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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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는 남편이 먼저 읽고 내게 선물로 준 책이다. 말로는 나를 위해 샀다고 하면서 읽기는 본인이 먼저 읽었다. 속도가 무진장 빠른 사람이라 금새 읽었지만 나는 설거지 하고 나서 잠깐, 빨래하고 나서 잠깐, 화장실 가서 잠깐(이런, 실례! 하지만 가끔은 망설이기도 했다는 변명)이러다 보니 며칠 걸렸다. 쉽게 잠못들면서 그때나 좀 읽지, 한번 불끄고 누우면 꼴딱 밤을 샐 지언정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싫다. 흐~억! 

동서양의 그림을 두 사람이 주제에 맞게 골라 매개로 삼되 주거니 받거니 편지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정말이지, 글들을 잘 쓴다. 손철주의 글은 한 세상을 알고난 사람들한테 느껴지는 앎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동양화를 담당하여 그림을 통해 인간사의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는데, 특히 이 책이 좋은 것은 편지 형식이 갖는 내밀함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감정을 곧잘 나타내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괜히 끼었나 싶다가도 그걸 훔쳐보는 것이 또한 재미나다.  

연배가 아래인 이주은은 서양의 그림을 담당했는데, 곧잘 영화이야기를 들여와 예술과 인간사의 넘나듦의 폭을 넓혀준다.  

나는 그림이 낯설다. 어쩌다 사람들한테 묻어서 미술관에 가면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 몰라 늘 당혹스럽다. 뭘 느껴야 하는지, 뭘 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낑낑대다 보면 허리만 아프고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몰래 그 그림을 다시 보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은 내게 너무 먼 당신이다. 급이 달라 사랑할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 같은. 그래서 슬프다. 한때는 내 문화적 토양이 척박해서 그건 고급이야, 난 순대국에 소주체질이거든 위로도 해보았지만 그때 뿐이다.  

그래서 그림 이야기를 사실 나는 좀 좋아한다. 느끼는 것을 모른다면 누가 가르쳐주는 대로 받아들여보기라도 하리라. 그러다 보니 글쓰는 이가 일러주는 대로 어떨때는 그 그림이 내게 살짝 미소를 건네기도 한다. 물론 책을 덮으면 그걸로 싹 끝나는 인연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 이야기가 좋은 것은 그림에서 삶, 즉 그리움, 유혹, 성공과 좌절, 나이, 행복, 일탈, 취미와 취향, 노는 남자와 여자, 어머니, 엄마까지 다루고 있어서 특별한 감식안을 가져야하는 것에서 조금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양의 그림에는 기본적을 알고 있어야 하는 상징 혹은 관습 같은 것이 있어서 설명이 없다면 그저 보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부러운 것보다, 혹은 이토록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부러운 것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날 정도로 부러운 것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후배의 눈웃음을 사랑하는 선배의 마음, 그 선배를 한없는 존경으로 따르는 후배의 모습이 또 한장의 그림이었다.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책도, 그림도, 시도 아니었다. 나는 책같은 사람, 그림같은 사람, 시같은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을 알기에 늘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일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림을 눈여겨 보듯 사람을 눈여겨 보는 일, 나는 그게 어렵다. 나를 눈여겨 보는 일 조차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한자쯤 땅위에 떠다니듯 헛헛하고 휘청거렸다고 생각한다.  

그림처럼 좀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김장 이야기를 주고 받든, 아이들이 어제 끝낸 야생화 이름 맞추기를 두고 뒷담화를 하든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 내게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지 오래되었다.  

<다 그림이다>는 재밌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한 몇 안되는 책이다. 그림을 볼 줄 알아서 부럽고 그림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부럽다,  

내 인생은 언제까지 부러워하고 질투만 할 것인가. 멈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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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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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을 읽었다. 책장을 덮은 건 한 며칠 되었는데 글로 정리하려고 하니 어려워서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한 감상을 적어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니까 단 몇 글자로라도 글론 남겨야 하기에 맥주 한 잔 하면서 그야말로 술김에 횡설수설한다.  

김훈 소설이 새로이 나온다길래 미리 주문을 했어도 받은 건 한참 기다린 뒤였다. 만만치 않은 부피에, 가고가리라는 새는 또 얼마나 낯설었는지. 솔직히 그런 외적인 것에 마음을 쓸 수 없을만큼 나는 그 속이 궁금했다. 김훈의 소설은 천천히 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는 김훈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이 작가가 그려내는 당대 현실의 사실성이다. 역사책에서는 한 두줄 기록되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비로소 살아움직이는 사람의 역사로 만드는 능력은 김훈 만한 작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천주교가 조선 땅에 들어오던 시기, 문명은 늘 충돌하고 충돌은 사람의 목숨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받아들이려는 자와 그걸 막으려는 자 사이의 갈등은 잔인하고 무섭지만 어느 한 곳 양보없이 팽팽하다. 나는 이런 충돌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관이 다른 것이지 시비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김훈이 들여다보는 것은 권력을 누리고 행사하는 윗것들이 아니라 조선 팔도에 엎드려 사는 백성들이다. 사학이 소나무 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이미 그 마음속에 있는 '야소'의 마음을 알게 하는데 그건 선택이 아니라 확인이다.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나는 <흑산>이 감동적인 이유를 바로 원래 그러하였음을 비로소 깨닫는 과정을 드러냄에서 찾는다.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이 유배지 생활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그리해야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인다.

문장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곤장을 치는 장면이나 망나니의 칼끝을 그린 장면은 영화를 보는 듯하고, 인물을 그려내는 데는 가감이 없어 생명을 얻는다.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뱃길도 흥미롭다.  

역사에 '만약에'라는 것이 없다고 하니 만약에 황사영이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혼자 삭이고, 아무튼 <흑산>에는 죽음이 넘치고 그 죽음은 가차없고 냉정하며  담담하고 그 죽음의 가치는 알 길이 없으되  독자는 그 무수한 죽음 앞에 조문을 하게 된다. 생과 사는 그렇듯 일상이다. 종교라 다르지 않다. 나는 <흑산>을 읽으면서 순교나, 박해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정약용이 조카사위를 사학으로 지목하고 살아남는 과정은 등골이 서늘해 지지만 정약용을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흑산>을 읽는것은 상상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삶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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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스 우즈의 그림들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9
패트리샤 레일리 기프 지음, 원지인 옮김 / 네버엔딩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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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 생명이 태어났고 아이는 살아가야한다. 출생의 근원을 따지는 일조차 의미가 없다. 이미 그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의미를 잃어버렸다. 태어난 곳(홀리스우즈)에서 아이는 버려졌다.  

이금이의 <주머니 속의 고래>를 읽다가 공개 입양된 준희를 만나고, 김려령의 <내 가슴에는 해마가 산다>를 통해 공개 입양된 하늘이와 한강이를 만나다가 <홀리스 우즈>까지 만나게 되었다. <고래>에서 준희는 세 인물 중 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개입양에 대해 생각꺼리만 제공했다. <해마>는 선천성심장병 수술을 한 뒤 생긴 수술 자국이 해마와 닮았다는 이미지에 공개 입양된 하늘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자라는 상태에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고래>와 <해마>는 공개 입양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두 작품 모두 공개입양의 양면을 다루지만 결국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끝난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말로 한다는 점에서 독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가족이 되어가는 지일텐데, 둘 다 입양된 아이의 눈과 입을 통해 말하되 가족이 될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 가족이 되는 것으로 결말이 나지만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그 과정이 궁금한 독자들은 아쉬운 마음을 어쩔 수 없다.  

<홀리스 우즈>가 두 작품과 조금 다른 것은 주인공이 '위탁'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공개입양이 당사자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면 '위탁'은 입양 될 사람이나 할 사람의 의지, 확신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위탁되었다가 기간이 지나서 다시 입양기관에 돌아오는 과정은 버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홀리스>도 위탁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상처받는다. 그러면서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먼저 도망을 치게 되는 것이다. 자존감은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으로 홀리스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내가 이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위탁의 과정이 공개입양을 하게되는 과정에서 필요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 눈에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가족이 되기도 하지만 버려진 아이들 모두가 가슴으로 만나 가족이 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위탁 기간이 끝나고도 가족을 못 만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 위탁 기간 동안 서로를 알아보고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풀어내고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고래>나 <해마>가 주로 주인공의 생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나 가족의 구체적인 행동, 상황이 부족해서 중간 과정이 생략된 느낌이라면 <홀리스>는 위탁된 가정의 가족들과 위탁된 홀리스 사이에 여러가지 상황들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가족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지는지 그 상황들, 행동들, 구체적인 말들을 통해 독자는 쉽게 몰입한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홀리스가 스티븐과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된다. 피해의식과 상실감으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홀리스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스티브와 엄마, 아빠가 평소에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다. 이야기에서 주인공과 등장 인물이 겪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게 빠진 채 하나의 사건(물론 결정적인 사건), 혹은 주인공의 내면을 말로만 풀어놓은 이야기는 감동도 적고 재미도 없다. 결정적인 사건이 효과를 내려면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결정적인 사건을 키워가야 한다.  

가족이 되는 것은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해야하는 것이다. 입양 기관이 위탁 가정을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결국은 입양을 원하는 쪽과 입양 될 아이가 서로를 알아봐 줘야하는 것이다. 부부로 사는 일은 연애기간이라는 위탁의 과정을 겪고 비로소 가족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억지스러운 비교지만 굳이 이렇게 생각을 해 본 것은 입양이 별스러운 과정이나 대단한 비밀, 혹은 희생이나 봉사라는 인류애적인 의미로 커진다면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홀리스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스티븐과 리건 가족이 보여준 모습은 있는 그대로였다. 특별한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홀리스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홀리스가 그린 그림을 제대로 봐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홀리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구제를 한다거나 보살펴야 할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홀리스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했다. 세상에 버려지고 여기저기 위탁 가정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은 홀리스의 잘못이 아니다. 홀리스는 그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스티븐과 남매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의 말처럼 홀리스는 가족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가족은 나때문에 네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잘났어라고 말 할 수 있고, 그게 인정받는 곳이 가정이고 네가 제일 잘났다고 추켜세워주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홀리스는 아마 타고난 화가일 것 같다. 치매를 앓고 있는 조시 아줌마를 보살피는 열 두살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아픔을 감당할 수도 있다. 얼굴도 예쁘다. 누군가는 그런 홀리스를 거칠다고 버리고 누군가는 그런 홀리스를 알아본다.  

나는 나의 가족들을 얼마만큼 알아볼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이 지금, 내 옆에서 나를 귀찮게도하고 열받게도 하지만 목젖이 보일 만큼 웃게도 만드는 그들이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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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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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읽는 방법>을 읽다보면 책 중간도 못가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앞서 발표한 <책을 읽는 방법>을 사서 읽어야 할 것이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자꾸 언급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또다시 읽어야 할 책을 만나는 일 또한 책을 읽는 방법으로 소개된다. 책을 ‘잘’ 읽고 싶은 생각이 있는 독자라면 히라노가 말하는 <책을 읽는 방법>이 도움을 줄 것 같다. 핵심은 슬로 리딩(천천히 읽기)이다. 속독을 할 때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걱정하면서 제시한 책읽기 방법인데, 결국 보다 ‘앞으로’가 아니라 보다 ‘깊게’로가 슬로리딩의 목적이다. 

“무작정 활자를 좇는 빈약한 독서에서 맛을 음미하고 생각하며 깊이 느끼는 풍요로운 독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 방법 10쪽>

<소설 읽는 방법>은 소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히라노의 생각과 실천이다. 그는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메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에 대해 생각하며 읽기를 권한다.

메커니즘은 소설이 소설로서 기능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작가가 제시하는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면 소설이 재미있고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작품이 작가의 인생에서 어떤 타이밍에 나왔는가(발달), 이 소설이 사회와 문화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가(진화),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이 나와 작가 사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기능) 이 네 가지 방식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한 권의 소설 무게가 달라지고 책 읽는 속도는 자연스럽게 늦춰질 것이다. 

소설 한 권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적인가 의문을 갖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시간 아까운 소설을 읽었던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자신들이 책을 잘못 읽은건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내가 그렇다. 히라노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작가여서 그런지 소설 작품을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인상이 짙다. 소설은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생각 속에서 창조된 세상이다. 거기에 잘못된 배치는 없다. 다만 독자들이 천천히 읽지 않고 꼼꼼히 읽지 않아서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내 소설읽기, 혹은 책읽기가 무엇이 문제인지 되돌아 봐야 했다. 은근히 반발심도 생기는데, 그는 ‘창조적 오독’으로 독자의 권리를 인정해 버린다. ‘창조적 오독’은 할 수 있으되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작품은 없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작가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얼마나 사랑하는 작가인지 알 수 있어서 그가 제시하는 소설 읽는 방법을 적극 수용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딴지를 걸고 싶어도 작품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소설은 그림이나 조각 등과 달리 감상하는 데 하루든 일주일이든 반드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예술이다. 첫 행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행까지 가닿은 시점에야 비로소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하나의 작품이 독자에게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아무리 다양한 사건들이 터져도 혹은 옛날 일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망상해도 우리는 담담히 현재를 살아가며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끄덕끄덕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은 화살표를 따라 우리는 감춰진 궁극의 술어 ‘......이다’를 찾아 울고 웃고 화내고 생각에 잠기며 마지막 한 행까지 가려고 한다.“

(<소설읽는 방법> 23쪽~30쪽)

  작은 화살표들이 모여 거대한 화살표에 이르는 과정이 소설이다. 독자는 화살표를 잃어버리지 말고 잘 찾아가야 한다. 
 

소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받아들였지만 오늘 듣는 히라노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좋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소설을 읽을 때 좀 더 바른 자세로, 좀 더 천천히 생각하며 읽게 될 것이다. 저자도 고백하지만 소설을 사랑하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주는 일은 어렵다.

그래도 이 책 실천편에서 저자가 구체으로 작품의 일부분을 예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읽어주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한 권의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독서법으로 그 소설을 대해야 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가 작가의 작품 속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천천히 읽으면서 그 소설에 맞는 독서법을 찾아 낼 때 작가와 작품, 독자의 행복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설 읽는 방법>이 없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한 명의 독자와 만나는 순간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책이 되기도 하고 특별한 책이 되기도 하는 그 순간이 책과 독자의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와 인연을 맺지 못한 책들 때문에 괴로웠다. 나의 모자람으로 내게 오지 못한 그 책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서 책 때문에 괴로운 경험을 다 하다니.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도 눈이 마주칠까봐 모른 척 하고 있다.

분명 한 건 나는 많이 읽는 것보다 천천히 읽기를 해야 하는 독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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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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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이 때의 ‘책’은 내용 보다는 ‘사물’이 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책은 인격을 갖는다. 마치 생명이 있어서 지고 태어 나는 것 같다. 안타까운 건 저자가 이야기 하는 책들이 지금 우리가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구병 등이 쓰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출간한 <숨어사는 외톨박이>는 어쩌면 더 이상 우리와 관계를 맺지 못할 것만 같다. 이렇듯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래서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는 더 애절하고 그(책)를 다시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에 쉽게 공감이 간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리라.

  책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을 쓴 사람의 책장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내가 읽은 책을 그도 읽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독자는 내 책꽂이에 책 하나를 더 꽂기도 한다. 그런데 <오래된 새책>은 기쁨 보다는 절망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한다. 이토록 읽을만한 책들이 절판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책들을 알아보지 못한 시력에 절망하고, 어찌 어찌 해서 구한다고 해도 그 값이 너무 비싸다. 오로지 필요에 의해 헌 책방을 뒤져 고가에도 구입하는 책 수집가들도 있지만 후일, 교환가치를 생각해서 투자를 하는 사람도 있을테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지극한 책 사랑을 실천하는 수집가라는 확신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절판된 책이 다른 옷을 입기는 해도 오래된 새책으로 출간된 책들이 적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신영복의 <엽서> 영인본, <서재결혼시키기>, <채링크로스 84번지> 같은 책을 샀다. 물론 다른 책들도 알아보았더니 가격이 내 수준을 넘어서서 저자의 말을 확인하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추억’을 자필로 읽는 맛이 특히 좋았다. 한글자 한글자 자필에 담긴 선생의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오래된 새책>을 읽고 <엽서>를 사게 된 것이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다. 

많고 많은 책에 대한 책 이야기 중에서 이 책만의 매력을 꼽으라면 ‘책’자체에 얽힌 사연들이다. 저자의 사인본이 남겨진 책이 어쩌다 헌 책 수집가의 손에까지 왔을까, ‘다 읽고 빌려달라’는 메모를 적어 친구에게 선물한 책이 이 세상 어느 구비를 돌아 저자에게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저자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듣다보면 책은 더 이상 글자가 인쇄된 종이 뭉텅이가 아니다. 정말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하고 나면 책을 얻은 기쁨도 있지만 한 때 이 책의 주인이었던 그가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책을 넘어 그 책의 임자였던 사람까지 더불어 생각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그래서 헌 책은 그저 낡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아니다. 헌 책이 되기까지 그 시간이 더해져서 새 임자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어쩌면 헌 책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매력 때문에 헌 책을 수집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저자는 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안다. 그래서 아깝지만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내 책을 내어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초판이니 재판이니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값나갈 만한 책들은 없다. 여전히 지금도 잘 나오는 책들이다. 물론 몇 권 정도는 절판이 되었다. 나또한 그 좋은 책이 어쩌다 절판이 되었을까 의아하다. 그래도 한 권 한 권 그 책을 샀을 때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오래전에 조카 녀석에게 빌려주고 못 받은 책이 생각나서 무척 아깝다. 골라서 준 책이었으니 내 책 목록에서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면 “내 생에 잊지 못할 그 책”들일 것이다. 이걸 어떻게 돌려받나 조금 심란하다. 아니, 많이 속상하다. 신영복의 <사람아, 아, 사람아>도 끼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우라질.

내가 가진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김승옥의 단편집 <야행>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을 다시 읽어보았다. 연도를 보니 내가 두 살 되던 해 출판되었다. 수없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내 책꽂이에서 빠지지 않은 책이다. 누렇게 바랬고 냄새도 찐하다. 오래된 책 냄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고향집에 어쩌다 그 책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구나 자기만의 책 이야기가 있다. <오래된 새책>은 “오래되고 구할 수 없는 책들 모두가 ‘오래된 새 책’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바램에 동의하면서 아울러 내가 갖고 있는 내 책들을 오래된 벗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책 수집가는 책을 아주 사랑해서 그(책)를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우선 내 책들에 대한 내 사랑부터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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