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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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색에 놀란다. 위스키의 호박색과 피노누아의 맑은 선홍색을 섞은 듯한 이 색. 투명하고 영롱하다. 코에 잔을 가져다 댔는데... 이건?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봄의 냄새, 물의 냄새가 났다. 상냥하다, 상냥해. 이건 상냥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마데이라의 상냥함 덕분에 간만에 밤의 부드러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밤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술을 각별하게 여기게 되었고, 이런 글도 쓰고 있는데, 마데이라가 딱 그런 술이다.          p.13


술로 인생이 망가지고, 망가지는 인생을 술에 의탁하는 과정을 피츠제럴드보다 잘 그린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Tender is the Night) 또한 전반적으로 술냄새가 물씬 풍기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한은형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밤은 부드러워, 마셔>로 짓게 된 이유도 피츠제럴드 때문이라고 한다. 제목뿐 아니라 내용도 각종 문학 작품들과 작가들과 관련된 술 이야기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에 나오는 크래프트 비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신과 인간이 함께 마시는 와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주인공의 주치의가 빈혈기에 대한 약으로 처방한 흑맥주, <율리스시>의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의 와인이라고 말했던 맥주 기네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사람들이 마시는 앵두주, 도로시 파커의 진과 칵테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속 인물들이 마시는 진 리키, 그리고 헤밍웨이의 <해류 속의 섬들>에 나오는 씁쓸하고 독한 술 다이키리 등 술과 함께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나 미식가로 유명한 한은형 작가가 묘사하는 디테일한 맛과 향에 대한 문장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어떤 종류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맞다. 술과 굴은 정신에 이바지하는 음식이었다. 내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영혼을 들어 올리는 음식 말이다. 우리가 땅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물리적 지엄함을 배반하면서. 음식을 먹고 그런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게 굴의 그 광물적인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굴에 착 달라붙던 샤블리 때문이기도 하고. 굴에 샤블리가 왜 이렇게 어울리는지 그때는 몰랐다... 굴과 마시는 샤블리가 그렇게나 충일했던 것은 그저 9월의 파리 공기와 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샤블리는 굴을 먹고 자란 술이었다.            p.262


<레이디 맥도날드>, <거짓말>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소설가 한은형의 술 에세이집이다. 사실 한은형 작가는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식가로 유명한데, 그래서 음식에 관련된 작품도 꽤 많았다.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모든 감각이 동원된 ‘주담酒談’이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오후 3시와 5시 사이의 술, 홍어무침과 소주,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 도로시 파커의 진, 교양 없는 마티니, 하이볼이라는 흥분, 밤의 술 위스키와 코냑, 굴과 샤블리 등 단어만 들어도 침샘이 자극되고 잔을 들어 손목을 꺾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해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한 즐거움도 주었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혹은 날씨가 좋아서 술을 찾게 되는 작가에게 술을 마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술을 마셔서 건강을 해치는 것보다 술을 참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건강에 더 해롭다고 믿는다니 그 귀여운 마음에 어쩐지 무장해제되는 듯한 느낌이다. 술을 즐겨 마시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길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조선일보 주말판인 '아무튼, 주말'에 2년 넘게 연재 중인 칼럼이다. 그 중 48꼭지를 선별해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작가의 입을 통해 술을 보고, 듣고, 마실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글들이었다. 작가가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 애정이 짐작이 될 것이다. 알면 알수록 먹고 싶어지고 알수록 마시고 싶어지는 술의 세계는 딱 기분 좋게 취해서 세상이 알딸딸해지는 그 순간만큼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또 그저 그럴 때도 마시는 게 술이라고, 그건 인생과도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마시는 거라고 말이다. 잔에 가득 부어진 액체가 마음에 찰랑이는 밤, 이 책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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