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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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이 있었던 것도,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고, 이 친구가 없으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했다죠. 그런데 그날 여느 때처럼 작업하는데 왜 그런지 살의가 불끈 치밀었어요. 지금 이 망치로 저 녀석 머리를 내리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더니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말았다는군요. 고향에선 꽤 오랫동안 화제가 됐던 사건인데, 그때 어른들이 연신 '마가 끼었다'란 말을 했거든요. 그런 순간이 일상에 확실히 있어요. 갈라진 틈새라고 할지, 지금 있는 세계하고 연속되지 않는, 이질적인 순간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 '풍경' 중에서, p.182

 

북쪽 벌판의 습지에 뜬, 바위 산에 들러붙은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이곳은 일반적으로는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은 학교로, 특수한 환경 및 특징 때문에 국내외 특정 부유층 사이에만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고등학교 통합 육 년제인 이 학교는 전교생을 다 합쳐도 학생이 그리 많지 않다. 남녀 쌍둥이인 가나메와 가나에는 막 봄을 맞이한 3월, 올해 들어올 신입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곳 기숙사 학교는 매우 평온하고 안락했지만, 바깥 세상과 연락을 취할 수단은 제한되고 외출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학생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고, 타말라라는 이름의 호리호리한 소녀가 등장한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에 머리는 칠흑처럼 한없이 검은 타말라는 어딘가 어둡고, 수수께끼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녀였다.

 

매주 교장실에서 열리는 다과 모임에 가나에와 가나메, 그리고 타말라가 초대를 받는다. 초대받는 학생은 그때그때 달랐는데, 그날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같은 세트의 파란 꽃무늬 찻잔인데, 타말라 것만 보라색 꽃무늬였다. 어쩐지 그게 마음에 걸렸던 가나메는 이후로도 타말라의 잔만 다른 사람들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과 모임에 갈 때마다 타말라가 내키지 않는 듯 갔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곳을 애들 진짜 '무덤'으로 삼고 싶은 부모가 있고 교장이 거기에 가담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던 터라, 가나메와 가나에는 이대로 가면 타말라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들은 타말라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데, 과연 그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타말라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신본격 미스터리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그리고 그때 직감했다. 내가 보는 게 뭔지를. 이상하게도 실은 그때까지 뚜렷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거니와 나는 분명히 다양한 풍경을 정말로 '본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체 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마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을 테고, 동시에 오랫동안 당연하게 '그것'을 경험해온 터라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보는 것은 누구 다른 사람이 보는 광경이라는 것을. 누가 현실에서 보는 광경이 내 머릿속에 뛰어든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나는 직감으로 그렇게 깨달았고 그 직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첫 꿈' 중에서, p.258~259

 

온다 리쿠가 <나와 춤을>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단편집이다.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SF, 청춘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18편의 단편을 한데 엮은 소설집으로 온다 리쿠의 다양한 매력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온다 리쿠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은 열매>의 스핀오프 작품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내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함이 스멀스멀 느껴지게 만드는 온다 리쿠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들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외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테마인 다큐멘터리를 보고 쓴 작품도 있고, <에피타프 도쿄>의 스핀오프도 있고, 괴담 특집으로 쓴 오싹한 이야기도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오마주 기획으로 쓴 작품도 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발레를 테마로 한 장편소설을 준비중이라 습작 삼아 써봤다는 단편도 있고,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쓴 작품과 은행에서 발생한 인질극, 도시전설을 담은 이야기도 있어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온다 리쿠의 상상력이 펼쳐진다.

 

작품의 말미에 수록된 '작가 후기'에서는 온다 리쿠가 직접 각 작품 별로 집필 스토리를 공개하고 있다. 각 단편의 배경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으니 부디 본문을 끝까지 읽은 뒤 읽어달라는 부탁의 말도 있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의뢰를 받아 쓰였고, 쓰면서 어땠는지, 그리고 작품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 혹은 감상도 짧게 수록되어 있으니 아주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장면에서는 정말 소름이 오싹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거나, 대반전이라는 테마로 쓴 이야기인데 과연 반전이 됐을지 의문이라는 멘트도 있고,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아주 나다운 단편인 것 같다'고 평한 작품도 있으니, 이 작품은 온다 리쿠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봐야 할 것이다. 온다 리쿠는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하나이지만, 각기 맛도 모양도 다양하고, 어떤 건 좀 이상하기도 한 초콜릿 상자와 닮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디 각각의 맛을 즐겨달라고 말이다. 장르라는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온다 리쿠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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