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지음 / 래빗홀 / 2023년 10월
평점 :

"이쇠돌은 저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대가로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 보다 생각했어요." 훗날 선녀는 이쇠돌의 아내가 되었을 때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녀가 살인죄로 기소되자 여성단체는 잇따라 성명을 내고 시위를 벌였다. 피해자 이쇠돌의 절도, 약취유인, 강간, 협박 등 수년간 이어진 범죄행위로 인해 선녀의 인권이 유린되어왔다는 점을 참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권 신장과 사법 정의 구현의 목소리가 고리아 왕국을 뒤덮었다. -'선녀를 위한 변론' 중에서, p.68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동화 속 세계에 덜컥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들어섰다. 이유는 '우주의 원리에 일종의 국소적인 오류'가 생겼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법원이 생겼고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라는 직업이 생긴다. 근처 다른 왕국들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국의 왕은 사법부에 형벌권과 각종 민사적인 분쟁의 해결권을 위임했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아침, 왕자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고, 마침 당일 왕국을 떠나라는 왕명을 받은 인어가 용의자로 검거된다. 그날 인어는 왕자가 머물던 별궁에 찾아간 데다,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단도를 가지고 있던 모습까지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녀는 나무꾼인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던 선녀가 순간적으로 격분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은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이들은 정말 무죄일까?
〈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각각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의 서사를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터리로 바꾸어 버린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선택 받지 못해 무기력하게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리는 인어와 나무꾼에 의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이를 낳고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야 했던 선녀라는 캐릭터를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점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게다가 그 과정을 법정 미스터리로 풀어내고 있어 살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살펴보고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릴 넘치는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사실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고, 강제로 아내를 삼았으니 현대의 법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명백히 범죄 행위이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알고 있던 동화의 서사를 제대로 뒤집어 무기력한 캐릭터를 변신시켰는데, 그 반전에서 오는 재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그래서 정우를 죽였니?"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p.235
<달리는 조사관>, <대나무가 우는 섬>, <라일락 붉게 피던 집>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송시우 작가님의 신작 소설집이다.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잘 짜인 미스터리를 보여주었던 전작들에 이어 이번에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눈길을 끌었다. 동화 <인어 공주>와 <선녀와 나무꾼>의 두 주인공이 살인죄로 기소되어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작가는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빼앗겨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을 선녀의 고초와 왕자를 구하는 대가로 평생 고통을 얻게 되었지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어 공주의 억울함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판을 벌리고 통쾌한 법정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흔한 법정 소설이나 동화 패러디가 아니다'는 추천평처럼, 송시우 작가만의 상상력과 탄탄한 필력으로 탄생한 웰메이드 미스터리였다.
아마추어 탐정 임기숙이 활약하는 두 작품도 흥미로웠는데, 임기숙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아이의 뼈>에 수록된 이야기에 등장했던 캐릭터라 더욱 반가웠다. 임기숙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지만, 섬세한 관찰력과 집중력으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낸다. 이번 작품에서는 서행물산 총무부에서 근무하며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걸로 등장한다. 당황할수록 아무 말이나 툭 던지는 버릇은 여전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불쑥 엉뚱한 말을 해버려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부스스한 단발머리와 항상 미안해하는 듯한 어리숙한 표정의 기숙 씨와 산만하고 활력 넘치는 반려견 타미는 따로 장편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부디 다른 작품에서도 또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법정 미스터리, 클래식 미스터리, 사회파 미스터리를 종횡무진 오가는 ‘송시우표 미스터리 종합 선물 세트’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재미와 한층 무르익은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인 미스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