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43
김이윤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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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를 받은 엄마를 둔 딸이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소설책 같은 게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고, 책상 위에 책만 여러 권 뽑아 놓았다. 정신을 다른 데 쏟고 싶어 만화책도 추리 소설도 꺼냈지만 한 쪽을 다 읽기도 전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눈과 귀를 붙잡아 두는 영화나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 대만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도 효과가 업을 게 분명했다. 뉴스가 의미 없다는 건 초저녁에 이미 확인한 일이고, 이런 밤에는 다만 만나는 일만이 필요할 것이다. 나 자신과 마주하거나 엄마와 독대하거나.

책을, 잘못 골랐다.
내가 일방적으로 엄마를 거부(dis-)하면서 속으로 미움을 쌓아가고 있던 요즈음, 그리고 오늘이다. 예약해놓은 건강검진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약간 서먹한 시선을 모른 척 하면서 나란히 병원에 들어섰고, 엄마는 검진실로 나는 대기실에 자리했다. 한번 가면 기본 세 시간은 기다려야 하기에 급하게 방바닥에 널려있던 책 한권을 가방에 넣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이 책이다. 들고 나갈 때는 몰랐는데, 다 읽고 나니 눈물 섞인 욕이 나온다. 정말 ‘제기랄’이다. 기다리고 있는 시간동안 나는 이 책 한권을 다 읽어버렸고, 대기실 구석의 작은 의자에 깊이 파묻혀 혼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삼키고는 했다. 오늘 아침, 언짢은 마음에 ‘엄마, 혼자서 가.’라는 유치한 말을 내뱉지 않은 내 입을 다독여주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의 말을 중얼거려본다.

어느 날 고등학생 여여‘군’(여여는 여자다)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온다.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인 엄마가 회복 불가능한 암에 걸려버린 것이다. 시간을 붙잡을 사이도 없이 엄마의 암은 괴력을 발휘했다. 엄마가 요양을 위해 시골로 떠나고, 남은 여여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고등학생으로 지내고 있다. 비록 집에서는 혼자 있지만 여전히 학교에 갔고, 단짝 친구인 세미와 피를 보는 우정의 맹세도 하고, 자신의 두 손에 쥐어진 그럼 스틱으로 우울한 기분도 풀어낸다. 자신의 첫사랑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를 선배인 시리우스를 가슴 속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엄마와의 이별도, 세상에 없던 아버지를 발견한 흥분도, 남겨진 자신이 살아가야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수시로 다가올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여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열여덟의 소녀가 충분히 보여줄 수도 있는 행동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학교 선배를 가슴에 담아 첫사랑의 설렘을 느끼기도 하고, 친구와의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될 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여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사랑을 했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미혼모라 불리는 엄마를 가진 여여다. 그런 엄마가 마흔 다섯의 나이에 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을 지켜보는 여여다. 아픈 엄마를 두고도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이 옳은 것인지 가끔은 헷갈리기도 하는 여여다. 마지막이다 싶은 순간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확인하고 싶은 여여다. 지금 여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여여 자신에게 두려움일지도 모르는데 당차고 멋지게 서 있는 여여가 내 눈에는 참 특이한 아이로 보였다. 단 둘이서만 살던 엄마와 여여였는데, 엄마가 떠나버리면 혼자 남을 여여일 텐데, 자칫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하는 여여가 안쓰럽다고 생각되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여여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여여를 지켜보던 모든 순간이 상실의 시간들이었는데 여여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스스로가-어쩌면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배워가고 알아가고 채워가면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아빠에게 ‘왜 나와 엄마를 버렸냐.’고 울부짖거나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멘토와 멘티로 만나 서로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외발자전거를 타고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아가고 있었다. 결국은, 부모와 자식에게도 언젠가는 이별이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남겨진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아가야 하고 살아지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두려움. 이제껏 그려진 여여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혹여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을 지도 모를 그 모습 안에 충분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 두려움이 여여에게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게 작게, 다양한 모양으로 무수히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여에게도 그 두려움을 떠나보내는 일이 아직 남아있던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자신이 홀로 남은 일이, 남아서 살아가야할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밝고 긍정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몸보다 마음이 더 많이 자란 아이인 여여는 그렇게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하얀 종이배를 접어서 서이사와 함께 강물에 띄워 보낸 것처럼 그렇게 차근차근, 오늘 이후로 내일에 만날지도 모를 두려움이 있더라도, 이제 여여에게는 겁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모든 일은 다 지나간다. 아름다운 외모도 영원하지 않을 것처럼 변하듯이 두려움과 아픔과 슬픔, 누군가와의 이별 역시 그렇게 많은 것들이 흘러가듯 지나갈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이별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도 당연하게 여겨지겠지.

맞아.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서이사님도 괜찮아. 우리는 다 괜찮아. 그치?

아침 이른 시간부터 검진용 가운을 입고 검진문진표를 들고 각각의 번호가 붙어있는 이 방 저 방을 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이 저 사람들에게 저렇게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고 싶어 하게 만든 것인지 순간 궁금해졌었다. 아마도 저 사람들 역시, 자신이 포함된 가족이나 그 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별-잠시 이별이 아닌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이 겁이 나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이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 있다면 약간의 연습 정도는 해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애잔한 바람 같은 몸부림이 아닐까 하고…….
엄마 차례의 검진이 다 끝나고, 아침부터 빈속으로 이런 저런 검사로 지쳤을 속을 달래주기 위해 병원 앞의 죽집으로 갔다.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혼자 앉아서 드시게 하기가 뭐해서 억지로 죽 두 그릇을 시켜놓고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든 순간에 엄마의 눈과 마주치고……. 괜히 쑥스러워서 씩~ 한번 웃어줬다. 어영부영 화해의 제스처를 먼저 날렸다. 다행이다.

아직까지 눈앞에서 누군가의 임종을 본 기억이 없다. 그저 그런 소식을 듣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 이 정도로 먹었으면 앞으로는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는 시간이 더 많을 텐데, 나는 여여처럼 초연한 듯 강하게 그리고 담담히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나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역시나 두려운 것이 현실인가 싶은 마음으로 조금 더 변명을 미뤄본다. 그래도 여전히, 언젠가는 맞이해야할 운명 같은 시간이라면 나도 마음의 연습을 조금쯤은 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 한 자락 늘 품고 살아야겠다.

오늘이 6월의 첫날인줄 알았는데, 달력을 보니 5월의 마지막 날이다. 다행이다. 아직 5월이 몇 시간 남았구나. 정신없이 5월이 흘러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나에게 2013년의 5월은 번개가 번쩍 하고 지나간 것처럼 내 기억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공사로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온갖 가족 행사가 몰려있는 달이어서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집에서는 명절보다 더 큰 행사인 엄마의 생신이 있기도 했다. 벌써 칠순이시다. 깜짝 놀랐다. 나는 항상 자식이었고 엄마는 항상 엄마였는데, 나이에 붙은 숫자를 보고 멘붕이 왔다. 아기처럼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엄마가 벌써 칠십이야?” 하고 물으면서도 놀라기만 했다. 갑자기 당신의 나이를 알리는 숫자에 우울해지시는 표정이다. “괜찮아. 괜찮아. 어디 가면 환갑으로 본다니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본다니까. 엄마, 동안이야!) 위로해드리면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마음이 짠하다. 철없는 딸내미 먹이고 키우느라 울 엄마 나이 칠십이 되도록 자신의 나이를 잊어야만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보내셨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나도 여여처럼 언젠가 엄마와의 이별을 해야만 할 테지만, 꼭 그래야만 하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뒤로, 아주 많이 뒤로, 미룰 수 있는 최대한 멀리 미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엄마’라는 울림을, '이별'이라는 슬픔을 가슴에 깊이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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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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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간만에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을 만나게 되는군.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은 마지막까지 읽어봐야만 그 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듯... 멋지구리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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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아이 창비청소년문학 50
공선옥 외 지음, 박숙경 엮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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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청소년문학의 시리즈가 50번째까지 이어져오는 이유를 이 책 한권에 다 담은 듯... 신뢰를 주는 작가들의 글을 한권으로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자주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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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김도언 지음 / 이른아침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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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배워야 했을까...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물론 나는 비흡연자이니 이 부분은 내가 이루지 못할 로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담배연기와 함께 맡아도 좋을 것만 같은 냄새가 난다. 왠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약간 비스듬히 앉아 한 손에는 담배를 한 손에는 이 책을 들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라고 할까.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의 사유가, 내뿜는 담배연기처럼 눈앞에서 흐트러지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퍼져나가라고... 이 책으로 담배연기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김도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2012년부터 2010년까지-나도 저자처럼 시간을 역순으로 말해본다- 약 3년여 시간의 기록이다. 지극히 사적인 일기 같으면서도 누군가의 투명한 일상을 만난 느낌은, 엿보는 것이 아닌 공유하는 기분이었다. 그 일상이 문학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라니 더 반갑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알 수 없는 이야기, 독자가 아닌 작가가 문학-그는 특히 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에 대한 사유를 풀어내고 있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궁금했기에 그렇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만난 다양한 문인들이 언급되고 그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거기에 저자의 마음을 풀어내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나의 허밍이 저절로 따르는 것 같다. 잘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음에도, 나도 같이 흘러가도 괜찮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마주하는 기분인 것도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편안함으로 만날 수 있는 상대 같은, 그 안에 글 이면의 문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생소했지만 편안하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저자가 자신과 이야기하듯 말하는 느낌, 혹은 일기라 부를 수 있는 이 글들을 마주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의 생각들, 하고 싶은 말들,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바라봄, 갖고 싶은 믿음일지도. 그래서 저자가 하는 말들이 더 진솔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저자의 일상 속에서 저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숨 쉬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유독 내 눈과 귀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가 하는 말들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말들. 그중에서도 특히,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이라 말하는 것은 치유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더 귀가 쫑긋해진다. 이 책이 역순으로 흘러가야만 했던 이유를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이미 지나간 일의 결과물을 먼저 보고, 몇 페이지 넘어가면 그 과정이 드러나고, 다시 또 몇 페이지 넘어가면 그 일의 시작이 보인다. 아, 이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흘러갔었구나, 싶은 생각으로 되짚어 가고 있었다. 저자가 글쓰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다는 이유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흘러가는 하루라는 일상이든 누군가(무언가)와의 일들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이든, 그건 글쓰기를 통해 흘러가면서 마무리되고 치유되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마음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 아닌 그 안에 흡수되고 싶었던 거라고, 그와 동시에 이 세계의 맑음을 함께 가지고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쓴 소리를 하고, 누군가는 내밀어주어야 할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면서도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일상을 품은 그의 문학적 사유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찰나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떠올리게 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틈 하나를 보게 만들고, 그 틈을 또 하나의 문학이 채워 넣는 과정을 갖게 했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책이 어떤 느낌인지 찾아보게 만들고, 왜 그 책이 그 순간에 언급되고 있었던 건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문장들을 귀에 담게 했다. 처음 발견했던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참 다양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문학을 통해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사유를 담게 만들고 있으므로 다행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저 독자인 내가 작가라는 이름의 그들을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그들이 바라고 가고자 하는 그 길을 떠올리면 같이 뭉클해질 수 있었다. ‘모든 문장은 온도를 가진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 내가 갖고 있는 나만의 문장도 그 온도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출렁인다. 저자의 문학일기이면서 동시에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들의 문학일기가 되는 순간이 아닐 런지.

읽어가는 동안 거꾸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그랬다. 저자의 기록이 역순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앞에서 읽은 내용(the end)이 뒤로 가면 진행형이나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로 묘사되고는 했다. 그런 것들이 잠깐 어지럽기도 했었다. 그럼 뒤에서부터 읽으면 편할 것을, 이상하게도 그러기는 싫었다. 굳이 이렇게 역순으로 엮어낸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나도 시간을 앞에서부터 거꾸로 걸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거꾸로 흐르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름 모를 여유로움도 생긴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한발 뒤로 물러서서 보게 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그리고 나 자신을...

이 책 안에 담긴 저자의 사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자신의 생각들과 시선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문학이란 공간 안으로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틈을 준 것 같아서, 살짝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독자로 살아가면서, 문학 안에서 숨 쉬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을 테니...


당신들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모든 문장은 온도를 가진다.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문장도 있고 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문장도 있다.
좋은 문장은, 적정한 온도를 가진 문장이다.
문장의 적정한 온도는 작가의 비범한 감각에 의해 통제된다.
문장의 온도를 통제할 감각을 가지지 못한 작가는 불행한 작가이거나 혹은 가짜 작가이다.
그 감각은 훈련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천연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뜨거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어떤 선동에 소구되는 격문일지라도,
글을 쓰는 행위는 작가의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과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장의 온도와 현실의 온도가 구분되지 못하고 연계될 때,
광고 문안이나 반성문 같은 천격의 문장이 나온다.
(6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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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궁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향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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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궁 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발견하고 싶어서 주문합니다. 책으로의 재미와 우리네 삶을 같이 보게 하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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