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이경 지음 / 래빗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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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이런 식으로 지나가면, 똑같은 하루가 또 시작됩니다. 그런 식으로 아기는 보호자가 쌓아온 삶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예요... 이 시간 동안 보호자는 아기에게 완전히, 특히 물리적으로 완전히 묶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도 강제로요. 그래서 고립감을 더 강렬히 느끼시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생각은 묶이지 않거든요. 이 시간에 남들은 뭐 할까, 난 여기 왜 이러고 있을까, 왜 이렇게 힘들까, 왜 안 자지, 왜 안 먹지, 왜 울음을 그치지 않지, 아기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데 난 왜 이렇게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울까....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중에서, p.31~32

 

미주는 태어난 지 이제 31일된 신생아를 돌보느라 지친 어느 날 밤, 거실 소파에 스웨덴 출신의 잘생긴 배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미주도, 비명 소리를 듣고 남편도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남자는 자신을 '젖병 소독의 천사, 보틀스의 엔젤'이라고 소개했다. 알고 봤더니 젖병 소독기 보틀스의 최신 모델에 탑재된 자체 AI였던 것이다. 두 달 전에 구매하고 사용자를 등록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 동안 작동이 안 되다가 갑자기 한밤중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아기의 수유 텀에 맞춰 약 세 시간마다 나타났는데, 젖병 소독 업무를 하면서 미주와 수다를 떨고 사라졌다. 미주와 남편은 젖병 소독의 천사가 왜 하필 잘생기고 키 큰 북유럽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왜 스웨덴 배우의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 추리를 해나가지만,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업체로부터 제품에 탑재된 AI 엔젤 알고리즘이 오류라는 이유로 자발적 리콜을 시행하기로 했다고, 회수해서 새 제품으로 교체해준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겨우 엿새 동안 함께 했던 인공지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미주는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게 된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사실 100일도 안 된 아기를 키운다는 건, 엄마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온전히 갈아 넣어야 가능한 일이다. 늘 수면 부족으로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고, 두세 시간 마다 수유를 하고 일일이 시간을 체크하다 보면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헷갈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니 말이다. 아기는 좀처럼 밤에 통잠을 자지 않고, 깰 때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기를 안아 어르고 재우는 것은 보통 엄마의 일이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위해 보통 아기와 엄마는 따로 자거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기를 돌보다 보면 지독하게 서럽고, 외롭게 느껴진다. 물론 아이가 주는 기쁨은 세상 어느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지만, 그 명백한 사실과는 별개로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엄마는 인간다운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꽤 긴 시간을 홀로 버텨내야 하니 말이다. 표제작인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에서도 직장맘이 AI 보육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배경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읽으면서 공감하는 엄마들이 많을 것 같다.

 

 

 

무언가, 그를 더욱 깊숙이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심금(心琴). 그래, 그의 마음의 현이 울렸다. 울리고 말았다. 다음 달이면 갈아치워질 장관이나 은퇴까지 부대껴야 할 이과장이 아니라, 자신과 명수와 명희와 구공일이, 장옥련님과 그의 생명 연장을 중단해줄 의사 둘과 이 작은 방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모여 죽순처럼 빽빽이 늘어선 광경에 깃든 무언가가 종직의 심금을 울렸다. 아주 찌잉하게 울렸다. 오직 한 사람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집합한 타인들과 타-로봇이 현을 뜯은 바로 그 지점에 박 주무관의 영혼이 살고 있었다.          -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중에서, p.150

 

이 작품은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가작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경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국문과 박사가 되어 연구자의 길을 걷다, 출산과 육아로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공지능 젖병소독기의 홀로그램이 말동무가 되어 준다거나, 아기와 엄마를 편안하게 이송시켜주는 황새영아송영 어플 등 돌봄 노동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반짝거리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외롭고 고단한 육아'를 경험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디테일들이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육아 돌봄과 관련된 두 작품 외에도 간병로봇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존재가 존엄사를 동의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들의 온갖 자질구레한 질문에 답해주는 오픈AI인 채팅GPT의 사정 등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여러 풍경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AI 육아 도우미, 간병로봇, AI 돌보미가 탑재된 차량 등 기계화된 돌봄 노동의 세계는 지금 당장 내일부터 펼쳐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육아에 지친 부모에게 친절한 말동무가 되어 주고, 아기의 울음소리를 쉬지 않고 서너 시간 들어도 고통스럽지 않고, 통증에 지친 환자의 짜증을 받아내고, 아무리 고된 간병도 너끈히 해내는,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모습으로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주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일상이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인간과 다르지만 닮은 존재인 ‘인공지능’을 거울 삼아 ‘인간성은 무엇인가’에 관해 질문을 이어간다는 점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다정한 SF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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