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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고래 - 중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ㅣ 푸른도서관 17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같은 시간을 보는 다른 시선
민기, 현중, 연호, 준희 이들을 중심 인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특히 민기, 연호, 준희가 각각 화자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 이런 구성이 각각 인물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세 아이가 같은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다른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상대의 감정을 읽지 못하거나 혹은 서툰 독자들에게 효과적이다.
민기는 잘생긴 얼굴 하나 믿고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외모에 비해 춤도 노래도 연기 능력은 떨어지는데 민기는 깨닫지 못한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절박함도 없다. 딱한 것은 그 길이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는 의식 수준이다. 길거리 캐스팅이라는 기획사 마케팅 피해자다. 현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그럴수록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민기는 외친다. “좋았어. 인생 뭐 별거냐? 가는 거야!”
민기네 집에 세 들어 사는 연호를 상담친구로 생각하지만 연호가 자기를 좋아하는 눈치는 모른 척 한다. 자기 외모에 생기다 만 연호가 여자 친구로는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한다. 랩을 잘하는 준희가 그들 사이에 끼면서 민기는 연호에 대한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
연호
중 3연호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다. 기초수급대상자가 될 수 있지만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는데 공짜밥을 먹을 수 없다는 할머니가 있다. 세상 이치를 알아 챌 만큼 철들었다. 기초환경조사서를 어떻게 거짓으로 꾸며 써야 하는 지도 안다. 원인은 엄마 때문이다. 철없이 결혼해 연호를 낳고는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음반을 내고 방송에도 나가는 가수가 되기 위해 엄마는 할머니에게 돈을 뜯어 내다 못해 알량한 전제 보증금을 빼 가는 일도 서슴지 않았았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부업을 하고 열여섯 살 소녀인 연호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게 한 엄마’에 대한 복수로 연호는 엄마의 직업을 가수가 아닌 상업으로 쓴다.
연호를 돌봐주는 할머니는 증조 할머니다. 연호 엄마도 엄마 없이 할머니 손에 자란 것 처럼 연호의 가족사는 복잡하고 비극적이다. 연호는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부정하지만 어쩔 수없이 연호는 엄마의 재능을 물려 받았다. 감추고 있지만 연호는 노래를 잘한다. 노래를 너무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너무 싫어서 자기가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른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민기가 그룹을 만들어 연예인이 되자고 할 때도 연호는 그저 민기를 한심하게 볼 뿐이다.
우연히 민기가 마련한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가 기획사에 전달되고 민기가 아닌 연호가 발탁된다. 연호의 실력을 알아보고 연호에게 가수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생긴다.
꿈조차 꿀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경험한 연호는 조심스럽게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엄마도 자기의 허황된 꿈을 접고 대신 연호를 돕기로 한다. 밑바닥을 경험한 연호는 이제 오를 일만 남아 보인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펴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날은 연호의 노력에 따라 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군가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연호의 삶 때문이 아닐까 넘겨 짚는다. 나는 연호의 삶이 애처롭고 가여워서 마음이 아프고 어쩔 수 없이 코가 매워지고 눈물이 났다. 재건축 때문에 민기네 집에서 나와 지하 방으로 이사하던 날, 조금씩 자기 마음에 설레임으로 들어오는 준희에게 남루한 모습을 보여야 했던 연호가 안쓰러웠다. 당장 살집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삶의 절박함을 우리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똥을 치워야 하는 꽃같은 열 여섯 소녀의 심정을 우리는 알수 있을까. 절망의 순간 단 한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절망을 느끼고 눈물 흘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연호의 담임 선생님의 조용한 눈물이 고마웠다는 건 독자인 내가 몰입해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 마음 조차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 연호는 누구 때문일까.
작가 정신을 나는 치열함이라고 생각한다. 연호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은 치열함이 필요했다. 연호의 비참한 생활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연호라는 당당한 인물의 성장을 독자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연호를 끝까지 들여다 본다. 바닥까지. 혹은 과로와 영양실조, 스트레스로 쓰러질때까지 지켜본다. 독자는 연호의 입으로, 민기의 눈으로, 준희의 마음으로 연호를 본다.
너보다 비참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엄살 부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연호같은 삶도 우리 곁에는 있다는 것이다. 연호를 응원할 수도 있고 연호의 삶을 통해 기운을 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연호는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작가는 치열하게 들여다 본다. 힘들었고 눈물 흘렸다는 것은 연호의 삶에 독자 또한 몰입해 있었다는 증거다.
“노래 하고 싶잖아”라는 준희의 말에 연호는 내면에 꼭꼭 숨겨둔 욕망을 발견한다. 엄마 때문에 자신의 처지 때문에 없는 것으로 잊어야 했던 꿈, 혹은 재능을 어둠 속에서 꺼낸 연호를 응원하는 것은 민기나 준희 뿐만이 아니다.
연호의 상처가 드러나있어서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라면 준희의 아픔은 가려져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말 할 수도 없는 상처는 곪고 햇볕을 보지 못하면 썩거나 죽는다. 그래서 연호 못지 않게 준희의 아픔도 조용하면서 쌔다.
준희는 공개 입양된 아이다. 커가면서 친부모라고 알았던 사람이 양부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을 충격을 막기 위해 입양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버려졌다는 상처는 결코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준희의 경우에는 생모가 누군지 알고 있다. 양부모가 먼저 생모의 연락처를 전해 줄 정도다. 언뜻 보기에 양부모의 행동이 진보적(?)으로 보이고 준희의 입장을 고려한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준희가 아직은 어린 학생이라는 점이다. 부모에게 생떼를 부리고 보호받아야 하는 나이에 비해 너무 큰 선택의 짐이 주어진 것이다.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지만 알아서 할 나이가 아닌 것을 어른들은 모른다. 남부럽지 않게 키워준 양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준희를 더말 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든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는 법, 준희가 연호를 금방 알아본 것도 아마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준희의 엄마도 그렇고 연호의 엄마도 그렇고 부모들은 자식들이 부모 고생을 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실이 그러하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어른에게 상처받는지 모르겠다. 준희도 연호도 그들 스스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준희 처럼 사려깊기 까지 하다. 연호는 알아서 제 일을 하고 어른 못지 않게 삶에 최선을 다한다. 두아이의 삶을 망가트린 건 엄마라는 존재다. 등장하지 않지만 아버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가장 소년답게 살고 있는 민기 조차도 기획사의 마케팅으로 상처를 받는다. 아이들을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것은 부모라는 존재며 어른들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다.
민기는 연예인으로서 자기가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민기의 누나는 부모 기대와 전혀 다르게 애견 미용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준희도 연호도 뜨거운 상처를 아물게 할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성장은 좌절을 통해 얻을 수 있듯이 세 아이는 좌절을 통해 자신을 알았다.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내 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꿈이 있던가. 혹은 꿈을 꾼적이 있던가. 있다해도 치열하게 마주선 적은 없다. 이건 내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은 꿈대로 현실에 떠밀려 잊거나 미루고 산다.
연예인을 꿈꾸는 것이 아무리 현재의 아이들의 화두라고 해도 불만은 있지만 꿈을 찾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다.
연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날아오를 준비를 하겠지만 민기가 궁금하다.
민기는 잘 생긴 외모 말고는 오히려 평범하다. 그런데 민기같은 평범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두드러지게 잘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 뭘 해야 할 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아이들말이다. 공부가 최선이라고 생각해 잠자는 시간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하는 아이들이 민기들이다. 그런 민기들이 하나씩 꿈을 찾기를 바란다. 그런데 누가 그 길을 안내해줄까.
부모들은 공부 말고는 대안이 없어보이고 학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사회도 마찬가지다. 꿈을 가지라고 떠밀면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세상이다.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육지에 붙잡혀 신화 속 고래잡으러 가자는 노래를 하는 아빠를 보면서 민기는 한 발짝 성장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좌절과 후즐근한 모습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는가 보다.
‘그래,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 나 자신이듯 미래의 나를 만드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야.’
민기는 손을 뻗어 그 아기 고래를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빠, 이제 집에 가요. 엄마 걱정하신단 말이야.”
민기는 아빠를 부축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땅의 아이들이 지금 당장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그러기에는 너무 이르다. 시간은 충분히 있다. 지금부터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해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설령 이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어도 고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도 믿고 싶다. 다들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조연을 꿈꾸며 컴퓨터 조립으로 돈을 모으겠다는 현중이도, 우선은 공부를 하면서 정말 무엇이 되고 싶은 지 생각해 보겠다는 민기도 언젠가는 연호처럼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