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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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색에 놀란다. 위스키의 호박색과 피노누아의 맑은 선홍색을 섞은 듯한 이 색. 투명하고 영롱하다. 코에 잔을 가져다 댔는데... 이건?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봄의 냄새, 물의 냄새가 났다. 상냥하다, 상냥해. 이건 상냥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마데이라의 상냥함 덕분에 간만에 밤의 부드러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밤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술을 각별하게 여기게 되었고, 이런 글도 쓰고 있는데, 마데이라가 딱 그런 술이다.          p.13


술로 인생이 망가지고, 망가지는 인생을 술에 의탁하는 과정을 피츠제럴드보다 잘 그린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Tender is the Night) 또한 전반적으로 술냄새가 물씬 풍기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한은형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밤은 부드러워, 마셔>로 짓게 된 이유도 피츠제럴드 때문이라고 한다. 제목뿐 아니라 내용도 각종 문학 작품들과 작가들과 관련된 술 이야기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에 나오는 크래프트 비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신과 인간이 함께 마시는 와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주인공의 주치의가 빈혈기에 대한 약으로 처방한 흑맥주, <율리스시>의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의 와인이라고 말했던 맥주 기네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사람들이 마시는 앵두주, 도로시 파커의 진과 칵테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속 인물들이 마시는 진 리키, 그리고 헤밍웨이의 <해류 속의 섬들>에 나오는 씁쓸하고 독한 술 다이키리 등 술과 함께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나 미식가로 유명한 한은형 작가가 묘사하는 디테일한 맛과 향에 대한 문장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어떤 종류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맞다. 술과 굴은 정신에 이바지하는 음식이었다. 내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영혼을 들어 올리는 음식 말이다. 우리가 땅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물리적 지엄함을 배반하면서. 음식을 먹고 그런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게 굴의 그 광물적인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굴에 착 달라붙던 샤블리 때문이기도 하고. 굴에 샤블리가 왜 이렇게 어울리는지 그때는 몰랐다... 굴과 마시는 샤블리가 그렇게나 충일했던 것은 그저 9월의 파리 공기와 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샤블리는 굴을 먹고 자란 술이었다.            p.262


<레이디 맥도날드>, <거짓말>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소설가 한은형의 술 에세이집이다. 사실 한은형 작가는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식가로 유명한데, 그래서 음식에 관련된 작품도 꽤 많았다.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모든 감각이 동원된 ‘주담酒談’이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오후 3시와 5시 사이의 술, 홍어무침과 소주,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 도로시 파커의 진, 교양 없는 마티니, 하이볼이라는 흥분, 밤의 술 위스키와 코냑, 굴과 샤블리 등 단어만 들어도 침샘이 자극되고 잔을 들어 손목을 꺾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해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한 즐거움도 주었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혹은 날씨가 좋아서 술을 찾게 되는 작가에게 술을 마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술을 마셔서 건강을 해치는 것보다 술을 참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건강에 더 해롭다고 믿는다니 그 귀여운 마음에 어쩐지 무장해제되는 듯한 느낌이다. 술을 즐겨 마시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길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조선일보 주말판인 '아무튼, 주말'에 2년 넘게 연재 중인 칼럼이다. 그 중 48꼭지를 선별해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작가의 입을 통해 술을 보고, 듣고, 마실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글들이었다. 작가가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 애정이 짐작이 될 것이다. 알면 알수록 먹고 싶어지고 알수록 마시고 싶어지는 술의 세계는 딱 기분 좋게 취해서 세상이 알딸딸해지는 그 순간만큼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또 그저 그럴 때도 마시는 게 술이라고, 그건 인생과도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마시는 거라고 말이다. 잔에 가득 부어진 액체가 마음에 찰랑이는 밤,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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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코티지 가든 에디션)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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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이 환상이라면, 그 모습은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림에서는 종종 담대한 행보로 용기 있게 새로운 색깔을 도입하지만, 타샤는 기본적으로 매사에 복고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역사가 깃든 것들을 선호한다. 사실 옛날에 쓰던 도구와 물건들, 아이디어들만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 그것이 타샤 정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녀의 원예 기술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잊은 방법들이다. 그녀는 여러 세대 전에 시골집 정원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종류의 식물들을 키운다.             p.25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 작가인 타샤 튜더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로 더 유명하다. 버몬트 주 산골에 18세기풍 농가를 짓고 홀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자연적인 삶의 바탕에는 바로 정원이 있다. 30만 평의 대지에 펼쳐진 타샤의 정원은 일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비밀의 화원'으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은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사계절 동안 담은 포토 에세이이다. <타샤의 정원> 개정 신판으로, 포근한 감성의 일러스트 커버를 입은 '타샤 튜더 코티지 가든 에디션'이다. 




타샤는 아흔 살이 넘어서도 장미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당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식물 하나하나를 그대로 애지중지하면서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낡은 헛간, 오래된 도구, 고풍스런 옷을 즐기고, 어머니의 정원에서 가져온 가장 오래된 장미들, 멸종되다시피 한 패랭이속 품종들, 수선화들을 데려와 키운다. 친구들을 정원으로 불러 모으고,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식물을 존중하는 마음을 나눈다. 무엇보다 타샤는 사랑하는 것에 푹 빠지는 사람이라, 정원이 절정에 다다르면 집 구석구석에 꽃장식이 넘쳐난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나 타샤의 집과 정원을 방문하면, 이곳에 푹 매료될 수밖에 없다.





가을에는 지하 저장실에 드나듦이 잦다. 감자 바구니는 문 바로 안쪽의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계단 아래와 안쪽 깊숙한 곳에는 모래를 켜켜이 뿌린 당근, 사탕무, 무 상자를 놓고, 가끔씩 물을 뿌려준다. 부추는 단으로 묶어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가끔 뿌리째 캔 양배추에서 흙을 털어내 고목 부분을 꼭 묶어서 매달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이따금 양배추 뿌리는 다 먹지 못하고 상할 때가 있지만, 잎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못 먹는 이파리는 닭 모이로 주지요." 간단히 말해 그것이 타샤의 인생 철학이다. 한순간도 그냥 보내지 않고, 몸짓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나뭇잎 하나 버리지 않는 것이.           p.200


타샤의 정원은 버몬트에서 가장 추운 곳에 있다. 3월이 시작되어도 뒷문에는 아직 1미터쯤 되는 눈이 쌓여 있다. 꽃밭은 아직도 깊이 잠겨 있지만, 씨앗과 구근 상자들이 매일 배달되며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는 중이다. 타샤는 구근을 구입할 때 백 개 이상씩 주문한다고 한다. 풍성하게 피어야 하니까, 수천 개씩 심는다고 말이다. 씨앗이 마련되어 파종 준비가 끝이 나면, 4월의 몇 주간은 '진흙탕 계절'이 되어 완전히 고립된다. 하지만 이내 눈이 빨리 녹는 언덕의 남쪽 기슭에 심어 놓은 구근 몇 개가 땅 위로 고개를 내밀면서 봄을 알리기 시작한다. 


5월이 되면 촘촘히 화초를 심은 꽃밭에 꽃이 만발한다. 5월에는 정원만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헛간 안마당도 분주해진다. 타샤는 깃털 달린 동물을 귀여워해 늘 밴텀닭과 뿔닭을 키웠다. 화가인 타샤에게 색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5월의 꽃밭에는 새벽녘의 분홍빛, 연보라색, 라벤더빛, 연노란색, 흰색 등이 흩어졌다 다시 반복된다. 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정원의 모습을 생생한 묘사와 사진으로도 만나볼 수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설레었다. 




정원을 가꾸는 것이 힘들지는 않냐고 묻는 이들에게, 타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정원의 나무나 꽃에게 특별한 걸 해주지는 않아요. 그저 좋아하니까 나무나 꽃에게 좋으리라 생각되는 것, 나무와 꽃이 기뻐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잡초 뽑기나 물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필요한 비료를 제대로 주고, 관심을 갖고, 소소한 것들을 매일같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이 책은 타샤가 맨발로 땅을 밟고 선 타샤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온갖 화초와 나무를 심고, 물주고, 돌봐주고, 기르고 열매를 수확하며 보내는 1년간의 정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계절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를 타샤의 정원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온도와 바람을 느끼고, 달이 바뀌는 것을 챙겨가며 정원을 가꾸는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삶을 살았던 타샤. 봄과 여름에 피는 색색의 꽃도, 가을에 추수하는 감자와 당근도, 긴 겨울의 온실에서 피어나는 동백꽃도 모드 자기 손으로 일구었던 것이기에 타샤의 정원은 그녀의 삶과도 같다. 언젠가 나이 들어 이런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페이지마다 염원처럼 묻어났다. 바쁘고 정신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자연을 그리워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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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클래식 리이매진드
루이스 캐럴 지음, 안드레아 다퀴노 그림, 윤영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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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부채와 장갑을 집어 들었다. 복도가 너무 더웠기 때문에 앨리스는 말을 하면서 계속 부채질을 했다!

"이런, 이런! 오늘은 정말 모든 게 별나구나! 어제만 해도 모든 게 그저 평범했는데. 밤새 내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뭔가 살짝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아. 하지만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니라면, 다음 문제는, 난 도대체 누구라는 거야? 아, 이거야말로 엄청난 수수께끼구나!"            p42


수없이 변주되는 고전 중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여러 판본으로 만나본 책이다. 그래서 웬만한 판본에는 크게 감흥이 없는데, 이번에 만난 버전은 정말 독특하고,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소소의책에서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왔다. 현대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번역에 세계 유수의 매체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인 안드레아 다퀴노가 시각적 요소를 더한 컬렉터용 버전이다. 특히나 표지 이미지가 너무 아름다운데, 뒤죽박죽 마법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신비로운 모험을 하게 되는 앨리스의 모습을 정말 근사한 색채로 그려냈다. 




안드레아 다퀴노는 광고 에이전시의 아트디렉터이자 삽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덕분에 루이스 캐럴의 언어를 정말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에게 정말 익숙한 고전이지만, 이 작품에 수록된 이미지들 중 그 어떤 것도 친근하거나,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양한 콜라주 기법과 화려한 컬러감으로 인물을 표현하고, 감정을 나타내고 있으니 말이다. 


앨리스가 분홍 눈의 하얀 토끼를 처음 발견하고 따라 가다가 토끼 굴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첫 장면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터널처럼 곧게 이어지다 갑자기 아래로 쑥 꺼지는, 꽤나 깊은 토끼 굴 속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대부분 어둠보다는 아기자기한 소품이나 책으로 가득한 배경이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앨리스의 생각을 이리 저리 배치해서 보여준다. 





"저쪽에는 모자 장수가 살아."

고양이는 이번엔 왼쪽 앞발을 흔들었다.

"저쪽에는 3월의 토끼가 살지.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 둘 다 미쳤으니까."

"하지만 난 미친 사람들이 있는 데엔 가고 싶지 않은걸." 

앨리스가 말했다.

"오, 그건 너도 어쩔 수 없어. 여긴 모두 미쳤거든.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 왔을 리가 없잖아."          p.126


사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초현실적이고 분위기에 기발한 은유와 언어유희, 수학적 논리와 이해하기 힘든 전개 등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그 초현실적인 부분이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해 유독 다양한 버전의 일러스트판이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토끼굴에 빠져 모험을 시작하게 된 앨리스는 몸집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자신이 흘린 눈물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여러 동물들을 만난다. 몸통 없이 웃는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체셔 고양이, 카드 몸집을 한 병사들과 시종일관 '저놈의 목을 쳐라'고 외치는 여왕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매력 또한 각각의 일러스트 버전마다 다르게 표현되어 왔다. 바로 그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가장 극대화시킨 것이 바로 이번에 만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여러 번 읽어서 전부 다 아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로 나오는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시리즈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독특한 시각적 해석을 담은 컬렉터용 하드커버 에디션이다. 첫 번째 작품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서는 세계적인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알려진 티나 베르닝의 강렬한 일러스트들이 텍스트에 담기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수준 높은 콜라보를 선보였다. 두 번째 작품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일러스트레이터 안드레아 다퀴노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 연출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어질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의 작품들도 매우 기대가 된다. 


하얀 토끼가 보이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 동화 속 세상에 푹 빠져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책 속에서 길을 잃어 버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매번 다른 버전으로 다시 읽을 때마다,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색다른 모험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야말로 고전이 가진 마법같은 힘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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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캡슐 -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윤수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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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는 비닐 봉투에 들어있었다. 비닐에는 유성 펜으로 '포스트 캡슐'이라고 써졌고, 그 밑에는 '이 편지는 15년 전, 15년 뒤의 당신에게 배달하기 위해서 포스트 캡슐에 넣어진 겁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느껴보세요'라고 손 글씨로 적혀있었다. 고토 나쓰미는 위화감부터 들었다. 포스트 캡슐의 존재는 알고 있다. 아마 우체국인가, 아니면 다른 어디선가 기획한 것으로,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몇 년이 지난 뒤 상대에게 배달하는 것이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빠 앞으로 온 편지는 그 포스트 캡슐에 들어있던 모양이다.            - '인사 편지' 중에서, p.112


도시코는 아들 시로가 다섯 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웠다. 생명보험 설계사 일을 하며 집을 자주 비워 아들에게 좀 소홀했지만 그만큼 더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했다. 아들은 취직하고 3년 뒤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게 소식이 끊기고 15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아들에게서 편지가 도착한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보니,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가정 폭력에 괴로워하는 그녀를 위해 남자를 죽이고 자살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신문을 뒤져 보았지만 관련된 내용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남자에게 찾아가 미리 경고라도 하기 위해 그 집을 찾아가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나쓰미는 비닐 봉투에 담겨진 편지를 받는다. 아빠에게 도착한 거였는데, 나쓰미의 아빠는 15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정이 있어서 회사를 떠난 부하 직원이 새 회사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 편지인데, 대체 왜 15년 뒤에 도착하는 포스트 캡슐을 통해 보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낸 사람에게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답장을 보내 그를 만나보지만 의문점은 해결되지 않는다. 나쓰미는 15년 전 아빠의 사고에 대해서 엄마에게 물어보고, 그 죽음에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알아본다. 당시에는 어려서 사고 경황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회식 후 집에 돌아오다가 급행전철에 치여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나쓰미는 석연치 않은 뭔가를 밝혀 내기 위해 관계자들을 찾아가 만나기 시작한다. 과연 15년 전에 일어난 사고의 진상과 포스트 캡슐로 도착한 편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는 터무니없이 크다. 그사이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행복이나 불행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 조용히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의 과거가 집 안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받은 사람은 시공간의 틈새가 억지로 벌어져 불행했을 수도 있는 과거로 되돌려진다. 봉인되어 있던 기억의 상자가 찢기고 지난날의 끈적한 고름이 배어난다. 행복한 과거면 괜찮지만 행복한 현재의 생활에 불행한 과거가 쏟아져 들어오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불행해지고, 불행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한층 더 불행해진다.             - '마지막 편지' 중에서, p.353


‘도착 시리즈’, ‘○○자 시리즈’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오리하라 이치의 신작이다. <그랜드맨션>이라는 작품 이후로 신작은 거의 9년 만에 나온 거라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오리하라 이치하면 '서술 트릭'의 대표 작가로 유명하다. 서술트릭이란 글자 그대로 작가가 독특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독자를 속이는 기법을 말한다. 의도적으로 편향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독자들의 판단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계속 독자들을 속여오다가 마지막에 진상을 밝히는 형식이다.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한 인물의 정체를 바꾸어 버리는 방식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다. 인물의 성별, 나이, 직업 등을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시간과 공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다수의 인물이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시간에 있다거나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진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쉽게 걸려들 수밖에 없지만, 반면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구성하지 않으면 치사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게 단점인데,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들은 제대로 된 서술트릭의 묘미를 보여주는 걸로 평가받아왔다. 이번 작품 역시 작가 특유의 서술 트릭이 빛을 발하는데, 연작 소설 형식으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종국에는 서로 이어지면서 숨겨진 묵직한 비밀이 드러난다. '15년 뒤에 배달되는 편지'라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중요한 것은 발신인이 포스트 캡슐을 통해 직접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히 15년이 흐르는 동안 편지를 부친 사실 자체를 잊어 버리고 있다가 갑자기 과거로부터 나타난 편지 수취인의 반응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편지를 받는 쪽도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로부터 도착한 편지가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부딪치는 결말은 묻혀있던 지난 범죄를 드러내거나, 현재의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그건 오리하라 이치가 구축한 정교한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잘 모아서 마지막 판을 맞추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자, 작가 생활 30년의 정수가 담긴 오리하라 이치표 서스펜스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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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고양이 클로드 3 - 우주 개의 방문 외계 고양이 클로드 3
조니 마르시아노.에밀리 체노웨스 지음, 롭 모마르츠 그림, 장혜란 옮김 / 북스그라운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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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행성에서 추방된 사악한 외계 고양이 황제와 도시를 떠나 낯선 시골로 이사를 와서 심난한 소년이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유쾌한 이야기를 그린 <외계 고양이 클로드> 시리즈 그 세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1권에서 잔악무도하기로 이름난 고양이 클로드는 배신자의 반역으로 육식 거인인 '인간' 종족이 사는 지구라는 행성으로 쫓겨나는 신세로 등장했다. 2권에서는 클로드가 다시 행성으로 돌아갈 날을 대비해 지구의 고양이들을 데려와 가르치며 고양이 특공대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실패했다. 우주적 재미로 무장한 3권에서는 우주 개가 등장해 클로드와 마주하게 된다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아주 오래 전, 개와 고양이는 크리트알 행성에서 함께 살았다. '황금기'라고 알려진 평화로운 시대를 지나 두 종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크리트알 행성은 지독히도 황폐한 곳으로 몰락한다. 이후 휴전 협정에서 고양이들에게는 리티르복스라는 행성이 영토로 주어졌고, 개들은 '개 성단'으로 알려진 자신들만의 태양계를 얻는다. 이렇게 개는 고양들이 가장 경멸하는 적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클로드는 불청객 개를 두 마리나 마주하게 된다. 우선 소년 인간 라지의 부모가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집에 오게 된 할머니가 와플스라는 개를 데리고 등장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주에서 온 개로 클로드처럼 인간 말을 할 줄 아는 존재였다. 게다가 자신을 우주 경비대 왈크스라고 신분을 밝힌 그 개는 클로드가 날려 버린 행성 '럼프즈'에 한 짓에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고 지구에 왔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긴커녕 개 성단으로 끌려가게 생긴 것이다. 




어리버리하지만 순수하고 착한 소년 라지는 과연 고양이와 개 중 누구의 편에 서게 될까. 사실 라지는 왈크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을 홀딱 빼앗긴다. 떠돌이 개라고 생각해 집에 잠시 데리고 있기로 하는데, 공 물어 오기 놀이를 한 시간씩 함께 할 정도로 왈크스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 


클로드는 끊임없이 은하계 통신기를 통해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와중에 와플스와 왈크스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한편, 할머니는 라지의 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냄새 강한 인도 음식을 잔뜩 준비한다. 안그래도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으로 인해 학교에서 난감했던 라지는 걱정이 많은데, 무사히 생일 파티를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라지는 왈크스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처음에는 외계 고양이더니 이제는 말하는 우주 개?'라고 당황하지만, 왈크스가 왜 지구에 왔는지 듣고는 고민하게 된다. 클로드가 우주에서는 사약한 황제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내 고양이'였으니 말이다. 과연 왈크스는 클로드를 체포할 수 있을까. 클로드는 개 성단이 아니라 자신의 행성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매번 스펙터클하고 요란한 재미를 선사하는 시리즈라 이번 작품도 흥미진진했다. 이 시리즈는 고양이 클로드와 인간 라지의 시점이 교차 구성되며 전개되는데, 너무도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어떻게 오해하고, 또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게다가 이번 이야기에서는 영원한 고양이의 앙숙인 개가 등장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클로드는 고양이답게 인간을 자기 부하로 여기면서 부릴 생각이나 하는데, 왈크스는 개답게 인간을 주인처럼 섬기며 그의 말을 잘 따른다.  클로드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더 많은데, 왈크스는 주인인 라지에게 더 관심이 많다. 이러한 성향은 실제 개와 고양이의 성격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존재가 어떻게 우정을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완전히 극과 극에 있는 다른 두 존재가 어떻게 어울리게 되는지를 보여주며 점점 더 재미를 더해가고 있다. 지구 어린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너무 유쾌하고, 웃기고, 재미있는 SF 동화! 외계 고양이 클로드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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