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종이 작업실 - Welcome to the Paper Workroom
박종이(박혜윤) 지음 / 지콜론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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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종이접기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성인이 되어 한때 종이학을 접고, 종이별을 접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이후로 종이접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이란 일상 속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너무도 친숙한 재료이지만, 종이를 이용해 뭔가를 만든다는 개념은 어릴 때 이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페이퍼 아트' 작품을 보게 되었고, 이걸 다 종이로 만들었나 싶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은 마음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페이퍼 아트'란 평면의 종이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체감 있는 조형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화려한 모습의 기하학적인 조형물도 있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지는 모형도 있으며, 문구점이나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팝업북과 팝업 카드도 역시 페이퍼 아트의 일종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페이퍼 아티스트 박종이 작가가 상상 속 작업실인 '종이 작업실'로 독자들을 초대해 함께 페이퍼 아트를 즐기게 만들어 준다. 25가지 작품과 전개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누구나 페이퍼 아트의 매력에 빠져들게 해준다.

 

 

뒤쪽에 수록된 전개도를 자르고 접어 형태를 만들어 나가면 점점 평면의 종이가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화병, 몬스테라부터 토마토, 레몬, 버섯, 가지 등 채소 종류도 있고, 데이지, 동백, 호접란, 장미 등 아기자기하고 예쁜 꽃들도 가득하다. 특별한 날을 위한 화관과 브로치, 케이크 토퍼와 크리스마스 리스도 있다. 각각의 아이템마다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고, 전개도와 컬러, 기본적인 준비물도 알려준다. 그리고 단계별로 상세하게 방법이 수록되어 있어 하나씩 따라가면서 만들면 된다.

 

 

이 책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회사에서,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길 없는 직장인과 주부들에게도,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피곤하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들이 가득 쌓였을 때는 페이퍼 아트로 현실을 잠깐 떠나보면 좋을 것 같다.

 

종이가 가진 특유의 질감과 느낌이 따뜻한 촉감을 느끼게 해주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사각사각 소리도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니 말이다. 그리고 만드는 내내 학창 시절에 과제로 뭔가 만들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덕분에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살았던 동심과 순수함도 되찾을 수 있고 말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온 세상이 시끄러운 날, 종이를 만지고 있으면 모든 것들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종이를 자르고 만지는 동안 천천히 흘러가는 그 시간을 즐겨보자. 나만의 속도에 맞춰 즐기는 페이퍼 아트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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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덩이 얘기를 하자면
엠마 아드보게 지음, 이유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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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체육관 뒤편에는 땅이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었다. 거대한 구덩이 안에는 잡초와 나무 그루터기들이 있었고, 내리막에다 뿌리랑 바위들도 있어 놀기에 딱 좋았다. 아이들은 무슨 놀이든 다 할 수 있는 구덩이에서 틈만 나면 신나게 놀았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구덩이에서 노는 것은 위험하다며, 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식당을 나서다가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일어났고, 그날 이후로 구덩이에서 노는 건 금지 된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구덩이에서 노는 것을 금지당한 아이들은 결국 구덩이 둘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들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누군가 다칠 것이 걱정이 된 선생님들은 급기야 구덩이를 아예 메워버리기로 한다. 그렇게 구덩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제 아이들은 어디에서 구르고 매달리고 놀 수 있을까?

 

무조건 뛰고 구르고 점프하고 날아다닐 수밖에 없는, 그 특별한 장소가 사라지고 난 뒤 아이들은 어떻게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낼까. 어른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곳도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에너지는 어른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겪지만, 어른이 되면서 그 시절의 반짝임을 잃어 버리게 되니 말이다. 이 작품은 다시 그 모든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스웨덴의 그림책 작가 엠마 아드보게의 신작이다. 자유로운 드로잉과 특유의 매트한 색채 팔레트로 아이들의 세계를 사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봄에 출간되었던 <내 딱지 얘기를 하자면>에서도 학교를 배경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사실적인 이야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쉬는 시간마다 탁구대 위에서 놀던 아이 중 하나가 다치는 바람에 무릎에 피가 나기 시작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아이의 무릎에 난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을 귀엽고 재미있게 표현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상처에 놀란 아이들의 마음과 밴드를 붙이고, 딱지가 생기고, 딱지가 떨어지고 난 뒤 새 살이 돋고 흉터만 남게 되는 과정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어 누구나 거쳐온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엠마 아드보게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회색이 많이 섞여 창백해 보이는 느낌인데,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흐릿한 연필선과 묽은 컬러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플해 보이는 드로잉은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현실 속 한 장면을 재현한다. 하나의 페이지에 등장 인물이 많은 편인데, 깨알같이 인물들마다 표정과 행동이 달라서 세세하게 보면 더 재미있다.

 

학교 뒤편 공터 구덩이처럼 어린 시절 친구들과 늘 모여서 놀았던 아지트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엠마 아드보게의 그림책은 잊고 있었던 그 장소,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처음으로 무릎에 상처가 나서 딱지가 생기는 경험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생각해 보자. 상처가 아물고 나면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은 스웨덴 최고의 문학상인 아우구스트상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의 안데르센상, 독일의 아동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삶과 놀이를 긍정하는, 축제와도 같은 그림책'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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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지음 / 래빗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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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쇠돌은 저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대가로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 보다 생각했어요." 훗날 선녀는 이쇠돌의 아내가 되었을 때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녀가 살인죄로 기소되자 여성단체는 잇따라 성명을 내고 시위를 벌였다. 피해자 이쇠돌의 절도, 약취유인, 강간, 협박 등 수년간 이어진 범죄행위로 인해 선녀의 인권이 유린되어왔다는 점을 참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권 신장과 사법 정의 구현의 목소리가 고리아 왕국을 뒤덮었다.               -'선녀를 위한 변론' 중에서, p.68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동화 속 세계에 덜컥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들어섰다. 이유는 '우주의 원리에 일종의 국소적인 오류'가 생겼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법원이 생겼고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라는 직업이 생긴다. 근처 다른 왕국들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국의 왕은 사법부에 형벌권과 각종 민사적인 분쟁의 해결권을 위임했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아침, 왕자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고, 마침 당일 왕국을 떠나라는 왕명을 받은 인어가 용의자로 검거된다. 그날 인어는 왕자가 머물던 별궁에 찾아간 데다,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단도를 가지고 있던 모습까지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녀는 나무꾼인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선녀가 순간적으로 격분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은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이들은 정말 무죄일까?

 

〈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각각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의 서사를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터리로 바꾸어 버린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선택 받지 못해 무기력하게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리는 인어와 나무꾼에 의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이를 낳고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야 했던 선녀라는 캐릭터를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점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게다가 그 과정을 법정 미스터리로 풀어내고 있어 살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살펴보고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릴 넘치는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사실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고, 강제로 아내를 삼았으니 현대의 법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명백히 범죄 행위이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알고 있던 동화의 서사를 제대로 뒤집어 무기력한 캐릭터를 변신시켰는데, 그 반전에서 오는 재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그래서 정우를 죽였니?"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p.235

 

<달리는 조사관>, <대나무가 우는 섬>, <라일락 붉게 피던 집>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송시우 작가님의 신작 소설집이다.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잘 짜인 미스터리를 보여주었던 전작들에 이어 이번에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눈길을 끌었다. 동화 <인어 공주>와 <선녀와 나무꾼>의 두 주인공이 살인죄로 기소되어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작가는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빼앗겨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을 선녀의 고초와 왕자를 구하는 대가로 평생 고통을 얻게 되었지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어 공주의 억울함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판을 벌리고 통쾌한 법정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흔한 법정 소설이나 동화 패러디가 아니다'는 추천평처럼, 송시우 작가만의 상상력과 탄탄한 필력으로 탄생한 웰메이드 미스터리였다.

 

아마추어 탐정 임기숙이 활약하는 두 작품도 흥미로웠는데, 임기숙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아이의 뼈>에 수록된 이야기에 등장했던 캐릭터라 더욱 반가웠다. 임기숙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지만, 섬세한 관찰력과 집중력으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낸다. 이번 작품에서는 서행물산 총무부에서 근무하며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걸로 등장한다. 당황할수록 아무 말이나 툭 던지는 버릇은 여전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불쑥 엉뚱한 말을 해버려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부스스한 단발머리와 항상 미안해하는 듯한 어리숙한 표정의 기숙 씨와 산만하고 활력 넘치는 반려견 타미는 따로 장편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부디 다른 작품에서도 또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법정 미스터리, 클래식 미스터리, 사회파 미스터리를 종횡무진 오가는 ‘송시우표 미스터리 종합 선물 세트’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재미와 한층 무르익은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인 미스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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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다 -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 돌베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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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들, 작은 것 하나라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하면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을 좌절시킨다. 삶은 완전하고 완벽한 통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삶은 남쪽 북쪽 사방팔방으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p.33~34

 

아무런 예고 없이, 어머니는 어느 날 중병에 걸렸다. 어머니의 상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어머니를 돕는 올바른 방법인지, 어떤 것을 다르게 또는 더 잘 할 수 있을지, 그 일은 가족 전체를 뒤흔든다. 게다가 어머니의 병은 수천 년 동안 존재했지만 이름이 없었던, 희귀 질병이었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약 11년 동안 상주 간병인과 함께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며, 세 딸들의 돌봄을 받았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자전적 에세이이다.

 

어머니는 여든여섯 살 반이 되었을 때 문제가 있다는 징후를 보였고, 가족들은 어머니가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것,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신경과 전문의와의 진료 상담을 예약했고, 의사는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MRI를 통해 뇌 영상을 읽는 행위에 1000퍼센트 확신이란 것은 없었다. 이후에 명의라는 내과의를 추천받아 진료를 받았고, 그 의사는 어머니가 '정상뇌압수두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 내린다. 당시에 그 병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는 병이다. 가족들은 그렇게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동시에 한데 몰려든다.어려운 의학적 문제들, 확신의 부족, 선택지와 가능성이 적거나 없다는 느낌으로 가족들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힘들었다. 어머니가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거나 예전 만큼 신체, 정신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으니 말이다. 저자는 삶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고, 삶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슬퍼하거나 어머니를 애도하지 않았다. 나는 안도감에 마비되었고 피로로 녹초가 되었다. 환희가 아니라 현기증을 느꼈다. 11년이라는 짐, 어머니라는 짐이 떠났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죽었다. 그러나 그 짐, 그 심리적 짐이 완전히 소멸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종종 불안해졌다. 내가 처리해야 할 뭔가를 잊어버렸다고 착각했다.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간다. 그러나 내가 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삶은 반사작용으로 가득하다.           p.205~206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린 틸먼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소설가로 '작가들이 존경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과 어머니, 가족의 내부 역학을 공개하는 것이 매우 낯설고, 불편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경험을 소설의 재료로 삼을 때는 있지만, 그 경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에,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데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써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고 대신 내 양심은 담겨 있었다'라는 문장을 비롯해서, 린 틸먼은 이 책의 곳곳에서 어머니가 싫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늙고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의무였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랑보다는 의무때문에 돌봄을 수행하는 이들의 죄책감, 가족을 돌보는 일의 두려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노동의 가치, 척박한 노인 의학의 현실... 이 책 속에 담긴 내용들은 나도 언젠가 겪게 될 일이고, 지금도 누군가는 겪고 있는 일일 것이다. 나이 듦과 병듦, 돌봄과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니 말이다. 이 책은 매우 현실적이고 냉철하게, 서늘하고 치열하게 돌봄 노동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돌봄 노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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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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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초가 널린 바위에 털썩 앉았고, 잉그리트도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파란 하늘에 떠오르는 파란 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연이 갑자기 쭈그러지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넘실대는 파도와 함께 멀리멀리 빠져나가 다른 삶을 시작하기를 평생을 바라왔다. 하지만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어떻게 그 삶에 다다를지는 알지 못했다.           p.72

 

우연히 티비 방송을 보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며 친딸을 협박하는 엄마에 대한 사연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딸이 보는 앞에서 극단적 시도를 했고, 폭력과 폭언을 했으며, 알코올 중독과 약물 오남용을 일삼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엄마와 이혼한 아빠도, 엄마의 가족인 이모나 외할머니들도 모두 손놓고 있는 상황에 이십대 초반의 딸 혼자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고 있었다. 딸이 엄마로부터 오는 연락을 끊지 못하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고등학생인 남동생에게 엄마가 해코지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딸의 입장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엄마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어른으로서 무책임했고, 자식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과 말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사연을 보면서 데버라 리비의 소설 속 주인공 소피아와 그녀의 어머니 로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학위 취득을 코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헌신했지만 상황은 무엇 하나 나아지는 게 없었고, 자신의 일상들을 모두 희생했으나 누구 하나 만족스럽게 웃을 수 없는 나날들이라니... 이렇게 모순으로 점철된 관계가 또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리 마비 증상은 사실 걸을 수 있지만 심리적인 이유로 걷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고, 유명 클리닉에 가보지만 의사의 진단 방식과 처방은 이해할 수 없고, 급기야 로즈는 고통을 호소하며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소피아는 자신을 붙드는 그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 관계란 것이 쉽게 끊어낼 수도, 모른 척 할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마냥 사랑할 수도, 훌훌 털어낼 수도 없는 관계,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거나 들어봤을 법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는 그런 작품이었다.

 

 

 

나는 괜찮지 않다. 전혀. 꽤 오랫동안 괜찮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더는 회복할 자신도 없는 것이, 거대한 삶을 바라면서도 바라던 일에 도전할 만큼 담대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도 말하지 않았다. 별자리에 나도 그녀처럼 영락한 인생으로 끝날 거라고 쓰여 있을까 봐, 그 두려움 때문에 그녀가 제 다리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그녀의 척추가 잘못되었을까 봐 또는 그녀에게 중대한 질병이 있을까 봐 죽도록 겁난다는 이야길 하지 않았다.           p.223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살림 비용>을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유년 시절부터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고군분투했던 여성이자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가 여성,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망상과 가해 온 억압들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과 사유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것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데버라 리비의 장편 소설이다. 2016년 맨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던 이 작품은 몇 년째 종잡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를 간호하기 위해 일상을 포기한 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병원을 전전하며 여러 검사를 했음에도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어머니는 늘 고통을 호소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곁에서 머물고 있는 딸은 평생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게다가 그런 딸에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통통하고 게으른 데다 고령의 자신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어머니라니. 모녀간의 묵은 갈등과 억압된 열망, 상처와 애증은 결국 파국으로 향하게 된다.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도로 한가운데로 밀고 가서는, 그곳에 남겨놓고 떠나버린 것이다. 멀리 대형 트럭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의사가 말한다. "그게 모든 슬픈 어머니의 자식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죠. 자식들은 매일 자문합니다. 왜 어머니는 살아 있는데 죽어 있는가?"라고.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고, 날카로우며, 위트와 뭉클함도 잊지 않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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