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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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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지만 나는 거의 대부분을 작품으로 만나왔다. 열렬히 사랑해서 단 한번 만나기를 소망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를 아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촛불 집회가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천천히 흘러가는 물처럼 사람들이 흘러가는데 남편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돌아봤더니 거기에 김훈이 있었다.

때로는 tv로, 거의 대부분은 책으로 만났던 그를 그야말로 스쳐지나 가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갑자기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나에게는 좀더 깊게 다가왔다.

반대로 젊은 시인 김사이는 시로 만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만났다. 스승을 만나는 자리였는데, ‘사이’라는 필명이 좋았다. 헤어졌을 때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이 안날만큼 말 수가 적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사람을 알고 나니 그녀의 시들이 그녀의 목소리로 읽혔다. 시 곳곳에 녹아있는 그녀의 여러 감정들이 훨씬 도드라져 내게 다가왔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나는 어느 책이든 ‘작가의 말’을 굉장히 열심히 들여다본다. 중간 중간에도 다시 작가의 말을 읽는 경우가 많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작가와 작품이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보니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작품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꽤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작가의 말은 나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더듬이를 쫙 펴고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은 작품을 거둬내고 작가와 독자가 대면하는 시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는 독자로서 작가를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색과 경험을 공들여 적은 산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잡문’ 이어서 밀도 있는 만남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작품을 빼고 난 생활인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날 수는 있었다.

오로지 나의 게으름 탓이지만 우리나라에 알려진 그의 이름에 비해 나는 그의 작품을 성실하게 읽지 못했다. 일본 문학은 오히려 어린이 문학이나 만화가 더 자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아는 일본의 문학은 바쇼의 하이쿠가 전부라고 느낄 만큼 빈약하다. 그러니 내게 일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 선수다. 그런데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는, 한국의 독자는 그를 잘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은 알지 못하는 작가를 먼저 만나는 일로써 내게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하루키는

①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

② 그가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 있다는 것

③ 그가 나이답게 여유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④ 그가 한국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 등이다.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은 “자기란 무엇인가”에서 찾았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그는 소설, 혹은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가도 임무를 다하고, 독자도 그 가설, 이야기를 다 읽고 덮는 순간, 별로 달라진 것 없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소설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답이나 결말이 없어서 허탈한 독자도 있겠지만 소설가는 가설을 보여줄 뿐, 독자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또 다른 해답이나 결말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가설, 이야기를 찾아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 부분을 ‘계속성’이라고 말한다. 옴진리교의 폐쇄성을 보면 하나의 가설, 이야기가 하나의 진리 안에 닫혀있을 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있다.

그는 소설, 이야기가 전부라고 말하지 않고 삶의 계속성과 함께 가는 생활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 이어짐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작가와 소설, 독자는 그렇게 오래도록 생활 곳곳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옴진리교 문제를 취재하면서 하루키는 그 날,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목했다고 했다. 작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개별적 존재들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옴진리교가 개별적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교리, 하나의 생각에 개별적 존재들을 가두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인식에 깊이 공감한다. 소설가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실제로 번갈아 발을 넣어보게 할 뿐이다.” 독자와 작가는 그 “무언가”를 찾아, ‘계속’. 할 뿐이다.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쓴 글에서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같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소설을 전부라고 말하지 않아서 좋다.

‘굴튀김 이야기’로 자기 이야기를 써보라는 충고는 나로서는 박수로 환영한다. 내가 누구라고 구구절절 쓰느니 이처럼 맛있는 글로 쓰는 것이 훨씬 풍요로운 자기 표현이다. 글에는 그 사람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면접관이라면, 막 튀겨낸 굴튀김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 사람의 귀라면 그가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수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겠지. 그 소리를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로 듣는 사람이 회사의 직원이 된다면 그 직원은 자기 존재로 옆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점수를 팍팍 줄 것이다. 당신이라면 사람이 좀스럽다고 볼까? 그럴수도!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있다고 생각한 것은 ‘째즈’를 비롯한 그의 음악 이야기 때문이다. 소설에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참 난감하다. 그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마음을 싣기가 어려워서 괴롭다. 소리라는 공간성 때문에 그림이라면 어렵게라도 가능할 상상조차 힘들다. 그래서 하루키가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하고 쓴 그의 음악이야기는 이 막막한 시간이 언제 끝나려나 무릎을 꿇고 법문을 듣는 미욱한 중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하루키가 태평양 한 가운데 살면서 우리 쪽, 일본을 기준으로 서쪽이 아니라 동쪽 그러니까 미국을 향해 온 몸을 돌려 세우고 있구나 생각해 보았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문학도!

그를 세계 시민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아주 약간 기분이 상해서 그를 미국 시민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가 그건 쫌 심하지 싶어서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의 글에서 일본적인 냄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그를 편안하게 생각한 것은 이미 우리 사이에도 미국이라는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스며 있기 때문일테니 말이다.

 

읽기에 조금은 편안한 이런 글의 매력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란 말과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약간은 풀어져도 되는 이런 글에서 평소 하던 대로 쓰는 말을 글로 읽는 느낌은 색다르다. 각 장마다 그 글을 싣는 이유라던가, 글의 출처, 혹은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들은 하루키의 육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각 각의 글들에 대해 무척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 있어서 본문보다 그 말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나이를 보니 호들갑 떨 것도 없고, 조바심 낼 나이도 아니고 살아온 생의 길이가 깊이로 더해져서 오로지 그 나이가 되어서야 나올 여유가 느껴졌다. 남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당연하게도!

 

한 권의 책을 한 자리에 앉아서 다 읽어내는 일이 어렵다 보니 맥이 뚝뚝 끊기는 독서를 할 수 밖에 없다. 방학이니 때 맞춰 아이 밥도 차려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먼지도 털어야 하고, 돌아서면 저녁해야 하고. 식구들이 돌아오고,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이 상황의 끝에 따라 또 다양하게 읽힌다. 더욱이 이 책처럼 이러저러한 글들을 모았다고 하는 책은 집중하기가 더 곤란하다.

어느 맥락에서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느 순간 나는 하루키가 꽤 차가운 이성(異性)으로 느껴졌다. 도무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냉정할 만큼 나(한국의 독자, 혹은 한국의 문학)에 대해 말이 없었다. 이 두꺼운 잡문집에는 <도넛을 베어 먹으며>가 유일하다. 그 글을 쓴 계기도 그가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일본인으로 2위에 뽑혔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을 몰라주는 매정한 남자라고 느낀 것은 한국 독자들이 그를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가 흡족한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몇 권의 책에도 한국어 서문이라거나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없다.

급기야 <잭 런던과 틀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그가 한국 문학을 어떻게 볼까 하는데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에서 잭 런던이 러일 전쟁 중에 한반도 북부의 벽촌에 묵었던 적이 있었단다. 마을 사람들이 잭 런던을 보자고 해서 조선의 외딴 시골마을에까지 자기가 알려졌다고 생각, 감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잭 런던이 아니라 잭 런던의 틀니를 보여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이쿠! 아버지!

하루키는 어빙 스톤이 쓴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잭 런던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로구나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틀니를 보여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제 틀니를 삼십분씩이나 뺐다 끼웠다 하면서 잭 런던은 “인간이 제아무리 사력을 다해 뭔가를 추구해도 그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좀처럼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루키는 그가 교훈을 터득하는 방식에서 감탄을 한다. 누구나 잭 런던처럼 무식한(이건 내 생각이다) 이방의 사람들 앞에서 틀니를 뺐다 끼웠다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하루키가 잭 런던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도넛> 말고 한국과 관련한 글은 잭 런던과 틀니와 관련한 이글이 전부다. 특별히 이 대목을 언급하며 문제 삼은 그의 생각 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느 만큼일까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우리가 접한 외국문학은 초기에는 일본 번역물을 다시 번역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화 자체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데, 혹시 이런 흐름과 그의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이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편협하고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그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만 한국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토록 그의 문학에 열렬히 환호를 하고 독자를 자처하는데도 한국에 한번 와보지도 않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다. 계획이 있거나 올 수도 있지만 지금 막 그의 <잡문집>을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강렬하다.

물론 그가 와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좋아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어야 하고, 한국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또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는 세계시민으로 인정받는 소설가이니까!

 

이 책을 통해 그를 다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해도 그의 육성과 맨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그의 말대로 독자는 책을 덮는 순간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의 느낌 혹은 나의 변화가 중요하다. 철저하게 논픽션의 세계였지만 그 또한 특별한 한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물론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고 나 또한 특별한 개인이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그 앞에서는 의미 없는 자기 방어일 뿐이다. 그가 소설가로서 폐쇄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소설이 앞으로 계속되는 한 그의 독자도 계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그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가다.

다만 나는 한걸음 다가가기 보다는 반걸음 물러났다. 애초에 준 마음이 없으니 이럴 것 까지 없잖아 할 수도 있건만 그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등만 바라본 것 같아 아주 약간 상처받았다. 거절당한 친구 대신 내가 뭐라 하는 꼴이다. 괜히 나서지 말라는 소리가 마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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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 우리 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 강좌
심상정 엮음 / 양철북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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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의 <마을학교>에서 이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마을학교 교장 격인 심상정의 힘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지역구의 어떤 당 소속 의원은 임대아파트 건축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어쨌든 서울 서쪽 끝 동네에 사는 나는 책을 통해 이런 학교 소식을 접하면 일단 배가 아프다. 전에 없던 욕심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것을 부러워 할 만큼 사회화가 된 사람이 아니다.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동네가 그래서 나한테 딱 맞는 동네다.

그러던 사람인데 어쩌자고 요새는 괜한 트집을 잡고 입꼬리가 치어 올라가는 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늘 뭔가에 화가 나있는 나를 발견한다.

겉보기에는 작은 키에 앳된 얼굴을 한 그녀가 있다.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굉장히 열을 받는 사람이다. 아픈 손가락 같은 아들 때문에, 그보다 더 많이 아픈 평범한 둘째와 그 친구들이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기운 없어 하다가 마치 박카스를 찾는 사람처럼 <나꼼수> 언제 업 되냐며 ‘졸라’ 씩씩댄다.

사십을 훌쩍 넘겨 살면서 그녀는 욕 한 번 써보지 못했다. ‘완벽하게 도덕적인 사람’인 그녀가 아이가 학교에서 하도 이것 저것 뺏기길래 부부가 욕을 한번 가르쳐보려다가 실패했던 일도 알고 있다. 그러던 그녀가 <나꼼수>를 들으면서 욕과 도덕의 경계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대단한 <나꼼수>다.

말이 길어졌다. 단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를 생각했고, 내가 열받아 하는 이유가 아마도 그녀에게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

 

박경철의 말을 읽은 날, 마침 아들과 피자에 꽂혔고 동네 59쌀피자를 꼭 먹어야 한다며 큰 거 두 판을 쏘았다. 아들 녀석 친구들도 마침 들이닥쳐서 예산이 더 들었지만 특별히 더 맛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지역경제, 서민 경제, 동네 경제 그런 것 잘 모른다고 이마트 피자 사먹는 짓 하지 않겠다고.

정태인의 죄수의 딜레마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컴퓨터를 싹 지우고 재부팅 하듯이 그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준비 땅해서 우리 모두 사교육 같은 거 동시에 손 딱 놓는 걸로!

이범의 얘기는 언제 들어도 목소리가 분명하고 커서 듣기 좋다. 딱 써먹기 좋은 구체적인 방법들이라서 더 잘 들린다. 너무 분명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거나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결국은 선택인데, 선택하지 말고 제도로 정해져 버렸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학교에서는 어떤 경쟁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나임윤경이라는 여성학자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소득이다. 이러니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있겠나. 세상에는 이토록 멋지고 훌륭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없으니 책으로 만나는 것이다.

사교육을 외도와 연관지어 현 상황을 들여다 보니 정말 요즘 우리 부모들은 다 집단 최면에 걸린 게 맞구나 싶다. 증세는 좀 더 심한 것 같다. 부부가 부부의 삶을 못살고 부모로서만 사니, 부는 돈을 벌고 모는 자식을 가르치고 결국에는 부부는 없고 의무만 이행하더라는 말.

그래서 외도를 하는데 또 이혼으로 가정이 깨지면 외도 또한 깨진다는 말은 너무 슬퍼서 속상했다. 부부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남편에게 해주었더니 그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아이 교육 때문에 부부가 돈버는 기계, 돈쓰는 기계가 되지는 않아야겠다. 아이도 그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니 우리 부부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윤구병과 이이화 선생의 말은 죄송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두 분 다 한평생 흙과 역사에 뜻한 바 대로 삶을 집중해오신 분들인데 왜 나는 이 두 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을까.

대안학교의 귀족화에 상처를 받았다고 윤구병 선생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아마 아직도 내가 수양이 덜 되어 편협한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두 분이 하시는 얘기가 더 근본적이고 지당한 말씀이긴 한데 “저는 지금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며 일어나 가버리는 나쁜 청중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무릎 꿇고 두 분의 말씀을 들을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신영복 선생이 나는 늘 어렵고 무섭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이 섞이면 그것은 양면이 아니라 더 큰 하나의 덩어리(힘)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을 선생을 보면서 느낀다. 그래서 감히 우러르기는 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을 말씀들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말.

 

“인디언들은 초원을 달려 작은 언덕에 올라가면 말머리를 돌려서 자기가 달려온 초원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했을까 봐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먼 길은 영혼과 함께 가야 됩니다”

 

이 먼 길은 “자신의 논리, 자신의 이유로 가야하는 길”이다. 그리고 ‘더불어’ 가야하는 길이다.

 

조국은 늘 그렇듯이 말보다 글이 쎈 사람 같다. 말로 한 것을 글로 옮겼을 때 조차 그렇게 느껴진다. 학자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일 년 열두 달 책상에 앉아서 연구만 하는 선생이 아니라서 좋다. <진보집권플랜>에서 동네 커피전문점에 가서 그곳에서 모은 쿠폰을 쓰더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듯 생활인으로서 법학자인 그가 멋지다고 생각한다.

사심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이 없는 먼 그대(나는 잘생긴, 엄친아들, 강남좌파를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다, 뼛속깊은 이 촌스러움!)인 그가 열심히 자기 몫을 하되, 현실에 발딛고 있는 것이 좋다.

심상정은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이다. 부끄럽지만 그녀에 대해 알려고 해 본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이 책이 그녀의 손에서 나오게 된 책이라는 것으로 나는 그녀가 국회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끝내 그곳에서 굳건히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부터, 다 읽고 몇 날이 지난 지금도 뉴스만 틀면 학교 폭력 기사가 뜬다. 이젠 거의 기겁의 수준으로 그 뉴스만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역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른 방송사 뉴스도 학교 폭력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집과 학교 밖에 모르고 사는 나같은 엄마는 좀 과장하면 패닉 상태다. 그래도 세상이 좀 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책에서 얻은 위안과 위로, 희망의 힘이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툭하고 맥이 빠져버린다.

신영복 선생의 “자신의 논리, 자신의 이유로 가라는 말”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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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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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을 보내주세요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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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먹을 수 있을까

 

내 손으로 골라 읽기를 원했지만 과연 이것을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사진으로 봤을 때는 무척 두꺼울 것 같더니 받아보니 의외로 얇다. 몸피도 작고.

후루룩 책장을 넘겨본 첫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긴 글일 거라 생각했는데 비연속적이고 짧은 글이다. 상대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 짧게 끊어 하는 말은 깊이 쫓아가기가 버겁다.

방법은 있는 힘껏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발이라도 더 거리를 좁히는 것.

 

틈이 보였다

 

표지 안쪽에 저자의 사진을 본다.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웃고 있다. 손바닥으로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듯, 그 연속적인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목의 주름이 낯설지 않다. 늙음은 어디나 똑같다.

신과 대립하는 것이 신의 부재가 아니라 악마이며, 우정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 대립되어 있다. 스푼이 포크 덕택에 모성적 부드러움을 보여준다는 저자의 말을 읽으며 비로소 나는 마음이 조금 열렸다. 겨우 그를 따라 상상력을 펼쳐볼 틈을 보았다.

 

거울을 보는 시간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나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여지없이 그곳에 있다. 입꼬리가 쳐져 있어서 더 무표정해 보인다. 내 얼굴과 대립되는 것을 찾아보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재미있지도 않고, 진지해 지지도 않았다. 기어이 생각해 낸 것이 고작 나와 사막, 나와 독서 정도. 이것도 나에 대한 개념 정리가 우선 되어야 한다.

 

저자의 거울은 116개의 개념들을 보여준다. 각각이 개념들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하고 짝을 이룬다. 남자의 거울에는 여자가 비치고, 황소의 거울에는 말이 비친다. 좀 더 본다. 문화의 거울에는 문명이, 순수의 거울에는 순결이, 태양의 거울에는 어둠일거라는 생각을 뒤집고 달이 비친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들로 나간 끝에서 보는 거울에는 존재의 얼굴에 무가 비친다.

 

서로 대립되는가 싶은 것들의 닮음과 다름을 저자의 안내를 따라 자각하면서 우리의 상상력은 힘을 얻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 눈과 정신이 ‘블링블링’해 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독자의 소화 능력에 따라 눈부심의 정도가 확연해 진다.

개념을 정리하는 개론서의 성격을 갖겠노라고 했으니 각 개념들의 정의는 분명하되 지극히 문학적이어서 읽기 즐겁다. 스푼과 포크, 지하실과 다락방 같은 글들은 정말 맛있는 글이다.

 

“나무는 수직적이고, 길은 수평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무는 한군데에 붙박여 있는 안정성의 상징이다. 반면 길은 순환의 도구이다.(나무와 길)” 나무의 수직성에서 안정성의 상징을 얻어내거나 수평적 길에서 순환의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상상력은 나같이 단순한 사람의 뇌를 즐겁게 자극시킨다. 나무와 길로 대립되는 두 개념은 균형을 이루기도 하지만 균형을 잃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도시의 두 가지 기능이 균형을 잃어가는 것이다. 거주의 기능이 순환의 기능에 의해 희생당하고 무시당한다.”

 

희생당하는 것들은 나무들이나, 분수대, 시장, 강둑 같은 것들이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틈이 벌어져 풀이 나 있는 것을 바라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물론 자동차 바퀴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와 같은 통찰과 유머와 상상력은 이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건 정말 문득 든 사족인데, 거주의 기능을 회복한다며, 시멘트와 전력으로 되돌려 놓은 서울의 청계천을 본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더러, 특히 광대나 신화적 존재들을 이야기 할 때는 잘 몰라서 머쓱하고 낯설다. 어쩔 수 없는 문화의 차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깨알 같은 재미가 많은 책이다.

 

그가 단순히 철학적 사유로서 개념을 정리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문제로 상상력을 확대 시켜서 나는 더 좋다. <나무와 길>도 그렇고 <문화와 문명> 같은 글은 두고 두고 생각해 볼만한 개념의 대립이다. 보편적인 것으로 열려 있지 못한 이기적인 문명이 문화를 살해했다는 그의 말이 유난히 자극적이다.

그와 나의 물리적 거리에 대립하여 생각의 거리가 자주 좁혀지는 것을 느껴보는 것도 짜릿한 경험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행에서 돌아왔다

 

여행은 무엇과 대립할까? 잠? 이 여행을 시작할 즈음 거울에 비춰본 나는 무엇과 대립할까? 이런 질문들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의미까지 있어 보인다.

대립하는 것을 찾는 과정은 한쪽의 개념을 일단 정리해야 가능하다.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대립한, 혹은 이웃한 개념을 더 많이 알게 된다. 다름을 통해 개별적인 것들의 의미를 알게 되거나 닮음을 통해 편협한 사고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거기에 상상력이 더해지면 한결 즐거운 여행이 된다.

이 책은 <시간의 거울>로 오래전에 소개되었다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으로 다시 출간되었다고 한다. 훨씬 철학적이었던 제목에서 다분히 문학적인 제목으로 ‘문패’가 바뀐 것 같다.

여행 가방을 정리하면서 여행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지금 내게 무엇이 남아있는지 상관없이 여행하는 내내 나는 즐거웠다. 아, 물론 즐거움과 대립하여 어려움 앞에서 발을 떼기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말이다. 책과 여행은 어떻게 닮아있거나 다른 지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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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 - 이찬수 선생님의 종교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6
이찬수 지음, 노석미 그림 / 너머학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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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다는 것에는, 지금은 완전하게 알 수 없는 부분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긍정적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이나 가치가 긍정적으로 전개되리라 예측하면서 그 예측에 몸과 마음을 용감하게 맡기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4)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너머 학교에서 발간된 책에 실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특히 너머학교 열린교실 시리즈를 빼놓지 않고 읽은 독자로서 이 책에 대한 믿음은 읽지 않았을 때는 98%의 믿음이었고, 읽으면서 의심했던 2%가 채워졌다.

 

 

나는 이 책이 믿음을 주제로 하지만 종교에 대한 것만이 아닐 것으로 기대했다. 위키 백과는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로 정의했다.

 

이 책은 종교 뿐만이 아니라 사람, 가치관, 사실에 대한 믿음의 얘기를 하고 있다. 만약 종교‘만’ 얘기했더라면 내 예측은 빗나갔고 2%가 채워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만 믿어지니까 믿었을 뿐인데,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아서 나는 고맙고 즐겁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눈여겨 살펴보고 내적 사유를 많이 한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의 주체는 ‘너’(나의 경우 나의 아들!)다. 나는 너(아들)를 믿고 있는가.

내가 ‘너’를 믿는 것은 네가 나에게 왔기 때문이다. 대상(너)이 없으면 나는 믿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나를 믿는다고 할 때 조차 나는 대상이 된다. 그러니 내 믿음의 원천이 되는 대상, 너(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내가 너를 믿고 싶을 때, 내게 필요한 것은 “지난 경험들에 담긴 의미 혹은 의미 있는 관계를 구체화하려는 의지와 지난 경험에 비추어 2%의 불확실성을 용기있게 받아들이는 결단이“었다. 그리고 ”경험, 의지, 용기는 믿음의 주요 구성요소“다.

 

 

최근에 와서야 나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아주 조금 짐작하기 시작했다. 의무와 책임을 전혀 이행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조바심으로 야단을 치면서 어느 순간, 내가 아이를 믿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동안 내 입은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했을 터. 나는 내 아이와 살아온 지난 경험을 구체화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 아이가 커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아이의 삶을 바탕으로 그 아이의 앞 날도 긍정적것이라고 믿을 용기와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온전히 믿기까지 아직은 부족은 2%를 그 용기가 채워 줍니다. 그 순간 믿음의 내용이 단순히 내 밖의 어떤 대상으로 남지 않고 나 자신의 것이 됩니다.“(50)

 

믿음의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나같은 사람이 많을 것을 알고, 용감하게 결단하라고 충고한다. 가려고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말은 옳다. 수학 시험을 50점을 맞아놓고도 자기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기를 믿으라고 너스레를 떠는 아이를 믿겠노라 결단을 못내린다면 나와 그 아이는 싸움 밖에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한들, 아직도 내 마음은 갈등 상태다. 한겨울에도 온종일 운동장에 나가 사는 아이를 감사히 받아들일 것이냐, 끌어다 책상 앞에 앉혀 놓고 그 날 그 날 해야할 수학 문제집을 들이밀 것이냐.

 

그런데 내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려면 즉 내 아이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려면 나는 내 아이를 그 아이 생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정이 쉽지 않기에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이 과정은 수도승이 그러하듯 나 또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깨닫고자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은 신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신을 믿는다는 말은 그 신이 내 안에 들어와 있어서 나의 모든 것이 그와의 관계 속에서, 그와 어울리게 움직이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신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렇게 살게 하고, 인류를 나아가 온 생명을 그렇게 살게 하는 분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65)

 

저자의 말에 의하면 근대 이전 서양 세계에서 신을 믿는 것은 자신과 이웃과 사회, 나아가 우주 전반에 어울리는 ‘삶’으로서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 헌신, 경외 등 전인격적인 자세이자 행위였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 믿음은 대체로 종교를 떠올리며 결단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행위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믿는다는 것을 자연법칙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초자연적인 어떤 너머의 존재에 의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법칙 안에서 살 때 너도 소중하고 나도 소중하며 만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멋진 믿음의 세계라는 말이 나는 마음에 든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열린 교실 기획이지만 먼저 나온 책들도 그렇고 이 책 또한 일반 독자들도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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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2012-03-2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의 내용을 아드님과의 관계에 적용해 해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 글이 '수수꽃다리'님의 삶을 통해 몸을 입는 느낌이 듭니다. 글은 역시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더 들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수꽃다리 2012-03-2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찬수 선생님!
어쩌면 이 글을 읽지 못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반갑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글을 드립니다.(마음은 더 크게 소리지르고 있답니다, 하악,하악 이럴수가. 책의 저자께서 이렇게 글을 남겨주시다니. 제게도 이런 일이^^)
그때 함께 구입한 선생님의 다른 책들은 곧 읽게 되겠지요? 어느 한때에, 제가 선생님의 글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좋은 글(말씀)을 책으로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봄비가 제법 내립니다. 오늘만큼은 어디에 계신지 모르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보낼 것 같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이찬수 2023-12-20 15: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기쁜 마음으로 진작에 읽었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좋게 읽어주신 다른 글도 있으시다니 글쓴이로서는 기운이 나면서도 어깨도 무거워집니다. 아드님이 벌써 성인이겠습니다. 더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수수꽃다리님의 삶을 응원하며 댓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김탁환의 쉐이크 - 영혼을 흔드는 스토리텔링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샀지?

사놓고도 내가 왜 샀는지 모르는 책을 만났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마흔 넘어가면서 냉장고 문을 열고는 왜 열었지 하는 꼴이다. 생활에서야 그렇다 해도 책까지 이럴 줄이야.

 

굳이굳이 이유를 대자면 ‘스토리텔링’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내 지식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서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는 것 정도. 지긋지긋하게도 책 읽기 싫어하는 모 학생 녀석들한테 절망하고 좌절하다가 읽는 대신 말로 들려주면 좀 들을까 싶어서 이 책 저 책 찍었다 놨다 하던 중이었을 거고.

 

아는 분은 정말 이야기를 잘 한다. 듣다보면 책 한권을 읽고 난 느낌이 들 만큼 거의 탁월하다. 그 양반이 하는 것이 스토리텔링, 이야기 들려주기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내가 이 책을 골라든 것이 좌절의 끝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을 거다.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 들려주기가 아니라 이야기 만들기에 관한 책이다. 김탁환은 소설 대신 이야기라고 했으니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소설이다. 소설 창작에 대한 김탁환의 지상 강의다. 김탁환만의 이야기 만들기 사계절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필요 없는 책 아닌가?

처음에는 그래, 한 번 생각 해봐하는 심정이었으나 제2코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접었다.

그래도 도전하고 싶은 독자라면 100권의 책과 10권의 공책을 준비하여 바다를 출발하여 사막에도 가고, 설산에도 오르고 수없이 맞아도 끄덕 없을 자신이 있다면 그가 마련한 코스를 밟아도 된다. 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 산 책인데, 나는 그 어느때 보다 열중하여 읽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나처럼 눈 밝은 독자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이 무척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 만드는 사람의 얘기를 들었으니 만든 사람처럼 읽으면 되는 일. 좀 더 밀착해서 그 작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이야기 하기도 좀 쉬워질래나?

어쨌든 이야기를 만드는 김탁환의 자세를 듣는 동안, 내 비록 이야기를 만들 능력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지만 그 또한 썩 괜찮은 경험이었다. 깨끗하게 마음 비우는 일!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 누군가를 흔들(shake) 힘은 없으나 잘 만들어진 쉐이크를 발견하여 기분 좋게 흔들릴 준비를 한 셈이니 이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내게 처음 다가올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이야기가 끝나자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서 오라, 새로운 여행이 될 이야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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