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캡슐 -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윤수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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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는 비닐 봉투에 들어있었다. 비닐에는 유성 펜으로 '포스트 캡슐'이라고 써졌고, 그 밑에는 '이 편지는 15년 전, 15년 뒤의 당신에게 배달하기 위해서 포스트 캡슐에 넣어진 겁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느껴보세요'라고 손 글씨로 적혀있었다. 고토 나쓰미는 위화감부터 들었다. 포스트 캡슐의 존재는 알고 있다. 아마 우체국인가, 아니면 다른 어디선가 기획한 것으로,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몇 년이 지난 뒤 상대에게 배달하는 것이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빠 앞으로 온 편지는 그 포스트 캡슐에 들어있던 모양이다.            - '인사 편지' 중에서, p.112


도시코는 아들 시로가 다섯 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웠다. 생명보험 설계사 일을 하며 집을 자주 비워 아들에게 좀 소홀했지만 그만큼 더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했다. 아들은 취직하고 3년 뒤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게 소식이 끊기고 15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아들에게서 편지가 도착한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보니,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가정 폭력에 괴로워하는 그녀를 위해 남자를 죽이고 자살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신문을 뒤져 보았지만 관련된 내용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남자에게 찾아가 미리 경고라도 하기 위해 그 집을 찾아가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나쓰미는 비닐 봉투에 담겨진 편지를 받는다. 아빠에게 도착한 거였는데, 나쓰미의 아빠는 15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정이 있어서 회사를 떠난 부하 직원이 새 회사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 편지인데, 대체 왜 15년 뒤에 도착하는 포스트 캡슐을 통해 보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낸 사람에게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답장을 보내 그를 만나보지만 의문점은 해결되지 않는다. 나쓰미는 15년 전 아빠의 사고에 대해서 엄마에게 물어보고, 그 죽음에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알아본다. 당시에는 어려서 사고 경황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회식 후 집에 돌아오다가 급행전철에 치여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나쓰미는 석연치 않은 뭔가를 밝혀 내기 위해 관계자들을 찾아가 만나기 시작한다. 과연 15년 전에 일어난 사고의 진상과 포스트 캡슐로 도착한 편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는 터무니없이 크다. 그사이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행복이나 불행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 조용히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의 과거가 집 안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받은 사람은 시공간의 틈새가 억지로 벌어져 불행했을 수도 있는 과거로 되돌려진다. 봉인되어 있던 기억의 상자가 찢기고 지난날의 끈적한 고름이 배어난다. 행복한 과거면 괜찮지만 행복한 현재의 생활에 불행한 과거가 쏟아져 들어오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불행해지고, 불행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한층 더 불행해진다.             - '마지막 편지' 중에서, p.353


‘도착 시리즈’, ‘○○자 시리즈’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오리하라 이치의 신작이다. <그랜드맨션>이라는 작품 이후로 신작은 거의 9년 만에 나온 거라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오리하라 이치하면 '서술 트릭'의 대표 작가로 유명하다. 서술트릭이란 글자 그대로 작가가 독특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독자를 속이는 기법을 말한다. 의도적으로 편향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독자들의 판단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계속 독자들을 속여오다가 마지막에 진상을 밝히는 형식이다.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한 인물의 정체를 바꾸어 버리는 방식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다. 인물의 성별, 나이, 직업 등을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시간과 공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다수의 인물이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시간에 있다거나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진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쉽게 걸려들 수밖에 없지만, 반면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구성하지 않으면 치사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게 단점인데,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들은 제대로 된 서술트릭의 묘미를 보여주는 걸로 평가받아왔다. 이번 작품 역시 작가 특유의 서술 트릭이 빛을 발하는데, 연작 소설 형식으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종국에는 서로 이어지면서 숨겨진 묵직한 비밀이 드러난다. '15년 뒤에 배달되는 편지'라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중요한 것은 발신인이 포스트 캡슐을 통해 직접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히 15년이 흐르는 동안 편지를 부친 사실 자체를 잊어 버리고 있다가 갑자기 과거로부터 나타난 편지 수취인의 반응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편지를 받는 쪽도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로부터 도착한 편지가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부딪치는 결말은 묻혀있던 지난 범죄를 드러내거나, 현재의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그건 오리하라 이치가 구축한 정교한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잘 모아서 마지막 판을 맞추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자, 작가 생활 30년의 정수가 담긴 오리하라 이치표 서스펜스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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