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제 그의 집은 어디에도 없고 ─ 알파마의 아파트는 수도사의 방처럼
을씨년스럽다 ─ 어느 집이든
발을 디디면 그의 집이 없다는 사실만 상기될 뿐이다.
1904년 리스본, 고미술 학예사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일주일 만에
연인과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 분노와 절망에 그는 뒤로 걷기 시작한다.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반발하면서 걷는다.
달리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그렇게 기이한 애도의 시간을 1년 보내다 어느 날 기록보관소에서 우연히 17세기 고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신부의
일기장이었고, 사랑하는 이들이
죽은 뒤 토마스는 오직 신부가 만든 물건의 흔적을 쫓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일기 속 내용을 따라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게 된다.
1939년 포르투갈, 시신을 다루는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에게 늦은 밤 아내 마리아가 찾아
온다. 두 사람은 에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 함께 크리스티의 책을 읽고 토론해왔다.
그날 밤 마리아는 크리스티의 소설과 복음서의 유사성에 대해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내가 돌아간 뒤
또 다른 마리아가 찾아온다. 그녀는 검은 상복 차림의 노부인으로 가방에 담아온 남편의 시신을 부검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부검을 통해서 남편이 왜 죽었는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고.
1981년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는 40여 년을 함께했던 아내가 죽고 나서 엄청난
상실감에 마치 유령처럼 지낸다. 동료들의 권유로 며칠 가벼운 휴가 겸 출장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한 침팬지를 만나게 된다. 그는 침팬지 오도에게 자석 같은 끌림을 느끼고, 오도 역시 계속 피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피터는 어쩐지
목구멍이 뻐근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거액을 들려 침팬지를 사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포르투갈로 건너가 침팬지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다. 3주 동안 ─ 아니
한평생일까? ─ 쉼 없이
움직였는데, 이제 할 일이
없다. 무수한 종속절과 수십
개의 형용사와 부사가 들어가고, 기발한 접속사들이 문장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는 와중에 ─
예기치 못한 막간의 촌극까지 끼어들고 ─ 하이픈 없는 명사들이 난무하는 장문이 마침내, 놀랍도록 고요한 마침표와 함께 끝이
난다. 한
시간쯤, 꼭대기 층 계단참에
나가 앉아서, 지치고 조금
긴장이 풀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그 마침표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문장은 무엇을 가져오려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버리고 남겨진 이들에게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상실감으로 세상이 끝난 것 같더라도 살아남은 사람은 어찌 되었든 계속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삶의 이치이다. 각기 다른 시대의 세 사람은 모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잃고 혼자 남겨 졌다. 토마스는 연인과 아들, 아버지를 잃었고, 에우제비우는 의문의 사고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피터
역시 40년 동안 함께 했던
아내를 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가혹한 삶을 살아 낸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 세 남자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장소를 통해
이어진다. 토마스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그를 기다리는 교회가 있다고 믿고 거기 도착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고, 에우제비우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에 살고 있으며, 피터는 자신의 고향이지만 두 살 때 떠나와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포르투갈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슬픈 사실은 의사들이 뭐라고 하든 자연사는 없다는
점이에요. 모든 죽음은 살해로, 사랑하는 이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느껴지죠.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삶의 전부였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체 왜 살아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얀 마텔의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죽음이란 이 세상에 없다. 모든 개별적인 죽음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죽음 앞에서 남겨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근거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세 남자의 각기 다른 여정은 이야기 자체로서도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그들의 끊임없는 고뇌와 사유를 따라다니면서 어쩐지 내가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특히나 병리학자 에우제비우가 노부인의 남편 시신을 부검을 끝내고 나서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굉장히 기묘하고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드는 그 장면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통해 노부인의 다소 이상한 행동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 부부가 함께한 시간과 사랑을 마치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체감할 수 있었다.
토마스가 포르투갈에서 겪게 되는 종교적인 그것도, 피터가 챔팬지 오도와 함께 교감하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체험도 우아하면서도 아름답게 상실을 겪어내는 인간의 이야기들이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산이 없다.
그저 언덕들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상실을 겪고 슬픔을 견뎌내는 것에 대해 얀 마텔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