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이 사는 맛 - 시대의 어른 채현국,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
채현국.정운현 지음 / 비아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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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내가 접하는 노인들을 보면 ‘노인은 당연히 이래도 된다’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나를 향한 말이 아니어도 반감을 갖는 경우가 잦았다. 노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진행되어야 할 어떤 일을 앞에 두고 노인이니까 먼저, 많이, 잘못했어도 그냥 넘어가야 하는, 식의 경우를 봐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둥둥 떠다닌다. ‘당연히?’ 왜 당연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 나이 들면 다 그렇단다. ‘근데 저 노인은 젊었을 때도 저랬잖아’라고 말하면 대꾸가 없다. 그런 건 또 그냥 넘어가야 한단다. 도대체 왜 나이 들면 다 그렇다는 이유로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면 노인 공경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런 모습을 보면서 걱정은 된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정말 저렇게 되는 걸까 싶은 노파심에 내 의견을 말하면, 시쳇말로 나는 싹수없는 없는 젊은이가 되는 거다. 그러니 더욱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진다. 어쨌든 노인들이 볼 때 나는, 집 근처 경로당의 노인들에게도 엄마네 교회 노인들에게도 난 그냥, 누구네 싸가지 없는 딸이다.

 

쓴맛이 사는 맛이라니, 비관론이 아니냐는 질문에 선생은 오히려 ‘적극적인 긍정론’이라며 반박한다. 쓴맛조차도 사는 맛이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삶은 깊어진다면서 말이다. 그게 다 사는 맛이란다. (36페이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노인의 시선으로 노인을 감싸는 게 당연한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도 노인이면서 책임감 없는 노인들을 봐주지 말라고,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기도 했고,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교육자인 채현국이다. 『쓴맛이 사는 맛』은 그가 한 말의 한 문장이 제목이 되어 채현국이 구술하고 정운현이 기록한 책이다. 1장과 2장은 정운현이 기록한 채현국의 이야기이고, 3장은 채현국이 그의 삶과 벗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찾은 고생과 여유,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가족사, 격변의 한국사가 그의 인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시하게 사는 게 행복을 찾는 과정이라는, 지금의 힘든 시간이 지나면 달콤한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오늘을 지내는 쓴맛도 사는 맛이라면서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조금은 긍정으로 보게 한다. 잘 살기 위해 스펙과 성공을 좇는 젊음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자신의 존재감을 말한다. 살아남기 위한 온갖 발버둥 속에 그 의미를 집어넣는 듯하다. 그와 그의 지기들이 함께한 역사도 지금 그의 삶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겠지. 한 사람의 일대기 같으면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들과 함께하는 귀한 소통의 시간이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여든의 노인이 살아온 이야기와 현재의 세태를 말하는 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든의 노인이 이렇게 세상을 볼 수 있구나’ 싶은 그의 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가르치려 들고 지적하는 게 특권인 것처럼 여겼던 대상이었는데, 그게 전혀 옳지 않음을 스스로 말하는 노인이라니. 세대 간 갈등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 서 있는 위치도, 시선도, 우선인 것도 달라질 것이니 어떻게 모든 시선이 하나가 될 수 있나 싶었다. 세상은 변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중심에 선 사람들도 달라지니까. 결코, 같을 수 없는 세대라고 생각했던 게 조금 달라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열린 사고가 변해가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시대에 필요한 게 뭔지 바로 아는 사람의 눈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서인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흔히 나이 먹는 건 쉬워도 어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하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디에서 잠깐 강연을 들으러 다녀온 기분이었다. 이 한 권으로 세대 간, 사람 간의 서로 달랐던 사고가 한 번에 하나가 되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꼰대’가 아닌 ‘어른’의 개념과 인식을 알 수 있는 기대감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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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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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거리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그저 술과 밤에 취한 어리석은 방랑객일까?

지구 한복판을 통과해 반대쪽으로 나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간신히 국경시장에서 탈출한 나는 망연히 주저앉아 도리어 지난밤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을 너무 많이 팔아버린 내게 그리워할 것이라고는 그곳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인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에는 아직 국경시장의 모습이 남아 있으니까.

소경이 자기 어둠 속에서 만들어낸 풍경에 머무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감은 채 풀숲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제와 비슷한 달이 내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지러진 달은 나를 국경시장에 데려가주지 않았다. ―「국경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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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유 - 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밥장 글.그림.사진 / 앨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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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게으르고 귀찮다는 이유로 선뜻 어딘가로 떠나겠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쉽게 마음도 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딘가에서 며칠 머물러야 하는 경우 가장 먼저 챙기는 게 소화제와 변비약이다. 낯선 곳에서 즐기는 것보다 불편하고 예민한 것을 먼저 느끼다 보니, ‘여행’이란 단어가 나와 친근할 리 없다. 변명 같지만, 여행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반면 누군가의 여행기를 듣거나 간접적으로 낯선 곳을 보는 것은 내가 갖는 불편함과는 별개로, 살짝 설렌다. 타인을 보는 게 그저 밀어내는 시선의 이방인을 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편해질 때가 있다. 여행이 주는 묘한 매력을 여행자는 분명 알았을 거다. 밥장의 표현대로라면 여행자의 ‘여행 독후감’은, 그걸 읽는 다른 이에게 그 여행의 흥분, 설렘, 감동, 여운까지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밥장은 '밥장=그림'과 동의어였다. 온라인을 통해 그의 여행 이야기를 듣곤 했지만, 여러 책 이야기를 하고 여러 나라 이야기를 해도 그냥 독자, 가끔 그림과 함께 여행이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책 『떠나는 이유』를 한 페이지씩 계속 넘기다 보니, '밥장=그림=여행'으로 보인다. 내가 보는 그의 동의어가 한 가지 더 늘어난 거다. 취재차 함께 한 여행이든 그만의 여행이든, 그에게 여행이 굉장히 가까운 지기 같았고, 위로였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에너지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의 많은 여행기가 있지만, 그의 이번 여행기에서는 사진보다 노트에 그린 후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는 글씨도 너무! 잘 쓴다) 처음부터 그가 노트에 후기를 그리고 쓰진 않았으리라. 언젠가부터 그에게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감정들이 사진에 전부 담아질 수 없음을 알게 된 후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압도적인 풍광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셔터를 누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모니터로 보면 그때 보았던 장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태양 아래 모든 것들은 각기 다른 빛줄기를 반사합니다. 습도와 온도, 계절에 빛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뇌가 인식할 때 비로소 ‘색’이 됩니다. 아직까지 사람의 눈처럼 해상도가 높거나 정교한 기능을 따라잡는 기술은 개발되지 못했고, 또 같은 색이라도 사람마다 달라 보인다고 합니다. (128페이지)

 

여행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여행이 된 중독자처럼 보이는 그의 여행기가 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어느 명소에서 풍기는 위압감이나 감탄사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느끼는 사람의 시선을 담아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거의 십년 전부터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에스토니아, 그리스 등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다닌 흔적들이 그에게 계속 길을 걷게 하는 듯하다. 좋아서 시작한 게 업이 되고 즐기면서도 어느 순간 그 안에 갇히게 된 마음을 열어야 했을 것 같다. 숨을 쉴 수 있는 곳, 혹은 숨을 쉬게 하는 계기. 그에게 그림을 사랑하면서 즐기고 업이 되었고, 때로 찾아오는 그 갇힘을 풀어주는 것은 여행이었을 거다. 그런 여행이 편하지 않다면 의미가 없을 테지. 그래서 그의 여행기는 그 자신에게도, 그걸 듣는 이에게도 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풍광에서 느끼는 어색함이 아닌, 다른 점을 인지하고 그 길을 걸음으로 느긋해지는 마음의 여유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풀어가는 아홉 단어로 쓴 여행기는 건조한 삶을 촉촉하게 만들어주는 단어들이다. 여행에서 찾은 아홉 가지 키워드가 인생에서 찾고 싶은 어떤 것을 기대하고 그리게 한다. 소박한 행운을 만난 기쁨, 자연이 주는 고마움, 내 것을 나눔으로 느끼는 부유함, 언젠가 펼쳐보며 든든함을 느낄 기록 같은 일들이 그의 여행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여행기는 여행지의 정보나 공간에 대한 게 아닌, 그곳을 상상하면서 더 채울 수 있는 향기 같은 것이다. 그가 방송 프로그램으로 함께 한 여행지들, 함께 한 여행자들의 이야기는 더 푸근하게 들린다. 이런 과정으로 이런 여행지를 이런 마음으로 다녀왔구나, 하는 후기를 듣는 게 정겹다. 영상을 통해서 보던 어느 장면을 이런 배경으로 담았구나 싶은 앎과 재미, 공감을 공유하게 된다.

 

 

여권을 들춰보면 여행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여권은 꼬질꼬질할수록 제맛입니다. 출국 창구 직원에게 여권을 건네면 빈 곳을 찾는 데 잠깐 애를 먹습니다. 몇 쪽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마땅한 곳을 찾아 출국 도장을 찍습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통과한 후 가만히 뒤쪽을 넘겨봅니다. 일본은 QR코드까지 있으며 네팔은 손으로 씁니다. EU는 형제처럼 똑같고 아르헨티나는 EU를 애타게 닮았습니다. 타이는 입국할 땐 네모, 출국할 때는 세모이고 뉴욕은 타원입니다. 파라과이는 진하고 큰 빨간 동그라미입니다. 대한민국은 촘촘하고 소박합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생긴 도장을 받을지 디자인은 새로울지 기대해봅니다. 여권이 만료되는 2021년까지 입출국 도장으로 빈틈없이 채워보고 싶습니다. (99페이지)

 

여행이란 이름으로 나설 때보다, 여행을 떠올리는 시간이 더 즐거운 이유를 밥장의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그의 기록이 즐겁다. 기억에 남는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여행의 연장이란 것을,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기록하는 그 모든 순간이 여행이 되고, 어느 사물 하나로도 여행이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매 챕터 끝에 함께 한 음악들 역시 그의 여행의 매력을 돕는다. 그때, 그 장소에서만 나를 더 감상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더 빛나게 보게 하는 음악들이 언급된다. 가슴을 더 뛰게 하는 건 음악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런 여행과 음악이 함께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을 테지. ^^

 

 

떠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튀어나올 때마다 꺼내 들고 싶은 책이 되지 않을까.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보고 싶을 때마다 펼치고 싶은 페이지가 아닐까. 작은 사물 하나에 온전히 마음을 두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사진, 그림이 아닐까. 여행도 좋지만, '여행(그곳)에 대한 상상'이 더 좋다고 느끼게 하는, 내가 읽은 『떠나는 이유』는 그런,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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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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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독서토론(?)을 수다라고 표현해도 좋다면, 나는 이 남자들의 수다가 즐겁다. 아주 섬세하면서도 웃음 나는 수다. 자주는 아니어도 생각날 때마다, 관심 있던 책이 주제가 될 때마다 지난 방송을 찾아서 듣곤 한다. 요즘엔 팟캐스트가 많기도 하고 진행자에 따라 그 분위기가 다 달라서 취향에 맞게 골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빨간 책방>을 굳이 선택해서 듣는 이유는 두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가 유쾌해서다. 물론 이 중심에는 책이 있고 제법 진지하다. 책에 관한 많은 것을 얘기하면서도 두 사람이 적당하게 밀고 당기는 듯한 분위기가 두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장르의 책을 소개하고 감상평을 나누었을 텐데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서는 그들이 엄선한 외국소설 7편의 방송을 다시 글로 옮겨놓았다. 부분적으로 다듬고 보충한 부분이 있다는데, 사실 거기까지는 어느 정도 변화를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방송을 글로 읽는 만족으로 충분했으니까. 뭐랄까, 드라마를 재밌게 본 후 대본을 읽는 다시 만나는 여운 같다고 하면 어울리려나. 글로 만나는 그들의 책 이야기가 방송으로 들었던 것을 다시 듣는 것으로, 목소리와 말투까지 그대로 전해져온다. ^^

 

이언 매큐언의 『속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모두 소장하고 있는 책이면서도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그건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책들의 제목을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거나 입소문이 익숙한 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의 리스트가 왜 이런 목록으로 설정되었는지 알만하다. 누구나 한번은 읽어봤을, 읽어봐도 좋을 책이라는 말을 대신 표현한 목록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목록은 나에게도 구석에 꽂아놓은 책을 다시 꺼내어 눈앞에 놓게 한다. 김중혁은 뒤늦게 읽은 『속죄』에 대해 "내 친구들은 이렇게 좋은 소설이 있으면 진작 얘기해줄 것이지 나만 빼놓고 다 읽었더라구요."라고 얘기하면서, '왜 이제까지 이걸 안 읽고 있었는지 마구 자책하고 후회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나도 가끔 오래전 출간된 어떤 책을 나중에서야 읽고 이런 느낌 받은 적이 있는 걸 보면, 이 대화의 장 안에서 누구나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소설가도 그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평론가도, 소설가도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책 이야기를 하게 되는구나, 하는 공감을 끌어낸다. 물론 그 독자의 지식이 넘쳐 책의 스토리와 감상평 외에 다른 이야기까지 뻗어나가게 하는 재주가 이 책들에 관심 갖게 하는데 큰 몫을 한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왜 『호밀밭의 파수꾼』의 출간 후 은둔 작가가 되었는지 상황과 배경을 유추해서 말하는 것도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화화된 책은 원작과 어떤 부분을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는지, 또 한 번 원작을 펼쳐보고 싶게 한다. 그럴 때마다 아무리 영화가 아름답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원작을 뛰어 넘는 영화가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거듭 하게 한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지극히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을 계속 상기시키는 듯하다. 나도 이 책을 읽었는데 이렇더라, 하는 식의 말투. 재미있지만 지루한 부분도 있고, 등등

 

얘를 들면 이런 식의 대화들.

ㄱ - 이렇게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워낙 강렬한 사랑 이야기니까 그것에 집중해서 보시고 재미없어 보이는 부분은 그냥 건너뛰세요. 그렇게 쭉 한 번 읽은 다음에 다시 한 번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사고의 편린들,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 연결된 그 구조들을 살펴보는 거죠. 그러면 아마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사랑과 연애를 다룬 소설 중에서 이 정도로 통찰력 있는 소설도 드물 것 같습니다. - 100페이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김중혁이 이렇게 말할 때, '재미없으면 그냥 덮어.'라는 말로 끝맺을 줄 알았는데, 결국은 이러이러하게 읽으면 잘 읽을 수 있다, 즐길 수 있는 책이다, 라는 말로 멀어져가는 독자를 회유한다. 그러니 웃음이 날 수밖에. 좋은 책이니 읽어보라고 끝까지 권하고 싶은 소심한 어필이라고 해야 할까. ^^

 

ㅇ - 샐린저는 두 손가락으로, 그러니까 독수리 타법으로 모든 작품을 다 썼다면서요?

ㄱ - 그렇다더군요. 특별히 좋아하는 타자기들이 있었는데 평생 딱 그 세 대의 타자기로 작품을 썼다고 해요. 그것도 독수리 타법으로.

ㅇ - 그 타자기들 경매장에 나오면 엄청나게 비싸게 팔리겠네요.(웃음) - 197페이지 호밀밭의 파수꾼

일담 같은 이야기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도 하는데,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이 작가는 이런 도구로 글을 썼다더라, 하는 사실을 전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언급을 덧붙인다. 나라도 충분히 할 법한, 만일 내가 샐린저의 타자기를 가지고 있다면 돈이 궁할 때 경매에 내놓아야지 하는 생각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니 시원할 수밖에. 재밌잖아.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책을 주제로 하는 얘기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얘기라는 거. ^^

 

1년여의 시간을 함께 한 많은 책 중에서, 그들이 고른 소설 7편을 얘기하는 내용에서 상당히 정독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두 사람은 책의 어떤 부분을 언급하면서, '그때 00이 이런 말을 했잖아요.' 라는 식으로 장면을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구절이 있었나?' 하면서 갸우뚱했다. 오래 전에 읽어서 까마득하기도 하고, 겉핥기식으로 읽어서 세세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 부끄럽다.) 포스트잇으로 군데군데 붙여놓고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모를 구절들을 언급한다. 그냥 흐르는 하나의 장면으로 볼 수 있는, 큰 스토리의 작은 부속품 같은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세세하게 짚어낸다. 결국은 이들과 함께 이 책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손이 저절로 뻗어가는... ^^ 문학을 진지하면서 유쾌하게 풀어가는 그들의 놀이 같은 감상평을 듣는 재미가 여기서 기인한다. 사사로운 언급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 부분들이 없었다면 그 소설을 알아가는 어떤 과정이 빠진듯한 느낌. 쓸데없는 잡식 같지만 그 책을 풀어가는 그들의 지식을 쉽게 풀이하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단순히 '이 책은 명작이다. 그러니 읽어야 한다.'는 강요나 틀에 박힌 칭찬이 아니라, 왜 좋은 책인지 그들이 직접 읽고 말하는, 같은 독자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책들의 내용, 세세한 장면들, 조금은 다르게 보는 시선들을 구석구석 언급하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결국, 이들의 책 이야기는 같은 공감을 풀어내고, 서로 다른 시선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책을 읽는 재미를 이렇게 표현한다.

 

책을 소개하는 방식이, 분위기가 이럴 수도 있다는 게 재밌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글이나, 홍보문구나, 누군가의 리뷰를 통해서 알고 공유하는 책도 많다. 책을 만나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만남도 꽤 즐겁다. 두 남자가 가끔은 티격태격하듯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듯이, 행간의 숨은 의미를 진지하게 찾아내듯이,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며 '꼭 읽어봐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하는 것마저 귀엽다. 그래서 <빨간책방>이 한회씩 방송할 때마다 저절로 그 책들을 찾아보게 된다. 가능하면 이 방송을 듣기 전에 내가 먼저 읽고 그들의 독서 후기에 동참하는 게 좋다. 아직 읽지 않은 책 이야기를 먼저 만나는 것도 나쁠 것 없지만, 다 읽은 후에 계속되는 그 독서의 여운에 함께 빠져들어 많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게 더 좋은 후기로 남아있을 것 같아서다. 이건 어떤 경험에 의한 생각이다. 온전히 나만의 사고로 그 책을 다 읽은 후에 다른 이의 느낌도 들어보는 게, 그 책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인 듯하다.

 

다방면에 그 매력을 발산하는 이동진과 조금 엉뚱해 보이는 사고의 소설가 김중혁의 만남이 이렇게 조화로울 줄 몰랐다. 이동진의 조용한 말투나 목소리가 좋아서 그의 라디오를 듣기도 했다. 그 매력이 팟캐스트까지 이어지게 한다. 그와 함께하는 남자 김중혁. 김중혁 작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왜 그의 소설보다, 그의 산문이나 이런 수다(?)가 좋은지 모르겠다. ^^ 김중혁 때문에라도 이 방송을 쉽게 끊지는 못할 듯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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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면 따져봐 - 논리로 배우는 인권 이야기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최훈 지음 / 창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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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타인을 볼 때, 내가 아닌 타인의 사고나 행동을 볼 때, 틀린 것과 다른 것을 인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억지 부리는 것에 심각한 거부반응이 인다. 좋게 말하면 배려, 나를 중심으로 말하면 남의 사생활이나 그만의 사고방식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생활 방식이다. 최훈의 『불편하면 따져봐』를 읽으면서 내가 가진 사고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안심이 든다.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부리는 간섭과 차별, 속을 후벼 파는 공격일 수 있는 잔인함을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인지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셀 수 없이 부딪히는 일들이 여기에 있었다.

 

이 책에서 하는 말들이 모두 맞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이야기를 소화하는 독자의 사고가 다 다를 것이기에 무조건 이해하고 맞는다고 판단하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학력 차별이나 성차별, 지역 차별을 포함해 인권에 관계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범하는 오류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 오류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어떤 과정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지는지, 그로 인해 어떤 싸움과 상처가 남는지 말한다. 그렇기에 조금 다른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온갖 차별적인 것을 만들고, 그런 이유로 더 많은 차별을 양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당하게 맞서야 하는 자신의 주장이 필요하다. ‘불편해요!’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 인권을 찾는 게 당연함을 인지하는 것. 따지스트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그게 불편한 사회에서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자 당면과제 아닐까. 이 책은 그렇게 인권을 지키기 위해 갖추어야 할 논리도구에 대해 설명한다. 많은 문제의 물음을 제기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당연히 수반되어야 하는 인간의 능력과 의무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며 그에 필요한 처방전을 일방적인 제시가 아닌 논의의 분위기로 이어가게 하는 책이다. 어렵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편한 예와 설명으로 주의를 집중시킨다. 개인적으로는 화가 올랐다가 흥분했다가, 감정이 널을 뛰곤 했는데, 그만큼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편함을 인지해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건강한 사회와 인권을 위해 기꺼이 펼쳐 들어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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