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카페 멋집 - 머물고 싶은 공간 훔치고 싶은 디테일
공상찻집 도라노코쿠 지음, 김슬기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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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라는 공간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한 이유만으로 가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카페 투어가 하나의 취미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나 역시 워낙 커피와 디저트를 좋아하고 즐기기도 하지만, 친구와 만나 하루에 카페만 연속으로 두세 곳을 가본 적도 있고, 카페 투어를 위해서 하루에 커피를 서너 잔 마신 적도 있다. 물론 여행을 가도 현지의 맛과 멋을 살린 카페는 필수 코스이다.  워낙 카페가 많기 때문에 인테리어나 분위기, 디저트의 퀄리티와 커피의 맛, 고유한 감성과 멋까지 선택을 위해 필요한 요소도 많다. 이번에 만난 책은 카페 덕후들을 위해 탄생한 ‘도쿄 카페 버킷리스트'를 담고 있다. 




카페를 찾는 이유는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혹은 약속 시간이 남아서 기다리기 위해, 혼자 휴식 시간을 가지기 위해, 또는 작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가서 방문하게 되는 현지의 카페는 어떨까.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아픈 다리를 쉬기 위해, 혹은 무선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등등 이유는 다르더라도 꼭 한 두 번쯤은 카페를 이용하게 된다. 기왕이면 그 도시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에 가면 여행이 더욱 기억에 남지 않을까. 이 책은 도쿄의 곳곳에 있는 카페들을 통해 도쿄라는 도시를 특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말 종류가 많은 다양한 크림 소다 메뉴도 볼 수 있었고, 커피와 빵, 간단한 샐러드가 함께 나오는 아침 세트 메뉴를 만날 수 있는 카페들도 있다. 단단하고 진한, 직접 만든 푸딩도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네 가지 수제 잼을 곁들인 잼 세트 토스트도 궁금해졌다. 오무라이스나 카레, 스파게티 등의 식사 메뉴를 함께 할 수 있는 카페들도 많았는데, 여행을 가면 크림소다와 함께 꼭 먹곤 해서 반가웠다. 다음에 도쿄에 가게 되면 이 책에 수록된 카페들부터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 




카페 투어를 위해서라면 하루에 커피를 세 잔 이상 마실 수 있다. 친구와 만나 하루에 카페만 연속으로 두 곳 이상 가본 적이 있다. 새로운 카페를 찾아보는 데 30분 이상 써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찍기 좋은 카페도 있고, 시그니처 메뉴가 유명한 카페도 있고, 디저트가 정말 근사하게 플레이팅되어 나오는 카페도 있다. 이국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곳도 있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만으로 힐링을 안겨주는 곳도 있다. 카페를 간다는 것은 빡빡한 일상 속에서 누리는 나만의 작은 사치이자 소소한 행복이니 어디를 갈지 조금 더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이 책에는 마치 동화 속 세계에 들어온 듯한 편안한 비일상을 약속하는 동화 속 카페, 유럽 어느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앤티크 카페, 달콤한 위로를 주는 아지트 같은 작은 카페, 유일무이한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찻집,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클래식 찻집,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레트로 카페 등 오랜 시간 현지인에게 사랑받은 찐 카페 멋집과 맛집 75곳이 수록되어 있다. 


19만 카페 전문 인플루언서인 '공상찻집 도라노코쿠'가 정성껏 엄선한 리스트라 여행자들에게, 그리고 카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선물같은 책이 되어줄 것 같다. 카페에 관한 작은 에세이와 상세한 운영 정보, 커피와 곁들이면 환상적인 디저트 메뉴 추천, 그리고 저자가 정성껏 찍은 수백 컷의 ‘멋스럽고’, ‘맛스러운’ 사진들 덕분에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쿄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카페를 사랑하는 덕후라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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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마음
임이랑 지음 / 허밍버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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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괴로운 것들이 너무 쉽게 좋은 것을 집어삼키고 평안을 지운다. 수없이 많은 밤을 쌓아 올린 평안도 순간의 불안 앞에선 불구덩이 안에 던져진 종잇조각처럼 순식간에 불타 사라진다. 정신이 망상과 싸우는 동안 몸이 백기를 흔들고 만다. '몸이 정신에게 지는 건 이렇게 초라한 마음이 되는 거구나'하며 슬퍼진다. 나약한 내가 강인하려는 나를 훼방 놓는다... 털어 버리고 싶다. 좋은 사람들의 눈빛만 남기고 쓸모없는 부스러기는 모두 사라져라.           p.42


식물을 가꾸고, 노래를 짓고, 글을 쓰는 사람, 디어클라우드 임이랑의 신작이다. <아무튼 식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불안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리라> 모두 너무 잘 읽었고, 팟캐스트 식물수다의 오랜 팬이기도 해서 임이랑 작가의 신작은 언제나 설레이는 마음으로 챙겨보게 된다. 머리가 복잡한 날엔 자꾸만 식물의 세계로 도망치게 된다. 유해한 것들로 넘쳐 나는 세상 속에서, 식물만큼 무해한 존재가 또 있을까. 푸릇푸릇한 식물이 주는 그 에너지가 또 매일을 살아갈 힘을 준다. 임이랑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바로 '식물'때문이다. <아무튼, 식물>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는 지금도 가끔 펼쳐 보는 책이고, 팟캐스트 식물 수다를 통해서 정말 많이 배웠다. 그야말로 힐링이 되는 목소리와 글이라 위로가 필요할 때, 휴식이 필요할 때 항상 찾게 된다. 


이번 신간은 식물 이야기 대신, 개인적이고 내밀한 단상들을 담은 비밀 일기장 같은 느낌이다. 200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임이랑 작가가 지나 보낸 시간과 감정을 엮어 만들었다. 그녀는 2004년부터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개인 홈페이지 <감정공작소>에 솔직하게 기록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글들에는 뮤지션, 베이시스트, 작가, DJ, 식집사… 그녀의 다양한 직업 세계와 취향, 삶의 흔적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식물을 가꾸고, 노래를 짓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민과 불안, 일상과 감정들이 담겨 있어 짧은 글들이지만, 그 무게와 깊이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임이랑 작가가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식물들을 향해 쓴 글과 말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왔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 이면에 있는 많은 생각들과 배경을 알게 되어 더 공감되고, 더 친근해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요란하지 않게, 잔잔하게, 자극에서 가장 먼 방식으로 나를 입히고 먹이고 도닥인다. '그럭저럭 사는 시기가 너무 길어지지만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대로 괜찮겠지' 생각하며.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싶은 내가 툭 튀어나와 그럭저럭 살아가는 나를 때려 눕히고 일상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곤란해지기 전가지는 그럭저럭 살아 내기로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은 슬픔과 애통함을 건너 씩씩하게 살아갈 날이 다시 돌아올 테니까. 비슷하게 생긴 인생의 모퉁이를 이미 나는 몇 번이고 돌아 이 자리에 있다.             p.242~243


이 책에는 단정한 일상의 루틴, 생활을 리듬화하는 버릇, 물속에서 느끼는 고요한 감각, 18년 차에 접어드는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살아가는 이유, 생각을 멈추는 연습, 일과 쉼의 밸런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 뮤지션과 작가로서 갖는 고민과 불안감 등 200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임이랑 작가가 지나 보낸 시간과 감정들이 촘촘하게 엮여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놓치고 있던 것들을 세심하게 붙잡아 반짝반짝 빛나게 보여주는 글들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가드너로 사느라 분주하고, 해가 지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일을 하는 임이랑 작가의 일상이 궁금했다면, 이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질 것 같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순간의 결정들이 모여 행동의 패턴을 만들어 가고, 그 새로운 패턴이 나를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다. 그러니 변화한 모습이란 각자의 책임이라는 거다. 내가 먹는 음식과 자세, 듣는 음악과 걷는 시간, 읽는 책과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니 말이다. 좋은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멀리까지 가게 된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런데 그 '좋은' 결정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 걸까. 시라는 형식을 제외하고는 짧은 글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임이랑 작가의 글들은 툭툭 던져놓은 단어에도, 단상 같은 글에도 생각할 거리가 담겨 있어 좋았다. 짧아서 술술 페이지가 넘어 가지만, 밑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펼쳐보고 싶은 그런 글들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때는 '지금이 아닌 순간을 갈망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던 시기'가 있다. 하지만 결국은 지금에 만족하고 여기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렇게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야 나만의 방식으로, 오롯하게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뒤척이는 어느 날 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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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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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아지른 듯한 산을 배경으로 목가적인 언덕이 있는 잔잔하고 평온한 곳이었다. 호수는 그림엽서에 나오는 물빛처럼 푸르렀지만, 수면 아래의 물은 유럽 구석구석의 모든 불행이 이런저런 행로를 거쳐 마침내 거기로 모여든 것처럼 약간 불길해 보였다. 회복해야 할 고달픔이 있고 죽어야 할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학교도 있었다. 양지바른 호숫가에서는 젊은이들이 물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 보니바르의 지하 감옥이 있고, 칼뱅의 거리가 있었다. 밤이 되면 바이런과 셸리의 유령이 여전히 어슴푸레한 물가를 떠돌아다녔다.

             - '이국의 여행자' 중에서, p.54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으로 소설가로서 절정인 시기를 화려하게 누리지만,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과 알코올 의존증 아내의 신경쇠약 등으로 고통받는 말년을 보낸다. 이 책은 그렇게 피츠제럴드가 작가 활동 후기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을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고르고 옮긴 이 작품들은 피츠제럴드가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축내며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내놓은 것들이다. 


<이국의 여행자>에는 미국을 떠나 1920년대 유럽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유복한 젊은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의 모델은 물론 스콧과 젤다인데, 이들이 이국의 땅에서 겪는 일들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지 불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인생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뭔가가 손상되었고(p.24)'라는 문장에서도 보여지듯이 정말 행복했던 시간 뒤에 찾아오는 것들을 보여준다.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에서 그리는 부부 사이의 위기는 실제로 피츠제럴드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할리우드에서 일할 때 경험한 몇 가지 사건을 소재로 <크레이지 선데이>가 쓰였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피츠제럴드가 거액의 빚을 지고, 젤다가 신경쇠약에 걸려 입원 중이던 시기에 쓰였다. 글은 생각처럼 써지지 않고 몸도 좋지 않았던 당시의 어두운 일상을 피츠제럴드는 '사소설' 형태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빚에 떠밀려 정신없이 사는 자신의 생활과 긴박한 상황을 픽션이라는 형태로 희화화해 <피네건의 빛>과 <잃어버린 10년>을 쓰기도 했다. 





갑자기 나는 홀로 외로이 있어야 한다는 강한 본능을 느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평생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나는 평균적인 사교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나 자신을, 나의 생각을, 나의 운명을 내가 접촉하게 된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관련짓고 싶어 하는 경향은 평균 이상이었다. 나는 항상 남을 구원하거나 남에게서 구원을 받았다. 하루의 아침나절 동안에만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이 느꼈을 법한 여러 다양한 감정들을 겪곤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감을 품은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 힘든 친구와 후원자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 '망가지다'중에서, p.307~308


소설도 자전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지만, 에세이는 더욱 솔직해 진다.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에 대해 '그는 머리가 아니라 펜 끝으로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 문장의 설득력은 아마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리라'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피츠제럴드는 <나의 잃어버린 도시'에서 뉴욕이라는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망가진 3부작'에서도 깨달음의 순간들을 담았다. '망가진 3부작'은 <망가지다>, <붙여놓다>, <취급주의> 세 작품으로 <에스콰이어>에 매달 연속으로 게재되었던 에세이이다.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해 예전부터 수없이 읽고 또 읽었던 에세이라고 한다. 특히나 해설에서 헤밍웨이에게 '여성스럽다'라고 비난받은 이 에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여기에 숨은 단단함을 부디 맛보라고 했을 정도이니, 그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오랜 팬을 자처하는 하루키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피츠제럴드의 후기 단편들을 직접 발굴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속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기만을 능가하는 힘, 어떻게든 희망을 움켜쥐려는 의지와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을 읽어 냈고, 그로 인해 작가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있다) 각각의 작품에는 하루키가 직접 작품의 배경과 해설을 썼다. 피츠제럴드는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일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해 부풀려 쓰는 타입의 작가라, 이 책에 수록된 소설과 에세이들은 모두 자전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츠제럴드는 장편소설 <라스트 타이쿤>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겨우 마흔네 살의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칠십 대 중반을 맞이한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말년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지금을 동시에 떠올린다. 하루키의 애정이 가득 담긴, 피츠제럴드의 아름다운 작품 선집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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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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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색에 놀란다. 위스키의 호박색과 피노누아의 맑은 선홍색을 섞은 듯한 이 색. 투명하고 영롱하다. 코에 잔을 가져다 댔는데... 이건?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봄의 냄새, 물의 냄새가 났다. 상냥하다, 상냥해. 이건 상냥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마데이라의 상냥함 덕분에 간만에 밤의 부드러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밤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술을 각별하게 여기게 되었고, 이런 글도 쓰고 있는데, 마데이라가 딱 그런 술이다.          p.13


술로 인생이 망가지고, 망가지는 인생을 술에 의탁하는 과정을 피츠제럴드보다 잘 그린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Tender is the Night) 또한 전반적으로 술냄새가 물씬 풍기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한은형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밤은 부드러워, 마셔>로 짓게 된 이유도 피츠제럴드 때문이라고 한다. 제목뿐 아니라 내용도 각종 문학 작품들과 작가들과 관련된 술 이야기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에 나오는 크래프트 비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신과 인간이 함께 마시는 와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주인공의 주치의가 빈혈기에 대한 약으로 처방한 흑맥주, <율리스시>의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의 와인이라고 말했던 맥주 기네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사람들이 마시는 앵두주, 도로시 파커의 진과 칵테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속 인물들이 마시는 진 리키, 그리고 헤밍웨이의 <해류 속의 섬들>에 나오는 씁쓸하고 독한 술 다이키리 등 술과 함께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나 미식가로 유명한 한은형 작가가 묘사하는 디테일한 맛과 향에 대한 문장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어떤 종류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맞다. 술과 굴은 정신에 이바지하는 음식이었다. 내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영혼을 들어 올리는 음식 말이다. 우리가 땅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물리적 지엄함을 배반하면서. 음식을 먹고 그런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게 굴의 그 광물적인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굴에 착 달라붙던 샤블리 때문이기도 하고. 굴에 샤블리가 왜 이렇게 어울리는지 그때는 몰랐다... 굴과 마시는 샤블리가 그렇게나 충일했던 것은 그저 9월의 파리 공기와 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샤블리는 굴을 먹고 자란 술이었다.            p.262


<레이디 맥도날드>, <거짓말>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소설가 한은형의 술 에세이집이다. 사실 한은형 작가는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식가로 유명한데, 그래서 음식에 관련된 작품도 꽤 많았다.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모든 감각이 동원된 ‘주담酒談’이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오후 3시와 5시 사이의 술, 홍어무침과 소주,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 도로시 파커의 진, 교양 없는 마티니, 하이볼이라는 흥분, 밤의 술 위스키와 코냑, 굴과 샤블리 등 단어만 들어도 침샘이 자극되고 잔을 들어 손목을 꺾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해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한 즐거움도 주었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혹은 날씨가 좋아서 술을 찾게 되는 작가에게 술을 마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술을 마셔서 건강을 해치는 것보다 술을 참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건강에 더 해롭다고 믿는다니 그 귀여운 마음에 어쩐지 무장해제되는 듯한 느낌이다. 술을 즐겨 마시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길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조선일보 주말판인 '아무튼, 주말'에 2년 넘게 연재 중인 칼럼이다. 그 중 48꼭지를 선별해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작가의 입을 통해 술을 보고, 듣고, 마실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글들이었다. 작가가 '눈을 뜨고, 눈 말고도 뜰 수 있는 건 모두 뜨고, 술을 마시고 싶다. 아니, 눈 말고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 애정이 짐작이 될 것이다. 알면 알수록 먹고 싶어지고 알수록 마시고 싶어지는 술의 세계는 딱 기분 좋게 취해서 세상이 알딸딸해지는 그 순간만큼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또 그저 그럴 때도 마시는 게 술이라고, 그건 인생과도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마시는 거라고 말이다. 잔에 가득 부어진 액체가 마음에 찰랑이는 밤,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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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코티지 가든 에디션)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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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이 환상이라면, 그 모습은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림에서는 종종 담대한 행보로 용기 있게 새로운 색깔을 도입하지만, 타샤는 기본적으로 매사에 복고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역사가 깃든 것들을 선호한다. 사실 옛날에 쓰던 도구와 물건들, 아이디어들만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 그것이 타샤 정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녀의 원예 기술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잊은 방법들이다. 그녀는 여러 세대 전에 시골집 정원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종류의 식물들을 키운다.             p.25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 작가인 타샤 튜더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로 더 유명하다. 버몬트 주 산골에 18세기풍 농가를 짓고 홀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자연적인 삶의 바탕에는 바로 정원이 있다. 30만 평의 대지에 펼쳐진 타샤의 정원은 일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비밀의 화원'으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은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사계절 동안 담은 포토 에세이이다. <타샤의 정원> 개정 신판으로, 포근한 감성의 일러스트 커버를 입은 '타샤 튜더 코티지 가든 에디션'이다. 




타샤는 아흔 살이 넘어서도 장미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당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식물 하나하나를 그대로 애지중지하면서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낡은 헛간, 오래된 도구, 고풍스런 옷을 즐기고, 어머니의 정원에서 가져온 가장 오래된 장미들, 멸종되다시피 한 패랭이속 품종들, 수선화들을 데려와 키운다. 친구들을 정원으로 불러 모으고,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식물을 존중하는 마음을 나눈다. 무엇보다 타샤는 사랑하는 것에 푹 빠지는 사람이라, 정원이 절정에 다다르면 집 구석구석에 꽃장식이 넘쳐난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나 타샤의 집과 정원을 방문하면, 이곳에 푹 매료될 수밖에 없다.





가을에는 지하 저장실에 드나듦이 잦다. 감자 바구니는 문 바로 안쪽의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계단 아래와 안쪽 깊숙한 곳에는 모래를 켜켜이 뿌린 당근, 사탕무, 무 상자를 놓고, 가끔씩 물을 뿌려준다. 부추는 단으로 묶어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가끔 뿌리째 캔 양배추에서 흙을 털어내 고목 부분을 꼭 묶어서 매달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이따금 양배추 뿌리는 다 먹지 못하고 상할 때가 있지만, 잎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못 먹는 이파리는 닭 모이로 주지요." 간단히 말해 그것이 타샤의 인생 철학이다. 한순간도 그냥 보내지 않고, 몸짓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나뭇잎 하나 버리지 않는 것이.           p.200


타샤의 정원은 버몬트에서 가장 추운 곳에 있다. 3월이 시작되어도 뒷문에는 아직 1미터쯤 되는 눈이 쌓여 있다. 꽃밭은 아직도 깊이 잠겨 있지만, 씨앗과 구근 상자들이 매일 배달되며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는 중이다. 타샤는 구근을 구입할 때 백 개 이상씩 주문한다고 한다. 풍성하게 피어야 하니까, 수천 개씩 심는다고 말이다. 씨앗이 마련되어 파종 준비가 끝이 나면, 4월의 몇 주간은 '진흙탕 계절'이 되어 완전히 고립된다. 하지만 이내 눈이 빨리 녹는 언덕의 남쪽 기슭에 심어 놓은 구근 몇 개가 땅 위로 고개를 내밀면서 봄을 알리기 시작한다. 


5월이 되면 촘촘히 화초를 심은 꽃밭에 꽃이 만발한다. 5월에는 정원만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헛간 안마당도 분주해진다. 타샤는 깃털 달린 동물을 귀여워해 늘 밴텀닭과 뿔닭을 키웠다. 화가인 타샤에게 색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5월의 꽃밭에는 새벽녘의 분홍빛, 연보라색, 라벤더빛, 연노란색, 흰색 등이 흩어졌다 다시 반복된다. 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정원의 모습을 생생한 묘사와 사진으로도 만나볼 수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설레었다. 




정원을 가꾸는 것이 힘들지는 않냐고 묻는 이들에게, 타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정원의 나무나 꽃에게 특별한 걸 해주지는 않아요. 그저 좋아하니까 나무나 꽃에게 좋으리라 생각되는 것, 나무와 꽃이 기뻐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잡초 뽑기나 물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필요한 비료를 제대로 주고, 관심을 갖고, 소소한 것들을 매일같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이 책은 타샤가 맨발로 땅을 밟고 선 타샤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온갖 화초와 나무를 심고, 물주고, 돌봐주고, 기르고 열매를 수확하며 보내는 1년간의 정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계절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를 타샤의 정원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온도와 바람을 느끼고, 달이 바뀌는 것을 챙겨가며 정원을 가꾸는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삶을 살았던 타샤. 봄과 여름에 피는 색색의 꽃도, 가을에 추수하는 감자와 당근도, 긴 겨울의 온실에서 피어나는 동백꽃도 모드 자기 손으로 일구었던 것이기에 타샤의 정원은 그녀의 삶과도 같다. 언젠가 나이 들어 이런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페이지마다 염원처럼 묻어났다. 바쁘고 정신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자연을 그리워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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