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의 내 갈 길 가는 에세이
안톤 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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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이십 대를 하기 싫은 공부에 낭비함으로써 받은 타격은 커다란 여파를 남겼고 지금까지도 후회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시간에 소설을 더 읽었더라면, 문학 이론서를 더 읽었더라면, 외국어를 배웠더라면, 영국이나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갔더라면(법대생으로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번역가나 소설가로서의 데뷔가 이토록 늦어졌을까. 무엇보다도 번역이나 글의 숙련도 및 완성도가 지금보다는 훨씬 높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부모님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p.63

 

작년해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을 때 수상을 기원하며 발표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수상은 불발이 되었지만, 최근에 전미도서상 1차 후보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몇 해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수상했던 것도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롱리스트(1차 후보)에 오른 두 작품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을 한국인 번역가 한 사람이 번역했다고 해서 관심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바로 부커상 역사상 한 해에 두 권의 책을 올린 세 번째 번역가이자 유색인종으로서는 첫 번째 번역가가 된 안톤 허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법대생이었던 그가 늦은 나이에 문학 공부를 시작해 한국문학 번역가로 데뷔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영미권에서는 한국문학이 여전히 인지도가 낮은데다, 영미권 출판계의 고질적인 백인 우월주의 등으로 한국문학 출판은 양적으로 부진한 편이다. 게다가 번역가가 개인 차원에서 책 한 권의 번역 권리를 얻으려면 속된 말로 100퍼센트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엄청난 장벽을 넘어야만 한다고. 한국 출판사에 번역 허락을 받고, 샘플 번역을 제작하고, 제안서를 쓰고, 영어권 출판사에 제출하고 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여러 단계의 설득 과정을 거쳐 거의 기적에 가까운 출판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문학 번역가로서의 굉장히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번역을 할 때 제 영혼의 작은 파편이 번역에 실리게 되고, 독자는 그 파편에 반응하는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좋아하고, 제가 의도했던 리딩을(정확히 말하면 제가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하는 리딩을) 그대로 쫓아가는 독자들을 보면 번역가로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뿌듯함을 느낍니다. 물론 독자들은 스스로의 희망, 불안, 편견을 이런 '부재'의 공간에 투여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문학의 범주에 속하며 문학은 누군가 생각하듯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문학은 깊은 독서와 번역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지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번역가로서 자신이 나른 것이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p.177

 

저자는 최근 처음으로 영문 장편소설을 계약했다고 한다. 그것도 미국의 '빅5' 출판사에 속하는 하퍼콜린스와의 계약이라고 하니, 곧 번역가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아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이 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부모님의 고시에 대한 집착으로 법대를 다녔고, 이후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잠시 일하기도 하다가,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대학원에 가서 늦깎이 영문학 전공자가 되었고, 이후 돈 잘 버는 통역사이자 번역가로 일을 하다가 결국 쉽지 않은 문학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보통 번역할 때 작품을 쓴 작가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게 된 정보라 작가와의 일화부터 부커상 뒷이야기, 영미 출판계를 뒤흔든 사기 사건의 전말, 번역가와 퀴어라는 정체성의 관계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라는 제목처럼 관습과 규칙 따위 가볍게 뛰어넘는 번역가로서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다. 후반부에는 저자가 옥스퍼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미들베리칼리지에서 진행한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사실과 번역가로서의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왜 번역가는 겸손해야만 하냐고, 자신은 번역가로서 항상 뻔뻔스럽게 행동해 왔다고 말이다. 번역가와 번역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세상에서 그의 당당한 목소리와 자신감이 더욱 의미있게 느껴진다. 한국문학과 문학번역에 대한 생생한 현주소가 궁금하다면, 사전이 아닌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의 진짜 매력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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