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드는 세계 위대한 도시들 2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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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도시가 추락하고 있다. 나무의 몸통을 향해, 그리고 불가능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뿌리를 향해. 죽은 도시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감정은 이제 없다. 파드미니는 동료들에게 문자를 보내러 황급히 전화기를 꺼낸다. 손가락이 땀에 젖어 키보드 화면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바람에 도저히 문자를 칠 수가 없어 결국은 음성 인식으로 전환해 소리 내어 말해야 한다. "저기요, 여러분? 우리 전부 다 곧 죽을 거예요.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요."               p.215

 

<우리는 도시가 된다>에 이어 <우리가 만드는 세계>로 N. K. 제미신의 '위대한 도시들' 판타지 2부작이 완결되었다. 이 시리즈는 N. K. 제미신의 첫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에 수록되었던 '위대한 도시의 탄생'에서 비롯되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거대한 촉수를 가진 도시의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화신들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 이미지처럼, 이야기는 거침 없는 활극으로 시작되었던 이 시리즈에서 도시는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유기체이다. 다른 모든 생물처럼 말이다. 도시는 자신을 대변하고 보호할 대리자 '화신'으로 구성원 중 누군가를 선택하고, 맨해튼, 브롱크스, 퀸스,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 등 뉴욕의 다섯 개 자치구를 수호하는 화신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각성하고, 수백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기에 처한 도시를 구하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그리고 스태튼 아일랜드까지 뉴욕 시의 다섯 자치구의 화신들이 각각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뉴욕에 막 도착한 남자, 전직래퍼이자 현직 변호사인 시의원, 수학천재 대학원생, 미술관 관장, 외딴 섬에서 일하는 사서는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화신이라는 것을 각성하고, 각자의 도시에서 촉수의 형태로 곳곳에 등장하는 '적'을 목격했다. 스태튼 아일랜드를 제외한 화신 넷이 모여 뉴욕 전체를 대표하는 화신을 찾아가는 여정까지가 <우리는 도시가 된다> 였다면, <우리가 만드는 세계> 에서는 전작에서 3개월 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가 지금 같은 속도로 다중우주 아래로 계속 추락한다면 한 달도 못 돼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할 거예요."
웃음소리가 점차 옅어진다. 아직 몇 군데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파이윰이 지루함과 멸시, 그 중간 어딘가쯤의 표정을 지으며 짙은 아이라인이 그려진 눈가를 가늘게 좁힌다.
"아주 극적인 표현이군. 돌이킬 수 없는 지점?"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는 시점이요... 우린 지금 물질과 에너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게 산산조각 나는 임계점을 향해 접근하고 있어요."              p.383

 

전편에서 벌어진 소동으로 생긴 피해는 아직 복구되지 않았고, 스태튼 아일랜드는 여전히 적인 ‘하얀 여자’에게 포섭되어 다른 화신들과는 단절된 상태이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을 향해 사람들이 느끼는 ‘혐오’라는 감정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과 시장 선거의 배후에도 적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화신들은 브루클린의 뉴욕 시장 출마를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그렇게 ‘시장 선거’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젠트리피케이션, 인종 차별, 제노포비아, 인터넷 여론 조작 등 현대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차곡차곡 묘사하며 평행세계에서 넘어온 '적'과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간다.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도시라는 공간이 자의식 있는 생명체라는 것도, 도시의 대리자이자 보호할 화신이 평범한 시민 중에서 선택된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살고 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도시를 지키기 위해 적에 맞선다는 것이 블록버스터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처럼 느껴지기도 했었고 말이다. 도시가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유기체라는 것, 하나의 세계에선 평범한 사람이지만 공간과 물리학의 법칙이 다르게 작용하는 또 다른 세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라는 존재가 수많은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거라는 설정만으로도 너무 매혹적인 작품이다. 제미신 특유의 현실에 단단히 발 딛고 서 있는 SF적인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버무려진, 이 스펙터클하고 박진감 넘치는 판타지를 만나 보자. '부서진 대지' 3부작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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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클래식 리이매진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티나 베르닝 그림, 이영아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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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목격자인 하녀의 주인조차 그를 고작 두 번 봤을 뿐이고, 그의 가족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으며, 그가 찍힌 사진 한 장 없었다. 그의 생김새를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보통의 목격자들이 그렇듯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 점에서만은 모든 이들의 진술이 일치했다. 그 도망자는 어딘가 모르게 기형인 듯한 인상을 풍기는데, 한 번 보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p.67

 

균형 잡힌 거구에 얼굴에는 수염 자국 하나 없는, 유능하고 다정한 인상의 남자와 창백하고 난쟁이처럼 작달막하고, 어딘가 기형인 듯한 인상을 주는 흉악한 인상의 남자가 동일 인물일 수 있을까. 이는 바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두 인격의 한 모습이다.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지킬 박사와 괴물 같은 외모로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하이드가 동일 인물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작품은 타락을 향한 욕망으로 터질 듯한 내면을 철저히 억누른 채 겉으로는 점잖은 척 교양과 아량을 두른 지킬의 이중적 면모를 분열된 두 인격 간의 갈등으로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 톨의 연민도 없는 인간의 얼굴, 한번 내비친 것만으로도 마음에 오래도록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한 하이드의 모습은 누구나의 내면 한 켠에 가지고 있는 약하고, 추악한 부분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도 같다. 물론 대부분은 그러한 면모를 깊숙이 넣어 두고, 도덕적이고, 정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말이다. 그 감춰진 욕망이 현실로 발현되어 실제로 활동을 하고 다닌다면,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지옥을 향해 갈지도 모른다.

 

 

누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외에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두 인격은 다소 극단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대비를 보여주기에 이만큼 매력적인 선택도 없었을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불분명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사소한 욕망이나, 나약한 이기심에 굴복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 인간이라 하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조금은 물들게 되는 순간도 올 수밖에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선과 악이 너무도 자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물론 그것이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싹한 고딕 추리소설이자 뛰어난 심리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지킬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뱉자마자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더니 더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의 표정이 뒤따랐다. 창문 아래에 있는 엔필드와 어터슨의 피까지 얼려버릴 듯 했다. 순식간에 창문이 확 닫혔기에 그 표정을 목격한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으로도 충분했기에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안뜰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눈빛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p.102~103

 

이 작품은 1886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영화와 뮤지컬, 연극, 오페라 등을 통해 수없이 변주되어 오면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기면서도 변함없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니 말이다. 나 역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를 여러 버전으로 만나 왔는데, 이번에 만난 버전은 정말 특별하다. 세계적인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알려진 티나 베르닝이 시각적으로 해석해내는 컬렉터용 버전으로 강렬한 일러스트들이 너무 흥미로웠다.

 

 

티나 베르닝의 그림들은 각각의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내거나 은근슬쩍 감추기도 하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독특하고 세밀한 터치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이미지들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색채와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텍스트에 담기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 독특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소소의 책에서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로 나오는 첫 번째 작품인데,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독특한 시각적 해석을 담은 컬렉터용 하드커버 에디션이다. 앞으로 이어질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의 작품들도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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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종이 작업실 - Welcome to the Paper Workroom
박종이(박혜윤) 지음 / 지콜론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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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종이접기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성인이 되어 한때 종이학을 접고, 종이별을 접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이후로 종이접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이란 일상 속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너무도 친숙한 재료이지만, 종이를 이용해 뭔가를 만든다는 개념은 어릴 때 이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페이퍼 아트' 작품을 보게 되었고, 이걸 다 종이로 만들었나 싶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은 마음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페이퍼 아트'란 평면의 종이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체감 있는 조형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화려한 모습의 기하학적인 조형물도 있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지는 모형도 있으며, 문구점이나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팝업북과 팝업 카드도 역시 페이퍼 아트의 일종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페이퍼 아티스트 박종이 작가가 상상 속 작업실인 '종이 작업실'로 독자들을 초대해 함께 페이퍼 아트를 즐기게 만들어 준다. 25가지 작품과 전개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누구나 페이퍼 아트의 매력에 빠져들게 해준다.

 

 

뒤쪽에 수록된 전개도를 자르고 접어 형태를 만들어 나가면 점점 평면의 종이가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화병, 몬스테라부터 토마토, 레몬, 버섯, 가지 등 채소 종류도 있고, 데이지, 동백, 호접란, 장미 등 아기자기하고 예쁜 꽃들도 가득하다. 특별한 날을 위한 화관과 브로치, 케이크 토퍼와 크리스마스 리스도 있다. 각각의 아이템마다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고, 전개도와 컬러, 기본적인 준비물도 알려준다. 그리고 단계별로 상세하게 방법이 수록되어 있어 하나씩 따라가면서 만들면 된다.

 

 

이 책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회사에서,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길 없는 직장인과 주부들에게도,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피곤하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들이 가득 쌓였을 때는 페이퍼 아트로 현실을 잠깐 떠나보면 좋을 것 같다.

 

종이가 가진 특유의 질감과 느낌이 따뜻한 촉감을 느끼게 해주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사각사각 소리도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니 말이다. 그리고 만드는 내내 학창 시절에 과제로 뭔가 만들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덕분에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살았던 동심과 순수함도 되찾을 수 있고 말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온 세상이 시끄러운 날, 종이를 만지고 있으면 모든 것들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종이를 자르고 만지는 동안 천천히 흘러가는 그 시간을 즐겨보자. 나만의 속도에 맞춰 즐기는 페이퍼 아트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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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덩이 얘기를 하자면
엠마 아드보게 지음, 이유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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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체육관 뒤편에는 땅이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었다. 거대한 구덩이 안에는 잡초와 나무 그루터기들이 있었고, 내리막에다 뿌리랑 바위들도 있어 놀기에 딱 좋았다. 아이들은 무슨 놀이든 다 할 수 있는 구덩이에서 틈만 나면 신나게 놀았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구덩이에서 노는 것은 위험하다며, 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식당을 나서다가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일어났고, 그날 이후로 구덩이에서 노는 건 금지 된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구덩이에서 노는 것을 금지당한 아이들은 결국 구덩이 둘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들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누군가 다칠 것이 걱정이 된 선생님들은 급기야 구덩이를 아예 메워버리기로 한다. 그렇게 구덩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제 아이들은 어디에서 구르고 매달리고 놀 수 있을까?

 

무조건 뛰고 구르고 점프하고 날아다닐 수밖에 없는, 그 특별한 장소가 사라지고 난 뒤 아이들은 어떻게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낼까. 어른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곳도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에너지는 어른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겪지만, 어른이 되면서 그 시절의 반짝임을 잃어 버리게 되니 말이다. 이 작품은 다시 그 모든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스웨덴의 그림책 작가 엠마 아드보게의 신작이다. 자유로운 드로잉과 특유의 매트한 색채 팔레트로 아이들의 세계를 사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봄에 출간되었던 <내 딱지 얘기를 하자면>에서도 학교를 배경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사실적인 이야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쉬는 시간마다 탁구대 위에서 놀던 아이 중 하나가 다치는 바람에 무릎에 피가 나기 시작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아이의 무릎에 난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을 귀엽고 재미있게 표현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상처에 놀란 아이들의 마음과 밴드를 붙이고, 딱지가 생기고, 딱지가 떨어지고 난 뒤 새 살이 돋고 흉터만 남게 되는 과정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어 누구나 거쳐온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엠마 아드보게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회색이 많이 섞여 창백해 보이는 느낌인데,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흐릿한 연필선과 묽은 컬러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플해 보이는 드로잉은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현실 속 한 장면을 재현한다. 하나의 페이지에 등장 인물이 많은 편인데, 깨알같이 인물들마다 표정과 행동이 달라서 세세하게 보면 더 재미있다.

 

학교 뒤편 공터 구덩이처럼 어린 시절 친구들과 늘 모여서 놀았던 아지트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엠마 아드보게의 그림책은 잊고 있었던 그 장소,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처음으로 무릎에 상처가 나서 딱지가 생기는 경험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생각해 보자. 상처가 아물고 나면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은 스웨덴 최고의 문학상인 아우구스트상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의 안데르센상, 독일의 아동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삶과 놀이를 긍정하는, 축제와도 같은 그림책'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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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지음 / 래빗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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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쇠돌은 저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대가로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 보다 생각했어요." 훗날 선녀는 이쇠돌의 아내가 되었을 때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녀가 살인죄로 기소되자 여성단체는 잇따라 성명을 내고 시위를 벌였다. 피해자 이쇠돌의 절도, 약취유인, 강간, 협박 등 수년간 이어진 범죄행위로 인해 선녀의 인권이 유린되어왔다는 점을 참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권 신장과 사법 정의 구현의 목소리가 고리아 왕국을 뒤덮었다.               -'선녀를 위한 변론' 중에서, p.68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동화 속 세계에 덜컥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들어섰다. 이유는 '우주의 원리에 일종의 국소적인 오류'가 생겼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법원이 생겼고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라는 직업이 생긴다. 근처 다른 왕국들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국의 왕은 사법부에 형벌권과 각종 민사적인 분쟁의 해결권을 위임했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아침, 왕자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고, 마침 당일 왕국을 떠나라는 왕명을 받은 인어가 용의자로 검거된다. 그날 인어는 왕자가 머물던 별궁에 찾아간 데다,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단도를 가지고 있던 모습까지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녀는 나무꾼인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선녀가 순간적으로 격분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은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이들은 정말 무죄일까?

 

〈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각각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의 서사를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터리로 바꾸어 버린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선택 받지 못해 무기력하게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리는 인어와 나무꾼에 의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이를 낳고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야 했던 선녀라는 캐릭터를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점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게다가 그 과정을 법정 미스터리로 풀어내고 있어 살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살펴보고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릴 넘치는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사실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고, 강제로 아내를 삼았으니 현대의 법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명백히 범죄 행위이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알고 있던 동화의 서사를 제대로 뒤집어 무기력한 캐릭터를 변신시켰는데, 그 반전에서 오는 재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그래서 정우를 죽였니?"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p.235

 

<달리는 조사관>, <대나무가 우는 섬>, <라일락 붉게 피던 집>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송시우 작가님의 신작 소설집이다.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잘 짜인 미스터리를 보여주었던 전작들에 이어 이번에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눈길을 끌었다. 동화 <인어 공주>와 <선녀와 나무꾼>의 두 주인공이 살인죄로 기소되어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작가는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빼앗겨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을 선녀의 고초와 왕자를 구하는 대가로 평생 고통을 얻게 되었지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어 공주의 억울함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판을 벌리고 통쾌한 법정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흔한 법정 소설이나 동화 패러디가 아니다'는 추천평처럼, 송시우 작가만의 상상력과 탄탄한 필력으로 탄생한 웰메이드 미스터리였다.

 

아마추어 탐정 임기숙이 활약하는 두 작품도 흥미로웠는데, 임기숙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아이의 뼈>에 수록된 이야기에 등장했던 캐릭터라 더욱 반가웠다. 임기숙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지만, 섬세한 관찰력과 집중력으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낸다. 이번 작품에서는 서행물산 총무부에서 근무하며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걸로 등장한다. 당황할수록 아무 말이나 툭 던지는 버릇은 여전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불쑥 엉뚱한 말을 해버려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부스스한 단발머리와 항상 미안해하는 듯한 어리숙한 표정의 기숙 씨와 산만하고 활력 넘치는 반려견 타미는 따로 장편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부디 다른 작품에서도 또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법정 미스터리, 클래식 미스터리, 사회파 미스터리를 종횡무진 오가는 ‘송시우표 미스터리 종합 선물 세트’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재미와 한층 무르익은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인 미스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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