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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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강준만 교수는 부지런하다. 그가 듣고 읽은 말, 글들은 그가 자신의 논리를 펴 가는데 요긴한 소재로 쓰인다. 언론학자로서 나는 그의 자세를 배우고 싶고 존경한다.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모두 공감할 수는 없어도 이게 뭔가 싶은 것들의 속살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게 그겁니다. 알려주고 깨우쳐 주었다.  

오래된 독자로서 한동안 그의 근황이 궁금했던 것은 그나마 한겨레에서 그의 글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새 많은 일들이 있었나보다.  

<강남좌파>는 인물을 벗어나야 우리 나라 정치가 발전한다고 하면서도 정치가 인물없이 가능한가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지금의 정부에서 나는 희망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더 절망적인 것은 그래도 믿고 따를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식대로는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최빈국의 농민들은 한끼의 식사보다 한 줌의 씨앗에서 삶의 희망을 본다고 한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어찌됐든 각자 해결할 수 있다고 쳐도 살다가 앞이 캄캄해질 때 물음표하나 해결해 줄 희망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어쨌든 여러가지 불만이 생기는 <강남좌파>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쓸 재주가 없어서 답답할 뿐이다. 그래도 강준만 교수가 박근혜에 대해 쓴 글에 대해서는 영 못마땅하다. 이런것이 그가 책에서 말하는 소통일까. 반대쪽에 있는 사람도 그 쪽에서는 이쪽도 반대라고? 왜 이렇게 무디어졌거나 두루뭉술해졌을까. 쏜 화살처럼 날카로웠다고 생각했던 강준만 교수의 글끝이 당황스럽다. 박근혜의 여성적 매력에 대한 부분은 도대체 박근혜가 정치인인가 싶기도 하다. 조국이 잘 생긴 외모 때문에 입길에 오른다고 들엇는데 조국의 외모는 마이너스가 되고 결혼도 하지 않은 박근혜의 섹시함은 플러스가 된다니 나는 도무지 어안이 벙벙하다. 박근혜의 정책 부재를 비판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이상하게 부드럽다. 혹은 무디다. 강준만 교수가 이상하다. 

 학벌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생각이 가장 궁금했는데 그 또한 새로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김규항의 전언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부르디외의 주장을 요약한 부분이 있는데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의 유지와 강화에 기여한다." 같은 부분을 강준만 식으로 더 강화해서 비판할 줄 알았는데 그저 현상만 나열할 뿐이어서 애 키우는 엄마로서 가장 김빠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책은 유행같은 거라고 하지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깨우침 혹은 앎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강남좌파>는 깨우침보다는 확인의 과정이고 카타르시스 없이 피곤한 책읽기였다.  그래서 나는 별을 세 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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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싱 마이 라이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9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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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수의 <어쩌자고 우린 열일곱>을 읽으면서 작가가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다. 냉정하다는 것은 현실을 담되 감정에 치우치거나 손을 대지 않고 잘 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자니 답답한 현실을 가장 내밀하게 겪으면서 작가의 마음은 얼마나 속상했을까. 지금 <키싱 마이라이프>를 늦게 읽으면서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두 남녀 아이가 좋아해서(사랑?!) 호르몬에 못이겨 서로 만지게 되고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고 결국 아이를 낳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하연이는 부모의 도움을 비롯해 어른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다. 미혼모가 되는 과정에서 기성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모습인가 싶어서 화가 났다. 하연이의 남자친구이자 아이 아빠인 채강이는 알바로 돈을 마련하고 여자친구 진아와 진아의 남자친구 현규 또한 미혼모 친구를 위해 학원을 가지 않고 알바로 돈을 마련한다. 끝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연이는 미혼모를 도와주는 시설을 찾게 되고 출산을 한다. 소설은 여기서 끝이다. 정말? 정말이다. 여기서 끝이다. 그 사이 엄마가 알게 되지만 입양을 놓고 고민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입양을 할 지 말지, 학교문제, 채강이와 채강이 부모와의 문제 등 출산을 하기까지도 어려웠지만 출산 후의 문제를 열어 둔채 소설은 끝났다.  

그 많은 일들을 어찌하라고 이렇게 끝을 맺고 제목은 또 <키싱 마이 라이프>란 말인지.  내가 왜 결말을 꼬투리 잡고 싶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런 소설을 어른을 대상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말처럼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면 독자를 좀 더 생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한순간의 실수로 임신을 하고 가출하고 친구들의 알바 도움을 받으며 미혼모 시설에 의탁하여 아이를 낳고 입양하거나 직접 기르다가 또 어려워 다시 시설에 맡기는 현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다음에 들이닥칠 어마어마한(좀 과장을 해야겠다. 양육은 이렇게 큰 문제다) 일들에 대해서는 어쩌라는 말인가. 공감을 끌어내고 이것이 우리 청소년의 현실이라면 이 소설은 누군가에게는 자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 청소년의 고민과 성장을 다루는 소설이라면 이런 식의 결말은 무책임하다는 판단이다. 일단은 출산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부터 진지한 고민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혹은 지금은 그 순간에 좀더 많은 고민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이해가 간다. 많은 미혼모들이 출산을 할 지 말 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 순간을 갖지 못한 채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시간을 보냈음을.  

아이를 낳고 기른 사람조차 이런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청소년들에게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책을 덮으며 그것이 나는 먼저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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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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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9학번이다. 80년대 맨 가장자리, 변두리에서 나는 그마마도 발 한짝 안으로 들여놓지 못한 존재다. 전교조 세대로 시작하는 90년대와는 질투로 오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지금은 그 무엇도 아닌 존재다. 지금 이 시간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있을가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걸로 봐서는 아마 소박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표백>을 읽으면서 아, 내가 결국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백 세대들을 좌절과 절망, 혹은 완성된 사회를 유지하하는데 필요한 부품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비정한 기성세대 축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가 청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면 <표백>은 현실의 개인들이 겪는 문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말보다 힘이 있어서 좀더 진지하게 듣게 된다.  추리 소설의 형식까지 띄고 있어서 더 흥미롭다. 현역 기자의 글이라 군더더기도 없고 작가의 경험이 녹아든 공간의 묘사는 리얼하다.

완성된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자살을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저항, 혹은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는 자살 선언의 요지는 분신이나 타살 보다 세련되었지만 그래서 더 모른척 하고 싶어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어보여서 더 그렇다.  그렇게 까지 자신을 내세워야 하는 그들 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세대 축에 끼어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완성된 사회에 끼어있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적이 없다.  

그들을 자살까지 하게 만든 원인이 해결 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7급 공무원 '나'의 삶도 눈물겨운 투쟁의 연속이라는 것도 아는 독자는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대로 그냥 계속 쭉 살아야하는 것인가, 한쪽에서는 스스로 사라지고 한쪽에서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들이 갔던 그 곳을 향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은 시간들, 어쩌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널부러져 있는 사이 모든 일이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좀 체 따라주지 않는 행동이 엇박을 내면서 내 삶도 꼬이는 일이 태반이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가 보다. 나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흔 두살 전업주부가 할 수있는일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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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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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소년의 이야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실한 결론 때문에  독자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도대체 이 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17년 동안 육체적 나이인 80년 이상을 살아버리는 삶의 속도에서 주인공은 늙는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이미 제 몸은 늙었는데 본질은 17세인 소년의 황당함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소설을 통해 나는 육체의 나이가 정신의 나이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17년의 시간이 80년 시간에 비해 터무니 없이 짧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예견된 죽음을 주인공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마음은 거기에 모아져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너무 이른 죽음이 그렇듯이 죽기에는 아까울 만큼 아름답다. 모든 자식이 그렇듯이 아름이 부모에게도 아름이는 선물같은 존재다.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아름이 부모는 최선을 다해 부모가 된다. 아름이는 최선을 다해 자식이 된다. 부모보다 일찍 늙고 먼저 죽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아름이네 가족은 누가 뭐라하든 부모 자식의 관계를 지키는데 그 과정이 내게는 무척 아름다웠고 눈물겨웠다. 철없는 열일곱살 짜리들이 그들 사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일찍 어른 사회로 들어온다. 사회적으로 아름이 부모 또한 조로를 경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좌충우돌 어렵고 고단하지만 아름이 부모는 조로증 걸린 아들을 통해 누구 못지 않게 어엿한 부모로 성장한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자못 유쾌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진지한 삶의 속살을 갖고 있다.  

태아의 시선 혹은 느낌으로 엄마 뱃속에서 느끼던 바깥 세상, 태어나던 순간의 모습들, 엄마가 된 미라의 심리묘사나 아기가 있는 방의 기운들을 묘사한 장면들은 특히 내가 아끼는 부분들이 되었다.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한 지인은 작가가 글을 참 잘 쓴다고 했는데, 나 역시 작가의 시선이 시인의 시선과 같다고 느꼈다. 소설 곳곳에 시의 흔적들이 많다. 이 때 시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유 혹은 인식의 깊이가 문장 문장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tv프로그램에 나간 뒤 '서하'와 주고 받는 인터넷 편지는 결국 반전이 있기는 해도 주인공에게는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부모를 위해 쓴 글을 유언처럼 남긴 주인공이 엄마가 읽어주는 자신의 글을 들으며 묻는다.   "어디예요?" 어디까지 읽었느냐라는 질문인데, 그건 마치 지금 내 목숨 혹은 내 삶이 어디까지 왔느냐라는 질문처럼 서럽게 들린다. 이제 곧 생의 시간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 그 생의 어느 순간까지 왔느냐는 말에 나는 울어버렸다. 좀 더 오래 여기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 마음 같아서, 그러면서도 부모도 없이 혼자서 그 길을 가야하는 어린 주인공의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어미된 자가 되어 내 아이를 그렇게 혼자 보내야하는 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 모든 과정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소설에 이토록 흠뻑 빠져본 것이 오랫만이다.  

독자가 되는 것은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괴롭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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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함정 - 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금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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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확신의 함정>에는 정말 많은 소설이 등장한다. 애초에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젊은 변호사가 현장에서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가해서다. 물론 검사 시절 경험한 일들이 등장한다. 내가 착각을 했거나 책 광고를 오해한 것 같다. 어쨌든 그 많은 소설들은 소설로만 떠돌지 않는다.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현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신의 함정>을 읽는 내내 문학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만큼 현실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기 위해 금 변호사는 소설을 도구로 삼았다.  

그런데 소설이 시대 정신을 담고 있고 시대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 책이 문학 에세이인지, 법조계에 종사하는 변호사로서의 치밀한 고민의 흔적인지 조금 헛갈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문학은 시대를 대표하고 상황을 형상화하기는 하지만(현실성이 있지만) 작가의 상상이고 창작이라는 점이다. 한 편의 소설은 충분히 문제적일 수 있다. 현실의 문제를 현실이 아닌 문학 작품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모순을 찾고 법과 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 불편했나 보다. 즉 문학 작품(소설)이 매개가 된다기 보다는 문학 작품에서 원인과 해결을 찾고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짧게 마무리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으로서 작가가 신의 위치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법과 정의 문제를 문학에 기대지 않고 치열하게 다루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쉬웠나보다.   

법의 문제를 다루고 조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이 책 덕분이다. 판사의 판결은 개인적 감정에 의해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지만 책 속에서도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판사가 어떤 성향인지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진다면 법 위에 판사가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한심한 생각도 해보았다. 즉 판사의 판단에 따라 누구는 죽을 수도 있고 누구는 살 수도 있는. 그런데 만약 그런 절대 힘을 가진 판사의 생각이 오류가 있거나 편협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면?  

어쩌면 법은 완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정해진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실은 그 법이 문제 투성이라는 것은 쉽게 경험 할 수 있다.  

<확신의 함정>은 법이 옳다는 확신에 그렇지 않다는 함정이 숨어 있는 것으로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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