뢰를 수행하러 갔을 때,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 이 가족은 이렇게 구원받는구나 싶어서 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에게도, 비슷한 시간을 걷는 누군가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읽게 된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256페이지)


우리가 모두 바라는 삶이 비슷하지 않을까. 스스로 일어서기를,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살아갈 수 있기를 말이다. 보통의 삶으로, 평범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갖는 것. 웃고 있으니 좋은 거라고, 그러면 된 거 아니냐고 말하던 이 집의 꼬맹이 조카가 말하던 게 정답인 것 같다. 좁은 집에서도, 슬픔이 침범해도, 반지하밖에 선택할 수 없어도, 가족 모두가 웃고 있으니 그거면 잘한 일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 안도한다. 이 가족이 이제는 웃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힘들어도 결국 나아갈 거라는 걸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적나라하게 너무 잘 반영해서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슬프게도,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 변화에 발 담그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 세상에서 또 허우적대면서 적응해야겠지. 하지만 그 허우적거림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다. 같은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만들어갈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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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색 인생그림책 14
리사 아이사토 지음, 김지은 옮김 / 길벗어린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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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서 어른으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삶의 궤적이 이 짧은 그림과 문장으로 다 표현되다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출렁이는 이 울컥거림은 또 뭔지. 우리 삶의 색이 결코 흑백으로 저장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아름답고 찬란하던 시간을 소환하는 마법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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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2-04-20 0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적에는 크리스마스가 정말로 신비로왔는데 말이죠. 이제는 연말에 회사일 마감하느라 바쁘고 정신없이 가족들 친구들 인사하고 연말세일에 필요한 물건들 어떻게 더 싸게 살 수 있나 찾고 또 찾고. 그 때의 마법같은 시간들은 더이상 느낄수가 없네요.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아이들이 나오는 (해리포터, 나르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영화를 틀어놓고 그때 그 시절 느낌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써봅니다.

구단씨 2022-04-23 14:1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많이 아쉽고 그리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 먹어갈 수록 더 그렇게 되네요.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오늘의 젊은 작가 33
김희선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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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결이 나에게 달려오는 것만 같다. 그건 영화 속에서 우주복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몰려다니는, 굉장히 강렬한 장면이었다. 하나의 은빛 덩어리가 되어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외친다.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자…… 다 함께 똑같이…….” 이상한 주문처럼 되뇌면서 몰려오는 사람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오히려 궁금증이 커지기만 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뭉쳐서 달려오고 있는지, 이들이 읊조리는 저 말은 무슨 뜻인지.


한 노인이 광장의 회전교차로에서 사망한다. 누가 봐도 자살이다. 자기 배낭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전동 드릴을 세워 놓고 작동시킨다. 노인은 무언가를 삼키더니 주저 없이 회전하는 드릴에 이마를 갖다 댄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피로 광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카페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기자 김영주는 기절하고, 곧 병원에서 깨어난다. 충격적인 장면이 쓰러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몰래 듣게 된 말로, 김영주는 노인의 사망이 단순한 자살 사건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다. 그에 후배 최 기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김영주는 최 기자와 함께 이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소설은 김영주가 본 노인의 죽음과 극동리에서 촬영 중인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하나씩 그 퍼즐을 맞춰간다. 극동리가 화성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화성을 배경으로 한 SF 영화가 극동리에서 촬영 중이다. 붉은 토양이 가득한 마을 공터에는 영화 세트장이 설치되고, 마을 주민들은 영화의 엑스트라로 동원되어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 한때 성황했던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은 쇠락해가던 중이었는데, 이 마을 출신 기업가가 마을을 살리겠다면서 산업단지와 영화 촬영장을 만들었던 거다. 그 기업가는 단번에 마을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기업가가 원하는 일을 다 해결해주려고 애쓴다. 그 중심에 마을 이장 오구식이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이상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오구식은 앞장서서 해결한다. 시체가 발견되어도, 미친 노인네가 병원에서 난동을 부려도, 낯선 사람이 찾아와 마을을 감시해도 그의 손에서 다 해결된다. 도대체 이 마을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처음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 김영주가 밝히고 싶던 일들은 어느 순간 묻어지고 있었다. 노인의 죽음이 단순히 농약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극동리 마을 주민 세 사람이 실종되었다는데, 이 의문을 풀고자 했을 때는 마침 그들이 놀러 갔다면서 이장은 실종 신고를 취소한다. 이 마을에 관련된 모든 일은 누군가의 조종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광장의 사람들이 목격한 큰 사건에도 농약 중독 정도로 수습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김영주 못지않게 이 사건은 최 기자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자꾸만 숨어드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 마을을 찾는다.


의문스러운 사건이 계속되고, 의문이 조금 풀릴 만하면 다른 사건이 등장하면서 앞선 사건에 의심을 더한다. 누굴까. 왜 그랬을까. 이 사람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하나씩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을 마주할 때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인가 하는 의문은 이어진다. 탄광 산업으로 마을이 활발할 때는 살만했지만, 어느 순간 광신이 문을 닫으면서 몰락해가기 시작했다. 어디 마을의 경기뿐일까. 마을에 남은 이들은 모두 노인들뿐이었다. 젊은이들의 활기도 없고, 무엇 하나 기대하면서 마을로 모여들 이유가 없어진 그때, 기업가의 마을 투자는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이 같은 건 아니다. 기업가의 개발이 마을이 죽음의 땅이 될 거라며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이름만 그럴싸한 산업단지일 거라고, 폐기물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희귀병에 걸려 죽어갈 거라고 말했다. 그가 바로 광장에서 드릴로 머리를 뚫고 죽은 노인 이만호였다. 많은 이가 찬성한 일에 왜 그 노인 혼자 반대했던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마을에 들어온 산업단지나 기업의 공장 터, 그들이 떠나고 난 후에 땅을 파보니 온갖 산업폐기물이 묻혀 있었고, 그 때문에 물과 땅은 오염되고 사람들은 자꾸만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고. 누군가 다른 생각을 말하면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이만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마을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여겼겠지. 죽어가는 마을을 살리겠다고 들어온 기업의 프로젝트를 방해하며 마을을 계속 죽은 동네로 만들어놓을 거냐고 화를 내고 싶었을 테다. 마을이 이렇게 활기에 찼는데, 사람들에게 이만호는 눈엣가시였을지도 모른다. 이만호는 누가 봐도 스스로 죽은 거지만, 그 죽음의 진짜 이유를 찾는 것. 최 기자와 김영주의 미스터리한 추적은 그래서 계속됐다. 그 안에서 인간이라면 가질만한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이장 오구식은 아침에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을 느낀다.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있지만,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몸은 가뿐해진다. 육체가 회춘하는 느낌이 이런 걸까. 마을에 산업단지가 들어오고 영화 세트장이 들어서면서 활기를 띤 것처럼, 오구식의 몸도 활기에 찼다. 어디 오구식뿐일까. 마을의 노인들 대부분 이런 활기로 살아간다. 자기 농사도 지으면서 영화의 엑스트라로 뛰어다닌다. 몸은 고단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즐거웠다. 뉴스로 마을 번영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기쁨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활기는 이상하게 틈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여 영혼을 나간 것처럼 보일 때, 마을 소년 경오의 눈에 사람들 머리 위로 이상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들의 몸에 무언가 스며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을 때마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것을 찾고 싶어진다. 소설은 최 기자와 김영주가 찾아다니던 진실을 독자와 함께 파고들면서, 이 마을과 사람들의 진짜 모습에 다가가게 한다. 그렇게 마주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활기가 섬뜩해 보였다. 왜 그랬을까 계속 생각하면서 읽는데,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욕망이 그 섬뜩함의 이유였다.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간절함이 어떤 사람을 만들고 어떤 세상을 만드는지 확인했을 때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남겨두고 싶은 것을 위해서, 나의 존재를 계속 소멸하지 않게 하려고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란 말인지. 아무 고민 없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선뜻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들의 욕망에 편승한 것만 같다. 어쩌면 아직 말하지 않은 우리 안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닐까. 젊음, 영생을 바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물으면서, 그들이 부르는 손짓과 하나 됨에 저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결말이 이 세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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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0
브램 스토커 지음, 이혜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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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보면 권선징악일지도 모른다. 드라큘라 백작을 처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부록으로 담긴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려서 좋았다. 드라큘라의 역사나 번외 편 이야기 같은 분위기로 쉽고 편하게 들려온다.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얻기에 충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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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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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 익숙하지 않은 흐름이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네 명의 시선으로 추리가 펼쳐지는데, 이게 참 웃기다. 같은 사건을 두고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다 보면 사건 해결에 다다를 것만 같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공감하고 공유하며, 내가 미처 다 알아채지 못한 행간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을 때, 이래서 독서 모임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네 명의 추리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한 사람이 놓친 것을 다른 사람이 찾아내어 퍼즐을 꿰어맞추는 듯한. 게다가 사건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그들이 감춘 속내가 슬슬 드러난다. 역시 인간이란, 자기 안위가 먼저가 아니겠는가.


특급호텔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웨이둬가 사망한다. 총을 맞고 죽은 채로 산책로에서 발견되었다. CCTV도 다 확인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목격자나 용의자를 추릴 수 없다. 밀실 살인인 걸까?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고, 단서도 없다. 경찰이 출동하고 검찰까지 나섰지만,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푸얼타이 교수, 뤄밍싱 경관, 거레이 변호사, 인텔 선생이 한 명씩 나서서 이 사건을 추리한다. 물론 처음부터 이 사건 해결을 위해 머리 맞대고 모인 건 아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호텔에 모인 네 사람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로 향했고,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진짜 기가 막힌다는 생각과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완벽할 것 같지만 한 가지씩 모자라고, 뒤통수를 치고 있지만 동시에 당하기도 하는 이들의 활약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호텔 사장의 사망 사건을 추리하는 것도 벅찬데, 이어지는 또 다른 살인. 푸얼타이 교수가 범인으로 지목한, 호텔 조경을 담당하던 황아투가 호텔 사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황아투가 호텔 사장을 죽인 게 아닌가? 아니면 이들의 뒤에서 누군가 한 사람씩 제거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걸까? 푸얼타이 교수가 풀어낸 추리가 뭔가 부족하다 싶을 때 등장한 뤄밍싱 경관은 사실 또 다른 살인사건을 찾아온 거였다. 그가 현재 경찰도 아니었으니 이 사건에 뛰어들 이유는 없지만, 호텔 사장 살인사건과 뭔가 연결된 것만 같다. 그렇게 사건을 지켜보던 뤄밍싱 경관은 푸얼타이 교수의 추리를 살짝 비틀고 그만의 추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레이 변호사의 추리. 뤄밍싱과 거레이의 관계는 이혼한 부부였다. 죽은 호텔 사장 아내가 거레이와 친구였고, 호텔의 파티에 초대됐던 거레이는 이 사건을 모두 지켜본 이다. 그러면서도 푸얼타이 교수나 뤄밍싱이 보지 못한 또 다른 장면을 본 근거로 그녀만의 추리를 완성해간다. 이렇게 그들의 추리는 완벽해질 수 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완벽한 추리를 하는 것 같은데, 막상 듣고 보면 마지막이 좀 모자라다. 그게 아쉽거나 미완성의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함이 이 책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게 아이러니. 그들 모두 자기가 본 그대로 말하고, 그 근거로 이 살인사건을 풀어가려고 애쓰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다르다는 게 재밌다. 앞서 세 사람이 꺼내놓은 추리는 나름 완벽(?)했고, 조금씩 이 사건이 풀리는 건 같았다. 그런데도 모자란 하나가 뭘까 궁금하던 차에 등장한 인텔 선생. 한때 이름을 날리던 괴도 인텔 선생은 부유층을 주로 털었다. 경찰이 그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어느 날 그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게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 인물을 거레이 변호사가 불러냈으니, 그 이름 인텔 선생은 이 호텔 살인사건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테지.


이쯤 되니 예상되지 않는가?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의 사망으로 시작된 사건이지만, 그동안 각자가 수면 아래로 묻어놓았던 사실과 감정들이 하나씩 올라오는 게 기대된다. 가려진 정체와 진실, 숨겨진 관계와 고통, 혼자 음흉하게 계획한 미래의 일들까지. 네 명의 추리가 끝났을 때는 더 깊게 감춰둔 진실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어쨌든 추리소설의 재미와 결말이 사건 해결을 보는 거라면 이 소설은 성공한 셈이다. 그 성공이 너무 진지하지 않아서 독자의 눈길을 끈다. 결말 역시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골 때리고 뭔가 모자란 듯한 인물들 때문에 그 재미가 더해졌다는 건 안 비밀. 그들이 풀어낸 추리에 하나씩 더해져서 다음 인물이 다시 풀어내고 있기에, 챕터 하나씩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이 사건을 보고 있는지 더 궁금하게 한다. 코믹 액션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기 마련이다. 거레이 변호사가 뤄밍싱과 이혼한 과정이나, 네 명의 인물이 각자 본 것을 근거로 추리하는 것이나 비슷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가끔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조금은 생각해보는 것도, 다른 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유쾌한 추리소설 한 편으로 마주한 진실 찾기가 볼만했다. 그나저나 다음번에 푸얼타이 교수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다. 새를 미치게 사랑하는 이 교수 매력 쩔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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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4-0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재밌어 보이네요.
저도 기억했다 봐야겠습니다.
저는 어제부터 <그 해 우리는>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비슷한 형식 같기도 하네요.
로맨틱 코미딘데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나래이션 부분에 나오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공감이 가더군요.^^

구단씨 2022-04-23 14:25   좋아요 0 | URL
약간 코믹(?)스럽기도 하고요.
한 사람의 추리가 끝날 때마다 반전이 등장하는데, 재밌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