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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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초가 널린 바위에 털썩 앉았고, 잉그리트도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파란 하늘에 떠오르는 파란 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연이 갑자기 쭈그러지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넘실대는 파도와 함께 멀리멀리 빠져나가 다른 삶을 시작하기를 평생을 바라왔다. 하지만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어떻게 그 삶에 다다를지는 알지 못했다.           p.72

 

우연히 티비 방송을 보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며 친딸을 협박하는 엄마에 대한 사연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딸이 보는 앞에서 극단적 시도를 했고, 폭력과 폭언을 했으며, 알코올 중독과 약물 오남용을 일삼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엄마와 이혼한 아빠도, 엄마의 가족인 이모나 외할머니들도 모두 손놓고 있는 상황에 이십대 초반의 딸 혼자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고 있었다. 딸이 엄마로부터 오는 연락을 끊지 못하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고등학생인 남동생에게 엄마가 해코지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딸의 입장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엄마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어른으로서 무책임했고, 자식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과 말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사연을 보면서 데버라 리비의 소설 속 주인공 소피아와 그녀의 어머니 로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학위 취득을 코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헌신했지만 상황은 무엇 하나 나아지는 게 없었고, 자신의 일상들을 모두 희생했으나 누구 하나 만족스럽게 웃을 수 없는 나날들이라니... 이렇게 모순으로 점철된 관계가 또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리 마비 증상은 사실 걸을 수 있지만 심리적인 이유로 걷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고, 유명 클리닉에 가보지만 의사의 진단 방식과 처방은 이해할 수 없고, 급기야 로즈는 고통을 호소하며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소피아는 자신을 붙드는 그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 관계란 것이 쉽게 끊어낼 수도, 모른 척 할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마냥 사랑할 수도, 훌훌 털어낼 수도 없는 관계,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거나 들어봤을 법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는 그런 작품이었다.

 

 

 

나는 괜찮지 않다. 전혀. 꽤 오랫동안 괜찮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더는 회복할 자신도 없는 것이, 거대한 삶을 바라면서도 바라던 일에 도전할 만큼 담대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도 말하지 않았다. 별자리에 나도 그녀처럼 영락한 인생으로 끝날 거라고 쓰여 있을까 봐, 그 두려움 때문에 그녀가 제 다리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그녀의 척추가 잘못되었을까 봐 또는 그녀에게 중대한 질병이 있을까 봐 죽도록 겁난다는 이야길 하지 않았다.           p.223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살림 비용>을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유년 시절부터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고군분투했던 여성이자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가 여성,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망상과 가해 온 억압들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과 사유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것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데버라 리비의 장편 소설이다. 2016년 맨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던 이 작품은 몇 년째 종잡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를 간호하기 위해 일상을 포기한 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병원을 전전하며 여러 검사를 했음에도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어머니는 늘 고통을 호소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곁에서 머물고 있는 딸은 평생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게다가 그런 딸에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통통하고 게으른 데다 고령의 자신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어머니라니. 모녀간의 묵은 갈등과 억압된 열망, 상처와 애증은 결국 파국으로 향하게 된다.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도로 한가운데로 밀고 가서는, 그곳에 남겨놓고 떠나버린 것이다. 멀리 대형 트럭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의사가 말한다. "그게 모든 슬픈 어머니의 자식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죠. 자식들은 매일 자문합니다. 왜 어머니는 살아 있는데 죽어 있는가?"라고.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고, 날카로우며, 위트와 뭉클함도 잊지 않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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