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이경 지음 / 래빗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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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이런 식으로 지나가면, 똑같은 하루가 또 시작됩니다. 그런 식으로 아기는 보호자가 쌓아온 삶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예요... 이 시간 동안 보호자는 아기에게 완전히, 특히 물리적으로 완전히 묶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도 강제로요. 그래서 고립감을 더 강렬히 느끼시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생각은 묶이지 않거든요. 이 시간에 남들은 뭐 할까, 난 여기 왜 이러고 있을까, 왜 이렇게 힘들까, 왜 안 자지, 왜 안 먹지, 왜 울음을 그치지 않지, 아기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데 난 왜 이렇게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울까....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중에서, p.31~32

 

미주는 태어난 지 이제 31일된 신생아를 돌보느라 지친 어느 날 밤, 거실 소파에 스웨덴 출신의 잘생긴 배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미주도, 비명 소리를 듣고 남편도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남자는 자신을 '젖병 소독의 천사, 보틀스의 엔젤'이라고 소개했다. 알고 봤더니 젖병 소독기 보틀스의 최신 모델에 탑재된 자체 AI였던 것이다. 두 달 전에 구매하고 사용자를 등록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 동안 작동이 안 되다가 갑자기 한밤중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아기의 수유 텀에 맞춰 약 세 시간마다 나타났는데, 젖병 소독 업무를 하면서 미주와 수다를 떨고 사라졌다. 미주와 남편은 젖병 소독의 천사가 왜 하필 잘생기고 키 큰 북유럽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왜 스웨덴 배우의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 추리를 해나가지만,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업체로부터 제품에 탑재된 AI 엔젤 알고리즘이 오류라는 이유로 자발적 리콜을 시행하기로 했다고, 회수해서 새 제품으로 교체해준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겨우 엿새 동안 함께 했던 인공지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미주는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게 된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사실 100일도 안 된 아기를 키운다는 건, 엄마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온전히 갈아 넣어야 가능한 일이다. 늘 수면 부족으로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고, 두세 시간 마다 수유를 하고 일일이 시간을 체크하다 보면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헷갈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니 말이다. 아기는 좀처럼 밤에 통잠을 자지 않고, 깰 때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기를 안아 어르고 재우는 것은 보통 엄마의 일이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위해 보통 아기와 엄마는 따로 자거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기를 돌보다 보면 지독하게 서럽고, 외롭게 느껴진다. 물론 아이가 주는 기쁨은 세상 어느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지만, 그 명백한 사실과는 별개로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엄마는 인간다운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꽤 긴 시간을 홀로 버텨내야 하니 말이다. 표제작인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에서도 직장맘이 AI 보육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배경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읽으면서 공감하는 엄마들이 많을 것 같다.

 

 

 

무언가, 그를 더욱 깊숙이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심금(心琴). 그래, 그의 마음의 현이 울렸다. 울리고 말았다. 다음 달이면 갈아치워질 장관이나 은퇴까지 부대껴야 할 이과장이 아니라, 자신과 명수와 명희와 구공일이, 장옥련님과 그의 생명 연장을 중단해줄 의사 둘과 이 작은 방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모여 죽순처럼 빽빽이 늘어선 광경에 깃든 무언가가 종직의 심금을 울렸다. 아주 찌잉하게 울렸다. 오직 한 사람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집합한 타인들과 타-로봇이 현을 뜯은 바로 그 지점에 박 주무관의 영혼이 살고 있었다.          -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중에서, p.150

 

이 작품은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가작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경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국문과 박사가 되어 연구자의 길을 걷다, 출산과 육아로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공지능 젖병소독기의 홀로그램이 말동무가 되어 준다거나, 아기와 엄마를 편안하게 이송시켜주는 황새영아송영 어플 등 돌봄 노동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반짝거리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외롭고 고단한 육아'를 경험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디테일들이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육아 돌봄과 관련된 두 작품 외에도 간병로봇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존재가 존엄사를 동의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들의 온갖 자질구레한 질문에 답해주는 오픈AI인 채팅GPT의 사정 등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여러 풍경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AI 육아 도우미, 간병로봇, AI 돌보미가 탑재된 차량 등 기계화된 돌봄 노동의 세계는 지금 당장 내일부터 펼쳐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육아에 지친 부모에게 친절한 말동무가 되어 주고, 아기의 울음소리를 쉬지 않고 서너 시간 들어도 고통스럽지 않고, 통증에 지친 환자의 짜증을 받아내고, 아무리 고된 간병도 너끈히 해내는,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모습으로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주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일상이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인간과 다르지만 닮은 존재인 ‘인공지능’을 거울 삼아 ‘인간성은 무엇인가’에 관해 질문을 이어간다는 점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다정한 SF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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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준의 아들코칭 백과 - 기질 파악부터 말공부, 사회성, 감정코칭까지
최민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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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육에서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가 '내가 한 말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일상은 변수가 시시각각 생기고 종종 어른들의 세계를 살다 보면, 아이와의 약속이 사소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혹은 아이가 먼저 텔레비전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밥 먹고 젤리 사러 가자는 약속을 까먹은 듯 보여, 살짝 넘어가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습니다. 오늘 살짝 넘어가면 다음 만족지연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잊지 마세요. 이 기다림(만족지연) 코칭법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세상은 신뢰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는 일과 같습니다.            p.142

 

한 번 말해서 듣지 않는 행동, 과격하고 거침없는 표현, 게임 중독, 너무 심한 장난이나 공격적인 활동, 고집이 세고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의지 등 이런 아들의 행동을 멈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진심을 담아 화를 내는 것이다. 결국 소리를 지르고서야 행동을 멈추게 되는 아들 덕분에 엄마는 늘 화내는 사람이 되고 늘 자책하곤 한다. 실제 설문조사 결과 부모들 대다수는 아들에게 유독 화가 난다고 했고, 현직 초등교사 중 90퍼센트가 남자아이들 때문에 학급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니, 이는 결코 특정 개인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걸까.

 

70만 구독자로부터 무한한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는 <아들TV> 최민준 소장은 아들에게는 '공감육아'가 아니라 '행동육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저 따뜻함과 사랑만으론 아들을 잘 키워내기 쉽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고, 적절한 수용과 단호함으로 아이를 바로잡는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아들의 기질 파악, 말공부, 감정코칭, 게임 통제, 자기효능감을 키우기 위한 방법부터, <아들TV>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화제의 콘텐츠를 담았다. '나를 위해서 네가 좀 움직이라고 말하는 관계'가 아니라 '한 팀'이 되어서 이야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절대로 아들과 대립하지 말라는 말에 뜨끔한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엄마가 화내기 직전까지 웃으면서 장난을 치고,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한 번 더 할 때마다 스트레스 수치가 치솟는데, 분노를 다스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어린이를 미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을 예뻐하는 어른이 많았다면, 지금은 시끄럽거나 버릇없이 굴까 봐 미리 걱정하거나 예민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동네 아이가 잘못하면 마을 어른들이 누구나 함께 훈육하고, 아이들은 응당 어른을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아이들은 어른을 무서워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어른들은 아이들이 예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 아들이지만 솔직히 너무 밉다는 부모님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미워하게 되었을까요?                p.370

 

지나친 공감육아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때려서 가르치는 것도 답이 아니다. 둘 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들은 공감능력보다 논리지능이 먼저 발달하는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맞추려는 마음보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능하다는 거지?'가 궁금한 존재이다. 딸로 태어나 자란 엄마들은 이럴 때마다 당황한다. 당연히 말로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들은 계속 엄마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기 때문에 힘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분노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아들의 이러한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아이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남성과 여성에게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신체의 차이뿐만 아니라 뇌, 호르몬, 염색체 등에 있어서 발달 순서와 정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육아의 난이도가 확 내려갈 수밖에 없다.

 

같은 문제라도 여자아이들은 공감능력을 우선시해 상대방 정서를 살피며 행동한다면, 남자아이들은 논리를 활용해서 해결하려는 면모가 많다. 교실에서 노는 방식이라던가,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 수업 시간에 보여야 하는 태도 등에서 이런 부분들이 확연하게 다르게 드러난다. 집에서 늘 뛰어 다니고, 공놀이까지 하려고 하는 아들에게 매번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러울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왔다면, 아파트에서 공놀이를 하지 않는 건 모두가 함께 정한 규칙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아들맘과의 상담, 남자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통해 밝혀낸 저자만의 특별한 통찰이 담겨 있으니 아들맘이라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아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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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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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이 있었던 것도,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고, 이 친구가 없으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했다죠. 그런데 그날 여느 때처럼 작업하는데 왜 그런지 살의가 불끈 치밀었어요. 지금 이 망치로 저 녀석 머리를 내리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더니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말았다는군요. 고향에선 꽤 오랫동안 화제가 됐던 사건인데, 그때 어른들이 연신 '마가 끼었다'란 말을 했거든요. 그런 순간이 일상에 확실히 있어요. 갈라진 틈새라고 할지, 지금 있는 세계하고 연속되지 않는, 이질적인 순간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 '풍경' 중에서, p.182

 

북쪽 벌판의 습지에 뜬, 바위 산에 들러붙은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이곳은 일반적으로는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은 학교로, 특수한 환경 및 특징 때문에 국내외 특정 부유층 사이에만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고등학교 통합 육 년제인 이 학교는 전교생을 다 합쳐도 학생이 그리 많지 않다. 남녀 쌍둥이인 가나메와 가나에는 막 봄을 맞이한 3월, 올해 들어올 신입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곳 기숙사 학교는 매우 평온하고 안락했지만, 바깥 세상과 연락을 취할 수단은 제한되고 외출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학생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고, 타말라라는 이름의 호리호리한 소녀가 등장한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에 머리는 칠흑처럼 한없이 검은 타말라는 어딘가 어둡고, 수수께끼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녀였다.

 

매주 교장실에서 열리는 다과 모임에 가나에와 가나메, 그리고 타말라가 초대를 받는다. 초대받는 학생은 그때그때 달랐는데, 그날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같은 세트의 파란 꽃무늬 찻잔인데, 타말라 것만 보라색 꽃무늬였다. 어쩐지 그게 마음에 걸렸던 가나메는 이후로도 타말라의 잔만 다른 사람들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과 모임에 갈 때마다 타말라가 내키지 않는 듯 갔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곳을 애들 진짜 '무덤'으로 삼고 싶은 부모가 있고 교장이 거기에 가담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던 터라, 가나메와 가나에는 이대로 가면 타말라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들은 타말라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데, 과연 그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타말라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신본격 미스터리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그리고 그때 직감했다. 내가 보는 게 뭔지를. 이상하게도 실은 그때까지 뚜렷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거니와 나는 분명히 다양한 풍경을 정말로 '본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체 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마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을 테고, 동시에 오랫동안 당연하게 '그것'을 경험해온 터라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보는 것은 누구 다른 사람이 보는 광경이라는 것을. 누가 현실에서 보는 광경이 내 머릿속에 뛰어든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나는 직감으로 그렇게 깨달았고 그 직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첫 꿈' 중에서, p.258~259

 

온다 리쿠가 <나와 춤을>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단편집이다.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SF, 청춘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18편의 단편을 한데 엮은 소설집으로 온다 리쿠의 다양한 매력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온다 리쿠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은 열매>의 스핀오프 작품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내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함이 스멀스멀 느껴지게 만드는 온다 리쿠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들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외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테마인 다큐멘터리를 보고 쓴 작품도 있고, <에피타프 도쿄>의 스핀오프도 있고, 괴담 특집으로 쓴 오싹한 이야기도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오마주 기획으로 쓴 작품도 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발레를 테마로 한 장편소설을 준비중이라 습작 삼아 써봤다는 단편도 있고,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쓴 작품과 은행에서 발생한 인질극, 도시전설을 담은 이야기도 있어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온다 리쿠의 상상력이 펼쳐진다.

 

작품의 말미에 수록된 '작가 후기'에서는 온다 리쿠가 직접 각 작품 별로 집필 스토리를 공개하고 있다. 각 단편의 배경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으니 부디 본문을 끝까지 읽은 뒤 읽어달라는 부탁의 말도 있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의뢰를 받아 쓰였고, 쓰면서 어땠는지, 그리고 작품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 혹은 감상도 짧게 수록되어 있으니 아주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장면에서는 정말 소름이 오싹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거나, 대반전이라는 테마로 쓴 이야기인데 과연 반전이 됐을지 의문이라는 멘트도 있고,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아주 나다운 단편인 것 같다'고 평한 작품도 있으니, 이 작품은 온다 리쿠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봐야 할 것이다. 온다 리쿠는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하나이지만, 각기 맛도 모양도 다양하고, 어떤 건 좀 이상하기도 한 초콜릿 상자와 닮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디 각각의 맛을 즐겨달라고 말이다. 장르라는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온다 리쿠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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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의 내 갈 길 가는 에세이
안톤 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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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이십 대를 하기 싫은 공부에 낭비함으로써 받은 타격은 커다란 여파를 남겼고 지금까지도 후회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시간에 소설을 더 읽었더라면, 문학 이론서를 더 읽었더라면, 외국어를 배웠더라면, 영국이나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갔더라면(법대생으로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번역가나 소설가로서의 데뷔가 이토록 늦어졌을까. 무엇보다도 번역이나 글의 숙련도 및 완성도가 지금보다는 훨씬 높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부모님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p.63

 

작년해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을 때 수상을 기원하며 발표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수상은 불발이 되었지만, 최근에 전미도서상 1차 후보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몇 해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수상했던 것도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롱리스트(1차 후보)에 오른 두 작품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을 한국인 번역가 한 사람이 번역했다고 해서 관심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바로 부커상 역사상 한 해에 두 권의 책을 올린 세 번째 번역가이자 유색인종으로서는 첫 번째 번역가가 된 안톤 허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법대생이었던 그가 늦은 나이에 문학 공부를 시작해 한국문학 번역가로 데뷔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영미권에서는 한국문학이 여전히 인지도가 낮은데다, 영미권 출판계의 고질적인 백인 우월주의 등으로 한국문학 출판은 양적으로 부진한 편이다. 게다가 번역가가 개인 차원에서 책 한 권의 번역 권리를 얻으려면 속된 말로 100퍼센트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엄청난 장벽을 넘어야만 한다고. 한국 출판사에 번역 허락을 받고, 샘플 번역을 제작하고, 제안서를 쓰고, 영어권 출판사에 제출하고 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여러 단계의 설득 과정을 거쳐 거의 기적에 가까운 출판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문학 번역가로서의 굉장히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번역을 할 때 제 영혼의 작은 파편이 번역에 실리게 되고, 독자는 그 파편에 반응하는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좋아하고, 제가 의도했던 리딩을(정확히 말하면 제가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하는 리딩을) 그대로 쫓아가는 독자들을 보면 번역가로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뿌듯함을 느낍니다. 물론 독자들은 스스로의 희망, 불안, 편견을 이런 '부재'의 공간에 투여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문학의 범주에 속하며 문학은 누군가 생각하듯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문학은 깊은 독서와 번역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지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번역가로서 자신이 나른 것이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p.177

 

저자는 최근 처음으로 영문 장편소설을 계약했다고 한다. 그것도 미국의 '빅5' 출판사에 속하는 하퍼콜린스와의 계약이라고 하니, 곧 번역가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아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이 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부모님의 고시에 대한 집착으로 법대를 다녔고, 이후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잠시 일하기도 하다가,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대학원에 가서 늦깎이 영문학 전공자가 되었고, 이후 돈 잘 버는 통역사이자 번역가로 일을 하다가 결국 쉽지 않은 문학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보통 번역할 때 작품을 쓴 작가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게 된 정보라 작가와의 일화부터 부커상 뒷이야기, 영미 출판계를 뒤흔든 사기 사건의 전말, 번역가와 퀴어라는 정체성의 관계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라는 제목처럼 관습과 규칙 따위 가볍게 뛰어넘는 번역가로서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다. 후반부에는 저자가 옥스퍼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미들베리칼리지에서 진행한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사실과 번역가로서의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왜 번역가는 겸손해야만 하냐고, 자신은 번역가로서 항상 뻔뻔스럽게 행동해 왔다고 말이다. 번역가와 번역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세상에서 그의 당당한 목소리와 자신감이 더욱 의미있게 느껴진다. 한국문학과 문학번역에 대한 생생한 현주소가 궁금하다면, 사전이 아닌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의 진짜 매력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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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김달님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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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에코 씨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 언제나처럼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건물 로비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건물에는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매일 아침 사람들이 감동할 것을 기대하며 그날의 노동을 다짐하는 사람이. 건물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쉬는 시간에는 좋아하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이. 정성을 다해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날 마음에 담아둔 것을 일기에 적는 사람이. 치에코 씨를 떠올리면 건물 곳곳에 그가 있을 만한 자리마다 조명이 켜지는 것 같다. 치에코 씨가 없어도 그 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 서로 이름을 알기 전에 치에코 씨가 나의 자리를 알아보았듯이. 하루하루. 우리 삶이 함께 흐르고 있다.                p.37~38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김달님 작가의 신작이다. 살면서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했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려 주었던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작가는 지난 겨울에 자신을 키워준 두 사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두 달 간격으로 연달아 떠나 보냈다. 이 책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까운 존재를 잃으면서 느꼈던 상실감과 슬픔, 공허함을 견디고 이겨내며 쓴 글들이다. 슬픔이 긴 날들에도 다시 기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지금 여기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조용히 희망하는 마음, 그리하여 하루하루 다가오는 삶을 기꺼이 사랑해보자는 마음이 담겨 있다.

 

회사 건물의 환경미화원, 택시 기사, 산책로에서 마주친 쑥 캐는 할머니, 글쓰기 수업을 듣는 70대 어르신, 45년 동안 물질을 해온 해녀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들려준 말들을 통해서 조금씩 자라난 마음이 '다음'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한 시절 함께였지만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 떠올리기만 해도 언제나 힘이 되는 사람들, 일을 통해서든 다른 어떤 이유로든 잠시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을, 그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마음이 페이지 마다 가득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직 살아보지 못한 여든 너머의 삶에도 여전히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배우고, 매일 반복되는 노동에도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통해 나의 한구석이 반듯하게 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내가 모르는 인생이 이토록 많다는 깨달음을 통해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다진다.

 

 

 

궁금해하다 깨닫는다. 매일 아침 달라지는 날씨처럼, 오늘도 모두에게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비가 내리는 곳에도. 차차 흐려지는 곳에도. 누군가는 열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기대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라테 아트에 성공하고, 누군가는 혼자 여행을 떠난 바다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때로는 그저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간다'라는 사실이 마음을 일으키는 힘이 될 때가 있다. 산다는 게 뭐 별건가 싶을 때 조금 더 살아볼 만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하루가 있고, 그 하루가 쌓인 사람들의 삶을 결코 다 알 수 없을 거라는 것. 몰라서 계속 궁금해지고 신기해지는 마음이 나에겐 세상을 좋아하는 방식이라는 걸.             p.180

 

나이를 먹을 수록 삶에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 크게 기대하지 않게 된다.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 설렘보다 조심스러움에 가까워지는 것, 할 수 있던 일을 하나씩 하지 못하게 되고, 가까운 존재를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하고, 예측 가능한 행복과 고만고만한 기쁨에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우리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먼 곳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은 순간도 분명 있다. 보지 않았더라면 존재하는지 몰랐을 풍경들을 찾아 가서 보고, 견뎌야 할 상실과 슬픔을 이겨내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좌절감을 산뜻하게 털어내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에 내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가, 내가 알 수 없는 인생들이 펼쳐져 있다. 내 옆에 있지 않더라도,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각자의 매일을 견뎌내고, 내일을 꿈꾸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하루가, 그 모든 인생이 나에게도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걸 사려 깊게 보여준다. 예쁜 표지만큼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계절을 계절답게 하는 존재의 이름을 익히며 세상에 알아야 할 이름이 여전히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설레이고,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을 믿게 하는 따뜻함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작가는 '사람들의 포옹, 사람들의 말, 사람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결국엔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나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수 년 동안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써온 이력 때문인지 모든 글에 인간적인 시선이 담겨 있어서 특히 더 좋았던 것 같다. 우리를 조금씩 자라게 하는,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말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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